카와이 마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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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2군 감독.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60번 - 0번(1989년~1999년) - 6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는 7번을 달았으며, 이후 2006년에 은퇴하면서 그 등번호를 이병규에게 물려주게 된다.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가장 이상적인 2번 타자로 유명했으며, 별명은 '''번트의 장인'''. 별명답게 팀내에서는 주로 1번 타자가 출루하면 번트를 쳐 자신이 아웃되더라도 1루에 있는 1번타자를 2루로 출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교진군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1번타자 시노즈카 카즈노리나 오가타 고이치[1] 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그 뒤를 카와이가 나와서 번트를 대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인지 프로생활 23년동안 타율 0.266(1199안타), 43홈런, 1199안타, 322타점, 47도루[2] 에 불과한 비교적 초라한 타격성적임에도 십수년간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1991년 시즌에는 66희생타로 당시 희생타 일본기록을 세웠으며[3] 2003년에는 통산 512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며 '''통산 희생타 세계기록'''을 세웠다.[4] 1999년을 기점으로 이미 주전 유격수 자리는 강타자 니오카 토모히로에게 넘기고 주로 대수비로 나왔지만, 간혹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방식으로 희생타 수를 늘렸다. 이후 요미우리 구단과의 불화로 인해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였고, 최종적으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총 55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희생타 기록 이외에도 수비에도 능하여,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무려 6차례나 수상하였다. 그것도 1980 ~ 90년대에 노무라 켄지로, 이케야마 타카히로, 이시이 타쿠로 등 공수를 겸비한 거물 유격수들 사이에서 타낸 상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단짝 2루수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와의 키스톤 콤비는 지금도 교진군 사상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고 있다.
은퇴 후, 2007 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수비코치를 맡았다가 2011년부터 자신의 친정팀 요미우리의 코치, 그것도 2군 감독으로 돌아왔다. 2003년에 한 번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고 2004년에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와는 등을 돌렸던 상태였다. 사실 2003년에도 현역 계속의 의지가 있었으나 팀 편성상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인간관계를 동원한 집요한 설득으로 "그래, 이것도 팀을 위한 길"이라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막상 결심하자마자 은퇴를 결심하게 한 하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만 떠넘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프런트의 행태에 반발하여 은퇴를 번복하고 주니치로 이적해서 3년을 더 뛰었다. 이미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기로 한 순간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는 물건너가고[5] 심정적으로는 거의 요미우리하고 등을 돌린 상태였으나 결국 하라 감독도 다시 감독자리에 복귀했고 세월이 지난 동안 서로 앙금은 풀린 듯하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1군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오프에 하라 감독이 용퇴하자 감독직 승격이 점쳐졌으나,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은퇴 후 감독에 취임하면서 없는 일이 됐고, 2016년부터 3군 감독을 맡았다.
2018년에는 2군 감독을 담당했고, 시즌 후 구단에서 퇴단해 2019년부터는 야구해설가로 활동한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OB선수로 나오는데 번트쪽 특능이 초특능이다. 그만큼 번트를 잘 댔던 선수.
우노 마사루에 비견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노안이다.[6] 선수시절부터 동료들에게 이걸로 인해 별명이 많이 붙었으며 카와이 마사히로를 주제로 한 만화에서도 대놓고 노안으로 나올 정도다.
아들인 '''카와이 타쿠야'''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었다. 그러나 2~3군에만 머무르다가 방출..
1. 소개
전 일본프로야구 선수.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3군,2군 감독.
등번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60번 - 0번(1989년~1999년) - 6번,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는 7번을 달았으며, 이후 2006년에 은퇴하면서 그 등번호를 이병규에게 물려주게 된다.
2. 선수시절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가장 이상적인 2번 타자로 유명했으며, 별명은 '''번트의 장인'''. 별명답게 팀내에서는 주로 1번 타자가 출루하면 번트를 쳐 자신이 아웃되더라도 1루에 있는 1번타자를 2루로 출루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로 교진군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까지 1번타자 시노즈카 카즈노리나 오가타 고이치[1] 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그 뒤를 카와이가 나와서 번트를 대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인지 프로생활 23년동안 타율 0.266(1199안타), 43홈런, 1199안타, 322타점, 47도루[2] 에 불과한 비교적 초라한 타격성적임에도 십수년간 요미우리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으며, 1991년 시즌에는 66희생타로 당시 희생타 일본기록을 세웠으며[3] 2003년에는 통산 512개의 희생타를 기록하며 '''통산 희생타 세계기록'''을 세웠다.[4] 1999년을 기점으로 이미 주전 유격수 자리는 강타자 니오카 토모히로에게 넘기고 주로 대수비로 나왔지만, 간혹 '''대타로 나와 번트를 대는''' 방식으로 희생타 수를 늘렸다. 이후 요미우리 구단과의 불화로 인해 2004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였고, 최종적으로 2006년 은퇴할 때까지 총 553개의 희생타를 기록했다.
희생타 기록 이외에도 수비에도 능하여,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을 무려 6차례나 수상하였다. 그것도 1980 ~ 90년대에 노무라 켄지로, 이케야마 타카히로, 이시이 타쿠로 등 공수를 겸비한 거물 유격수들 사이에서 타낸 상이라 더욱 가치가 있다. 단짝 2루수였던 시노즈카 카즈노리와의 키스톤 콤비는 지금도 교진군 사상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히고 있다.
3. 코치
은퇴 후, 2007 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수비코치를 맡았다가 2011년부터 자신의 친정팀 요미우리의 코치, 그것도 2군 감독으로 돌아왔다. 2003년에 한 번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고 2004년에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요미우리와는 등을 돌렸던 상태였다. 사실 2003년에도 현역 계속의 의지가 있었으나 팀 편성상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인간관계를 동원한 집요한 설득으로 "그래, 이것도 팀을 위한 길"이라면서 은퇴 결심을 굳혔는데 막상 결심하자마자 은퇴를 결심하게 한 하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물러나게 되고, 부진의 책임을 감독에게만 떠넘기고 책임을 지지 않는 프런트의 행태에 반발하여 은퇴를 번복하고 주니치로 이적해서 3년을 더 뛰었다. 이미 요미우리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기로 한 순간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는 물건너가고[5] 심정적으로는 거의 요미우리하고 등을 돌린 상태였으나 결국 하라 감독도 다시 감독자리에 복귀했고 세월이 지난 동안 서로 앙금은 풀린 듯하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1군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오프에 하라 감독이 용퇴하자 감독직 승격이 점쳐졌으나,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은퇴 후 감독에 취임하면서 없는 일이 됐고, 2016년부터 3군 감독을 맡았다.
2018년에는 2군 감독을 담당했고, 시즌 후 구단에서 퇴단해 2019년부터는 야구해설가로 활동한다.
4. 기타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에서 OB선수로 나오는데 번트쪽 특능이 초특능이다. 그만큼 번트를 잘 댔던 선수.
우노 마사루에 비견될 정도로 무지막지한 노안이다.[6] 선수시절부터 동료들에게 이걸로 인해 별명이 많이 붙었으며 카와이 마사히로를 주제로 한 만화에서도 대놓고 노안으로 나올 정도다.
아들인 '''카와이 타쿠야'''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고 있었다. 그러나 2~3군에만 머무르다가 방출..
[1] 緒方 耕一. 현재 히로시마 도요 카프 감독으로 있는 오가타 고이치(緒方孝市)와는 동명이인.[2] 홈런은 그렇다 쳐도 도루가 매우 적은 것이 테이블 세터로서는 놀라운 점. 통산 도루 성공률 역시 56.6%에 불과하다.[3] 이후 2001년 시즌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미야모토 신야가 67희생타로 경신한다.[4] 그 전까지의 세계 기록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인 에디 콜린스가 기록한 511희생타였다.[5] 요미우리 퇴단 이 후 다른 팀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감독이 된 케이스는 후지타 모토시가 유일하다.[6] 둘은 2004년부터 2008년까지 한솥밥을 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