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 자이언츠/순수혈통주의
1. 개관
일본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존재하는 비공식적이지만 거의 불문율 수준의 방침. 간단하게 말해 순혈 자이언츠 선수 출신이어야 자이언츠의 감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미우리 순혈이 아니면 코치까지는 가능하지만[1] 요미우리 감독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오로지 요미우리에서만 선수 시절을 보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선수 생활은 물론, 코칭 스태프 커리어까지 오로지 요미우리 한 팀을 위해 바쳐야만 감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옆나라의 원년부터 유지해온 전통 구단[2] 이나 같은 모기업인 축구단, 저 멀리 물 건너에 있는 축구단[3] 과 닮았지만 그 팀들과는 좀 방향이 다른 골품제이자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빡센 골품제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수십년 역사상 이 골품제의 예외가 후지타 모토시 단 한명이었을 정도.
이 탓에 오랜 구단 역사와 별개로 일본프로야구의 양대리그제 정착 이후 여태껏 요미우리의 지휘봉을 잡은 감독은 고작 '''8명'''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1961년부터 지휘봉을 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부터는 그냥 요미우리 순혈일 뿐만 아니라 요미우리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는 조건까지 불문율로 붙어버리는 바람에 더더욱 빡센 골품제가 되어버렸다. 후술할 카토 켄 외에도 무라타 신이치 등 스타플레이어가 아니라서 감독 후보로도 못 언급된 선수는 한 트럭이며, 2020년 현재도 카메이 요시유키 등 이런 선수가 좀 있다. 카메이는 나름 1000안타도 넘기고 통산 OPS도 7할 이상인 꽤 성공적인 선수인데도..[4] 카메이말고도 사카모토, 스가노가 있다.
물론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좀 추상적인 기준이기도 해서 필수 조건은 아니다. 중요한 건 타 팀과 어떤 식으로든 엮인 적이 있는지 문제.
2. 상세
2.1. 예시
일단 타 구단에서 뛰다 요미우리에서 은퇴했다고 해도 인정 못 받는다. 이 정도는 '''4두품''' 이하에 해당하며 어디가서 자이언츠 출신이라고 말도 못한다. 예를 들어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다 말년에 몇 년만 삼성 라이온즈에서 뛴 최동원을 아무도 삼성 출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와 같다. 하지만 최동원의 사례와는 또 다른 게 선수 본인이 자이언츠에 애착을 가지고 있더라도 OB회 등에서 거의 허용을 안 하는 분위기. 물론 대놓고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지만 알게 모르게 타 팀 출신들은 알아서 짜지는 분위기이고(...), OB들이 그나마 인정을 해줘야 주변에서도 자이언츠 출신으로 인정을 해주는 식이다.
4두품 이하 조건에서 팀에 웬만큼 공헌도가 높거나 압도적인 통산 성적을 쌓았을 경우 '''5두품''' 대접. 가네다 마사이치와 장훈이 이런 케이스이다. 이 둘은 그나마 일본 야구계에서 넘사벽의 업적을 남겼기에 그나마 요미우리 순혈은 아니더라도 공로자로서 인정은 해준다. 특히 가네다는 고작 5년만 뛰었는데도 요미우리가 그의 등번호인 34번을 영구결번 시켜줄 정도. 위에 언급한 국내에서 순혈을 따지는 두산 베어스나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여기부터 감독이 가능하다.
요미우리에서 20년 뛰고 선수 생활 막판에 1~2년 정도 다른 팀에서 뛰거나, 반대로 아주 어릴 때 팔려와서 평생을 요미우리맨으로 지냈어도 인정을 못 받는다. 이 정도면 '''6두품''' 취급. 즉 요미우리 기준이면 NBA 시카고 불스의 마이클 조던조차 6두품 취급받는다는 소리. 그래도 이정도면 어디가서 요미우리 OB라고 말하고 다녀도 되고 또 대우는 그렇게 해준다. 그리고 본인의 능력 여하에 따라서는 코치까지도 할 수 있다. 명투수 니시모토 다카시, 통산 최다 희생타 기록 보유자인 카와이 마사히로 등이 이런 케이스. 최동원의 케이스를 대입하면 만약 롯데에서 최동원을 순혈로 인정 안 한다면 이 케이스로 해석 가능하다. 삼성으로 치면 김시진, 양준혁, 성준, 두산으로 치면 홍성흔, 안경현, LG로 치면 이상훈이 대충 이 케이스에 들어맞을 듯. 정확히 말하자면 양준혁, 이택근, 홍성흔은 잠깐 다른 팀을 다녀온 케이스이지만, 어차피 니시모토도 은퇴직전 마지막 1년은 요미우리로 복귀해서 요미우리 소속으로 은퇴했다.
심지어는 '''선수 생활 내내 요미우리에서만 뛰다 은퇴를 했더라도 지도자 생활을 다른 팀에서 잠시라도 한 경우도 순혈로 인정 못 받는다.''' 이쯤 되면 '''진골''' 대접을 받는다. 삼성으로 치면 딱 이만수, 류중일, 전병호, 김재걸, 장태수, 두산으로 치면 현 감독인 김태형, LG로 치면 차명석 현 단장이나 서용빈 kt 2군 감독, 한화로 치면 한용덕, 이상군, 장종훈, 롯데로 치면 김민호 정도 되는 셈이다. 그래도 다른 팀 코치직에서 물러나면 코치로 다시 불러들이기도 하고 요미우리 OB회 회장직을 맡아서 팀 운영에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허용된다. 다른 피가 섞이면 대우가 내려간다는 점 또한 묘하게 골품제를 닮았다(...). 참고로 구단 역사상 유일한 예외였던 후지타 모토시가 바로 이 케이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들 '''대형사고를 치는 순간 두품이고 뭐고 없다.''' 팬 뿐만 아니라 구단에서도 이미지 문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두품 언급하는 것 자체가 구단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행위이다. 요미우리도 이러면 코치조차 안 시켜준다.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이런 예다.
2.1.1. NPB의 다른 팀에서는?
같은 일본프로야구 내 다른 11개 팀에서도 순수 성골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그나마 역사가 긴 한신 타이거스나 주니치 드래곤즈는 조금은 수월한 편이고, 그 외 다른 세리그 팀들도 전반적으로 역사가 길어서 그런지 어려운 건 아니다. 다만 파리그는...
- 한신 타이거스 - 이 팀은 순혈 성골 선수들을 미스터 타이거스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영구결번된 요시다 요시오나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한신 이외의 유니폼에 일절 손댄 적 없는 와다 유타카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팬들은 순혈운 물론, 두품조차 감독으로 오길 꺼려한다.
-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전 감독 오가타 고이치가 해당된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전 감독 후루타 아츠야, 마나카 미쓰루가 해당된다.
-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 하마의 번장 미우라 다이스케가 해당된다.
- 치바 롯데 마린즈 - 후쿠우라 카즈야가 해당된다. 심지어 이 사람은 고향도 치바라 치바의 긍지로 불린다.[5] 참고로 롯데는 차기 감독은 후쿠우라라고 이미 구단에서 발표를 한 상황.
요미우리의 골품제는 사실 트레이드와 FA 등의 수단 외에는 국내 이적도 제한적이고 해외로의 선수 이동이 아주 흔하지는 않은 야구니깐 지켜질 수 있는 전통이다. 가령 축구 같이 이적이 더 개방적인 스포츠인 경우에서는 이런 조건으로 감독을 선임하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6] 하지만 아예 이견 없는 요미우리식 성골 끝판왕은 의외로 축구에서 나왔다. 경기장 이름으로 익히 들었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전 레알 마드리드 CF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 14세 레알 마드리드 유스를 시작으로 선수, 감독, 거기에 회장까지 역임한 스포츠계 궁극의 성골이다. 베르나베우 회장 급은 아니지만 AS 로마의 전설 프란체스코 토티 역시 교진군의 사례에 부합한다. 로마 유스에서 데뷔해 2017년까지 로마에서만 뛰었으며 선수 커리어 역시 뛰어나고 주장도 역임했다. 그 후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로마의 디렉터로 재임했다. 이제는 에이전트 사업을 한다고 하니 일단은 성골 조건도 유지 중이다.
2018년에는 이 골품제의 성골이었던 우츠미 테츠야가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이었던 스미타니 긴지로를 요미우리가 FA로 데려오면서 매몰차게 28인 보호명단에서 빼버렸고 우츠미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이부로 가게 되었다. 우츠미는 구단 사무실에 펑펑 울면서 찾아온뒤 기자회견을 하며 요미우리에서 선수생활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해서 슬프다면서도 세이부에서 남은 선수생활을 보내면서 더 강해져 돌아오겠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로써 우츠미 테츠야도 차기 요미우리 감독 후보에서 완전히 나가리.(...) 현지 요미우리 팬들 반응은 선수생활 동안 좋은 커리어를 쌓고 사생활도 깨끗한데다가 한팀에 오래 제적한 선수를 요미우리가 FA영입을 이유로 보호명단에서 빼버린걸 놀라워하면서 우츠미가 여기에 빡쳐서 바로 은퇴해버릴걸로 예상했으나 우츠미가 세이부행을 받아들이자 두번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2019년 1월 7일에 마루 요시히로의 보상선수로 초노 히사요시가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떠나게 되자 요미우리 팬들은 또 놀랐다.
2.1.2. KBO에서는?
이러한 요미우리식 골품제를 KBO 리그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군 입대로 상무나 경찰청에서 뛴 건 뺀다.
- 롯데 자이언츠 : 염종석, 주형광 정도만 감독이 가능하며, 최대한 범위를 넓히면 현역때 준 레귤러급이었던 이정민, 문규현, 박종윤 정도가 감독직 후보로 고려가 가능하다. 배장호, 나승현, 이우민, 손용석, 이인구도 원클럽맨이긴 하지만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해다. 역대 감독들 중 첫 취임 당시의 김용희를 제외하면 모든 감독이 순혈이 아니다. 후에 김용희는 삼성과 SK 감독을 맡기도 했기 때문에 오 사다하루와 비슷한 케이스라 하겠다. 구단의 선수 출신인 이종운 전 감독마저도 현역 막판엔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다. 조원우 전 감독은 선수 시절에는 아예 롯데에서 뛴 적이 없었고 은퇴 후 2년 동안 코치를 한 것이 전부였다. 조성환 한화 이글스 코치 같은 경우는 진골이다. 강민호가 성골이 될 수 있었지만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6두품이 되었다. 이대호의 경우 해외 진출 건으로 애매. 박정태는 메이저리그 코치 경력이 있지만 연수차 간것이라 순혈엔 해당되어 당초 감독직 후보 첫머리에 있었으나 2019년초 음주운전+취중 버스 난입 난동 사건으로 언급도 하기 꺼려진 케이스. 현 시점에선 손아섭, 전준우 정도가 차기 성골 후보라 할 수 있다. 송승준, 김대우는 롯데 데뷔 10년차가 넘었지만 한명은 마이너 리그, 한명은 대만 프로야구 2군 데뷔로 애매해진 케이스.
- 삼성 라이온즈 : 현 시점에선 전임 감독 김한수가 요미우리식 원칙에 가장 충실했던 감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현재까지 성골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케이스는 김한수 외엔 강기웅과 조동찬, 권오준 정도밖에 없다. 심지어 현직 감독인 허삼영이나 강명구의 경우[7] 요미우리식 기준으로 따지면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해진다. 또한 위에서 설명하는 요미우리식 골품제를 삼성의 케이스에 적용하면 해태 타이거즈에 있다가 김응용과의 갈등으로 삼성으로 이적한 이순철과 롯데 자이언츠에 있다가 1차 선수협 파동으로 김시진과 트레이드된 최동원은 4두품 이하가 된다.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해서 삼성으로 이적한 김종훈이나 마해영의[8] 경우 5두품이 된다. 삼성에서 시작했으나 중간에 다른 구단에 갔다왔거나 막판에 팀을 떠난 김시진, 장효조, 성준, 양준혁은 6두품이 된다. 원 클럽 맨이지만 SK 와이번스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이만수와 kt wiz에서 코치 생활을 한 전병호, 삼성에서만 선수-코치를 하다가 2019년부터 KIA 타이거즈 코치가 된 장태수의 경우 진골 취급을 받는다. 삼성 한 팀에서만 선수-코치를 거쳐 2011년 삼성 감독에 부임한 류중일 감독의 경우 김한수와 더불어 요미우리식 순혈제에 가장 맞는 감독이었으나 2018년부터 LG 트윈스 감독으로 옮기게 되자 오 사다하루와 비슷한 진골 취급을 받는다.해외진출의 경우 교진군에서는 이렇다 할 사례가 아직 없으므로 교진군 기준으로 볼 때 이승엽은 애매하다. 참고로 교진군에서의 이승엽은 두품도 없는 그냥 용병이다. 이유야 당연히 데뷔도 다른 곳에서 했고 중간에 잠깐 왔다가 간 케이스이며, 그렇다고 2006년 한시즌을 빼면 교진군에 크게 공헌한 적 없는 먹튀 용병일 뿐이기 때문. 오승환이 이승엽과 비슷한 상황일 듯 보이나 도박 문제로 두품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차기 성골 후보가 많지도 않은게 현 시점에선 김상수. 박해민, 구자욱 정도가 성골을 노려볼만 하다. 이렇듯 구단 역사에 비해 좀 아쉬운 편인데 유력한 성골 후보였던 윤성환과 박한이가 각각 도박과 음주운전으로 결격사유가 생겼고[9] , 5두품 이상의 대접이 유력했던 임창용과 진갑용 또한 도박과 약물 문제로 두품을 언급하기가 어려워졌다.
- 두산 베어스 : 박철순, 장원진 정도만 감독직이 가능하고 김경문, 김진욱은 물론이거니와 김태형조차도 각각 6두품과 진골에 해당하므로 절대 두산의 감독이 될 수 없다. 김경문 감독은 선수 말년에 태평양 돌핀스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6두품에 해당. 1년만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후 코치 연수를 거쳐 처음 코치 생활을 시작한 곳은 삼성이었다. 김진욱 역시 선수생활 말년에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1시즌을 뛰었기 때문에 6두품에 해당된다. 김태형 감독의 경우 선수 생활은 OB-두산에서만 한 원 클럽 맨이고 이후 2011년까지 두산에서 코치 생활을 하였으나 2012년부터 2014년부터는 SK 코치였기 때문에 진골에 해당된다. 고영민 코치도 선수 생활은 두산에서만 했으나, 코치 생활은 kt 위즈에서 시작했으니 진골에 해당된다. 김동주도 두산 원클럽맨이기는 했으나 사생활, 팀 케미, 재계약 등에서 잡음을 일으켜 두품 이하. 차기 성골 후보로는 오재원, 정수빈, 허경민, 유희관, 박건우가 존재한다. 민병헌은 2018년부터 롯데, 김현수는 2018년부터 LG, 양의지는 2019년부터 NC, 최주환은 2021년부터 SK로 이적하여 6두품이며, 이용찬은 음주운전, 김재호는 병역비리건으로 두품 이하. 김재환 역시 약쟁이 사건으로 두품 이하.
- KIA 타이거즈 : 김상훈, 김종국 정도가 가능하다. 김주형은 원클럽맨이긴 하지만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하다. 홍세완은 SK코치로 이적하면서 진골이 되었다. 선동열과 이종범은 주니치 드래곤즈 경력 이전에 각각 삼성 라이온즈 감독과 한화의 코치가 되면서 진골 취급. 유동훈은 해태-KIA 타이거즈 원 클럽 플레이어고 코치 생활 역시 KIA에서 시작하였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2019년부터는 LG 코치를 하게 되며 진골이 되었다. 유력한 성골 후보 안치홍은 롯데로의 FA 이적으로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차기 성골 후보로는 나지완, 김선빈 등이 있다. 윤석민은 2014년 노포크 경력 때문에 애매하다. 양현종은 차기 성골 후보로 손꼽혔으나 해외 이적건으로 애매해졌다.
- LG 트윈스 : 일단 현직 감독 류지현이 요미우리식 순수혈통주의에 완전히 부합한다. 심지어 류지현은 고향도 서울에 학교까지 모두 서울에서 나온, 요미우리로 따지면 소프트뱅크 감독 취임 이전의 오 사다하루같은 커리어를 보유하고 있다.[10] 류지현 외에도 KBO 구단 중에선 비교적 성골 대접을 받는 선수가 많은 구단으로 김용수, 김기범, 김정민, 이동현, 이종열, 박용택이 성골에 해당된다. 경헌호, 김광삼, 윤진호, 장진용 등도 원클럽맨이긴 하지만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하다. 서용빈은 주니치 코치 경력은 제껴 두고라도 kt 2군 감독으로 가면서 진골이 되었다. 이승엽, 이대호와 마찬가지로 해외 진출 이력이 있는 이병규와 LG에서만 10년을 뛰고 2018년을 끝으로 은퇴했지만 프로선수 생활은 미국에서 시작한 봉중근은 보류. 88년생 밑으로 채은성 & 이천웅 & 이형종 & 김지용 & 오지환 & 최동환 등등이 일단 차기 성골 후보들. 놀랍게도 서승화 역시 원클럽맨에 충족되나 팀내외적으로 사고란 사고는 워낙 창의적으로 치고 다닌데다 구단 윗선에 완전히 찍혀서[11] 언급되지 않고 있다. 두산 베어스에서 지명되었으나 두산 소속으로 한게임도 안뛰고 신인시즌 바로 트레이드로 와서 2019년에도 뛰고 있는 김용의는 6두품 취급. 정찬헌은 음주운전 건이 있어서 두품 이하.
- 한화 이글스 : 신경현, 박정진, 윤규진이 성골에 해당한다. 다른 순혈인 임수민, 고동진, 이양기는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하다. 박정진은 이글스 역대 홀드 1위인만큼 성골 조건에 부합하며, 신경현은 약 10년간 한화 안방을 책임졌고 윤규진 또한 오랫동안 준 레귤러급으로 활약해온만큼 어찌어찌 커트라인으로 쳐줄만 하다. 반면 한화 3군으로 불리며 한화 내 골품제에서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으로 알려지는 북일고 성골의 경우 전술한 코치들은 해당이 되지 않는 반면 철밥통, 칰무원 등으로 까였거나 까이는 이상군, 한용덕은 북일고 출신이지만 LG, 두산 등에서 코치 생활을 했던 것 때문에 교진군 기준으로는 진골이다. 이건 이영우도 마찬가지. 당초 송진우가 성골 명단의 첫머리에 있었으나 2020시즌 종료 후 한화를 떠나 독립야구단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진골로 격하되었다. 마찬가지로 구대성은 오릭스 블루웨이브, 뉴욕 메츠, 시드니 블루삭스에서의 해외 경력이 있고 질롱 코리아의 감독을 맡으면서 진골이 되었다. 김별명과 정민철의 경우 중간에 해외 진출 경력이 있어 역시 애매하다. 차기 성골 후보로는 송광민, 장민재, 오선진 정도가 유력하다. 송창식, 메이저리그 방어율왕도 성골로 쳐야한다는 말이 있는데 송창식은 도중에 은퇴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애매하고, 류현진은 저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쓰이 히데키와 같은 케이스. 최진행의 경우 약쟁이 경력으로 논외. 안영명은 6개월 기아 경력, 2021년 방출 후 kt 경력으로 6두품.
- SK 와이번스 : 구단 역사가 20년을 향해 가면서 성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윤희상, 조동화, 박재상, 박정권, 채병용, 박희수 정도가 성골이고, 준 레귤러급까지 확대하면 제춘모나 엄정욱도 꼽을 수 있다. 박경완과 전병두는 5두품에 해당한다. 차기 성골 후보로는 최정, 김강민이 존재한다. 김광현도 성골 후보였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이적건으로 애매해졌다. 그런데 2021년 시즌부터 신세계에게 구단이 인수되는 것이 변수가 됐다.
- 키움 히어로즈 : 키움은 KBO 공식 계보로 따지면 감독직 후보가 될 성골은 오주원 정도 뿐이다. 강병식, 김지수는 원클럽맨이긴 하지만 커리어가 부실해서 애매하다. 이후로 성골 후보인 현역 선수는 이정후, 최원태, 한현희, 김혜성, 임병욱 정도에 불과하다. 조상우와 박동원은 성추문으로 애매하며, 강정호는 음주운전 3회로 KBO리그 복귀조차 불발되어 가능성이 희박하고 김하성은 해외 진출 경력 때문에 애매하다. 프랜차이즈 스타 이택근은 중간에 LG 트윈스에서 2년 뛰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진골이 되었다. 박병호와 서건창은 LG 데뷔, 투수 김상수, 이지영, 나이트는 삼성 경력, 신재영은 NC 경력, 이승호는 KIA 데뷔, 마정길은 한화에서 데뷔했기에 5두품에 해당되는데, 이 중 신재영, 이승호, 서건창은 타팀에서 1년 넘게 뛰진 않았기에 커리어 내내 키움 유니폼만 입으면 6두품이 가능하다. 별개로 밴헤켄은 그냥 용병이다. 게다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잠깐 머물렀다. 조상우와 박동원은 한때 비록 무혐의로 조용히 끝냈으나 논란으로 애매하다.
- NC 다이노스, kt wiz : 향후 최소 10년간은 적합한 후보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순혈 같은 거 따지려면 구단 역사가 최소 20 ~ 30년 넘어가야 된다. 단, NC의 경우 나성범과 박민우, kt는 강백호가 최소 6두품 이상이 될 가능성은 있다. 또한 NC는 5두품은 일단 확보한 상태다.
- 삼청태현 : 조용준, 조용훈, 김동기 정도만 성골에 해당된다. 원클럽맨이었던 이숭용, 정명원, 염경엽, 박승민은 진골, 신철인은 6두품[12] , 장정석, 최창호, 박정현, 김일경, 황두성, 이보근, 김세현, 유한준, 손승락, 송신영, 김경기, 양상문은 이적 이력으로 5두품, 또한 김동수, 송지만, 박경완, 박재홍, 박종호, 정성훈, 조웅천의 경우 누적 스탯과 업적으로 5두품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 출신지까지 도쿄인 성골은 구단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감독취임 당시 기준으로 오 사다하루 단 한 명 뿐이라, 거기서도 출신 지역은 예외로 처리해 놓는다.
2.2. 정리
즉, 요미우리 순혈주의의 대전제는 '''"프로야구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인생 종치는 순간까지 요미우리의 유니폼이 아닌 다른 프로팀의 유니폼을 1초라도 입었으면 요미우리 순혈이 아니다."'''라는 거다. 그만큼 순혈을 까다롭게 따지는 구단이다. 그래서 키요하라 카즈히로는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수 없지만,[14] 키요하라의 동기인 쿠와타 마스미는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선수 시절의 성적은 키요하라 쪽이 넘사벽임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쉽게도 쿠와타 역시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약간은 구단에서 떠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MLB 진출을 했다. 요미우리가 미국 쪽 유니폼 1년만 입은 것도 불순물로 쳐버리면 쿠와타조차도 순혈이 아니게 된다. 쿠와타도 요미우리에 대한 충성심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과 마쓰이와는 달리 메이저리그에 가기 직전 상황에 요미우리에서는 이미 효용 가치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본인의 개인적인 도전을 구단이 흔쾌히 수락했다는 점에서 그 처우도 주목거리지만 이미 하라 다쓰노리에서 다카하시 요시노부로 감독 승계가 되었고 다카하시의 사임 이후에 다시 하라가 감독을 맡았으며 다카하시도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고 그 뒤에도 아베 신노스케, 사카모토 하야토 등등이 줄줄이 대기 중이라[15] 구와타도 요미우리 감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16] 사실 저들 외에 사와무라 히로카즈도 혹시? 하는 상황이었으나 2020년에 심해로 추락하면서 치바 롯데 마린즈로 쫓겨나듯 트레이드되며 후보에서 탈락.
요미우리의 골품제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게 되는 경위는 '''자의든 타의든 상관없다'''는 것이다. 즉, 본인의 의지로 제 발로 팀에서 나간 것이 아니라 '''구단의 뜻에 의해서 타구단으로 트레이드된 경우'''에도 '''가차없이 순혈이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즉, 타구단으로의 트레이드된 선수는 구단으로부터 '''"당신은 은퇴하고 나서 능력이 되면 우리 팀 코치까지는 할 수 있지만, 감독은 절대 안 됨."'''이라는 선고를 받았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면 불륜사건으로 구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트레이드 된 '''니오카 도모히로'''와 2018년 세이부의 포수 스미타니 긴지로를 FA로 영입한 뒤 보상선수로 지명된 '''우츠미 테츠야'''가 이런 케이스다. 니오카의 경우에는 불륜이라는 불미스러운 사고를 치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떠넘기듯이 트레이드가 되어 닛폰햄 팬들이 분노하기도 했다. 정작 닛폰햄 이적 후에는 <북쪽의 갱생시설>으로 불리며 워크에틱 개선 케이스가 많은 닛폰햄답게 활약해 주며 2009년, 2012년 퍼시픽리그 우승에 공헌하면서 이런 의견도 불식됐으며, 젊은 선수들과 식사도 많이 하면서 선수들에게 조언을 많이 해 줬다고 한다. 우츠미는 고등학교 때부터 요미우리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 때 드래프트에서 오릭스에 지명되자 입단을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도쿄가스 야구부에서 3년을 재수를 한 뒤에 본인의 의지대로 요미우리에 입단한 경력이 있다. 요미우리 입단 이후 2019년까지 현역 NPB 통산 2위[17] 인 133승에 2012년 일본시리즈 MVP 등의 활약으로 막대한 공헌을 했음에 방출 후 현역생활 연장을 위해서도 아니고 보상선수로 가는거라 우츠미가 감독직을 원했다면 그야말로 사형선고.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구단에서 효용가치가 떨어져서 방출 통보를 받은 선수 중에는 기량만 따지면 다른 팀으로 옮겨서 몇 년 정도는 충분히 더 뛸 수 있는데도 요미우리 순혈을 지키기 위해서 그냥 자진 은퇴의 길을 택하는 경우도 꽤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했듯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경우는 순혈이어도 감독 후보로도 꼽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오 사다하루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직을 수락했을 때, 일본 야구계는 이를 충격적인 뉴스로 받아들였다. 당시 다이에 GM이었던 네모토 리쿠오의 강력한 러브콜[18] 을 받고 호크스 감독직을 수락할 때까지 오 사다하루는 누가 뭐래도 카와카미 테츠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와 더불어 요미우리의 상징이자 전설이었고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 오 사다하루가 감독을 맡았던 1980년대 중반의 요미우리는 우승을 장담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음에도 우승 지상주의에 밀려 감독직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 요미우리는 FA 제도 도입 등 바뀐 제도를 십분 활용하여 돈지랄로 팀 전력을 강화하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해설가로서 성골 신분만 유지하고 있었으면 당시 감독이던 나가시마처럼 다시 한 번 요미우리의 감독직으로 복귀해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진골 신분으로 내려앉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낙에 일본 전체에서 레전드급인지라 레전드 대우는 변함이 없지만 이게 더 무서운 거다. 여전히 일본프로야구 '''전체'''에서 레전드 대우를 받으며 변함없는 존경의 대상이지만 그래봐야 '''요미우리 내부'''에서는 '''"본인이 감독하고 싶어서 스스로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은 진골"'''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니.
2.3. 예외
후지타 모토시의 경우, 요미우리 순혈 대스타로 선수 생활을 마쳤으며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밑에서 투수코치를 오랫동안 맡는 등 요미우리 최전성기를 받친 가신이었지만, 카와카미 감독 퇴진과 함께 교진군을 나와서 2년간 다이요 훼일즈 투수 코치를 역임한 경력이 있는데, 1980년 시즌 후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 직에서 사임하자마자 '''바로 감독자리에 올랐다.''' 다른 팀, 그것도 같은 리그의 경쟁 구단에서 코치로 활동한 커리어가 있는, 진골임에도 요미우리 감독이 된 것이다.
당시로서도 이게 워낙 충격적인 일이라 팬들이나 팀내 프런트, 선수단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고, 이후 요미우리 감독을 그만둘 때까지 안팎에서 수도없이 디스를 당해야 했다.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 일본시리즈 우승도 했지만[19] , 나가시마가 깔아준거 받아먹은 운장(.....)이란 폄하를 팬과 언론에게 숱하게 받았다. 그런데 그걸 막아주고 감독을 보호해야할 프런트마저도 그 폄하에 맞장구 쳐주는 자들이 많아서 후지타의 편은 거의 없이 외로운 요미우리 감독생활을 해야했다. 어쨌든 1기 감독 시절 1981년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요미우리 감독으로 재취임한 1989년에도 팀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래도 그가 2006년에 사망했을 때 구단장으로 그의 장례를 치르면서 요미우리도 그에 대한 대우는 나름대로 해줬다.
현재까지도 다른 팀 지도자 경력이 있음에도 요미우리 감독이 된 인물은 후지타가 유일하다. 그러나 후지타는 신인왕-2년 연속 MVP와 다승왕 1회를 거머쥐었고 지금도 이어지는 18번 세습의 전통을 만들어낸 당대 교진이 자랑하는 대스타였고, 코치로 타 팀 유니폼을 입긴 했지만 그 기간이 2년으로 짧았으며, 지도자로서도 V9기간동안 투수코치를 맡아 명투수코치로 소문난 우수한 지도자였다. 또한 당시 교진도 나가시마 체제에서 창단 첫 최하위를 겪는 등 팀이 크게 흔들리고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는데, 그렇다고 마땅한 감독 후보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기에 교진도 과감히 진골인 후지타를 앉힐 수 있었던 것. 단순히 예외 있네? 순수혈통주의라더니 별것 아니구만? 이 아니라 그조차 극복한 후지타가 대단한 것이다.
뜬금없게도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신문 회장이 요미우리에서 한 시즌도 뛴 적이 없는 스즈키 이치로에게 요미우리 감독 제안을 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물론 덕담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설령 진지한 의도로 접근했더라도 일본 야구계에서의 이치로의 위상을 떠나서 요미우리 OB들이 반발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테고, 본인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2.4. 해외파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케이스는 커리어의 후반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보낸 마쓰이 히데키이다. 마쓰이는 비록 미국의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일본 국내에서는 요미우리 외에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 만약 마쓰이가 일본 야구계로 복귀할 경우 요미우리의 감독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 요미우리의 순혈주의의 정의와 요미우리로 대표되는 일본 프로야구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게 판가름 날 것 같다. 과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진출한 것도 피에 '''불순물이 섞인 것'''으로 간주해서 내칠지 아니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일본 야구를 뛰어넘는 한 수준 높은 리그이고 일본 국내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MLB에서 뛴 경력이 있는 OB는 순혈로 간주해서 받아들일지. 마쓰이의 경우가 주목받는 것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MLB에서도 최고 명문이라는 뉴욕 양키스의 일원으로서 3년 연속 포함한 100타점 4번에 월드시리즈 MVP도 수상하는 등 일급 타자의 기량을 과시했다는 점이다. 요미우리의 마쓰이에 대한 태도에 따라 콧대 높은 요미우리의 순혈주의라는 것이 그저 메이저리그의 위엄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고 굽신굽신하는 일본 국내 한정인지 아니면 '''"메이저리그? 그거 먹는 거냐?"'''라는 위엄을 과시할지 주목을 받는 부분이다. 일단 몇몇 구단들이 마쓰이 영입에 관심을 보이지만 요미우리에선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마츠이 없어도 아쉽지 않은 상황도 그렇겠지만 내심 마쓰이를 프랜차이저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긴 하다. 양키스에서 계속 뛰었으면 모를까, 그놈의 무릎 부상 때문에 저니맨 신세가 돼버린 마쓰이를 본다면...더군다나 마츠이 히데키의 부모도 한신 타이거즈 팬이고 마츠이 역시 그동안 보였던 성향[20] 을 보면 요미우리에 제대로 찍힌 듯한 느낌이었는데 일본 대표 팀 소집하는 날을 '''"오늘 쨉들의 모임이 있는 거야?"'''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구단의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와타나베 츠네오 요미우리 신문 회장이 직접 마쓰이를 감독감으로 보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일단 마쓰이가 코치진으로 합류해서 감독 수업을 받는 것이 우선이긴 하겠지만 감독 선임에 대해서는 과연 OB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문제.
어쨌든 그덕에 마쓰이와 비슷한 케이스인 우에하라 고지도 어쨌든 성골 취급으로 감독을 할 가능성이 생기긴 했지만 강도 높은 요미우리 비판 때문에 어려울 듯.[21] 대지진으로 인한 정전 사태 중에도 프로야구를 강행하려는 요미우리를 씹었는데 그 이면에는 입단 과정에서 구단 측의 야쿠자 동원 등 안 좋은 루머에다 이런저런 일로 요미우리에 대한 감정이 나빴던 우에하라의 작심이 한 몫한 듯한 느낌도 있는 듯하다. 다만 우에하라가 팬들의 예상을 뒤엎고 2018년 요미우리로 복귀를 해서 서로간의 서운했던 일들은 봉합을 한 듯 하기 때문에 아직은 알 수 없다. 비슷한 케이스였던 타카하시 히사노리는 2014년 시즌부터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뛰게 되어 성골에서 탈락했다.
3. 감독 선임
선수 시절에는 요미우리에서'''만''' 뛰었지만 코치, 감독 생활은 다른 팀에서 한 히로오카 타츠로[22] 이나 모리 마사아키[23] 등은 맡은 팀을 몇 번씩이나 우승으로 이끈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가 침체기일 때조차 감독 인선에서 고려돼 본 적이 없다. 감독 선임을 위한 수뇌부 상황을 표현하자면, 구단 내외부에서 "요새 우승에서 좀 멀어진 거 같은데 이쯤 되면 능력도 검증된 히로오카나 모리를 감독으로 모셔와야 하지 않겠음?"이라고 변죽을 울리면 바로 '''"어디 감히 야쿠르트, 세이부같은 평민 팀 유니폼에 손을 댄 작자들을!"''' 하고 반응이 나온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호리우치 츠네오는 감독으로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이후에도 요미우리의 코치직 이외에는 해설자를 제외한 그 어떤 자리에도 앉지 않았던 덕분에 감독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준비도 없이 단지 다른 팀 유니폼을 입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호리우치 츠네오를 감독으로 내세웠다가 팀 역사에 남을 흑역사만 기록하고 말았다. 이 시절 호시노 센이치의 감독 선임설도 나왔는데 OB 회장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를 위시한 요미우리 OB회가 발끈하면서 난리를 치는 통에 무산됐다. 하긴 선수 시절부터 안티 요미우리 이미지[24] 로 먹고 살았고 일본시리즈 우승 경력도 없었으며[25] , 요미우리 유니폼을 1초도 입어본 적이 없는 호시노 따위야... [26] 라는 게 흔히들 생각하는 호시노의 이미지인데 호시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호시노가 안티 요미우리의 스탠스를 취하는 건 일종의 쇼맨십이다. 호시노의 요미우리 콤플렉스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지명받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호리우치 시절 팀이 난맥상을 보이고 호시노가 잠시 감독후보로 거론되었을 때 호시노의 반응은 평소에 보이던 안티 요미우리 열혈남의 반응이 아니라 "혹시나 선수로 요미우리 유니폼을 못 입어본 한을 감독으로 풀 기회가 오나"하는 상당히 솔깃해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자신이 요미우리의 순혈 전통을 타파하는 최초의 감독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독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식의 의중을 내비치고는 했다. 결국 위에서 기술한대로 요미우리 OB회의 반대로 그냥 한 때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것 때문에 요미우리는 팀이 서서히 가라앉는데도 융통성이 없다는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 헌데 호시노는 2018년 고인이 되셨으니 이젠 논외.
2012~15년에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지휘봉을 잡았던 나카하타 키요시도 비슷한 케이스이다. 미스터 자이언츠라고 불리던 나가시마 시게오의 골수 심복이던 나카하타도 오매불망 요미우리의 감독직만을 바라보며 다른 팀의 코치 제의를 거절하고 요미우리를 떠나 있을 때는 해설자 생활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의 바람과는 다르게 결국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가 자기랑 같이 뛰던 후배인 하라 다쓰노리로부터 '''자기보다 19년이나 프로 입단이 늦은 새카만 후배'''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로 이어질 조짐[27] 이 보이자, 그대로 갔다간 평생 프로에서 감독 한 번 못해보고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꿩 대신 닭으로 평생의 꿈이던 요미우리의 감독 자리를 포기하고 요코하마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28] 이렇기 때문에 수많은 요미우리의 OB들이 다른 팀 감독이나 코치 자리를 마다하고 오로지 해설자 생활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012년 기준으로 하라 다쓰노리의 자리가 위태위태해지고 에가와 스구루의 수석 코치 영입을 둘러싸고 광풍이 한 차례 불었는데 정작 에가와는 '난 감독을 절대 안 할 거임' 하고 선을 그어버렸고[29] 아직 코치 생활 시작조차 안 한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경험을 충분히 쌓을 때까지 몸빵을 해줄 요미우리 감독 후보로는 한 번도 요미우리 이외에 유니폼을 입은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60년대생 중에 사이토 마사키와 마키하라 히로미[30] 등이 꼽히고 있긴 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타카하시가 감독 이을 커리어를 쌓을 때까지 땜빵 후보일 뿐... 현직 코치들 가운데 순혈로는 오카자키 카오루와 무라타 신이치가 있지만 이 둘은 위의 두명에 비해서는 커리어가 평범하고 그저 준수한 수준이었던 선수들인지라 애매한 상황이다. 마키하라의 경우는 너무 현장을 오래 떠나있어서 과연 코치로서 복귀가 쉬울지도 의문부호가 있기도 하고.
2014년, 평생의 숙적 한신에게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헌납한 후 하라 다쓰노리감독의 경질설이 부각되면서 마츠이 히데키를 감독이 아니라 코치라도 좋으니까 수뇌진으로 불러오려고 했으나, 마츠이 본인이 오고 싶지 않다며 거절해서 무산되었다. 결국 2015시즌 후에 하라 감독이 사임하고 후임감독 인선에 나섰는데 그 전 부터 예측해온대로 타카하시 요시노부를 감독후보 1순위로 올려놓고 의사타진 중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문제는 타카하시 본인이 선수생활에 미련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하라 감독 집권기 동안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은 고사하고 코치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칫하면 나가시마 시게오가 처음 감독자리에 올랐을 때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단 측은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2015년 10월 23일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신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 정도면 구단이 망할 때까지 순혈주의는 계속될 듯. 솔직히 호리우치하고 오 사다하루를 제외하면 순혈주의로 실패한 케이스가 없으니 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팀은 극소수의 엘리트급 선수들을 거의 신인 시절부터 감독 후보로 내정하고 철저한 이미지 관리와 제왕학 교육을 통해서 감독 후보를 양성하는 방법으로 저 조건을 만족하는 감독 수요를 충족하고 있다. 그런 엘리트급 선수가 연륜을 쌓으면서 기대를 충족하는 활약을 하는 경우 중참급으로 올라오면 팀의 리더역할을 맡기고 고참이 돼서 선수생활 말년이 다가오면 거의 플레잉 코치에 준하는 대우를 해준다. 물론 선수가 현역에 미련을 보이지 않도록 은퇴시기는 최대한 선수의 의견을 존중해준다. 그리고 선수에서 은퇴하면 코치 혹은 해설자 생활을 거쳐서 야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준 뒤 적당히 시기가 무르익으면 우리 나라의 수석코치급인 벤치코치 등의 자리에 앉혀서 현직 감독으로 부터 감독이 되기 위한 도제식 수업을 받게 한다. 그렇게 벤치 코치 자리에서 2~3년 정도 지나면 현임 감독도 어느정도 장기집권을 한 상태가 돼서 구단 안팎에서 슬슬 신진대사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며 감독 교체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현임 감독의 계약 임기가 만료되면 원만 퇴직의 형태로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다카하시의 전임인 하라 다쓰노리가 이러한 코스를 제대로 밟은 경우이다.
그래서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감독 재임기간 동안 최하위 혹은 2년 연속 B클래스 등의 대형 사고를 치거나 막장 행각으로 쉴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로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경우[31] ,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감독직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지 않는 한 다음 감독 후보는 아베 신노스케, 그 다음 감독 후보는 사카모토 하야토로 어느정도 추측이 가능할 정도이다.
물론 감독 교체가 항상 저렇게 진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부진의 책임을 만만한 감독에게 뒤집어 씌우고 아무 생각 없이 잘라놓고 궁여지책으로 지도자 경험도 인성도 부족한 무능력자를 덜컥 감독자리에 앉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카하시 요시노부 또한 현역 연장 의지가 있는 상태에서 하라 감독과 구단 프런트간의 알력에 의한 교체 움직임 때문에 제왕학 수업단계를 거의 건너뛴 상태에서 서둘러서 앉힌 느낌이라 구단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결국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다카하시는 3년의 계약기간이 종료되고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오퍼를 받았음에도 본인이 고사를 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을 정도였다. 거기다 다카하시의 후임으로 부임한 감독은 바로 다카하시 직전 전임이었던 하라 타츠노리(...). 이로서 하라는 2000년대 이후 요미우리 한 팀에서만 무려 세 번이나 감독직에 오르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32] 이미 60대가 되어버린 하라를 다시 또다시 감독직에 앉혔다는 자체가 요미우리 감독 후보군의 심각한 인재난을 그대로 반영하는 케이스라 봐도 무리가 아니다.[33] 2020년 기준으로 가장 유력한 차기 요미우리 감독 주자는 아베 신노스케이지만, 아베도 지도자로써는 2020년에 첫발을 내딛은 초짜이기에 못해도 2~3년의 시간은 더 필요한 상황이다.[34]
사실 이 말도 안되게 빡센 조건 때문에 스스로 감독 후보군을 좁힌다는 위의 기술이 일반적으로 보면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립된 이후로 여태껏 이 팀의 감독자리에 앉아본 사람은, 현직인 하라 타츠노리 를 포함해 딱 8명 밖에 없으며, 어떤 무능력자를 제외하면 최소 5년 이상의 임기는 보장을 받아왔다'''는 것이다.[35] 즉 한 번 앉히면 웬만하면 장기집권이기 때문에 현직 감독이 지휘를 하는 동안 이미 차기 감독 후보가 베테랑으로서 팀의 리더 역할을 하고, 현직 감독이 물러날 때 쯤 돼서 감독직을 물려주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무르익고, 그 동안에 차차기 감독후보가 팀 분위기를 이끄는 주축선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이 감독 선임에 큰 영향을 안 미치고 있는 것도 현재까지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면서도 NPB에서 독보적인 성적을 올리고 있는 교진군의 행보를 보면, 야구 감독이 팀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36]
4. 비판
이 점에 있어서 너무나도 보수적이고 새로운 야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고 너무 배타적인 게 아니냐는 의견도 많다. 같은 일본 인이자 같은 야구인임에도 타 구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독을 못한다는 건 가혹하다는 평이 대세이다.
비록 프랜차이저가 감독 코치를 이루면서 잘 나가는 팀이야말로 진정한 명문 팀으로서 의미가 있는 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겠으나, 프랜차이즈 스타를 찾는 것도 정도껏이지 '''선수도 아니고 지도자 생활을 다른 팀에서 했다고 능력있는 인재를 내칠 정도의 결벽증에 가까운 순혈주의'''는 2004~2005년 호리우치의 사례처럼 도리어 팀을 망치는 족쇄로 작용하는 경우가 나올 가능성이 많은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점은 2016시즌 이후로 팀을 맡고 있으면서 결국 팀을 B클래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타카하시 요시노부체제에서도 반복된 바 있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저 조건을 만족하는 케이스 그 자체가 매우 적다는 점이다. 즉 저런 말도 안되게 빡센 조건을 다 만족하는 사람도 몇명 안되는데, 그 적은 후보 사이에서 또 감독감을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코치고 뭐고 지도자 경력이 하나도 없거나, 인덕도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감독에 앉힐수 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다는 점이다.[37] 그나마 출신지를 안 따지는 게 용할 지경. 사실 출신지까지 따지면 성골 자체가 씨가 말라 버리니 못하는 것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구단의 전 역사를 통틀어서 출신지까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호크스 부임 이전의 성골인 오 사다하루 한 명 뿐[38] . 그런데 이 양반은 국적이 중화민국이다(...). 만일 국적까지 철저히 따진다면 성골은 진즉에 전멸하는 데다가 애초에 그런 성골은 나온 적도 없다. 하긴 NPB에서 유일한 한국태생감독을 쓰던 팀이 다름 아닌 요미우리다. 심지어 이양반은 중간에 나고야에서 뛴적이 있는 진골이다.
5. 외국인 선수
감독 순혈주의와는 별개의 내용이긴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선수 구성에서도 일본인 순혈주의를 고집해서 외국인 선수 개방에도 가장 늦었던 구단이기도 했다. 정확하게는 미국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한 외국인 선수의 영입이다.[39] 물론 러시아계였던 빅토르 스타르핀이라든지 하와이 출신의 일본계 미국인이었던 요나미네 카나메가 있긴 했지만, 일본에서 오랜 기간 거주했거나 일본계라 여기서는 논외. 일본 프로야구는 출범 초창기부터 외국인 선수를 자유로이 기용했지만 요미우리는 1975년에 가서야 메이저리그 출신 내야수이자 전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인 데이비 존슨을 영입했다. 그러나 막상 데리고 온 데이비 존슨이 생각보다 못하자 요미우리의 외국인선수 자리는 무덤이나 다름없었고, 그나마 워렌 크로마티가 영입되어 대박을 친 이후에 좀 나아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요미우리는 신입 외국인 선수가 성공하는 경우가 별로 없고 그나마 성적을 낸 선수들은 타팀 출신 외국인 선수라는 점에서 여전히 외국인 선수의 무덤인 건 여전하다. 그 빡센 규율을 외국인 선수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니 요미우리 특유의 경직된 팀문화를 외국인 선수들이 버티질 못하기 때문. 그래도 8년간 마무리와 필승계투조를 오가며 활약한 스캇 매티슨이나 한때 몸담았던 마일스 마이콜라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가서 성공을 거두는 등 성공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외국인 선수들과 일본국적 선수들의 사이도 좋은 편.
애초에 외인을 뽑을 때 신입보다는 웃돈을 더 주더라도 타팀에서 활약이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 것을 선호해서 신입 자체가 많지 않아 성공사례가 적은 것이지, 그렇게까지 신입외인의 무덤이라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물론 빡센 규율이나 애초에 신입에게도 돈을 많이 주는 만큼 기대치도 높아서 타팀보다 신입외인의 실패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덤 소리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이야기.
[1] 예로 김기태 前 KIA 타이거즈 감독을 들 수 있다. 김기태는 한국에서만 뛴 순수 KBO 리그 출신이지만 감독이 아닌 코치이기 때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로 부임하는 데 결격 사유가 없었다.[2] 이 팀의 경우 선동렬 등의 예외가 존재한다. 그러나 2010년대 감독인 류중일, 김한수 모두 원클럽맨이었으며 현 감독 허삼영 또한 짧긴 하지만 삼성 선수 출신에 삼성 전력분석팀장이었다. 그리고 이 팀은 단장또한 대부분 내부승진인사로 임명되는 편이다.[3] 여기는 요미우리보다 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요미우리는 감독선임에서는 순혈주의여도 선수 기용에선 융통성이 있는 반면 아틀레틱 클루브는 무조건 바스크 혈통 or 바스크 출신 or 빌바오 유스 출신만 선수로 뛸 수 있다. 그나마도 뒤의 두 조건은 최근에나 생긴 것으로 과거에는 무조건 바스크 혈통의 선수만 기용했다. 다만 코칭스태프 구성에서는 제한이 없다는 점이 또 교진군과 대비되는 점이다.[4] 다만, 카메이는 2005년 부터 현재까지의 각 시즌별 성적을 놓고보면, 풀타임으로 뛴 시즌이 3시즌 반정도(2008년 후반기, 2009년, 2018년, 2019년)에 불과하다.(사실, 2005년~2008년 전반기까지는 아예 백업이었고, 2010년~2017년,2020년 시즌은 성적부진, (개인성적이 괜찮을만 하면)부상으로 2군으로 밀려나서 풀타임을 소화할 수 없었다.)#[5] 니시무라 노리후미 전 감독도 한때는 순혈 성골이었으나 오릭스 버팔로즈로 가면서 이젠 옛날 얘기. 코치 중에선 오노 신고, 모로즈미 켄지, 오오츠카 아키라 등이 있는데 셋 중 오노를 제외하면 커리어가 변변찮아서 쿄진식 순수혈통주의엔 해당하기 어렵다. OB 중에는 아리토 미치요 등이 있긴 하다. 무라타 쵸지도 한때는 해당됐으나 다이에 코치로 가면서 이젠 아니다.[6] 교진군의 감독선임 이상의 순혈주의 선수선발 조건을 자랑하는 아틀레틱 클루브에서도 감독 선임에는 순혈주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나마 축구계의 사례를 꼽아보면 베르더 브레멘에서 유소년 선수, 프로선수, 유소년 감독, 수석코치, 2군 감독을 거쳐 1군 감독을 한 토마스 샤프 정도나 이 경우에 속한다. 이 사람은 무려 41년이나 베르더 브레멘에서만 활동한 성골이었다. 그러나 2013년 이후에는 다른 팀들을 맡으면서 진골이 되었다. 또한 전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이었고 현재 인도네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인 신태용도 이 조건에 그나마 거의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선수생활 말년에 1년 동안 호주 A리그에서 단 1경기만 뛰고 은퇴한 것을 제외하면 오로지 성남 일화 천마에서만 선수생활을 했으며 K리그 역사상 올타임 넘버원급 공격형 미드필더로 꼽힐만큼 선수로서의 커리어도 뛰어났으며 지도자 생활도 국가대표팀으로 가기 전에는 역시 성남에서만 지도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최소 6두품~진골 정도의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교진군이 외국에서 뛴 커리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성골로 볼 여지도 있다. 서술되듯이 외국에서 뛴 선수가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관한 사례가 없기 때문에 약간 애매한 경우.[7] 그래도 출장 경기 수도 많고 한국시리즈에 나가 여러 번 우승을 하는 등 허삼영에 비해서는 압도적으로 낫다.[8] 뛴 기간은 길지 않지만 이마양이라는 말도 있고 V2 확정 끝내기포라는 거대한 임팩트를 남기면서 두품 취급은 한다.[9] 다만 박한이는 다시 육성군 코치로 삼성에 합류했다.[10] 결국 류지현은 2021시즌 LG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11] 사실 이쪽은 강제 엘전드로써 1차 지명이라 실패하면 망신이니 오래 붙잡았던거지 2라운드 쩌리였고 저런 사고를 쳤으면 즉각 방출감이었다.[12] 해태 연습생 시절이 있다[13] 애초에 로컬 보이까지 겸하는 원클럽맨은 야구가 아닌 타 스포츠들에서도 잘 안 나온다.[14] 사실 키요하라가 열성 교진빠라고 해도 일단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서 교진군을 나간 뒤 오릭스에서 은퇴했으니 사고 안치고 성실하게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쳐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세이부랑 오릭스 시절은 그냥 잊는다 해도 선수시절 부상 등으로 활약을 잘 못한 데다 파벌까지 만들어 맘에 안드는 선수를 괴롭히고 감독/코치진을 좌지우지하기까지 했으니 다른 구단이든 임명할 리가 없다. 그리고 결국 2016년 2월 각성제 흡입혐의로 체포되면서 "반성 안 하는 한 감독직도 없고 코치직도 없다" 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어버렸다.[15] 의외로 후보가 없어 보이지만 꽤 많은 편. 카메이 요시유키가 감독 후보로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카메이도 쿄진에서 16년째 원클럽맨으로 뛰면서 통산 1000안타를 넘긴 나름 주축 선수인데도..[16] 사카모토 다음으로 꼽히는 요미우리 감독 후보는 '''1996년생'''인 오카모토 카즈마라서 한참 멀었다.[17] NPB에서의 성적만 따져서. MLB 등의 성적 제외.[18] 당시 네모토가 오에게 한 말이 걸작이었는데, "거인이란 집안은 이미 장남인 나가시마가 대를 이은 셈이다. 당신은 차남이니 부담 가질 필요가 있는가?" "이제 시대는 나가시마 vs 오 사다하루 의 라이벌전을 원한다"라는 식으로 오를 설득했다.[19] 한지붕 두 가족 시리즈, 역대급 리버스 스윕 시리즈를 이끌었을 때의 감독이었다.[20] 룸메였던 아베 신노스케처럼 카케후 마사유키를 동경할 정도로 한신빠돌이였고 드래프트 끝나고 지명했던 한신 타이거즈를 향해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21] 거기다 마쓰이 히데키처럼 본인도 간사이출신답게 골수 한신빠돌이였다.[22] 야쿠르트의 첫 일본시리즈 우승과 세이부의 80년대 전성기를 이끈 명장. 히로오카는 선수 생활은 요미우리에서 했지만 코치, 감독 생활은 히로시마, 야쿠르트, 세이부, GM 생활은 롯데에서 지냈다. 그래서 감독 인선에서는 거의 고려가 되지 않지만 요미우리 OB회 회장 자리는 역임한 바 있으며 회장 재임시절 감독이하 선수단의 운영에 이런 저런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23] 히로오카의 후임으로 세이부에서 리그 우승 8번, 일본시리즈 우승 6번의 위업을 이룬 OB 출신 모리 마사아키 조차도 선수 시절도 아니고 코치, 감독 시절을 다른 팀에서 보냈다는 이유로 감독 인선에서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다. 게다가 모리 감독의 경우 그의 마지막 감독 생활이었던 1994년에 요미우리의 모종의 계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요미우리가 3승 2패로 우승하기 바로 직전인 1994년 일본시리즈 6차전 경기 시작 직전에 "세이부, 모리 감독 경질"이라는 루머를 도쿄돔 전광판에 떡하니 띄워놨다. 그야말로 OB고 뭐고 간에 상대편 감독 죽이기밖에는...[24] 그러나 2018년 1월 암으로 별세했을 때에는 요미우리 구단 차원에서 추도문을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나가시마 시게오 종신명예감독에 의하면 호시노와 맞붙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승부했으며, 다카하시 감독에 의하면 "거인이 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을 만날 때마다 했다고.[25] 2013년 라쿠텐의 우승으로 한을 풀었다.[26] 호시노의 경우는 오사카, 나고야를 중심으로 후원회이자 팬클럽인 코센카이(虎仙会)가 있어서 굳이 도쿄에 갈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 빽이 있어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있었던 코센카이 모임에서는 요미우리 OB들을 대놓고 디스할 정도. [27] 그리고 진짜로 하라에서 다카하시로 감독직이 넘어갔다.[28] 가을야구 진출 여부만 보면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전부터 팀성적이 워낙 막장이어서 웬만하면 망한 감독이라 하지 않는데다 뭐니해도 관중이 크게 늘었으니... 그리고 나카하타는 선수들의 워크에틱을 강화하고, '포기하지 않는 야구'라는 팀컬러를 확립하며, 훗날 요코하마의 주축선수가 되는 츠츠고 요시토모, 야마사키 야스아키 등을 적극적으로 믿고 기용하면서 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는 훗날 요코하마가 A클래스 성적을 거둘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재임시절 성적과 별개로 요코하마 팬들의 평은 좋은 편이다.[29] 한신 타이거스에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어도 유니폼을 입은 적은 없어서 순혈로 부르기에는 뭔가 애매한 케이스.[30] 마키하라의 경우 1993년에 고향팀인 주니치로 갈 것을 염두에 두고 FA를 신청한 전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구단에 찍힌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 아직 요미우리에서 코치도 못 해봤다.[31] 그것도 어느정도 수준까지는 모기업인 요미우리 신문의 미디어 장악력을 동원해서 덮어 주었다. 단 요미우리가 시발점이 된 야구도박 스캔들은 얄짤없어서 요미우리도 대놓고 깠다.[32] KBO 리그에서는 강병철이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세 번이나 역임한 사례가 있다.[33] 에가와 스구루는 아예 감독을 할 생각이 없다고 못박았다.[34] 전임자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또한 지도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급하게 감독으로 올렸다가 탈이 났다는게 중평이라, 아베를 바로 감독직에 올리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35] 2016~2018시즌까지 감독을 역임한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경우 3년의 재임기간 뒤에 물러나긴 했지만 경질이나 사퇴가 아닌 계약기간 종료였고, 무엇보다 구단에서는 재계약을 희망했으나 본인이 고사한 케이스라 다카하시 또한 5년 이상을 보장받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36] KBO에서는 통일된 육성시스템을 강조하는 두산 베어스가 비슷하다. 이쪽은 감독이 아니라 코치 개인의 영향이 미비한 편.[37] 단순한 순수혈통 뿐만 아니라 성적까지 보는 게 더 문제다. 현역 시절에 백업, 2군 붙박이, 극단적으로는 프로 미지명자 출신의 명감독, 명코치도 생각보다 많다.[38] 오 사다하루는 도쿄도의 대표적인 서민지역인 스미다구 출신으로 고등학교도 도쿄의 야구 명문고인 와세다 실업고를 나왔고 고교시절에 모교를 고시엔 우승으로 이끌며 사상 최초로 도쿄의 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요미우리 성골의 다른 대표격인 카와카미 테츠하루는 쿠마모토현 출신, 나가시마 시게오는 치바현 출신이며, 하라 다쓰노리는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주한 가나가와현에서 성장했다.[39] 미국 리그 외에서라면 '''무려 단일리그, 그것도 2차대전 이전(!)에''' 영입한 선수가 있다. 필리핀 출신의 아데라노 리베라라는 선수로, 1939년 1월에 당시는 도쿄 교진군이었던 자이언츠가 마닐라로 원정경기를 갔을 당시 상대팀인 마닐라 세관 팀의 주장 겸 4번 타자로 나서서 이날 경기 때 당시 교진군의 에이스였던 빅토르 스타르핀을 격파하는 데 큰 공헌을 했는데 이것이 주목을 받게 되어 1939년 교진군에 입단하게 된다. 그후 1939년 딱 1년간만 뛴 후 필리핀으로 돌아갔는데, 이후 행적은 그의 딸에 의하면 귀국 후 세관원으로 일하다가 필리핀 독립의용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 선수는 지금도 NPB 사상 유일한 필리핀 출신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