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산틴 2세
스코틀랜드 게일어: Causantín mac Áeda (카우산틴 막 아다)
영어: Constantine II(콘스탄틴 2세)
(?~952, 재위: 900~943)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으로, 실질적인 최초의 스코틀랜드 국왕이다. 오래 재위하지 못하고 죽은 아드 막 키나다의 아들이다. 그의 시기에 그의 나라와 백성들은 처음으로 픽트가 아닌 알바, 혹은 스코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시대에 최초로 게일식의 체계화된 정부 기록이 보이며 카우산틴 2세가 만든 체제는 훗날 데이비드 1세의 내정 개혁 이전까지 사용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그의 출생연도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그의 아버지가 879년에 죽었기 때문에 879년 이전에 출생한 것은 확실하다. 그의 아버지 사후에 픽트 왕위는 기리크 막 둥갈과 오하드 막 룬이라는 알핀 가문 바깥의 사람이 차지했는데, 이 기간 동안 픽트 왕위에 강력한 계승권을 갖고 있는 알핀 가의 요인 돔날 2세와 카우산틴 2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핀 가가 키나드 1세 시절부터 아일랜드의 아르드리들과 여러 모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아일랜드로 망명을 갔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889년에 그의 사촌 돔날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알핀 가가 복권될 때 스코틀랜드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2.2. 초창기 통치
이후 900년에 사촌 돔날 2세가 살해당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치세에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은 904년 픽트 왕국군이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에서 출병한 더블린 국왕 이마르와 그가 이끄는 데인인 군대를 스트래턴에서 맞닥뜨려 크게 이기고 국왕 이마르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906년엔, 수도 스콘에 있는 '믿음의 언덕'이라는 곳에서 주교 첼라흐와 만나 신앙, 법, 규율, 그리고 라틴어로 pariter cum Scottis라고 하는 것 네 가지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이 partier cum Scottis가 무엇인지는 여러 추측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게일인의 법 또는 게일인의 관습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스코틀랜드의 기독교화와 게일화를 위해 왕과 교회가 손잡은 것이다. 이 만남의 또 다른 의미는 시기상 첼라흐 주교 및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성직자는 기리크의 치세 당시에 임명되었거나 당시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과 카우산틴 2세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우산틴 2세는 왕국의 종교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내정에 도움을 받게 됐다.[1] 이후 얼마간 기록이 적어지는데, 아마 긴 전쟁 기간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2.3. 바이킹과의 전쟁
카우산틴 2세가 즉위한 10세기 초반,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는 옛 바이킹들의 후예 데인인들이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고 쇠락기로 접어들 때였다.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와 그 뒤를 이은 시트릭 케흐[2] 는 노섬브리아와 맨 섬,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을 다시 통합해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는데,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라는 기록에 의하면 911년 즈음에 머시아 영주 애설플래드가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감행할 때 아일랜드인들과 북쪽 군주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데인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아닌 북쪽 군주가 카우산틴 2세 밖에 없으므로 동맹에 가담해 바이킹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918년, 노섬브리아의 잉글랜드인 왕 엘드레드 1세가 왕국 남쪽의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가 이끄는 군대에게 쫒겨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오자 카우산틴 2세는 그를 도와 남하해 현대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 동쪽인 코브릿지에서 라그나르와 크게 싸웠다. '울라 편년사'에 의하면 라그나르는 군대를 네 부대로 분산해 배치했는데, 스코틀랜드군은 세 부대를 격파했으나 라그나르가 친히 이끄는 네 번째 부대에게 매복당해 승리를 놓쳤다고 한다. 왕이나 모마어들[3] 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전투의 흐름은 완전히 스코틀랜드가 다 이긴 전투였는지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이 전투를 카우산틴 2세의 근소한 승리로 기록하나, 결국 엘드레드의 복위를 이루지 못한 카우산틴 2세가 패배한 전투라 볼 수 있고 실제로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는 이 전투를 통해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918년에 반 데인인 동맹을 주창한 머시아의 영주 애설플래드가 죽고 그녀의 남동생 웨식스 왕 대 에드워드가 머시아를 빼앗았는데[4] , 그는 918-919년 즈음에 누나가 진행하던 데인인의 주요 다섯 도시[5] 정복을 위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920년에 라그나르 및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을 만나 조약을 맺고 이 왕들에게 명목상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노섬브리아-더블린의 왕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카우산틴 2세가 이 조약에 참여했다.
2.4. 라이벌 애설스탠
애설스탠과 카우산틴 2세의 관계는 마치 한국사의 광개토대왕과 아신왕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 에드워드의 사후 웨식스-머시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애설스탠은 더 큰 야망을 품는데, 그는 시트릭 케흐와 그의 누이를 혼인시켜 노섬브리아의 데인인들과 기독교화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주는 척 했다가, 시트릭 케흐가 죽자마자 927년에 대대적으로 노섬브리아를 공격해 노섬브리아에서 데인인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모든 브리타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워체스터의 존의 기록에 따르면 카우산틴 2세는 망명 온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6] 를 받아들이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반 잉글랜드 동맹을 체결해 군사적 대항에 나섰고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과 웨일스의 소 왕국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다른 역사가 말미스버리의 윌리엄의 기록에서 엿볼수 있는데 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주변 국가 국왕들을 컴브리아의 에몬트 다리로 소집하여 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내용은 '우상숭배를 절대 금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북유럽 신화를 따르는 데인인들과의 동맹을 의미한다. 여기 참여한 왕들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웨일스 데허이바르스의 국왕 하이웰 닷, 그리고 카우산틴 2세였다. 또한 이때 애설스탠이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일둘브의 대부를 서주었다고 한다. 즉, 노섬브리아 데인인의 잔당, 스코틀랜드, 웨일스 지역이 연합을 맺고 덤볐다 털린 것이다.
이후 몇 년간 기록이 없는데, 다만 웨일스의 하이웰 닷 등이 아예 애설스탠의 궁정에 입조해 있는데 비해 카우산틴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배권은 인정했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와 좋지 않은 사이임을 추측할 수 있다. 결국 934년, 애설스탠은 다시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웨일스의 네 개 소 왕국들의 왕을 모조리 대동했으며, 934년 5월 28일에 윈체스터로 군을 집결시켜 6월 7일에 북진을 시작했다. 카우산틴 2세는 또(..) 깨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잉글랜드의 육군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오웨인이 이끄는 군대를 제압한 후 하이랜드까지 북진해 포트리우까지 다다랐고, 해군은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트니스까지 공략했다. 이 전쟁의 전개 과정에 대해 '클론맥노이즈 연대기'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애설스탠이 어떠한 대승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기록한 반면 헌팅턴의 헨리는 잉글랜드군이 별다른 저항도 맞닥뜨리지 않고 진격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두 기록을 취합해서 카우산틴 2세가 큰 군사적 저항을 관두고 애설스탠과 외교로 이 전쟁을 해결한 것으로 본다. 조약은 스코틀랜드에게 불리하게 체결되었고, 카우산틴 2세는 그의 아들을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고 잉글랜드 궁정에 입조하고 애설스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약들에 참가해야 했다.
935년부터 다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934년 한 해 동안 잉글랜드에 머무른 뒤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번번히 무릎을 꿇었지만 근성의 카우산틴 2세는 포기하지 않고 와신상담을 꿈꿨다. 당시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은 노섬브리아의 데인인 왕이었던 시트릭 케흐가 노섬브리아로 갈 때 왕위를 넘겨줬던 그의 동생 고드프레드의 아들 올라프 구드프리트손[7] 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카우산틴 2세는 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워체스터의 존은 이때 카우산틴 2세의 딸과 올라프가 결혼했다고 하나, 이 기록은 신빙성이 낮다고 평가되고 있다. 어스트리드클라이드 역시 이 동맹에 다시 가담했고, 이 새로운 반 잉글랜드 동맹은 937년, 잉글랜드에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아예 각을 잡은건지, 주로 여름에 전쟁을 진행하던 관습까지 깨고 가을에 잉글랜드를 기습한 것이다. 허를 찔린 애설스탠은 빠른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스코틀랜드-더블린 연합군은 신나게 잉글랜드 북서부를 털었다. 애설스탠은 군대 소집에 한 달 가량을 소모한 뒤 10월 경에 브루난버[8] 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의 대해서는 브루난버 전투를 참조. 전투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피로스의 승리로, 이 전투에서 카우산틴 2세는 아들 첼라흐를 잃었고, 애설스탠은 두 조카와 사촌들을 잃었다. 양군 모두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잉글랜드도 워낙 큰 피해를 입어 또 애설스탠에게 가서 조아리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 동안 카우산틴 2세의 이를 바득바득 갈리게 한 애설스탠은 결국 939년, 세상을 떠난다.
2.5. 통치 후기와 퇴위
비록 카우산틴 2세가 내정, 종교 양쪽의 개혁으로 강한 권위를 얻었지만 패배가 반복되고 본인도 늙으면서, 카우산틴 2세는 더 이상 예전같은 권위를 누리기 힘들었다. 그에게 남은 왕위 계승자는 애설스탠이 대부를 서준 아들 일둘브와 조카 말 콜룸이었는데, 일둘브가 세례를 927년에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아직 어려, 조카 말 콜룸이 사실상 확실한 계승자였다. 결국 카우산틴의 의지인지 말 콜룸이 직접 압박했는지는 몰라도 943년, 카우산틴 2세는 퇴위하고 말 콜룸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러고는 파이프에 있는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9] 에 들어가 신앙 생활로 여생을 보낸다. 이미 그가 재위하고 있을 때의 기록에도 그를 성스러운 왕이라 부르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무척 독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퇴위한 이후에도 말 콜룸 1세와는 사이가 좋은 듯 한데,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 의하면 카우산틴 2세가 말 콜룸 1세에게 잉글랜드 북부를 약탈하도록 부추겼고, 몇 주간 왕권을 다시 이양받아 잉글랜드를 친히 털고 왔다고 한다. 카우산틴 2세의 잉글랜드에 대한 뼛속깊은 적개심을 느낄 수 있기도 한 기록이다. 952년,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비록 잉글랜드에게 많은 패배를 겪었지만 그의 치세에 마침내 스코틀랜드라는 민족이 탄생했고, 또한 내정 개혁을 통해 왕권을 바로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덕분에 스코틀랜드 왕국의 대표적 명군 중 하나로 남았다.
[1] 카롤루스 대제의 행정 조직에서도 보이듯이, 당대 교회는 단순한 종교 건물이 아닌, 많은 식자층들이 상주하면서 주변 지역의 주민 명부와 내정 상태 등의 고급 정보를 다루고 공유하는 훌륭한 행정 조직이었다.[2] 데인인 또는 데인-게일 혼혈인 왕들로 아일랜드 식으로 이름이 기록되었다.[3] 모마어는 스코틀랜드 고유의 귀족 작위로 보통 백작위로 번역되나 아일랜드의 소 왕과 같은 급이라 볼 수 있다. 중앙 집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마어들은 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참고로 모마어라는 귀족 작위는 바로 이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4] 애설플래드는 유일한 자식이었던 딸 앨프윈에게 물려주었으나, 머시아를 침략한 에드워드는 어린 앨프윈을 웨식스로 보내고 머시아를 차지했다. 이후 앨프윈의 행방은 확실하지 않으나, 수녀원에 보내졌다고 한다.[5] Five Boroughs of the Danelaw. 바이킹이 차지한 머시아 동부의 주요 다섯 도시로, 더비,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를 말한다.[6] 아일랜드어로 아믈리브 쿠어런이라고도 한다.[7]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와는 사촌지간이다.[8] 이 곳이 어디인지는 많은 추측이 있는데, 현재 정설은 잉글랜드 서부 해안가의 브롬보로우라는 마을이다.[9] 컬디 운동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유행하던 금욕주의 계열 수도원 일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