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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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17대 임금이자 건길지. 아신왕이라는 호칭은 아방왕(阿芳王) 또는 아화왕(阿華王)의 오기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華)는 미(美)와도 자형이 비슷하다. 향기로울 방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아신의 신은 화려할 화 자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관미성은 우리 북방 끝의 요새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가지고 있는 바가 되었다. 이는 과인의 슬픔이 아플 정도인 바이니, 경의,, 마땅히 마음을 쓰는 바로 부끄러움을 씻도록 하라"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외삼촌 진무를 좌장으로 삼으며 이른 말. 고구려 정복에 대한 야욕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백제 최고의 근성가이. 단, 좋게 말해서 근성이지 아집, 독선, 광기에 사로잡힌 임금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일부는 아신왕의 끈질긴 고구려에 대한 복수의 집념을 가상하게 여겨 동정적으로 서술하기도 했지만 냉정히 볼 때 근초고왕의 전성기가 이어지던 백제가 고구려에 뒤처지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백제 막장화의 장본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암군이라 해도 할 말이 없으며 백성 입장에서는 최악의 폭군이었다. 광개토대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백제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가며 국력을 매우 소모시켰지만 실행한 전쟁은 전부 패배로 끝났고 본인 역시 전쟁 속에 허망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아신왕의 치세에는 전쟁과 외침, 군사력 고갈, 사보타지, 대규모 유민 발생, 외교적 고립, 지도층 분열 등 한 나라가 망하려면 발생하는 국가 막장 테크가 한꺼번에 발생했는데 신기하게도 망하지는 않았다.
아들로는 전지왕이 있었다. 아신왕 사망 당시 태자(전지왕)가 일본에 있었는데 아신왕의 친동생인 부여훈해(訓解)와 부여설례(碟禮)가 왕위를 놓고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전지왕이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연구자들이나 역사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근초고왕 시절의 강대국으로 다시 돌려놓고 고구려에 진 빚을 갚으려고 했던 노력은 가상하나 대진운이 너무 안좋아서 어쩔 수 었었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나마 광개토대왕은 백제 아신왕의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아니면 별 신경쓰이지도 않는 상대로 생각했는지 자신을 죽을 때까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진 아신왕을 살려도 주고 나라도 보전해주었다. 광개토대왕 입장에서 꾸준히 나댈 때마다 꾸준히 짓밟아주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특별히 광개토대왕이 관대해서라기 보다는 고구려는 사방팔방 적국들에게 둘러쌓인 형국이니 함부로 남쪽 변방에만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멸망시킨 국가는 없지만 후연은 고구려와 싸우다가 제대로 얻어맞고 자멸한 걸 보면 비교 대상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하게나마 정권을 유지했다는 부분은 나름 아신왕의 카리스마를 방증하는 부분이다. 백제를 이 때 완전히 짓밟지 못해 이후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성사시켰고 결국 장수왕부터 고구려는 나제동맹의 철벽 수비에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초기 일생
아신왕은 침류왕의 장남으로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한성(漢城) 별궁에서 태어났다.
이 날에 신비한 빛이 사방을 비추며 밤을 밝혀주었다는 출생 설화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아신왕을 가리켜서 '총기가 있었고 매 사냥과 말타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서술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아신왕은 상당히 비범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
아신왕의 부왕인 침류왕은 385년 11월에 승하했으나 당시 아신왕의 나이가 어리다하여 아신왕의 숙부였던 진사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본래 아신왕에게 돌아가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고 꽤 직설적으로[9]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일본서기 특성상 마치 자신들이 상전이고 한반도의 국가들이 신하인 것처럼 적어놓은 윤색과 과장이 있음을 명심하자. 일본서기의 윤색 날조 마치 일본이 한반도의 국가들보다 상전인것처럼 묘사하는 특유의 날조를 걷어내고 보면 아신왕은 숙부인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겼으며 진사왕이 사망한 후 왕위를 이어받은 것을 알수 있다.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木菟宿禰, 嘖讓其无禮狀. 由是, 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禰等, 便立阿花爲王而歸.
이 해에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즉위하여 귀국(貴國)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 그래서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 , 우전시대숙녜(羽田矢代宿禰;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 , 석천숙녜(石川宿禰;이시카와노스쿠네), 목토숙녜(木菟宿禰;츠쿠노스쿠네) 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이로 미루어보아 아신왕은 원래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좌를 진사왕에게 빼앗겼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침류왕의 승하 당시(385)에 그가 어렸기 때문에 제16대 왕에는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나 불과 9년 뒤인 394년 전지의 태자 책봉과 405년경 전지와 설례 등의 왕위 다툼을 보면 385년경에는 이미 아들까지 있었을 것이니 그 때 아신왕이 어렸다 함은 다소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진사왕의 즉위는 다른 어떤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아신왕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태어난 시기는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다. 침류왕이 죽었던 385년에 아신왕이 '유년의 나이'라 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인 진사왕이 즉위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건데 당시의 아신왕은 많아도 15세 정도의 나이였을 것이다. 때문에 아신왕의 출생년도는 대략 370년대 가량으로 볼 수 있다.
2.2. 숙부에게 복수하고 왕위에 오르다
광개토대왕릉비, 일본서기 등을 종합해보면, 일본에 있던 아신왕[10] 은 392년 귀국하여 왜국의 도움으로 숙부인 진사왕을 시해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아신왕은 선왕인 침류왕의 태자였고 엄연한 후계자였기에 침류왕 사후 곧바로 그가 임금으로 즉위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숙부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하여 임금으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391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백제의 관미성[11] 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이에 고구려의 추가 공격을 막아낼 군사력을 다듬기 위해 진사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 행사를 벌이는 틈을 노려 아신왕이 왜국 세력의 도움으로 진사왕을 암살하고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추정된다.[12][13]
왕위 찬탈을 위해 백제로 오는 과정에서 신라 정부까지 제압[14] 하는 활약을 보면 나름대로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하나 라이벌이 너무 먼치킨이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에 집권했다. 엄밀히 말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덕분에''' 아신왕이 즉위했다고 볼 수도 있다. 광개토왕 초반의 의욕적인 확장(석현성, 관미성)에 밀려 전왕 진사왕의 입지가 좁아진 틈을 타서 아신왕의 정변이 일어났다고 보는 견해.
2.3. 고구려와의 전쟁
즉위하자마자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기 위해 393년, 자신의 외척이며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던 좌장 진무에게 고구려를 공격하게 했다. 진무는 꽤 뛰어난 장수로 병졸보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용맹히 싸웠고 저번에 빼앗겼던 관미성을 포위까지는 했지만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지 군량미가 부족해 그냥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394년, 전지[15] 를 태자로 삼아 왕위 구도를 굳힌 뒤 7월에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5천 정예 기병을 끌고 수곡성에서 백제군을 격파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계속된 공격이 신경 쓰였는지 8월에 남쪽 지역에 7개의 성을 쌓았다.
395년에도 백제의 북벌은 계속되어 8월 백제 최고의 명장 진무를 다시 시켜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갔다. 백제군의 규모는 자세히 기록돼있진 않지만, 최소한 고구려군보다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기병 7천을 이끌고 와서 전투한 결과 백제군이 대패해 8천명이나 전사했다고 한다.[16] 아신왕은 복수하기 위해 11월에 즉위한 이후 처음으로 본인이 직접 7천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고구려에 쳐들어가려 했으나 한강을 건너 청목령(지금의 개성특급시)까지 갔지만 큰 눈을 만나 병사들이 얼어죽기에 이르자 되돌아와 한산성에서 군사들을 위로했다.
아신왕의 공격은 매번 실패하고 있었지만, 거의 1년에 한 번씩 연례적으로 쳐들어갈 정도였고, 적이 백제 하나 뿐이 아니라 거란 등등 싸우고 있는 적이 많아서 고구려 입장에서는 굉장히 눈엣가시였다. 이렇게 계속되는 아신왕의 공세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향해 전격적으로 진격, 백제의 수도를 비롯한 수십개 성을 함락시켜버린 뒤 기어이 아신왕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이 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면, 아신왕이 직접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후로는 영원히 노객(신하)이 되겠습니다.'''[17] 라고 외쳤으며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이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덤으로 58성 700촌을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게다가 아신왕이 외쳤다는 노객(奴客)의 단어를 잘 보자. '''"종 노(奴)"'''자가 들어가 있다. 말이 좋아서 신하이지 실제로는 '''노비가 되겠다'''고 한 것.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왕보고 '''노비가 되겠다'''라고 한 것이니 이만한 굴욕이 없다. 현대로 치면 무조건 항복을 한 셈.
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이때 빼앗긴 땅은 이로부터 약 80여년 뒤에 장수왕이 한성으로 밀고 내려올때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수복하지 못했던 듯 하다.[19] 그러나 아신왕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광개토대왕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그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일 뿐이지 진심으로 항복한 건 아니어서, 한강 남쪽에서 사열하며 군사를 정비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 2면
398년 8월,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병영 안에 떨어져 소리가 났다. 왕이 이를 심히 꺼리어 정벌을 중지하였다. 하도 발리니까 이젠 '''하늘에서도 그만 좀 하라고 경고를 줬던 모양'''(...).
하지만 우리의 아신왕께서는 '''비범하게도''' 하늘의 경고도 무시하고 다시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셨다. 백성들이 돈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어명을 내리셨다. 이로서 백성들의 불만이 팽배해져 갔다.
399년 8월, 또 고구려로 쳐들어갈 군사를 모으기 위해 망국적인 징집을 단행하다 결국 백성들이 사보타주를 일으켜 북벌 자체가 취소되어 버렸다.[20] 이들은 징집을 피해 대규모로 신라와 왜국 등으로 달아났다. 이때 백제 왕족(진사왕계)으로 추정되는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무려 '120현'[21] 의 인구를 들고 야마토로 망명해왔다.[22] 계속 지니까 백제인들도 군대 끌려가봐야 개죽음 뿐이라 생각해 전쟁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렇게 백제의 군사력도 덩달아 고갈되어버려 아신왕은 더이상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하고, 대신 당시 사이가 좋았던 왜(야마토 정권)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때 백제가 고구려에게 왜와 화통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점을 생각해보면 신하가 되겠다고 빌었던 게 대놓고 거짓말이 되었으니 고구려에게 얻어맞을 명분을 제공한 셈.
아신왕은 한일 관계 우호 증진에 굉장히(...) 기여했다라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23] 자의반 타의반 왜에 꽤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고 왜의 성장을 도왔다.[24] 6.25 때 한국이 물 먹은 것 덕에 일본이 성장을 했던 것처럼 이때도 백제가 물 먹은 것 덕에 애꿎은(?) 일본이 굉장한 성장을 일구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야마토 왕조가 국가로서 모양새를 갖추는 시기가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발리는 시기다. 백제로부터 미친듯이 들어오는 유민 행렬로 인구가 증가함은 물론 고급 인력을 수용하게 되었고, 아신왕이 군사를 뜯어내기 위해 왕인, 아직기 같은 당대의 석학을 일본에 보내어 선진 문화를 전파시켜주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서 일본을 끌어들였다. 심지어 태자까지 볼모로 보낼 정도[25] 로 열의를 보였다. 그 덕에 본인 사후에 막내 동생 설례가 왕 되어보겠다고 설쳐 둘째 훈해가 죽고 막내마저 죽었지만.
이후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전략은 계속 실패하니 일단 접어두고, 당시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다 왜국과는 사이가 나쁘던 신라를 먼저 공격해 향후 고구려 정벌에 걸림돌을 없애는 쪽으로 수정하여, 영락 9년에 왜의 대군[26] 및 가야의 협조까지 받아 신라를 침공했으나 영락 10년 광개토대왕이 직접 신라까지 이끌고 온 5만 군대에게 왜군에 가야군까지 또 다시 쓸리고 말았다. 지못미...이로써 백제는 근초고왕 때 가야 지역까지 구축해놓았던 한반도 남부의 패권까지 한꺼번에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후의 보루였던 백제 중심의 백제 - 가야 - 야마토 연합도 가야가 파괴되면서 무너져 내린건 덤. 그동안 가야권의 맹주였던 김해 금관국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큰 타격을 받아 532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패권 다툼을 못하고 작은 성읍 국가로 전락했고, 대신 반파국(대가야)이 나중에 다시 힘을 키워 가야가 다시 등장하지만 그건 50여년 뒤의 이야기.
아신왕 입장에서 더 이상 쓸 카드가 하나도 없어서 400년부터는 왜국과의 교류를 늘리는 데 집중한다. 그래야 왜군 지원군을 얻을 수 있으니까. 유명한 아직기와 왕인을 왜국으로 보낸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403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공격했다. 당시 신라에서는 실성 마립간이 왜국에 미사흔을 보내는 등, 항상 사이가 나빴던 신라와 일본 관계가 회복될 조짐이 보였던 것과 연관짓기도 한다. 아무튼 왜국은 405년부터 다시 신라에 적대적으로 돌아서서, 백제와 왜국의 밀월관계는 계속되었다.
404년에 다시 왜의 지원군을 부르는 데 성공해 연합해서 고구려의 지금의 황해도 지역을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재미있게도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공할 때 썼던 수륙 병진책을 따라해서 수군과 육군으로 황해도의 석성을 짓밟은 후 평양성까지 쳐올라갔는데 결과는...발렸다. 사태가 좀 커지자 광개토대왕이 직접 와서 격퇴시켰다. 이 때 특히 왜인이 많이 죽었다고 광개토대왕릉비에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 아신왕은 승하했다. 신라 공격 직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였다는 언급이 나오고 대방 고지 공격은 백제와 연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백제가 왜군을 끌어들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2.4. 최후
아신왕은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27] 아신왕이 죽은 후 아신왕의 동생 설례가 섭정 훈해의 목숨을 빼앗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했고, 일본에 있던 태자(전지왕)는 귀국 도중 정변을 피해 외딴 섬에 피신하는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가 일본 군대의 호위와 해씨 세력의 비호로 숙부 설례를 제거하고 가까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남아있다.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한 필의 비단과 같았다." 오방색에 의하면 흰색 자체가 서쪽과 동의어이기 때문에 결국 요약하면 서쪽 세력에 의해 시해됐다는 말이 된다.
3. 삼국사기 내용
'''《삼국사기》 아신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아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二年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다
二年秋八月 진무가 석현성 등을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다
三年春二月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를 사면하다
三年秋七月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우다
三年 낮에 태백성이 나타나다
四年春二月 혜성이 나타나서 20일 만에 사라지다
四年秋八月 왕이 진무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다
四年冬十一月 패수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출전하다
六年夏五月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를 파견하다[28]
六年秋七月 한수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七年春二月 진무를 병관좌평에 임명하다
七年春三月 쌍현성을 축조하다
七年秋八月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에 이르다
七年秋九月 서대에서 활쏘기 연습을 시키다
八年秋八月 고구려 공격을 위해 군사와 말을 징발하다
九年春二月 혜성이 규와 루 성좌에 나타나다
九年夏六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一年 큰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내다
十一年夏五月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청하다
十二年春二月 왜국에서 사신이 도착하다
十二年秋七月 신라 변경을 공격하다
十四年春三月 흰 기운이 왕궁의 서쪽에서 일어나다
十四年秋九月 아신왕이 죽다
4. 대중 매체에서
4.1. 드라마
태왕사신기 제작 초기에는 서브 남주인공이 될 뻔했으나 흐지부지 되어버리며 이후 광개토태왕에서는 서브 남주인공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담덕과 대립각을 제대로 세운다.[29] 태왕사신기에서의 배우는 양기원이며 광개토대왕에서는 박정철[30] 이다.
4.2. 소설
곽재식의 소설 역적전에서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아신왕은 담덕에게 발린 기억 때문에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열등감[31] 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런데 또 자기가 천재라는 듯한 자의식도 있는 성격이 꼬인 인물. 아신왕이 담덕에게 복수전을 펼치기 위해 갖가지 계략을 짜고[32] 그 계략이 멀리 가야에 있던 두 주인공 출랑랑과 사가노가 모험을 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4.3.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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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샷은 1993년 10월 22일부터 1994년 10월 21일까지 KBS 2TV에서 방영한 <만화 인물한국사: 초롱이의 옛날여행> 애니매이션 중 광개토대왕 편의 한 장면이다.
망했어요 짤방으로 가끔 쓰인다.
[1] 이체차로 쓰면 아화(阿華)가 된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신(阿莘)이 오기가 되는 것.[2] 《일본서기》.[3] 진서에서 386년 백제 왕세자 여휘를 사지절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 386년은 진사왕 2년이지만 진사왕은 침류왕의 동생이었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부여휘는 아신왕이었으며 그가 선왕의 왕세자로서 중국 측에 정당성을 가졌다는 가설이 있다. 일단 이 사람 이후 최초로 백제왕으로서 봉작되는 사람은 전지왕이기 때문에 왕세자 휘는 결국 아신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측과 교섭할 때 백제인은 주로 이름의 뒷 글자를 쓴 것을 감안하면 본명은 아휘(阿暉)인 듯.[4] 전지왕의 이복동생.[5] 전지왕의 여동생. 여기서 원(媛)은 현대 한국어의 ‘OO녀’와 같이 여성 인명의 뒤에 흔히 붙는 접미사이고, 도(都)는 고대 일본 인명에서 の와 더불어 흔히 쓰인 연결사 つ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따라서 실제 인명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제(新齊)’이다.[6] 진무를 아신왕의 장인이 아닌 외삼촌으로 보는 해석에 입각.[7] 아신왕의 출생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학계에서는 이즈음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8] 다만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왕에 이런 식의 좋은 평가를 써놓았다. 즉 그냥 하는 말이다.[9] 아신왕의 쿠데타에 왜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기록 역시 직설적으로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10] 진사왕이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자 태자였던 아신왕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일본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1] 이병도는 관미성을 지금의 강화군 교동도로 추정했다.[12]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보건대, 일본 위주의 과장이 있어 보이지만 아무튼 왜에서 그의 쿠데타를 지원해 준 것만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13]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사람들이 진사왕을 시해했다고 서술하고 있다.[14] 광개토대왕릉비, 일본서기 등을 종합해보면 신묘년에 왕위에 오르며 왜의 지원을 받아 신라와 가라(가야)에 대한 영향권을 강화한 듯한 뉘앙스의 기록이 남아있따.[15] 훗날의 전지왕.[16] 전멸 문서에서도 나와있지만 게임과 달리 실제 전쟁에서는 총 병력의 20%만 죽어도 '전멸'로 간주한다. 8천이 전투 불능도 아니고 죽었다는 건 가히 엄청난 피해였던 셈.[17] 약 1200년 후 조선의 인조가 청태종에게 같은 꼴을 당한다.[18] 고구려가 백제를 부를 때 사용한 멸칭. 대충 '''백'''제 '''잔'''챙이들 정도의 뜻으로 여기면 된다. 반대로 백제는 고구려를 짐승의 이름, 이리를 닮은 짐승을 뜻하는 단어인 박(狛)으로 불렀다.[19] 아신왕 때 밀려난 영토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이다. 이는 아신왕 이후 개로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대 기록에 잃어버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강 유역에 대한 기사가 버젓이 그것도 빈번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령왕 때는 황해도 수곡성을 공격했다는 기사까지 있을 정도이다. 현재 학계에서 개로왕 ~ 웅진 시기 백제의 영역은 떠오르는 논점 중 하나다.[20] 기록에는 징집 대상 백성들이 도망가서 군대 모으기가 어려웠단 식으로 되어 있다.[21] (통일) 신라 말기 현의 개수가 400여 개였던 걸 보면 굉장한 숫자다.[22] 그래도 이들은 친백제적인 야마토로 갔으니 망정이지 고구려나 신라로 가버렸다면... 사실 당시 신라 측에서 유즈키노키미 휘하 120현민의 야마토 망명을 방해한 적이 있다. 이 사건이 영락 10년 고구려의 왜구 격퇴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엑소더스급 민족대이동.[23] 사실 왜의 성장에는 백제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24] 즉위할 때 왜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으니 기브 앤 테이크 지만 왕위 찬탈이라는 "테이크" 한 것에 비해 일본에 끌려가는 모습("기브")이 여럿 나오는 터라 '''"누구때문에 왕 됐는데"''' 하는 식으로 일본한테 계속 끌려갔던 듯 하다. 게다가 아신왕은 계속 고구려 광개토대왕한테 죽어라 얻어 맞는 입장이었으니 일본한테 더욱 매달릴 수밖에..[25] 하지만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이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일본으로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심지어 문제가 되는 그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들이 나행주를 필두로 제기되어 설득력을 얻었다.[26] 이때 움직인 군대가 1만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저있는데 기록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왜는 군대를 맡았고 가야는 그 군대를 수용할 기지를 제공했다. 백제는 뒤에서 명령을 했다.[27] 일각에서는 영락 14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 그 후유증으로 승하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아신왕이 승하했을 때 태자가 일본에 머물러 있는 등 왕위 계승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상황이었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신왕의 승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태자가 해외에 있었던 점이 정변을 일으키게 된 한 요인으로 작용되었을 가능성이 꽤 크며 연이은 실정과 전쟁의 실패로 불만을 품은 귀족들의 정변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28]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호태왕비에 따르면 5년 또는 6년 광개토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이 항복한 내용이 있다.[29]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태왕사신기 시놉시스에서의 담덕은 광개토태왕에서 배우 이태곤이 연기한 담덕의 모습과 비슷하다. 또한 원래 시놉시스에서는 담덕, 수지니, 아신의 삼각 관계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에서 담덕, 도영, 아신 사이의 삼각 관계와 비슷한 구조다.[30] 1997년 3월 KBS 슈퍼탤런트 3기로 데뷔했으며 KBS와의 전속 계약이 종료된 뒤 한동안 타 방송사에서 활동했다가 해당 작품으로 KBS 복귀를 했다.[31] 고구려 군사들이 밟고 지나간 궁전의 바닥이 싫다고 바닥을 전부 갈아 엎어 교체하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궁녀들과 놀다가 괜히 궁녀가 고구려군에게 잡혔던 일을 비웃는다고 생각해서 죽이려고도 한다.[32] 당연히 역사대로 공들여 계략을 짜서 성공시키지만 그래도 결말에서는 담덕에게 허무하게 또 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