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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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들에겐 한 명뿐인 첫사랑인데 나에겐 두 명이 있다. 내 첫사랑, 그리고 칼 바랏.'''
'''피트 도허티'''
영국 록 뮤지션. 前 더티 프리티 씽스의 리더이자 솔로 아티스트.'''내가 뭘 하든 사람들이 날 스미스로 기억하는 것처럼, 넌 앞으로도 사람들에겐 항상 리버틴즈일거야. 명심해.'''
'''그리고 리버틴즈'''
1997년 리버틴즈 결성
2002년 '''리버틴즈 데뷔앨범''' "'''Up The Bracket'''" '''발매''', 발매 1년만에 UK Gold(10만장) 달성. 현재 누적판매고 20만장 이상.
2004년 리버틴즈 2집 "The Libertines" 발매, '''UK 앨범 차트 #1'''. 발매 9개월만에 UK Platinum(30만장) 달성. '''현재 누적판매고 50만장 이상.''' 리버틴즈에서 피트 도허티를 내쫓음. 곧 리버틴즈 해체. '''더티 프리티 씽(이하 DPT) 결성.'''
2006년 DPT 데뷔앨범 "Waterloo to Anywhere"발매, UK Gold 달성.
2007년 '''도허티 솔로 콘서트에서 재결합.'''
2008년 DPT 2번째 앨범 "Romance at Short Notice"발매. 앨범 발매 후 마지막 투어를 마친 후 DPT 해체.
2009년 런던 리듬 팩토리 콘서트에서 '''도허티, 게리 파웰 재결합.'''[3]
2010년 '''온전한 4인조 리버틴즈로 일시적 재결합'''. 레딩/리즈 페스티벌 메인 스테이지 '''커리어 역대 최다 관객 70,000명 동원.''' [4] 데뷔 솔로앨범 "Carl Barât"발매.
2014년 다시 리버틴즈 '''일시적''' 재결합. BST 하이드 파크 페스티벌 관객 '''65,000명 동원.'''
2003년 리버틴즈 '''NME Awards 최고의 신인상 수상.'''
2004,2005년 마찬가지로 리버틴즈로서 NME Awards 최고의 영국 밴드상 2연패 수상. '''3년 연속 NME 3관왕.''' 또한 '''피트 도허티와 함께 2004년 NME Cool List 1위.''' 그 다음 해인 2005년에는 10위. 2집 "The Libertines"가 동년 Q Awards에서 최고의 앨범상 노미네이트. 최고의 프로듀서상(클래시의 믹 존스) 수상.
2006년 NME Awards 올해의 영웅상 노미네이트.
2007년 NME Awards 올해의 트랙상에 DPT 싱글 "Bang Bang You're Dead"가, 베스트 뮤직 DVD에 라이브 앨범 "Puffing on a Coffin Nail: Live at the Forum"가 노미네이트, 피트 도허티와 함께 NME 독자 투표 가장 옷 잘 입는 남자, 가장 섹시한 남자 공동 노미네이트.
2012년 윈스체터 대학에서 현대음악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박사 학위 수료'''[5]
UK Top 10 싱글 2개.[6] 총 누적 앨범 판매고 약 '''90만 장'''.
리버틴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쉽게 소개하자면, '''리버틴즈는 절대 피트 도허티 원맨밴드가 아님'''을 증명하는 인물. 아니 도허티 없는 리버틴즈가 리버틴즈라 할 수 없듯, 바랏 없는 리버틴즈도 절대 리버틴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버틴즈 팬이라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피트 도허티 평생의 베프이자 소울메이트.'''
도허티-바랏 항목 참조.
2. 출생과 유년기, 대학 입학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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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갓 졸업할 즈음의 칼 바랏. 약간은 차가운 조각미남형이나, 겨우 초등학생인데 표정이 불안정해보이기도 한다. [7]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 출신. 프랑스, 러시아, 폴란드 피가 섞였다고 한다. 이혼 부모와 히피 가정에서 자라나, 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서 번갈아 가면서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는 과거 예술가를 지망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군수공장에서 일했다고 하며, 어머니는 상반되게도 반전운동을 하는 일종의 NGO 회원이었다고 하는데...알만하지만 두 사람 모두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는 뜻이다. 특히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연중 쉼 없이 천막 농성 시위를 해대는 히피적인 생활 스타일 때문에 그런 곳에서 여러 날 묵기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피트 도허티와 마찬가지로 한 곳에 꾸준히 정착하지 못했던 결과 친구 관계가 소원하기도 하는 등 남모를 고민이 많았었다고 밝혔다.
칼 바랏은 피트 도허티와는 다르게 데뷔 이전의 인생에 관해선 말하기를 꺼리는데 성격 탓도 있지만 실제로 가정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안 좋은 기억도 많이 가지고 있는 듯 하다.[8] 데뷔하기 전에 피트 도허티와 가난하게 살때도 매일 자살[9] 을 생각했고 도허티가 자신과 동반자살하길 원했다. 총을 구해서 서로 쏘거나 같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방식같은걸로. 그때는 상태가 괜찮았던 도허티가 삶에 대한 의지와 재능을 발현할 것을 항상 일깨워줬다고 한다. 그래서 성격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지만 마찬가지인 이유로 동시에 긍정적(이 되기라도 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청소년 때부터 약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이라는 나라 특성상 특별히 칼이 탈선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이때 동년배의 피트 도허티보다 칼이 약을 더 많이 해댄 건 피트가 밝혔다. [10]
그래도 학창시절 성적은 준수해서 1996년 브루넬 대학 연극학과에 입학, 거기서 피트 도허티의 누나인 에이미 조 도허티와 플랫메이트가 된다. 자세히 밝힌 바는 없으나 짧게나마 사귀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에이미 조로부터 당시 '''시인을 지망하는 동생'''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그렇게 브릿팝의 황제가 한 때 비틀즈와 스미스의 계승자라 추켜세웠던 둘의 인연이 시작된다. [11]
3. 피트 도허티와의 만남과 리버틴즈
메인 항목: 리버틴즈, Up the Bracket, NME"'''날 칭찬해주는 놈들, 충고해주는 놈들, 욕하는 놈들. 다 똑같다. 말만 그러지 다 나 X되면 비웃느라 바쁜 거 누가 모를까봐. 사람들이 뭐라 지껄이건 관심 없다. 나한텐 카를로스밖에 없다. 칼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가 웃는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 근데 난 그를 자꾸 울게 만들었다. 상처주느니 포기하기로, 모든 걸 그만두기로 했다.'''"
'''피트 도허티'''
97년 리버틴즈를 결성, 2000~2001년부터 슬슬 인디계에서 인지도를 얻어가며, 마침내 2002년 6월 리버틴즈 첫 싱글 "What A Waster"의 경쾌한 UK 싱글차트 #37를 기록, 같은 해 10월 데뷔앨범 Up the Bracket이 UK 앨범차트 #35를 비롯해서 3~4개의 차트에 좋은 성적으로 진입한다.등장 당시 우리 세대 비틀즈부터 차세대 오아시스나 섹스 피스톨즈와 MSP의 재림이라는 등 참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당시 영국 록계 몰락의 위기의식을 느낀 여론의 과한 기대 여론이 많이 적용하였을 뿐, 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리버틴즈는 스트록스에 대항한 '''런던의 자존심'''이 되어주었다. 스트록스의 데뷔 앨범과 함께 런던 개러지 락의 교과서로 등극한 리버틴즈의 데뷔 앨범은 이후 우후죽순 솟아날 온갖 런던 포스트 펑크 인디 카피밴드들의 시초가 된다.
그러나 고질적으로 안고 살던 마약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해지기 시작하고 칼과의 불화가 극에 달해 2004년 영국 차트 #1에 가뿐하게 진입한 리버틴즈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을 내고 밴드에서 쫓겨난다. 얼마 안 가 리버틴즈도 자연스레 해체된다. 그 당시 리버틴즈는 이미 런던 내에서 스트록스보다도 핫했던 밴드였음을 감안하면 여러모로 안타깝지만, 실질적으로 밴드 유지 자체가 불가능했으며 NME와 밴드의 지인들이 말하길 "(밴드 내부적으로 망가진 정도가) 섹스 피스톨즈 때를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사실상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참고 피트를 쫓아내고 혼자 남은 칼 바랏은 2004년말까지 '''계약 때문에 반드시 치뤄내야 했던''' 공연 및 프로모[12] 를 피트 없이 치뤄내며 어찌보면 피트보다 더한 고생을 하게 된다. 이후 리버틴즈 드러머 게리 파웰을 동반한 후 2005년 자신만의 단독 밴드 더티 프리팅 씽을 결성, 다음 해 데뷔 앨범을 발매, 무려 '''앨범 차트 #3'''에 올라 베이비솀블즈의 데뷔 앨범 'Down In Albion'의 차트 성적 #10을 상업적으로도 평론적으로 처바르는 위엄을 보여주었으나, 2008년 DPT 두번째 앨범의 부진으로 인해 동년 연말에 해체하게 된다.
4. DPT와 솔로 활동
[1] 사실 바랏은 스미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피트 도허티가 스미스의 열렬한 팬인데, 모리세이가 도허티에게 '시드 비셔스나 따라하는 클리셰'라는 비난을 포함하여 막말을 하자 도허티는 크게 상처를 받았고, 다음에 모리세이를 만나면 한 대 치고 콜라보레이션을 제의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반면 모리세이와 바랏은 꽤 잘 어울렸다.[2] 작은 키는 아니나 친구의 키가...[3] 리버틴즈 드러머.[4] '''사실상 활동 2년차 데뷔 밴드로.''' 참고로 영국 콘서트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 오아시스의 96년 넵워스 공연으로 12만 5천 명.[5] 바랏 본인 말로는 "대학에서 잘못 판단했다는 걸 깨닫기 전에 얼른 받았다"한다(..)[6] 리버틴즈 - Can't Stand Me Now #2, DPT - Bang Bang You're Dead #5[7] 피트 도허티는 칼의 어렸을 때 사진에서 자기 어렸을 때의 불안한 심정을 읽었다고 한다.[8] '난 지난 일들에 떠올리지 않는다. 내가 어느날 그것들에 대해 떠올리는 날, 틀림없이 나는 그날 죽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9] 후에 리버틴즈 2집 발매 전 매니저 앨런 맥기의 집 대리석 싱크대에 머리를 박고 자살시도를 한다.[10] 그렇다고 피트가 약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사실상 칼이나 피트 둘 다 사춘기 즈음, 즉 중학교 무렵에 약에 손을 댔다고 보는 게 맞을 듯.[11] 당시 피트는 우등생 소년이어서 칼보다 한 살 어린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대학생이었다. 그것도 런던 대학교 소속 퀸 메리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사실 피트의 수능성적이 거의 상위 10%이내 급이었다.[12] 하필이면 리버틴즈 두번째 앨범은 차트 넘버 원을 올킬하는 등 초대박을 쳐서 스케줄이 쉴새없이 잡혔다. 그런 타이밍에 피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