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세이

 

''' Morrissey[1][2]'''
[image]
'''본명'''
스티븐 패트릭 모리시 (Steven Patrick Morrissey)
'''출생'''
1959년 5월 22일 (만 65세), 잉글랜드 랭커셔 주 다비흄
'''국적'''
영국 [image]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가
'''소속 그룹'''
더 스미스 (1982년 ~ 1987년)
'''서명'''
[image][3][image][4]
[ 그 외 정보 펼치기 · 접기 ]
'''링크'''
[47] 공식 사이트 영국 공식 머천다이즈 판매처 미국 공식 머천다이즈 판매처
'''종교'''
무종교
'''활동기간'''
1977년 ~
'''장르'''
얼터너티브 록, 인디 , 인디 록 음악, 쟁글 팝
'''악기'''
보컬
'''신체'''
180cm
'''가족'''
'''부모'''
'''부''' 피터 모리세이 , '''모''' 엘리자베스 드와이어
'''배우자'''
없음

1. 개요
2. 생애
2.1. 더 스미스 이전
2.3. 솔로 활동
2.3.1. 정규 앨범
2.3.2. 비정규 앨범
2.3.3. 2012년 내한공연
3. 여담
3.1. 논란
3.1.1. 인종주의?
3.1.2. 영국제일주의
3.1.3. 사생활


1. 개요


'''영국 대중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이며, 현존하는 위대한 브리티시 아이콘.'''

BBC, 2009년 기사

'''비틀즈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NME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가이다.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영국 인디 음악과 록의 전설이자 영원한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소년같은 외모와 사춘기적 감성을 한 몸에 걸친 특유의 가사와 감수성으로 더 스미스 시절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인디 록과 브릿팝의 탄생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그는 영국 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작사가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고 가사는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BBC의 방송 ‘The Culture Show’가 실시한 2006년 여론 조사[5]에서 모리세이는 데이비드 애튼버러에 이어 두 번째로 훌륭한 영국 문화 아이콘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그만큼 영국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논란도 많으나 그가 영국 음악과 인디 록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은 부정할 수가 없으며 현재까지 영국 인디 록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영국 인디의 화신'''같은 존재이다.

2. 생애


''영국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모 아니면 도다. 나를 사랑하거나, 버스 밑에 깔리길 바라거나. 중간은 없다.''

'''대부분의 팝 스타들이 아이콘적인 위치에 오르기 전에 죽어버리는데,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올랐다.'''

인디펜던트

[image]
[image]
어린이 시절
13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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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6]
30대 초반
[image]
[image]
40대 중반
50대 후반

2.1. 더 스미스 이전


1959년 5월 22일영국 맨체스터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비원이였고 어머니는 도서관 사서였다. 당시 영국에서 발생한 청소년 연쇄살인사건인 무어 살인사건[7]의 발생 장소가 모리세이의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희생자들과 나이가 비슷했던 모리세이는 유년 시절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으며 보내야 했다.[8] 그래서 근시가 생겨 안경을 종종 썼는데 이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조니 마가 처음 그의 방에 갔을 때 한 방에 그렇게 많은 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 그 덕에 8살 때는 첫 시를 완성하기도 했고, 10살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Complete Works of Oscar Wilde'를 처음 접하여 그 후로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뿐 아니라 인물 자체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6살때 처음으로 음악을 발견하여, 항상 방에서 크게 음악을 틀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9] 이후 스미스의 데뷔 앨범 The Smiths에서 무어스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곡인 Suffer Little Children을 수록하였는데, 가사에 당시 희생당했던 아이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기재했다는 이유로 언론과 유가족들의 비난을 받았고 유가족들이 소송까지 걸게 된다. 하지만 모리세이의 성장 배경과 곡을 들어본 유가족들이 추모의 의미를 담은 가사라는걸 깨닫고 소송을 취하했으며 오히려 언론에서 비난받는 모리세이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원래 맨체스터는 다소 거친 노동자 계급 문화를 가졌던 곳으로 유명한데, 모리세이는 유년 시절 집에만 틀여박혀 있었던터라 거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엄격했던 모리세이의 집안 또한 그에게 조그마한 일탈도 허용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모리세이는 현재까지도 강경한 채식주의[10]로 대표되는 절제된 생활[11] 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때문인지 그는 만성적인 우울증을 앓고있다고 한다.[12]청소년기에 느낀 이러한 비참함은 그의 음악적 원천이 되었으며 모리세이의 생명 존중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이때 주로 듣던 음악은 샹그리라같은 60년대 걸그룹의 음악들과 뉴욕 돌스[13], 데이빗 보위등이 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친하게 지냈던 소수의 친구들 중 하나가 펑크 록커이자 유명 비주얼 아티스트 린더 스털링이다. 데뷔전이었지만 매드체스터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팩토리 레코드와 하시엔다 클럽의 사장인 토니 윌슨과도 가까웠다. 하지만 팩토리 레코드는 스미스와 계약하진 않았다.[14] 윌슨이 죽기전까지는 서로 신경을 긁어대는 이상한 우정(?)을 유지했는데, 윌슨은 생전에 그를 부를 때 일부러 모리세이가 싫어하는 본명인 '스티븐'이라고 불렀다. 그외에 제임스의 팀 부스, 더 컬트의 빌리 더피[15] 등과 친했으나 린더를 제외하곤 누구와의 우정도 오래가진 못했다. 여담으로 이렇게 맨체스터 토박임에도 맨체스터 특유의 악센트를 안쓰고 포쉬한 악센트를 쓴다. 이에 대해 모리세이는 아이리쉬의 특징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어머니쪽 가족에 의해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본인이 맨체스터 악센트를 쓰지 않음에 매일 신에게 감사한다고(...) 얘기했다.[16]
모리세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음악 잡지에 각종 글을 기고[17]하거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펜팔[18]을 주고받으며 방구석폐인[19]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1982년 5월 어느날 조니 마가 기타를 들고 모리세이의 집 현관에 약속도 않고 불쑥 찾아왔다. 그는 모리세이에게 밴드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 밴드가 더 스미스다.
한편 모리세이의 이러한 스미스 이전 삶을 다룬 영화도 있는데 제목은 'Still Ill'의 두번째 소절을 딴 제목의 <잉글랜드 이즈 마인(England Is Mine)>트레일러 으로 2018년 7월 5일 국내 개봉했다. 모리세이 역은 잭 로던, 린더 스털링역은 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 조니 마 역은 로리 키나스턴이 맡았다.

2.2. 더 스미스


해당 항목 참조.

2.3. 솔로 활동


스미스의 갑작스런 해체 이후, 모리세이는 1년 가까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운둔하였다.[20] 이런 그를 본 스미스의 프로듀서였던 스티븐 스트릿이 모리세이의 집으로 곡을 들고 찾아와 격려하였고 모리세이는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허나 조니 마라는 든든한 조력자 없는 그의 솔로 활동은 꽤 불안정했다. 프로듀서가 자주 바뀐 데다가 음악적 성향도 들쭉날쭉거렸다. 1988년에 내놓은 첫 솔로 음반 《Viva Hate》는 스미스 후광[21]에 괜찮은 퀄리티로 호평을 받았다. 매니저에게서 첫 솔로 앨범이 차트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리세이는 또 잠적해버렸다. 그 다음 작품 Kill Uncle은 흑역사급의 굴욕적인 평가를 받았다. 다행히 데이빗 보위[22]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에 같이 작업했던 기타리스트인 믹 론슨으로 프로듀서를 교체하고 발표한 1992년 작 《Your Arsenal》, 1994년 작 《Vauxhall and I》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허나 1995년부터 불거진 스미스 멤버들과의 소송의 트라우마 때문에 또 나락에 떨어져 결국 소송이 끝난 1997년 이후 7년동안 음악 활동을 완전히 중지했다.
할리우드로 이주 후 발표한 2004년 작 《You Are the Quarry》[23]가 대박을 치면서 '역시 모리세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건지 2006년과 2009년에도 앨범을 냈다. 미국의 촉망받는 사진작가 라이언 맥긴리가 이 때 2년간 투어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2007년에 모리세이를 주제로 한 <Irregular Regulars>라는 전시회를 열었다.[24] 모리세이는 2009년 이후에는 공연만 다니고 활동이 뜸하다가 2013년 11월에 라이브 앨범 & DVD/BD인《Morrissey 25 Live》를 발표했고, 무려 펭귄클래식을 통해 자서전을 발표했다. 클래식이 아닌 원고를 클래식 라인으로 출간한다는 것에 대해 큰 논란이 일었다. 펭귄클래식의 명성을 흐리게하는 눈먼 결정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 일에 대해 펭귄 북스 측은 "모리세이가 자서전을 쓴 과정(인생) 자체가 클래식입니다 (중략) 대부분의 전설들은 죽어야 그 자리에 오르는데 모리세이는 살아 있는 동안 그 자리에 올랐으니까"라고 밝혔다. 2014년 7월 앨범《World Peace Is None Of Your Business》[25]를 발매했다.
2017년 11월 17일 열한 번째 정규 앨범 《Low in High School》를 발매하였다. 2019년 5월 24일에는 커버곡으로 이루어진 《California Son》 앨범이 발표되었다. 선공개되었던 Wedding Bell Blues는 무려 그린데이의 보컬리스트 빌리 조 암스트롱이 피쳐링하였다!
새 커버앨범이 발매된지 3일 만인 2019년 5월 27일 인터뷰#에서, 이미 열세 번째 오리지널 스튜디오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2020년 1월 발매를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2.3.1. 정규 앨범


'''Viva Hate'''
정규 1집 1988/03/14
'''Kill Uncle'''
정규 2집 1991/03/04
'''Your Arsenal'''
정규 3집 1992/07/27
'''Vauxhall And I'''
정규 4집 1994/03/14
'''Southpaw Grammar'''
정규 5집 1995/08/28
'''Maladjusted'''
정규 6집 1997/08/11
'''You Are The Quarry'''
정규 7집 2004/05/17
'''Ringleader Of The Tormentors'''
정규 8집 2006/04/03
'''Years Of Refusal'''
정규 9집 2009/02/16
'''World Peace Is None Of Your Business'''
정규 10집 2014/07/14
'''Low In High School'''
정규 11집 2017/11/17
'''California Son'''
정규 12집/커버앨범 2019/05/24


'''I Am Not a Dog on a Chain'''
정규 13집 2020/03/20



2.3.2. 비정규 앨범


'''Bona Drag'''
컴필레이션 1990/10/08
'''Beethoven Was Deaf'''
라이브 1993/05/10
'''World Of Morrissey'''
컴필레이션 1995/02/06
'''Suedehead: The Best Of Morrissey'''
컴필레이션 1997/09/15
'''My Early Burglary Years'''
컴필레이션 1998/09/15
'''The CD Singles '88–91''''
컴필레이션 2000/06/17
'''The CD Singles '91–95''''
컴필레이션 2000/09/17
'''¡The Best Of! Morrissey'''
컴필레이션 2001/11/06
'''Live At Earls Court'''
라이브 2005/04/04
'''Greatest Hits'''
컴필레이션 2008/02/11
'''The HMV/Parlophone Singles '88–'95'''
컴필레이션 2009/10/12
'''Swords'''
컴필레이션 2009/10/26

'''Very Best Of Morrissey'''
컴필레이션 2011/04/25
'''This Is Morrissey'''
컴필레이션 2018/07/06


2.3.3. 2012년 내한공연


2012년 5월 6일 멜론AX홀에서 내한 공연이 열렸다. 한국 내 인지도 때문에 비슷한 시기 노엘 갤러거의 내한공연이 티켓 판매 오픈 2분만에 매진된 반면 암표 가격도 정가 절반 시세에 형성되었다. 공연장에도 영국인 등 유럽인과 북미인들이 절반이었다. 공연에서 다른 멤버들은 영국 왕실을 까는 티셔츠를 입었고[26] 스미스 시절 곡인 'Meat is Murder'에서는 각종 가축의 짝짓기 영상을 보여주는 등[27] 섬나라의 기상을 은근히 잘 보여주었다.[28]
간간히 앞줄 관객들과 손을 잡아주면서 중간에는 셔츠를 벗어서 관객에게 던져주고 마지막에는 한 팬의 현수막을 허리에 껴입는 팬서비스까지 보여주었다. 링크 반면 1시간 15분에 그친 공연 시간이나 멘트 부족은 아쉬움을 남겼다. 의사소통이 안될 것이라고 속단한 것일까? 그가 원래 적극적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무대매너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건 이제까지의 공연 영상을 보면 알 수 있지만[29] 팬들의 갈증을 풀기에는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모리세이는 당시의 도도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해 돌았던 투어의 베스트5에 서울 공연을 넣었다(!)

3. 여담


  • 2014년 중순 갑자기 미국 투어를 취소했고, 10월에는 스페인 언론 엘 문도(El Mundo)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식도암에 걸렸음을 밝혔다.#원문 이 인터뷰에서 그는 "If I die, then I die. And if I don’t, then I don’t."라고 발언했다. 이후 2015년에는 토크쇼 '래리킹 나우(Larry King Now)'에 출연하여 진단 당시의 심경과 현재 건강상태에 대해 밝혔고, 오늘의 건강상태를 물으니 활짝 폈다고"Blooming" 대답했다.#영상
  • 2014년 초에 소설을 집필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2015년 9월에 소설 "List of the Lost"를 출간했다. 평은 영 좋지 않은 편. 가디언지의 Michael Hann은 아예 대놓고 읽지 밀라고하기도 했으며 The Daily Beast의 Nico Hines는 책 내 여성에 대한 묘사를 두고 "괴상한 여성혐오 산책'이라고 깠다. 이 비판에는 NME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소설을 두고 "혼란스럽고 종종 민망한 섹스의 조금 당황스러운 슬랩과 클리셰, 괴상하고 과장된 대화"라고 칭하기도 했다..
  • 2012년에는 55살이 되는 2년 뒤에 은퇴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0] 현재 은퇴 발언은 번복한 상태이다.
  • 2016년에 슈프림콜라보레이션 티셔츠를 냈다. 이 일과 관련해서도 잡음이 많았다. 슈프림이 티셔츠에 넣기 위해 찍은 모리세이의 사진은 출시전까지 극비로 부치기로 합의가 되었는데, 모리세이의 조카[31]가 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바람에 슈프림은 모리세이에게 사진을 다시 찍자고 제의했다. 그런데 모리세이는 슈프림이 패스트푸드 전문점 화이트 캐슬(White Castle)로 부터 스폰을 받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고 전에 작업한 것도 출시하지 말라고 했다. 양측간에 공방이 오갔으나 슈프림은 그냥 배째라는 식으로 처음 작업한 사진을 가지고 티셔츠를 발매했다. 불티나게 팔리는중.
  •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싱어 중 하나이다.
  • 그의 경력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You Are the Quarry》 앨범 라이선스 버전에 수록된 성문영의 상세한 해설도 참조바란다.
  • 영화 앤트맨과 와스프에서 주인공의 친구 루이스의 할머니가 모리세이의 열혈팬으로 나오고, 모리세이의 대표곡 'Everyday Is Like Sunday'와 'First Of The Gang To Die'가 영화에 삽입되었다. (영화의 OST앨범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 2006년 NME와의 인터뷰에서, 2004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대신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죽었어야 한다고 발언하고 조지 W. 부시테러리스트라고 언급한 일로 인해 FBI로부터 조사를 받았었다고 얘기했다.
  • 2015년의 한 인터뷰에서, 음악과 문학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걸 상상할 수 있냐는 질문에 "아뇨. 마이크가 내 묘비입니다. No, The microphone is my gravestone" 라고 대답했다.
  • 60이 된 현재에도 30년 전과 비교해서 목소리 변화가 거의 없는 가수이다. 워낙에 독특한 목소리를 지녀서 그러기도 하겠지만 목 관리를 어느 정도 철저히 한 듯.
  • 위에서 언급된 데이빗 보위를 showie로 부른 사례처럼 누군가를 디스할 때 이름을 비틀어 조롱하는 버릇이 있다. 영국 왕세손비 Kate Middleton은 Kate Muddleton. 데이빗/빅토리아 베컴(Beckham)은 Peckham.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Broccoli Spears. 마돈나는 Mcdonna. Radiohead와 Coldplay는 각각 Radiodead, Oldplay라고 조롱했다.
  • 2019년 6월 MorrisseyCentral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후회하는 일이 있냐는 질문에 "로버트 스미스. 35년 전에 그에 대해서 심한 말 많이 했지... 근데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라고 대답했다..![32]
  • Sparks는 'Lighten Up Morrissey'라는 모리시에 관한 곡을 쓰기도 했다. 모리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Sparks의 Kimono My House를 꼽을 정도로 Sparks를 좋아했다. 노래
  • 스미스 트리뷰트 앨범에도 참여했던 밴드 디바인코미디(The Divine Comedy)의 'At The Indie Disco'라는 곡에 '모리세이의 포스터 옆에서, 한 다발의 꽃과 함께'[33]라는 가사가 있다.
  • 2019년 9월 13일 미시건에서 열린 California Son 투어 콘서트에서 1,000번째 콘서트라고 밝혔다. 영상
  • 모리세이는 라몬즈의 열렬한 으로, 2014년 발매된 라몬즈의 베스트 앨범 《Morrissey Curates The Ramones》 기획에 초대되어 트랙리스트를 손수 선곡했다. 이 앨범은 9,000장 한정 발매 되었다.
  • 2004년 멜트다운 페스티벌의 호스트로서 직접 퍼포머 라인업을 짰다. 모리세이는 이 페스티벌에서 뉴욕돌즈 해체 30년만의 재결합 공연을 추진하여 성공시켰다.
  • 영화 미드 90에 모리세이의 3집 앨범 수록곡 'We'll Let You Know'가 삽입되었다. 배우이자 미드 90으로 감독데뷔를 한 조나 힐이 모리세이의 팬이다.

3.1. 논란



3.1.1. 인종주의?


음악 경력 전반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인종주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언론들은 더 스미스 시절의 곡 'Panic' 가사와 흑인음악 혐오 성향과 결부시켜 모리세이를 인종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심지어는 기자가 대놓고 '당신은 인종주의자입니까?'라는 질문을 한 일도 있었다. 모리세이는 이러한 의혹 제기에 스스로든 레이블과 매니저를 통해서든 한결같이 부인하고 있다.
2010년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내 동물 학대 실상을 비난하며 중국인을 아종(subspecies)으로 지칭했다. 즉 생물 분류학적으로 사람과 같은 종이지만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족속들이란 의미. 어떤 언론에서는 '하위인종'이라고 번역했는 데, 엄연한 오역이다. 인종을 뜻하는 영단어엔 종을 뜻하는 'species'가 전혀 없기 때문. 달리 말하자면 모리세이는 중국인을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은 셈이다.
2011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 공연에서 'Meat is Murder'를 부르기 전에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학살맥도날드KFC자행하는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발언을 했다. 또 2012년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바베큐 굽는 냄새가 나자 공연중이던 모리세이는 "살 타는 냄새가 나는데...그게 사람고기였으면 좋겠군."이라고 발언해 큰 물의를 빚었다. 영상
때문에 영국계 유색인종 뮤지션들은 모리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도계 밴드인 코너샵 리더 틴더 싱은 대놓고 모리세이 사진 화형식을 벌였을 정도.

3.1.2. 영국제일주의


한국의 음악팬들 사이에선 모리세이는 영국 제일주의고 미국을 싫어했다는 인식이 퍼져있다 [34]. 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는 정확하지 않은 얘기다.
음악적인 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선 모리세이가 좋아한 음악의 절대 다수가 미국음악이었다. 동시대의 다른 영국 뮤지션들에 비해서 '''미국 록음악에 굉장히 호의적이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뮤지션들인 엘비스 프레슬리,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기 팝, 라몬즈, 패티 스미스, 뉴욕 돌스[35] 등도 죄다 미국 출신 뮤지션들이다.
2010년에는 13일의 금요일을 맞아 자신이 좋아하는 13장의 앨범을 선정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미국 뮤지션들의 앨범들이고, 영국 출신 뮤지션의 앨범은 오직 Roxy Music의 ‘For Your Pleasure’ 이 한 장밖에 없었다.[36]#출처#출처
1980년대 초반 펜팔에서는, "미국 음악씬은 무시무시하다. 뉴욕에선 롤링스톤즈비틀즈,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연주되고, 뉴웨이브 DJ들은 프리텐더스를 튼다. 근데 영국에 돌아오면 보이는 건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한 13살 짜리 소년들과 듀란 듀란뿐이다."라며 늘 다채로운 음악이 융성하는 미국에 비해 단조롭고 얄팍한 당시의 영국 음악씬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다.[37]
우리나라 음악관련 사이트들에선 모리세이가 펑크록에 대해 "세계가 영국을 따르려고 했던 사건"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퍼져 있는데, 그런 말을 했다는 원문 출처도 전혀 찾을 수 없고 모리세이의 미국 중심 음악관과 배치되는 걸 볼때 누군가 지어낸 얘기로 보인다. 오히려 모리세이는 10대 때부터 뉴욕 펑크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펑크 무브먼트는 뉴욕이 주도했으며, '''뉴욕 펑크에 비하면 영국 펑크는 2류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내용의 편지를 멜로디 메이커지에 보내기도 했다.[38]#출처
이렇게 철저히 미국 음악만을 숭앙하는 모리세이의 태도와 취향은 조니 마의 음악 취향과 상당히 다르다. 조니 마는 영국 음악과 미국 음악 모두로부터 고르게 영향을 받았던 반면, 모리세이는 철저히 미국음악 빠였고 상대적으로 영국 음악은 대단치 않게 여겼다.[39] 그리고 좋아했던 미국 음악도 조니 마는 백인 록음악 뿐 아니라 흑인음악에도 상당한 애착이 있었던 반면, 모리세이는 흑인음악은 좋아하지 않고 뉴욕의 백인 펑크록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즉 모리세이가 골수 뉴욕펑크 숭배자에 가까웠다면, 조니 마는 어느 한 장르에만 치우치지 않고 훨씬 폭넓게 음악을 좋아하고 다양한 음악적 자양분을 받아들였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둘간의 이런 음악적 견해 차이도 더 스미스 해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모리세이가 미국을 싫어해서 미국에 투어도 가지 않았다는 설명도 돌아다니는데, 이것 역시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다.[40] 실제로 스미스는 1983년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여러차례 공연을 했다. 특히 1986년 미국에서의 공연 횟수는 20회인데, 이것은 같은 해의 자국인 영국내에서의 공연과 같은 횟수다.#출처 게다가 모리세이는 아예 미국 LA의 할리우드로 이사가서 거기서 계속 눌러 살고 있고, 이곳 할리우드를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모리세이가 'America is not the world' 에서 나타낸 것처럼 정치적인 면에선 미국의 독선에 대해 비판의 자세를 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적으로는 철저히 미국 음악 추종자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뉴욕펑크를 중심으로 미국 '''백인''' 음악은 좋아한 반면 '''흑인''' 음악은 싫어했던 것도, 꼭 인종차별주의자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아마도 1970년대 중반에 있었던 디스코#s-1 열풍으로 대표되는 상업적인 흑인 문화를 싫어했던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곡이 더 스미스 시절의 곡인 'Panic'이다. 가사 후렴구에 '''디스코는 불태워버려!, 그걸 튼 DJ는 교수형에 처하자.(Burn down the Disco, Hang the blessed DJ.)'''란 내용이 나온다. 모리세이에게 인종차별주의자란 낙인이 찍힌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곡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사의 내용은 디스코 폭파의 밤을 인종차별적 사건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기존 디스코 그룹의 상업적인 행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모리세이와 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보도하던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비극적인 내용의 보도가 끝나자마자 DJ가 의 신나는 'I'm Your Man'을 틀자 느낀 기분을 가사로 옮긴 것 뿐이라고. 실제로 가사가 논란이 되자 조니 마는 "그럼 뉴 오더에는 흑인이 있냐?"라 따지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뉴 오더와 스미스는 경쟁 상태였고, 모리세이는 조이 디비전이안 커티스가 죽은 후광으로 뜬 밴드라고까지 말하며 조이 디비전을 깠다.[41]
하지만 디스코만 깠던게 아니라 두루 흑인음악을 여러번 깠었는데, 예를들어 1986년 인터뷰에선 레게야말로 가장 인종차별적인 음악이라는 발언을 했고,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자넷 잭슨, 휘트니 휴스턴 등의 흑인음악을 싫어한다고도 말했으며, 나중엔 조니 마가 작곡해서 가져언 곡들 중에 흑인음악 냄새가 나는 건 자기와 안맞다며 가사 붙이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던 걸로 보아, 모리세이 개인적 음악 취향상 흑인음악을 안 좋아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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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에는 밴드 매드니스의 재결합 공연에 영국 국기 유니언 잭을 들고 나타나 비난을 받았다. 매드니스는 유독 스킨헤드팬이 많은 밴드였다. 스킨헤드가 스카, 레게 음악을 향유했다는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그 날 공연에도 앞자리에 스킨헤드족들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게스트로 나온 모리세이가 유니언 잭을 몸에 걸치고 나왔으니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쓴 격으로 필요 이상의 오해와 비난을 사게 되었다. 그 사건으로 매드니스 재결합은 그냥 묻혀버렸다(...) 스미스 시절부터 의도했든 아니든 영국 언론과 대중들의 사랑과 비난을 한몸에 받아왔던 그이기에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할리우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42]
그러나 상술한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지성과 감성, 카리스마로 논란을 상쇄하는 인기 또한 늘 그를 따라다닌 것이 사실이다. 여러모로 문제적 인물이자 희대의 아이콘.
참고로 브렉시트가 한창 뜨거운 감자였을 때는 영국의 EU 탈퇴를 지지했다. 이후에는 UKIP에서 대표직을 위해 뛰었으나 떨어진 극우 반이슬람주의 정치인 앤 마리 워터스와 그녀의 정당 For Britain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3.1.3. 사생활


더 스미스 시절부터 모리세이의 사생활은 큰 논란이 되어왔다. 더 스미스와 솔로앨범의 가사와 앨범커버등 컨셉들은 노골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80년대 당시에는 모리세이는 자신은 섹스를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정의했다.[43] 무성애자란 말을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
그러나 모리세이는 무성애자이며 동정이라는 주장은 철회[44]하고 2013년 발간한 자서전에서 남자와 여자 몇 몇과 깊은 관계에 있었음을 고백했다. 팝 역사상 오래된 떡밥이 해결된셈. 언론이 이 일을 가지고 모리세이의 전 남자친구[45]를 괴롭혔기 때문에, 모리세이는 미국판 자서전에서는 이 내용을 삭제했다.
여전히 독신이긴하다. 이란계 여자친구를 만날 때 아이를 가질 것을 상의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46]앞으로도 그럴듯.
2017년에는 케빈 스페이시하비 와인스틴을 옹호하는 입장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1] 영어권의 발음과 국내 외국어 표기법 모두 모리세이가 아닌 '모리시'이다. 핫뮤직과 같은 잡지를 통해 퍼진 잘못된 표기법으로, 이후 본국의 발음이 확인된 이후 정정되었다. 아직도 이 표기법이 많이 퍼져있어 2012년 내한공연에까지 쓰였으나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 이 문서의 인물이 아니어도 Morrissey 성씨를 가진 다른 인물들도 모리세이라고 쓰는 경우가 매우 많다.[2] 82년 스미스를 결성하자마자 모리세이는 본래 이름인 '스티븐'을 버리고 모리세이로 살기로 결심한다. '스티븐'이란 이름이 너무 지루해서 그랬다는 설이 있고, 누구에게도 친근하게 불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는 설도 있다. 조니 마가 이때부터는 그를 '모즈'(Moz), '모저'(Mozzer)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그게 그의 지금까지의 애칭이 되었다.[3] 초창기 사용하던 서명[4] 현재 사용하는 서명[5] 링크, 총 투표수 75,000표[6] 1983년에 출판된 모리세이의 책 '제임스 딘은 죽지 않았다(James Dean Is Not Dead)'의 저자소개란에 수록된 사진[7]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안 브래디와 마이라 힌들리가 맨체스터에 살던 청소년 5명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사건. 일부 희생자들의 시신이 남부 잉글랜드의 새들워스 무어에서 발견되어 무어스 사건이라고 이름붙여졌다.[8] 그러나 의외로 모리세이는 육상에 재능이 있어서 많은 수상을 했는데 뛰는 것을 싫어해서 그만두었다. 맨체스터의 기타리스트 비니 라일리에 의하면 레슬링도 잘하고 힘도 세다고. 사람들이 모리세이에게 갖는 편견들이 재밌다고 덧붙였다.[9] "나는 시끄러운 아이(noisy child)였다. 나는 6살의 나이에 음악을 발견했고 늘 하루종일 크게 노래를 틀어댔다. 나는 멈추지 않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매우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솔직히 가족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인내심을 보였다는 것이 놀랍다." (Word Magazine, 2003)[10] 모리세이는 11살때부터 채식을 해왔으며, 폴 매카트니와 함께 대표적인 채식주의자로 유명하다. 참고로 모리세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채식주의자용 치즈라고 한다.[11] "I don't eat anything that has burped or ran or swam so it has to be something really quite dry and lifeless and exotic. Rather like me." (난 뛰어다녔거나 헤엄쳐다녔던 것은 먹지 않는다. 내가 먹는 건 완전히 무감하고 생명이 없는 것이라야 한다. 마치 나처럼.)[12] 소수의 친구들에게 유머감각과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대부분의 맨체스터 사람들에게는 '그 모퉁이에 사는 정신이 좀 이상한 스티븐(Steven the Nutter)'이라고 불렸다고(...)[13] 그는 뉴욕돌스의 엄청난 팬으로 뉴욕돌스 영국 팬클럽 회장이었다(...) 본인이 만들었다. 여기서 뉴욕돌스 팬진도 썼는데 조니 마가 이것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2006년에 뉴욕돌스 재결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도 모리세이[14] 언젠가 윌슨은 모리세이가 쓴 희곡 습작을 읽고 이상한 집착이 생겼고 그를 'Our Dostoevsky'라고 불렀다. 모리세이는 19살 때 그에게 '전 팝스타가 될거예요'라고 선언했는데 윌슨은 그가 작가가 될 줄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이상한 꼬마(strange kid)가 팝스타가 될 방법은 지구 어디에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황당했다고. 몇 해 뒤 스미스가 데모테잎을 가지고 그를 찾아갔을 땐 비웃으면서 깠다(...)[15] 그가 1978년에 조니 마를 모리세이에게 처음 소개시켜주었다.[16] I've never had a Manchester accent. I've always had a very soft voice and I was raised by my mother's side of the family, who were very Irish. I never sounded Mancunian, for which I thank God every day. (Word Magazine, 2003)[17] 당시 모리세이의 희망 직업이 기자였다.[18] Robert Mackie라는 이름의 스코틀랜드 펜팔과 80~81년에 주고받은 편지들이 'Words By Morrissey'라는 fanzine으로 나오기도 했다.[19] 히키코모리라고 링크가 되어있지만 사실 모리세이의 성격은 은둔형 외톨이라기 보다는 그냥 사회부적응자라고 보면 된다(...)[20] 모리세이는 스미스가 그에겐 엄청난 정서적 투자였고 서약이었는데 조니 마가 갑자기 '모든게 끝났다'라고 선언했다고[21] 사실 이 앨범 자체가 조니 마의 작곡스타일을 영리하게 카피한 것이다(!)[22] 데이빗 보위는 모리세이의 한 때 우상이었고 보위도 모리세이의 노래인 'I know it's gonna happen someday'를 커버하는 등 90년대 초반에 얼마간 좋은 사이를 유지했다. 그런데 보위가 90년대에 유럽투어를 할 때, 모리세이가 오프닝게스트로 투어 중 전 공연에 같이 참여하기로 약속했는데 (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여러 썰이 있지만,) 모리세이가 두세번의 공연 뒤 그만두었다. 이후 사이가 멀어졌고 모리세이는 보위를 'David Showie'라고 조롱하는 등 좋은 사이는 아닌듯 하다. [23] 수록곡 자체는 02년도부터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린데이, SUM41, blink-182 앨범을 만든 프로듀서 제리 핀과 작업하면서 중후하면서도 탄력이 살아있는 앨범으로 환골탈태하였다. 이전까지는 자기복제라는 굴욕적인 평가까지 받았지만 탄력있는 사운드와 그 자신의 원숙미가 더해져서 잊혀지던 커리어가 반전한 셈.[24] 여기서 모리세이의 모습은 실루엣으로만 찍혀있는데 이것에 대해 맥긴리는 "모리세이는 그의 노래처럼 무척 신비로운 사람이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온지라 아무도 그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느낌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모리세이 이전에 그와 같이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사, 음악, 심지어는 무대 위에서의 몸짓까지도 온전하게 소유하고 있는 아티스트다."라고 작업 방식을 설명한 적이 있다.[25] 이 앨범에 실린 동명의 곡은 '세계평화는 알아서 할테니까 니들은 열심히 일해서 세금이나 잘 내. 부자들은 더 배불러야 하고 가난한 자들은 계속 그렇게 가난한 채여야 해.'라는 풍자적 가사를 노래하는, 특정 국가들의 정부 및 빈익빈부익부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26] 'We hate William and Kate'란 문구가 적혀있었다.[27] 수위가 높아 어떤 여성 관객들은 곡 연주 내내 고개를 돌렸다.[28] 모리세이는 Vegan계 채식주의자이다.[29] 나이로 보나 음악으로 보나 어떤 때는 디너쇼 같기까지 하다. 물론 영어권 국가에선 멘트가 많다.[30] 조니 마는 이 발언에 대해 "걔 절대 은퇴안할걸"이라고 예언했다[31] 사진작가이자 모델로, 모리세이의 'Suedehead'뮤직비디오# 초반에 등장하는 꼬마가 이사람이다.[32] (Q. Any small regrets?) Oh, I never make my regrets small … if I can help it. Oh. Umm. Robert Smith. I said some terrible things about him 35 years ago … but I didn’t mean them … I was just being very Grange Hill. It’s great when you can blame everything on Tourette’s syndrome. (laughs)[33] Next to the poster of Morrissey with a bunch of flowers[34] 참고로 모리세이는 영국의 주류인 앵글로색슨계가 아니라 아일랜드계이다. Irish Blood, English Heart라는 노래도 있다.[35] 심지어 뉴욕 돌즈 팬클럽의 영국 지부 회장까지 지낼 정도로 열성적인 팬이었다.[36] 게다가 이 Roxy Music도, 저 리스트를 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록시뮤직의 리더 브라이언 페리가 사냥광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Roxy Music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37] [image] [image][38] 한국에선 Sex Pistols가 워낙 유명해 이들을 펑크록의 원조로 인식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Sex Pistols 등장 이전부터 펑크를 즐겨듣던 모리세이는 당연히 뉴욕이 펑크의 발상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39] 비틀즈를 예로 들면 조니 마는 비틀즈로부터 받은 영향과 애정을 표현하곤 했던 반면 모리시는 비틀즈가 쓴 좋은 곡은 단지 넷 밖에 없으며 자신은 그들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 했다.#[40] 아마 IZM에 실린 이 리뷰가 엉터리 소문의 근원인 듯 하다. 임진모의 리뷰 하단에 보면 스미스가 미국을 혐오해 투어를 가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고, 배순탁의 리뷰에는 투어를 가지 않았다는 언급은 없지만, 임진모의 리뷰를 기초로 쓴 것처럼 내용이 비슷한다. 리뷰1 리뷰2 심지어 임진모의 리뷰로부터 16년 뒤인 2017년에 쓰여진 이 리뷰도 스미스가 미국주의에 맞섰다는 등의 언급을 하고 있다. 리뷰3[41] 사실 스미스는 조이디비전등이 속해있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이 성사될 뻔했는데 레코드 매니저인 롭 그레튼과 모리세이가 큰 말다툼을 하게되어 무산되었다. 그때 그레튼은 "이안은 스스로 목이라도 맸어.(네 놈은 그런 깡이라도 있음?)"라는 식으로 얘기했고 또 사장인 토니 윌슨은 데모 테잎을 듣고 "이 버즈의 곡들은 이미 연주 되고 있는데?(=니네 음악 버즈랑 똑같음)"이라고 말했다. 그게 모리세이의 신경을 건드렸다. 모리세이는 그레튼을 한참 째려보다가 나가버렸다고 한다. 토니 윌슨의 생애를 다룬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윌슨에게 '네가 스미스와 계약안한건 잘못한일이다'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적 연출과는 다르게 토니 윌슨은 스미스와 계약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전에 밝혔다. 한편 최근 모리세이의 자서전에 따르면 조니 마가 도망가서 스미스가 해체되었을 때 윌슨은 모리세이에게 "조니는 할 만큼 했어!"라고 했다고(...)[42] 그런데 모리세이가 10대 시절 쓴 펜팔을 보면 '오늘 하루종일 눈만 치우고 있다. 눈이 정말 싫다. 그리고 눈도 나를 싫어한다. 따뜻한 LA같은데서 살고싶다'라는 내용이 있다(!)[image][43] 조니 마의 1984년 6월 잡지인터뷰에 따르면 '모리세이는 섹스는 하지 않았어. 그런데 여자친구가 굉장히 많았고 남자친구도 몇 있었지(...) ''Morrissey doesn't participate in sex at the moment and hasn't done so for a while, he's had a lot of girlfriends in the past and quite a few men friends.'''라고[44] 자신은 'Humansexual'이라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그게 몇 명 안돼서 그렇지' 라고 했다.[45] 제이크 월터스라는 사진작가로 모리세이와 오래 작업했다. 원래는 복스홀(Vauxhall)출신의 복서였다. 모리세이의 앨범 <Vauxhall & I>나 노래 'Boxers'등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은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산다(...)[46] 스미스 시절에 폴란드인 여자친구를 사귄적도 있고, 중년이 되어서 불가리아인 여자친구를 사귄적도 있는걸로 보아 외국인 여자가 취향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