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 갤러거

 

[image]
<colbgcolor=#59515e><colcolor=#fff> '''본명'''
노엘 토머스 데이비드 갤러거
(Noel Thomas David Gallagher)[1]
'''출생'''
1967년 5월 29일 (56세)
영국 잉글랜드 그레이터맨체스터
맨체스터시 롱사이트
'''국적'''
[image] 영국
'''직업'''
가수, 음악가, 싱어송라이터[2]
'''소속'''
오아시스 (1994~2009)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2011~ )
'''활동 기간'''
1991년 ~ 현재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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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9515e><colcolor=#fff> '''부모님'''
어머니 페기 갤러거,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55]
'''형제'''
형 폴 갤러거, 동생 리암 갤러거
'''배우자'''
멕 매튜스 (1997~2001, 이혼)
사라 맥도널드 갤러거 (2011~ )
'''자식'''
슬하 2남 1녀
딸 아나이스 갤러거(2000년생)[56]
아들 도노반 로리 맥도날드 갤러거(2007년생)
아들 소니 패트릭 맥도날드 갤러거(2010년생)
'''신체'''
174cm,[57] 68kg, 청안
'''종교'''
무종교 (무신론)
'''레이블'''
에픽 레코드, 크리에이션 레코드

1. 개요
2. 생애
3. 음악
3.1. 기타리스트로서
3.2. 작곡
3.2.1. 표절과 오마주의 경계
3.3. 보컬
4. 한국과 노엘
5. 축구
5.1. 유명한 축구 선수들과의 인연
6. 짤방
7. 그 외
7.1. 사생활
7.2. 노엘의 실제 키는?
8. Discography
9. 콜라보레이션
9.1. 음악
9.1.1. OST
9.2. 패션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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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질문: 오아시스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노엘: '''나!'''

지금은 해체된 영국의 로큰롤 밴드 오아시스의 (사실상)리더, 메인 송라이터이자 기타리스트.
현재,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의 프런트맨이자 보컬리스트, 기타리스트
오아시스 탈퇴 후,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라는 독자적인 백밴드를 결성하고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아시스가 해체한 지금도 여전히 팬들은 그를 '''The Chief(대장)'''이라고 부른다.
후술하겠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하나이자 '''영국 대중음악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또한 영국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독설가'''이기도 하다.
또한 많은 영국 음악가들이 그랬듯 노동 계급 출신이며, 특히 그 중에서도 다른 영국 노동 계급 시민들에게 영웅 대접받는 인물이기도 하다.[3]

2. 생애



2.1. 데뷔 이전


[image]
초등학생 때의 노엘.
[image]
어린 시절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있는 노엘.
맨체스터 롱사이트에서 아일랜드 계통인 부모 페기 갤러거와 토마스 갤러거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워킹 클래스에 집은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갤러거 형제는 아버지 토마스 갤러거에 의해 자주 폭행을 당했는데[4] 이 때문에 형 폴과 함께 말더듬 증세를 겪어 4년 간 언어장애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결국 1982년 페기 갤러거는 세 아들들을 데리고 도망가게 된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이야기를 자주 언급하지 않고, 언급이 되어도 또래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침에는 항상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일어났다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악감정이 전혀 없다고 말할 정도다.[5][6]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갤러거 삼형제는 엄청난 문제아로 자라났는데, 특히 노엘은 자주 무단 결석을 했으며 경찰과의 트러블도 잦았다. 구체적인 예로는 절도 전과 등이 있다. 또한 초등학생 시절엔 신장 감염을 오래 앓았다고 하며, 그 이유로 다른 애들은 촌스러운 밤색 반바지 입고 등교할 때 자기만 혼자 검정색 긴 바지를 입고 닥터마틴을 신고 다녀서 다들 자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말더듬증과 실독증을 앓고 있었으며(난독증과 조금 다르다) 이는 오아시스 결성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노엘이 말하길 리암에게 가사를 줘서 부르게 했는데 'Don't Back In Anger, Not Today' 라고 부르길래 가사 틀렸다고 하니깐 '여기 그렇게 써 있거든?' 했다고 한다. 현재는 어느정도 치료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15살 무렵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노엘은 여러 방식으로 이 때 일화를 이야기하는데 그 때 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 한다. 선생에게 밀가루를 집어던지고 퇴학당했다고도 하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학교의 졸업식날이었다고도 이야기 한다. 잦은 무단 결석과 무단 조퇴 역시 문제였는데 어머니인 페기 갤러거는 학교의 급식실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학교 밖으로 빠져나갔더라도 점심 시간이 되면 급식을 먹으러 다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며, 계속된 결석이 어머니인 페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자 그녀는 학교 선생에게 "하지만 점심 때 맨날 봤는데요?" 라고 반문하였으나 이윽고 노엘이 자신의 비행을 이실직고 했다고 한다.
또한 90년대 잡지 인터뷰에선 노엘은 훗날 '언제 음악으로 먹고 살거란 걸 알게 됐느냐'는 질문에 '내가 졸업장도 없이 학교를 나왔을 때 엄마가 어느날 밤에 앉아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이제부터 어쩔 생각이냐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래도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거, 내가 다른 건 관심도 없지만 처음으로 몰두한 게 기타였지' 라고 답한다. 다만 노엘에 의하면 페기 갤러거는 노엘에게 '빨리 제대로 된 일을 찾아라' 라거나 '적당히 결혼해서 정착하면 좋으련만' 등의 말은 하지 않았고 그저 '그게 니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니가 실업수당 받으면서 살아도 괜찮다. 하지만 사람은 돼야지. 내가 실망 할 일은 하지 마라' 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16살, 17살이 되자 엄마가 아침만 되면 자기를 걷어차면서 빨리 취업센터에 가라고도 했다고. 수조도 만들어 봤으며 제과점, 간판장이, 세탁소, 노가다 등 안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했다고. 참고로 갤러거 형제들의 어머니는 당시 오아시스가 엄청나게 성공했음에도 그 때 그 시절 맨체스터 공영 주택에서 그대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리암이 큰 성을 사주려고 했으나 거절했다고. 또한 정원 손질을 잘해서 품평회를 나가도 된다던가 하루종일 식물이랑 대화를 한다고 한다. 동네를 돌아다니면 자식들의 유명세에 힘입어 페기 역시 대우받는다고 서술한다.
1980년대에는 언더-5즈(Under-5s), 영 거브너(Young Guvnor)와 같은 난봉에 가까운 축구 팬클럽 활동을 하기도 하고, 마약에도 빠져 살았다. '왜 학교에 가는 대신 마리화나나 피면서 들판에 널부러져 있으면 안되나' 라는 생각까지도 했다고. 학교에 있다가 몰래 빠져나온 무리들과 함께 친구들 집에 모여서 마리화나 피면서 레코드를 듣거나 슈퍼마켓, 자전거 등을 털었다고 한다. 형제끼리도 무지막지하게 싸웠는데, 특히 연년생인 폴과 노엘, 같은 방을 썼던 리암과 노엘이 많이 싸웠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형은 독방을 쓰고 자기는 동생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어지간히 싫었던 듯.
기타를 처음 치기 시작한 건 13살~14살 무렵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타를 얻게 된 경위는 본인이 그 때 그 때 다르게 이야기한다. 컨츄리DJ 노릇을 하던 자신의 아버지답게 집에 그냥 아무도 거들떠도 안보는 낡은 기타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고서 한동안 집구석에 방치되어있을 때 아무도 건들지 않고 널부러져 있던 기타를 본인이 가지고 놀면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다른 일화에선 당시 유명한 악기점에서 팔던 깁슨 허밍버드의 짝퉁 검은색 어쿠스틱 기타를 샀을 때가 처음 기타를 치기 시작한 걸로 이야기 한다. 본인 말로는 진퉁 살 돈은 없었다고 한다. 숙제도 내팽겨치고 기타 연습만 했는데, 애니멀스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과 비틀즈의 'Ticket To Ride'만 주야장천 쳤다고 하며 엄마가 매우 질려했다고도 한다. 또다른 일화에선 동네의 녹음기 등의 음악 장비를 가지고 있는 자신보다 몇살 많은 남자와 함께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의 곡을 녹음했다고도 한다. 노엘이 가장 존경했던 기타리스트는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와 스미스조니 마였다고. 스톤 로지스의 존 스콰이어 역시 매우 존경했는데 오아시스 초창기엔 그의 연주를 포함한 모든 걸 따라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보컬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보컬이었던 스티븐 오트가 탈퇴했을 때 노엘은 도전했으나 탈락했다. 노엘이 그들의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노엘이 스톤 로지스 공연을 갔다가 만난 남자와 친분이 생겼는데 그가 맨체스터 밴드인 인스파이럴 카펫츠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노엘은 그들의 공연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 오디션 기회까지 얻었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노엘에게 로디 자리를 주었고 노엘이 승낙하면서 음악 산업에 발을 들인다. 노엘이 말하길 "너 노래 좀 해볼래? 넌 우리 노래를 다 아니깐" 이래서 노래를 했으나 "망할 한 음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지만 그들이 내게 로디라도 하라고 했고 난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했지" 라고 했다. 그는 밴드 안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며 밴드와 함께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로디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일로 공연 중에 커다란 젖통 인형에 매달리게 한다던지, 고층 빌딩을 걸어 올라간다던지 하는 일을 꼽았다. 또한 이 시기에 훗날 오아시스의 엔지니어가 될 마크 코일을 만나게 된다.
이후 1991년, 로디 일을 하던 중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리암이 밴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맨체스터에 돌아왔을 때 그들을 보러갔으며 그 자리에서 밴드 매니저를 제안받는다. 아마추어인 그들과 다르게 프로 업계에서 일해본 적이 있기 때문. 하지만 노엘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고 결국 기타리스트로 들어가게 된다. 노엘이 말하길 '그들 이외에 같이 밴드하고 싶은 사람들이 없었으며 운명이었다'고 한다. 노엘 본인도 작곡을 해오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지하게 음악을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그저 혼자 있을 때 부를려고 작곡했던 것이라고 한다. 리암이 있었기 때문에 밴드에 들어갔던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들이 만든 곡들을 같이 연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노엘이 자신의 노래를 선보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밴드를 장악해 나갔다고 한다. 데뷔 초창기 시절엔 이 일화가 부풀려져 '자신이 밴드의 모든 작곡권과 지휘권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가입한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대답했으며 다만 초창기엔 본인이 그런 식으로 인터뷰를 한 건 인정한다고 발언한다. 리암에 의하면 오히려 노엘 쪽에서 제발 밴드에 넣어달라고 빌었다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노엘이 원래 일하던 로디 자리에서 해고되었기 때문에 미래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노엘에 의하면 자신의 해고 원인으로는 일단 자신이 너무 게을렀고(...), 밴드의 모든 관계자들이 노엘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인이 대장처럼 굴었다고.
오아시스에 가입한 후 1993년의 어느 날, 여러 클럽을 전전하던 그들은 시스터 러버스라는 여성 밴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클럽으로 원정 공연을 갔다가, 당초 그곳에 방문할 거라 예상되었던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를 사로잡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정식 계약으로 이어지며 음악계에 데뷔하게 된다. 노엘의 발언에 따르면, 이후 U2의 레코드사였던 마더 레코드에서 크리에이션보다 더 나은 계약 조건과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당시 앨런 맥기가 자신들을 얼마나 믿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푼돈에 그냥 크리에이션과 그대로 계약했다고 한다.

2.2.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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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re And Then DVD로 널리 알려진 1996년 4월 28일의 메인 로드 공연에서)[7]
오아시스 문서 참조. 같은 오아시스의 멤버이자 동생인 리암과의 충돌 끝에 결국 2009년 8월 28일, 노엘은 밴드의 공식 웹사이트에 오아시스를 탈퇴한다는 글을 올린다.

'''약간의 슬픔과 굉장한 안도감과 함께 여러분께 내가 오늘 밤 오아시스를 그만둔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쓰고싶은대로 써갈기겠지만, 난 간단하게 '더 이상 리암과 함께 일하지 못하겠다'라고 하고 싶습니다. 파리, 콘스탄츠와 밀란에 있을 예정이었던 공연의 표를 구입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표합니다.'''

오아시스 해체 이후 노엘은 겜과는 자선 공연도 함께 하고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그를 제외한 오아시스 멤버들과는 별다른 교우 관계가 없는 듯 했다. 그렇지만 비디아이의 해체 이후에는 페스티벌 장에서 전 멤버들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리암과도 크리스마스에 문자를 주고 받는 등 시간이 잘 해결해주고 있다.

2.3.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문서 참고

3. 음악



3.1. 기타리스트로서


노엘 갤러거 "난 나 자신을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난 앉아서 여러가지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진 않아. 난 오로지 노래에 대해서만 생각을 하지. 물론 나도 나만의 기타 스타일이 있는데, 정확하게 리듬을 치고 정확히 음을 조절하는 그런 거야. 난 내가 좋아하는 걸 연주하고,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 하지만 난 기타 테크닉이나 여러가지에 대해서 연연하진 않아. 난 작곡가라구."

기자 "하지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 보지 않는다고 말해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기타 히어로'''다."

- 2011년 MusicRadar와의 인터뷰 중

오아시스가 90년대에 난립한 그 무수히 많은 기타 밴드들 중 가장 성공한 극소수의 거대 락밴드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엘 갤러거는 단 한번도 '''뛰어난 기타리스트'''로서의 영예는 누려본 적이 없다. 응당 그러한 평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있을 정도로 오아시스는 연주적인 측면에선 별다른 화두에 오르지 못했다. 연주 기술에 있어서 날고 기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음악계에서 오아시스의 음악은 기교 중심의 음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튠은 오로지 노래에 초점이 맞춰진 것들이었고, 악기 중심의 곡들이 대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엘은 Take It Away 재단과의 홍보 인터뷰에서도 '''"우리 음악에 대체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코드들은 들어가 있지 않아. 항상 쉬운 오픈 코드들 위주였지. 그게 우리 음악이 사람들에게 공감 받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였던 것 같아."'''라는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솔직함과 허세 부리지 않는 무덤덤함이 오히려 오아시스와 노엘의 연주를 만만하게 보게 만들었던 여지가 있었으나, 스튜디오와 작업실 등지에서 노엘의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본 여러 뮤지션들과 관계자들에 의하면 노엘은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저평가 당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비틀즈링고 스타의 아들이자, 전설적인 밴드인 더 후의 객원 드러머였고 오아시스의 6집과 7집에서 투어와 녹음 현장을 함께 했던 드러머인 잭 스타키오아시스를 떠나면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오아시스에서 연주하는 건 더 후에서 연주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어렵다. 더 후에서는 쳐야할 드럼 솔로가 더 많다는 점과는 상관이 없다. '이봐, 오아시스 공연 정도는 난 한 손을 등 뒤로 묶고도 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병신같은 드러머들도 있지. 뭐,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x나 구릴 거라고 친구! '''내 드러밍이 조금이라도 느리거나 빠르면 밴드의 모든 멤버가 그걸 알아차렸어.''' 그들은 내가 만나본 가장 똑똑한 뮤지션들이야.". 스타키가 원래 연주하던 밴드가 바로 그 전설적인 더 후였음을 감안한다면, 떠나가는 전 동료들을 위한 따뜻한 말이었다고 해도 오아시스를 충분히 높게 평가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폴 웰러는 그의 커리어 내내 수십년 동안 노엘이 과소평가 당하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서로가 돈독한 사이임을 감안하더라도, 웰러의 노엘에 대한 시각 자체는 충분히 핵심을 찌르는 의견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표현해왔다.

"난 걔가 작업실에서 해온 걸 항상 봐왔다. 뮤지션적으로 훌륭한 베이시스트고, 훌륭한 드러머다. 모든 걸 다 잘 한단 말이다. 걔는 과소평가 받고 있다. 사람들은 걔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작곡 능력이 뛰어나다. 멜로디가 정말 천재적이다. 요즘도 계속 그의 노래 중 하나가 머리 속에 맴돈다··· 멜로디만 잘 만든다면 그걸 어떤 코드로 칠 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엘 본인은 자신이 기타를 잘 친다는 자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엘은 이미 데뷔 초부터 자신의 기타 연주에 대한 항의와 비난을 많이 받아왔는데, 데뷔 앨범의 미국 투어에선 한 관객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관객 "헤이. 난 당신 기타 치는 게 좋아. 맘에 들어."

노엘 "그게 무슨 소리지?"

관객 "항상 모든 곡의 리프가 다 똑같잖아. 뭔가 내면의 잠재의식 같은 걸 표현하는 거 아니야?"

노엘 "그렇지 않아! 자세히 들어보면 분명히 조금씩 뭔가 다른..."

관객 "아닌 거 같은데(...)

노엘 "(윽, 개새x. 들켜버렸군)"

90년대에 오아시스가 데뷔했을 당시, 오아시스의 성공 가도를 옆에서 지켜 보던 몇몇 밴드들로부터 ''''노엘 갤러거는 초보기타연주법 책부터 사서 기타 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면서 노엘의 기타 연주를 까내리곤 했지만 노엘은 개의치 않아 했다. 노엘은 언제나 본인 스스로를 '''작곡가'''라고 지칭하였으며, '''기타히어로'''가 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했기 때문이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을 폴 매카트니피터 그린 정도의 기타리스트로 여겼으며, 자신이 만든 곡과 리프임에도 작업실과 라이브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기타리스트에게 그것을 맡기는 데 거부감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난 그렇게 못치니까!"'''라고 대답한다. Champagne Supernova에 나오는 후렴 기타 솔로는 노엘이 아닌 폴 웰러가 연주한 것인데, 웰러가 자신의 기타 솔로 음량을 왜 줄였냐는 언질에 노엘은 '''"어휴. 형님. 그거 내가 줄인 거 아니에요. 제가 왜 그런 짓을 해요. 형이 나보다 백만배는 더 잘 치는데!"'''라고 대답했다.
또한 노엘이 존경하는 조니 마 또한 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앨범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기타 솔로를 연주해주고 있으며, 심지어 노엘의 크루 중 훌륭한 기타 테크니션 스태프가 있는지 그에게도 앨범의 기타 솔로를 연주하게끔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노엘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에고가 그렇게 강하지 않으며 그림을 항상 크게 보고, 자신이 연주하는 것보다 남이 연주하는 것이 더 뛰어난 상황이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노래의 완성도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개의치 않아 하는 것이다. 심지어 Be Here Now 당시 프로 뮤지션이 아닌 배우 조니 뎁이 슬라이드 기타를 연주하게끔 하였다.
노엘은 언제나 자신들의 영웅들과 그 사고방식의 궤를 같이 하였는데 폴 매카트니, 존 레논,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 더 스미스조니 마, U2디 에지, 티렉스 등에서 그가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십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모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타 솔로 탑 10 리스트''' 같은 부류에 나올 법한 날고 기는 '''기타맨'''들이 아니라, 언제나 '''작곡'''과 '''노래'''를 만들어 내는 송라이터적인 관점의 뮤지션들을 선호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기타연주의 이론책이나 정론책을 독파하고 사전에 실릴 수 있는 모범적인 연주를 하는 연주가들이 아닌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한 자신만의 연주법과 접근법을 가진''' 연주에 있어서 개성적인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존 레논은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당신이 어떤 종류의 기타리스트를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난 괜찮은 기타리스트다. 난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기타를 울부짖고 살아 움직이도록 할 수 있다. 테크닉은 정말 별로다. 현란하게 연주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난 기타가 말을 하게 할 수 있다." 라고 언급한다.
섹스 피스톨즈의 스티브 존스 역시, 단순한 쓰리 코드 펑크 연주를 하기 때문에 뛰어난 연주자 리스트 안에서 존재감이 없지만, 그는 언제나 앨범 단 한 장으로 전설의 반열에 오른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였으며, 그의 스트로크는 언제나 칼박자였다고 한다. 리듬 기타리스트들이 상대적으로 솔로와 장식 악절을 연주하는 리드 기타리스트들보다 저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스티브 존스의 업적은 의미있는 것이며, 노엘 갤러거 역시 스티브 존스의 그러함을 찬송하는 것이다. 리듬 기타리스트가 갖춰야 할 덕목인 '정확한 박자의 스트러밍과 에너지로 밴드의 곡을 나아가게 하는 재능'은 음악의 세계에서 언제나 상대적인 저평가를 받아 왔기 때문이다. 특유의 Funky한 리듬 기타로 추앙받는 Chic나일 로저스나 일본 굴지의 전설이자 컷팅 연주의 달인인 야마시타 타츠로 또한 엄밀히 말해 리듬 기타리스트의 범주에 들어감에도 말이다. 또한 조니 마디 에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기타 연주라는 측면에서의 접근론이 매우 개성 있는 인물들 중 하나이며, 티렉스마크 볼란이 연주하는 그 특유의 ''''광선총 사운드''''는 그 누가 어떤 장비를 써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노엘 갤러거는 언제나 자신이 개성 있는 기타리스트라고 생각해 왔으며, 자기 자신을 기타리스트로서 그렇게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크게 개의치도 않아 했으며, 그저 자신만의 방법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음악가로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잡지인 MusicRader는 그의 연주를 ''''노엘 갤러거의 연주에는 아주 아름답고 간단해보이는 매력이 있다. 믿을 수 없이 캐쥬얼하며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그가 작곡한 Wonderwall이 얼마나 많은 초보 기타리스트들에게서 연주 되고 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엘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전 세계 투어를 돌면서 어느 나라의 길가나 바를 가더라도 자신이 쓴 음악을 어린 아이들이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그는 AC/DC레드 제플린 등으로 이미지 새겨진 대표적인 록의 퍼포먼스들, 혹은 메탈이나 재즈 기타 장르에서 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적인 연주력과 현학적인 이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기타 연주와 개성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기타리스트 일 것이다.

3.2. 작곡


'''"노엘 갤러거는 그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이다."'''

- 조지 마틴 경(卿)

오아시스의 거의 모든 히트곡은 '''그가 작곡했다'''. 그의 창작력이 절정을 치달았던 90년대 당시엔 정규 앨범뿐만이 아니라 싱글의 B-side 곡들까지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노엘은 "우리 B-side 곡들은 웬만한 밴드들의 싱글보다 훌륭하다. 그들의 가장 훌륭한 곡들을 전부 다 합해도 우리 B-side 수준도 안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다. 밴드의 프로듀서였던 오웬 모리스는 그 당시 대중들은 오아시스의 B-side곡들을 듣기 위해서 싱글을 구매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애초에 미국 시장을 겨냥해 발매될 예정이었던 B-Side 모음집인 The Masterplan이 전세계에 발매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크리에이션 레코드 사장 앨런 맥기는 "이 노래를 들어봐. 이게 B-side라고. 노엘 갤러거는 천재임에 틀림없어."라며 감동했다고. 2000년대 이후론 노엘이 더 이상 많은 노래를 쓰지 못함과 동시에, 시장의 추세에 맞추어 싱글의 B-side 곡 수를 줄이게 되면서 브릿팝 시절처럼 자투리 곡에 크게 힘을 쏟지는 않았다. 또한 그의 지독한 자가 복제 성향은 2000년대 들어서 많은 질타를 받았으며 오아시스를 트렌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 성향 때문에 오아시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다시금 스타디움 밴드로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다시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 많은 부침과 방황을 겪기도 한다.

Q) 지난 내한 공연에서 'Don't Look Back In Anger'를 따라 부르는 관객들을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한참동안 바라보더라.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노래는 더 이상 오아시스의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세상의 것이 된 노래'''라고. '노엘 갤러거'라는 이름과 당신의 수많은 노래들, 무엇이 더 오래 남을까?

A) Don't Look Back In Anger라는 노래를 쓴 그날 밤의 그 순간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 25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반대로 나는 생에서 그 순간을 단 한 번 겪었고, 그 이후로 계속 나이 들고 있다. 음악은 영원하다. Live Forever 역시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닌 ''''영원히 기억되는 것'에 대해 쓴 노래다. 그게 바로 음악이다.'''

-2015년 9월호, 아레나옴므플러스와의 내한 인터뷰에서#

그의 말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노동자로 살던 시절엔 항상 돈이 없었지만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고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너바나의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 같은 부정적인 노래를 쓰기보다는 긍정적인 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8] 그래서 나오게 된 곡이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인 Live Forever였다.
'Supersonic', 'Shakermaker', 'Live Forever'를 연이어 발매하며 주가를 높인 그들은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쐐기를 밖으며 단숨에 당대 최고의 밴드로 올라선다. 이무렵, 비틀즈의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리암 갤러거는 난봉꾼이며, 오아시스는 30년만 지나면 잊힐 허접한 밴드라고 독설을 퍼부었지만, 노엘 갤러거는 재능 있고 훌륭한 실력을 가진 친구라고 칭찬했다. 이후 발매된 세번째 앨범 Be Here Now는 여전히 큰 세일즈와는 달리 초기의 열광과는 별개로 낮은 평가를 받으며 상승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후 그는 밴드에 찾아온 여러 대격변, 시대의 변화, 한 번의 이혼 그리고 마약 후유증 등의 영향으로 작곡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밴드는 점점 정상에서 내려오는 듯 했다. 노엘은 마약을 끊었고, 브릿팝의 광풍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2000년대에 들어서자 그와 밴드는 전체적으로 차분해지고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밴드 멤버가 변경되고 실력이 향상되면서 한층 어른스러워짐에 따라, 노엘은 다양한 방식의 작곡 성향을 드러냈고 음악적 변화에도 꾸준히 싱글 차트 1위와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하며 그 성과를 인정 받았다.

"지금이라도 Little By Little이나, Champagne Supernova 같은 곡들은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앞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쓸 수 있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난 이제 그런 싱얼롱 조의 곡들은 질렸다고. Lyla나 Don't look back in anger 같은 곡을 도대체 몇백곡이나 써줘야 직성이 풀리나?''' 나도 이쯤에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어. 이번에 그런 전환점에 서 있던 나를 앞으로 나아 갈 수 있게 해준 것이 데이브[9]

야. 내가 새로운 타입의 곡을 써서 들려줄 때마다 '이거 좋군!, 좀 더 이런 자신의 숨겨진 면을 보여 달라고.'라고 해서 나도 이후론 지금까지의 오아시스의 스타일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어. 좀 더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고 싶었고 만약 우리가 어떤 타입의 곡을 낸다고 해도 위화감 없이 "오아시스의 클래식이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앞으로의 이상이기도 해." (2008년 11월 rockin'on : oasis)

기타, 베이스, 드럼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룰 수 있다. 인스파이럴 카페츠의 로디 시절엔 스탭 명단에 드럼 테크니션으로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7집 Dig Out Your Soul에서는 본인이 드럼을 친 곡도 꽤 있고(Bag It Up, Waiting For The Rapture, Soldier On) 농담조로 "내가 체력만 되면 이생키들 다 내쫓고 나 혼자 밴드할텐데."라고 말했는데
그외 X-Files: Fight The Future의 OST(Teotihuacan)[10]와 영화 Goal!의 OST(Who Put The Weight Of The World On My Shoulders) 등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2011년에 작곡의 기술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가사 쓰는 일이 자신에게 악몽이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할 게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인터뷰어가 '하지만 당신은 엄청난 이야기꾼이잖아요!'라고 하자 그렇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곡을 썼더라면 지금 당신은 나를 인터뷰하고 있지도 않을 거라며 플라시보의 브라이언 몰코 같은 꼴이 났을 거라고 말했다. 당신 앨범에 참여한 음악가들 상당수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냐는 말에 '쟈니 로튼은 결코 쟈니 로튼에 대해 노래하지 않았어. 그들은 우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 더 스페셜즈도, 더 잼도 우리들에 대해 노래했어'라고 대꾸하며, 이어지는 비판에서 안 좋은 예시로 로비 윌리엄스를 들었다. 모든 게 얼마나 자신이 개 같은지에 대한 곡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필을 하겠냐고(...)랩 음악도 모든 게 래퍼 자신의 고투, 어떻게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출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라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노엘의 음악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하는 대목.
솔로 2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새로 몇 곡을 썻는데 amazing하다고 한다. 3집을 준비할 때 쯤 그 데모들을 가지고 david holmes에게 가져갔으나 ‘스튜디오에서 처음부터 같이 작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고 노엘이 받아들임으로써 3집의 보너스 트랙 dead in the water를 빼놓고는 모두 공개되지 않았다. 작업당시 작업해둔 리프를 즉석에서 떠올린 척 연주할 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차렸다고.
솔로 3집 발매 이후 인터뷰에서 현재 15살 이후로 처음으로 집에 기타가 없으며 베이스로만 작곡을 한다고 한다. The police 느낌이 나며, 늘 그렇듯 amazing하다고.
공개하지 않은 곡이 아주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로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정규앨범 3개 분량의 뛰어난 곡이 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말은 데뷔 초창기 태고적부터 단골로 내뱉는 말이었다.
종합하자면, 노엘 갤러거는 오아시스가 성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추적인 인물이었며, 자신의 형제인 리암 갤러거와 함께 그 자체로 90년대 영국 문화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자신의 세대를 대변하는 작곡가였으며, 그 자신조차도 자신들보다 뛰어난 밴드는 영국에 얼마든지 있다고 인정할 정도로 솔직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자신들이 이 업계 챔피언이라고 주장하는 대범함과 확신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이는 노엘이 자주 무하마드 알리와 비교되기도 한 이유였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노엘을 예술가와 아티스트라는 칭호 속에 넣기 보다 장인에 가까운 범주에서 그를 이해했으며, 그의 밴드인 오아시스역시 음악적인 영향력보단 문화적인 영향력이 더 강한 밴드로 남아 있다.
이는 그의 기본적인 작곡 성향이 일명 '싸가지 있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인했기 때문인데, 이것이 당시 영국 음악계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물렸던 것이 승승장구의 이유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영국밴드들은 너무 내성적인 것 같아. 씨발 음악은 TV 같아야지. 틀면 재미있게 해줘야 된다구. 우리가 바로 그런 밴드지. (생략) 우린 스웨이드나 스미스처럼 심오한 가사를 쓰고 싶은 열망은 없어.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고, 그들이 뭘 할지, 뭘 입을지, 누구에게 투표해야 하는지 명령하길 원해. (생략)' '사람이 너무 열심히 하려고 애쓰면 이루지 못하는 법이지. 요즘 대부분의 팝스타들은 노력은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애를 쓴다는 거야. 너무 열심히 노력하는 것처럼 들려. 그에 비해 우리가 하는 건 완전히 자연스럽지.' 등의 발언을 하면서 블러 펄프 스웨이드 등 무언가 일장연설과 자기 과시에 가까운 스웨그를 남발하던 자신 세대와는 다르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시각으로, 다시 말해서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영감을 얻을 줄 아는 현명함으로 그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었다.
또한 그가 데뷔할 무렵 이미 그의 나이는 만 27세였으며, 요절한 천재들이 죽어간 나이가 돼서야 뒤늦게 데뷔했던 것이다.[11] 그만큼 그는 확실한 성공에 굶주려 있었으며 자신의 작곡 방식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데뷔 앨범이 20년뒤에도 여전히 팔리고 있을 것이며,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행과 사고 때문이 아닌 음악 그 자체만으로 이 앨범을 사고 들을 것이라는 지혜롭고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제 데뷔한 밴드치고 너무나 '조숙한' 음악을 했던 것이다. 데뷔 앨범에서부터 이미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각자 좋아하는 밴드들의 모든 장점을 모아놓은 듯한 밴드'라고 오아시스를 소개했으며, 신인의 패기를 넘어서서 이미 큰 성공이라도 해본 듯한 사람의 관록이 보일 정도였다. 성공을 가져본 적이 없던 아마추어들의 태도라기엔 너무나 성숙했다. 결국 이미 데뷔하기도 전부터 작곡과 음악 산업에 도가 튼 듯한 애늙은이 같은 면이 오아시스를 빠르게 정상의 자리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빠르게 '생기'를 잃게 되는 원인이 된다. 또한 그 '생기'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노래를 대중과 관중에게 전달하는 리암 갤러거의 보컬 퍼포먼스와 컨디션에 의지하는 바 또한 컸던 것도 오아시스의 아킬레스 건이었던 것이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과 주어진 틀을 깨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능적으로 진보하려는 성향이 있지만, 노엘 갤러거는 자신의 인터뷰에서처럼 언제나 '안전지대'에 머물며 훌륭한 로큰롤 팝송을 지향하고 그것이 몇백만장씩 팔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양식을 고수했다는 데서 장인에 가까운 평가를 받아 왔다. 이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표현 영역을 넓히려는 시도는 오아시스가 해체한 이후에 일어났으나 이것은 당시까진 아주 먼 이야기였다.
결국 오아시스는 음악적으로 진보하고 기대감을 갖게 하며 트렌드의 선두에서 약진하는 밴드가 아닌, 자신들의 선배인 롤링 스톤즈, U2등과 같은 스타디움 밴드로서 성장하게 된다. 노엘에 의하면 '본인들은 그다지 스타디움 음악을 하는 밴드는 아니긴 하지만' 이라고 언급한다. 오아시스는 결국 프렌차이즈화 되었으며 앨범의 발매를 통한 음악적 '성과'보다는 공연과 투어 등의 음악적 '활동'에 더 무게를 싣는 밴드로서 마무리 되었다. 노엘이 끝끝내 추구해왔던 하나의 음악적 이상향은 언제나 쉽고 재밌게 누구나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를 가진 로큰롤 팝송이었으며, 그것만 충족이 된다면 아무것도 크게 개의치 않아했다. 물론 예민한 그답게 자신들의 앨범에 악평을 쓰는 평론가들의 이름과 내용까지 기억해뒀다가 언급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있는 등 피드백이 아주 없진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그는 오아시스라는 밴드를 일종의 '왕국화' 혹은 '프렌차이즈화'했으며,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며 대중들에게 특정한 분야의 장인으로서 인식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결국 오아시스는 그 찬란한 시작과 너저분한 마무리 내내 훌륭한 후렴구를 가진 앤섬을 무더기로 쏟아내서 공연한번 가본 적 없는 사람도 공연장으로 불러내고 이윽고는 불특정다수가 그것을 따라부르게끔 만드는 우직한 밴드 였다고 할 수 있다. 오아시스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큰 성공과 인지도를 얻었던 밴드였으며, 자신들의 부족한 음악적 성과와 영향력을 넘어서는 그 특유의 압도적인 문화적 지배력과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오아시스 이후 노엘은 더이상 철저히 대중의 즐거움을 겨냥하고자 하는 집착과 자신이 키워온 왕조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좀 더 자신의 내면에 파고드는데 집중하면서 자신의 틀을 깨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본인 특유의 경직된 틀과 사보타주하는 경향을 조금씩 누그러뜨리고 있다.

3.2.1. 표절과 오마주의 경계


노엘은 무수히 많은 곡을 써내면서 표절 시비에도 자주 휘말렸는데, 이는 '''영국 락음악 씬에서 선배 음악인에 대한 존경의 의미에서 오마주'''로 여겨지는 것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오아시스와 노엘의 솔로 프로젝트의 표절 의혹 곡들 모음. 오마주나 트리뷰트의 곡들, 표절로 판명된 곡, 단순히 표절 의혹만 제기된 곡, 원곡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곡들이 모두 섞여 있다.
대표적인 표절곡들로는, 당시 코카콜라 광고 삽입곡이었던 'I'd Like to Teach the World to Sing'을 표절한 Shakermaker[12]스티비 원더, 헨리 코스비, 실비아 모이의 'Uptight'를 표절한 'Step Out', 닐 이네스의 'How sweet to be an idiot'을 표절한 'Whatever', 조지 해리슨의 'My Sweet Lord'에서 기타 리프를 훔쳐온 'Supersonic', [13]역시 조지 해리슨의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와 링고 스타를 대표하는 노래 'With A Little Help From My Friend에서 따온 She's Electric[14], 티렉스의 'Get It On'의 리프를 가져와 만든 'Cigarettes and Alcohol', Wham!의 'Freedom'에 영향을 받은 'Fade Away'등 이 밖에도 많은 곡들이 있다. 또한 노엘의 솔로 앨범들에서 역시 여러 노래들과의 유사성이 드러나기도.
노엘은 오마주에 대해서 매우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표절 시비가 제기될 때마다 "응 맞아. 이 노래는 여기서 가져왔고, 이 노래는 저기서 가져왔어"라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Cigarettes and Alcohol이 표절 시비에 걸렸을 때 "그래도 우리 때문에 사람들이 티렉스를 알게 됐잖아?" 라고 말했는데 대선배인 로드 스튜어트는 데뷔 1년차 신인 록밴드의 싱글 Cigarettes and Alcohol을 극찬하며 커버 버전을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표절곡이었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노엘은 '누군가 우리 곡을 베껴도 아무 상관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몸소 실천했다. 트래비스가 2집 The Man Who의 히트곡 Writing To Reach You 발매 당시 리더 프랜 힐리는 '라디오에서 Wonderwall을 듣다가 그 코드를 훔치고 가사를 빌려왔다'고 밝혔는데 아무도 표절이라고 안 했고, 원래 트래비스의 광팬이었던[15] 노엘은 트래비스 무대에 함께 올라 All I Wanna Do is Rock을 함께 공연했다. 이렇듯 영국 록 음악 씬에서 오마주는 선후배 간의 긍정적인 교류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노엘의 작곡 기법에 대한 매우 절묘한 평가로 배철수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멜로디에 강한 스파이크로 되받아치는 듯한'''을 꼽을 수 있겠다.

3.3. 보컬


데뷔 때부터 꾸준히 '노엘 표 발라드'라고 할 수 있는 어쿠스틱 발라드 곡들을 써왔으며, 목소리도 하드한 록 음악보다는 포크 계열의 발라드 곡에 더 어울리는 편이다. 리암이 날카롭고 락킹한 목소리라면 노엘은 서정적인 음색이면서도 다소 건조한 톤이며[16], 음역대도 동생에 비해 폭이 넓은 편. Acquiesce가 두 사람의 듀엣 곡이 된 이유가 후렴 코러스 파트 녹음 당시 리암의 고음이 안 나와서 노엘이 대신 불러서일 정도이니(알려진 바로는 녹음을 앞두고 리암의 목이 맛이가서 노엘이 고음부분을 한 것). 열성팬들이 B-side를 듣기 위해 oasis 싱글을 구매하는 이유 중 하나가 노엘이 보컬을 담당한 곡은 상당수 싱글 B-side로 발매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형제가 굉장히 대조적인 목소리를 지녔던 게 오아시스의 인기 요인이기도 했다. 1집 수록곡으로 오아시스 최고의 노래로 손꼽히며 대선배 폴 매카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인 Slide Away의 경우 원곡은 리암이 불렀고 콘서트에선 노엘의 어쿠스틱 공연이 인기를 모았는데, 리암의 Slide Away는 '자, 떠나자'며 확고한 느낌이 든다면 노엘의 Slide Away는 '나와 같이 떠나지 않겠니?'와 같은 애달픈 느낌이 든다고 한다. 리암의 창법이 직설화법이라면, 노엘의 창법은 반어법 적인 느낌을 준다는 평가. 노엘이 부른 gas panic도 리암보다 더 쓸쓸하고 담담한 느낌이다.
90년대에 한창 유행하였던 MTV Unplugged에서 리암을 대신하여 보컬까지 소화해냈고 (리암이 어쿠스틱 공연을 싫어해서 공연 직전에 노엘이 부르기로 결정되었다.), 특히 최고의 전성기였던 96년도 공연 등에선 리암의 컨디션 난조와 공연 불참가 등등으로 보컬리스트 부재 중일 때엔 전부 노엘이 불렀기 때문에 오히려 oasis 팬들은 이러한 노엘이 보컬을 담당한 부틀렉까지 찾아서 구매할 정도로 노엘은 열성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결국 2000년대 중후반에 들어 리암의 목소리가 아예 가버리면서 몇몇 팬들중에서는 “리암이 음색에서는 노엘을 앞지를수 있지만, 노엘은 리암보다 노래를 잘 부른다.” 라는 주장을 펼친 케이스들도 존재한다.
솔로 데뷔 이전 노엘의 온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앨범은 로열 앨버트 홀에서의 자선 공연 실황을 녹음하여 itunes를 통해 5일 동안 무료 배포된 'The Dreams We Have as Children – Live at the Royal Albert Hall'이다. 절친한 동지인 폴 웰러가 함께 무대에 올랐을 뿐 아니라 oasis의 히트곡과 B-Side곡, 앨범 수록곡, 리메이크곡을 총망라하였고, 당연히 부틀렉과는 격이 다른 사운드와 녹음 수준을 보여주어서 [17] 아름다운 관현악 세션과 함께 하는 노엘의 어쿠스틱 공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4. 한국과 노엘


'''지난 번에 서울에 왔을 때가 내 생일이었지? 그런데 서울에 올 때마다 매일이 내 생일 같아.'''

'''(So last time I was in Seoul, it was my birthday, right? but it would seem that everyday is my birthday every time I come to Seoul.)'''

2015년 4월 3일 서울 공연에서

'''노엘 갤러거, 한국에서 가장 친근한 48세'''. 2015년 5월 21일 오전에 기사가 게재되고 며칠 동안 네이버 메인 뮤직란에 걸려 있었다.
90년대 브릿팝 열풍에 힘입어 제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선두주자가 Oasis였기에, 당시 PC통신 락음악 동호회에서 노엘은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는 당시 일본 음악 잡지의 인기 투표에서 노엘이 동생 리암을 압도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아시아에서의 인기는 노엘이 리암보다 많았으나, 같은 시기 영국 음악 잡지를 보면 표지 모델로 등장해도 리암이 센터이고 노엘이 살짝 밀렸다. 오아시스 초기에는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를 제외하면 대중들에게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건 리암이었다.
그러나 오아시스 후기로 갈수록 탄탄한 작곡 실력만큼이나 보컬 면에서도 노엘이 인정받으면서 리암이 뒤로 밀리는 경향을 보였고, 영국의 주간 남성 잡지인 Zoo Magazine 독자들이 선정한 ''''2007년 영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100 Coolest British Men of 2007)' 1위에 노엘 갤러거가 선정'''되었다.# 이때 2위가 스티븐 제라드, 3위가 닥터 후의 데이비드 테넌트, 4위가 007 주인공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였고 리암은 22위였다. 이듬해에도 노엘은 3위에 랭크. 여기에 2010년 이후로는 노엘의 성공적인 솔로 활동과는 반대로 1집과 2집의 연이은 저조한 판매량에 비디아이가 해체하면서 지금은 완전히 역전된 상태. 노엘 갤러거의 인기는 기존부터 워낙 높았기에 그 인기가 급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거친 언행의 인터뷰와 별개로, 팬들에게 친절하고 사인도 잘 해주는 등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는 걸로 유명하다. 오아시스 첫 내한 당시 Mnet 인터뷰에서 노엘이 먼저 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으로 잡고 인터뷰에 응해서 기자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사연이 있다. 녹음기에 시계로 인한 잡음이 들어갈까봐 기자를 배려해준 것. 비단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엘의 인터뷰 준비는 언제나 훌륭하며, 언제나 인터뷰할 때는 핸드폰을 꺼놓고 상대방이 편하게 인터뷰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고 한다.
솔로로 내한왔을 때도 혼자서 코엑스로 쇼핑을 나갔던 노엘답게,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소에서 가까운 압구정으로 나갔다가 마침 SM엔터테인먼트의 사옥 앞을 지나게 됐는데, 그 앞에 모여있던 동방신기의 소녀팬들 중 몇 명이 노엘을 알아보고 따라갔다. 차마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하고, 거리를 유지한 채 열심히 따라오는 한국 소녀들을 보다못한 노엘이 너희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가 자신의 팬임을 알고 선선히 사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아이돌 가수의 플카를 들고 서있던 소녀팬들인 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알아볼 줄은 노엘이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몇번의 한국의 투어 방문 후 노엘의 한국 팬들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2015년 최근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색소폰 연주자일거야! 한국에 가봤나? 말그대로 아시아의 아일랜드야. 거기서 공연하면 더블린 공연같아. 한국 팬들은 미쳤어. 아주 정신이 나갔다고. 진짜로." [18][19]라고 한국에 대해 언급했다. 다른 국가에 비해 10대 팬층(교복을 입고 공연장에 온 관객들도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이 두터운 것도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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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3일, 노엘이 내한 직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사진)
2012년 5월 28일 솔로 데뷔 이후 첫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장소는 전 해에 비디아이가 공연을 했던 AX-KOREA. 그리고 티켓팅 시작 2분만에 매진. 희망은 취소표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고침 전쟁이 벌어졌었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반응 덕에 5월 29일의 추가공연 결정. 프로필에서 보다시피 그날은 노엘의 생일이다! 솔로 앨범 발매 후 첫 생일날의 공연이 한국이라니 팬들로서도 굉장히 의미가 각별한 날이 되었고, 노엘 또한 자신의 생일에 콘서트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생일날 콘서트 도중 팬들이 떼창으로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고, 무대 위에서 노엘에게 케이크도 전달이 되었다. 투어일기에서도 "생일 선물 모두 고마워. 특히 케이크 선물에 감사해. 케이크는 분장실에서 끝장났어. 완전 예술작품이던데!! 마지막 곡 무대에서도 누가 생일 케이크를 무대로 전해줬지!!"라고 적은 걸 보면 정성스레 생일을 챙겨준 한국 팬들에 대한 노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엘의 입국에 맞춰 공항에 몰려 있던 팬들에 의해 일본에서 산 자켓에 테러를 당했는데, "한국 최정예 요원들을 투입하여 범인을 찾아 달라." 분통을 터뜨리며 범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인터뷰가 워낙 재미있어서 팬이 아닌 사람들도 즐겨 찾는 영상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노엘의 한국 인지도가 음악 팬들을 넘어 한층 더 급증하게 된 훈훈한 사건'''.
2012년 5월 25일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 후지 록 페스티벌에도 참여한다고 언급했다. 이후 후지 록 페스티벌 둘째날 헤드라이너로 공연하였다.
2015년 4월 3일/4일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장소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시어터, 오프닝 밴드는 바이바이배드맨이 맡았다. 공연 앵콜을 부르기 전 앵콜브레이크 때 팬들이 Live Forever를 불러달라고 떼창을 하며 불러달라고 성원했지만 세트리스트에 충실했는데, 후일 인터뷰에서 노엘은 이날 한국 팬들의 Live Forever 떼창을 찬양했다. 공연 당일 노엘은 기자회견에서 "건강이 많이 안 좋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질문에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다'''고 답해서 걱정을 많이 샀는데, 3년 전의 내한 공연보다 10분 더 길게 공연했고, 관중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아빠 미소 를 지으며 팬들을 바라보는 노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한 기념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주체는 피키캐스트에 인터뷰어는 '''에릭남'''. 센스 넘치는 에릭남의 노엘의 특징을 활용한 알찬 인터뷰와 처음엔 점잔 빼다가 뒤로 갈수록 노엘의 거침없는 독설과 재치 넘치는 자막이 압권. 3년 전 자켓에 매직을 그은 범인을 여전히 용서하지 않는 중이다. 다만 Gigs를 Goods로 잘못듣고 번역하는 등 오역이 눈에 띄었다.
2015년 7월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주최측에서 발표하기 전에 인천공항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 7월에 한국에 올 거냐는 질문에 노엘이 "Yeah!"라고 대답해주면서 오피셜을 능가하는 본인피셜, 노피셜 발표가 되었다. 1년에 두 번 한국에 공연하러 온다는 사실에 팬들은 물론 국내 언론도 흥분하였고, 실제 페스티벌에서도 모든 관중을 독점하며 헤드라이너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18곡의 세트리스트는 단독 내한 공연과 버금갔고, 특히 Champagne Supernova 플래시 이벤트는 노엘이 음향을 조율하느라 1분 가까이 관객석을 등지고 있었는데, 돌아보면서 마주하게 된 수많은 '초신성'들의 향연에 정말 환한 미소를 지으며, Amazing이라는 표현으로 화답했다. 이 영상은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끌었다.
2018년 5월 3일, '''드디어 노엘 갤러거의 단독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날짜는 8월16일로, 주최는 라이브네이션이다. 당연히 국내 오아시스 팬덤은 열광하는중. 일본 서머소닉 페스티벌 전에 한번 들리는것으로 보인다.
결국 2018년 8월 15일 광복절, 다음날 있을 단독 내한을 위하여 인천공항을 통해 9시 30분경 입국했다.
내한을 주재하는 라이브 네이션 코리아측에서 사인 요청을 하지 말아달라고 사전 공지를 했지만, 노엘 갤러거는 한국 팬들을 위해서 직접 유성펜을 지참하고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팬들에게 일일이 싸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르는 줄 없이 대부분 말이다!
다만 라네코 측에서 질서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사정했지만, 줄의 길이가 짧고 뚜겁게 분포되어 있는 열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질서의 붕괴가 일어나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정면의 열은 줄이 길고 얇게 분포되어 노엘이 대부분 다 싸인을 해주었다.
이로 인해 노엘 갤러거의 내한공연 3년주기설이 나오는 중. 오아시스로 내한한 2006, 2009, 솔로로 내한한 2012, 2015, 2018. 하지만 3년주기를 깨버리고 2019년 5월 19일 1년도 안 되어 한국 내한을 확정지었다!
2019년 5월 18일 오후 2시경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 19, 20일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공연에서 노엘은 그동안 해준 적이 손에 꼽는 Live Forever를 관객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연주해주었으며 20일에는 맨시티의 FA컵 우승을 축하하며 전광판에 콤파니의 사진을 띄우고 Wonderwall을 연주하는 팬심을 과시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집안 곳곳에 태극기를 걸어 놨다는 얘기를 했다. 링크

5. 축구


'''축구[20]

는 내 전부지. 내 전부야. 어쩌면 음악보다 축구를 더 사랑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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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동생 리암과 함께 맨체스터 시티의 골수팬이자 축덕. 오아시스에 있을 때도, 나온 후에도, 틈만나면 스포츠 방송에 나와 특유의 지독한 입담을 과시하며, 심지어 FA 컵 조추첨을 하기도 한다. 덕분에 팬카페만큼이나 축구 커뮤니티에 관련 게시글이 자주 올라오고 해외 축구 기사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며, 심지어 EPL 중계 시 관객석의 노엘이 카메라에 잡히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곤 했다. 덕분에 딱히 오아시스나 락음악에 관심이 없는 축구 팬들도 노엘이 누구인지는 알 정도.
노엘의 말에 따르면 음악적 재능은 원래 주어진 것이지만, 축구는 자신이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밴드를 하지 않았으면 축구 암표 판매원처럼 어떻게든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는 영국에서 살아가는 노동 계급 젊은이들에겐 흔한 일이다. 영국 노동 계급 젊은이들에게 본인이 응원하는 축구 팀은 '''종교'''라고 볼 수 있으며[22], 어릴때 같이 나고 자란 동네친구들은 같은 동네 팀을 좋아한다.[23] 말 그대로 동네 문화의 한 축이 축구인 셈.[24]
노엘은 맨체스터 시티를 '''정말 사랑한다.''' 팀이 3부리그를 왔다갔다하던 흑역사와도 같은 시절이자 오아시스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90년대 후반에도 노엘은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어 꼬박꼬박 맨체스터 시티 경기를 찾았다. 모두가 맨유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반골의식으로 맨시티팬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고[25], 사촌들이 모두 맨유를 좋아해서 그에 대한 반항으로 아버지와 함께 맨시티의 팬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은 알려진 바가 없다.[26] '''공연을 할 때에도 항상 맨시티의 저지를 걸어두며 심지어 유로2012에 잉글랜드 경기를 보러 갔을 때에도 맨체스터 시티를 나타내는 걸개를 걸고 경기를 관람했다.'''
사실 노엘이나 리암의 축구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는데, 자신들이 어린 시절 자라왔던 맨체스터 버니지에서 유일하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이 라디오에서 축구 경기 중계를 듣는 것뿐이었다 한다. 노엘은 "맨체스터에서 자란다면 가질 수 있는 꿈은 두가지 밖에 없다. '''축구 선수가 되거나 락스타가 되거나."'''라고 말하였으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자신의 집에서 맨체스터 시티 경기장의 불빛이 보였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지역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극도로 혐오하며, 맨유와 그 팬들을 조롱하는 어록도 수두룩하다. '''"유나이티드 팬들이 기름을 살 때마다 우리 수중으로 돈이 들어온다니 너무나 기쁘다.(...)"'''라는 그 유명한 짤방 외에도, 맨유에서 수비수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던 게리 네빌의 수염을 모두 뽑아버리겠다(...)며 으르렁거린 적도 있다. 형제 모두가 게리 네빌을 특히 싫어했는데 훗날 게리 네빌과 대면하며 별 문제 없이 인터뷰를 진행했다.
80년대 노동자로 살아갈때는 맨시티의 훌리건짓[27][28]을 하기도 했으며 때문에 국내 오아시스 팬들은 맨체스터 시티에 당연히 높은 호감을 보인다.
축구로는 관람하는 것만 지독히 좋아할 뿐, 잘 하지는 못한다고 한다. 노엘이 축구를 하면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뻗어 버린다고.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집에서 축구를 보면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한다고 한다. 안절부절하면서,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고... 딸인 아나이스가 그 모습을 볼때면 아빠 무섭다고 좀 가만히 앉아서 보라고 얘기를 한다는데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노엘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좋아한다. 월드컵 7회 연속 진출, 2002년 4강까지 알고 있고, 판타스틱하고, 헤어 스타일도 멋있는 팀이라고 칭찬했다. 2009년 7월 내한 인터뷰 심지어 남한과 북한이 경기하는 일정까지 알고 있다. 일정이 맞았으면 (공연 다음날이 축구 경기인데, 아침에 출국) 보러 갔을 것이고, 당연하지만 남한이 이기길 바란다고. 2009년 4월 내한 인터뷰
알싸 같은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인터뷰가 올라올 때, 예전에 노엘을 잘 모르는 네티즌들이 "도대체 노엘 갤러거가 누구길래 인터뷰를 하면 기사가 됨?"이라고 묻기도 했다. 사실 다른 밴드의 뮤지션들도 좋아하는 축구 클럽이 있긴 하지만, 노엘처럼 열정적으로 축구계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은 거의 없다. 이제는 아예 무려 '''축구 전문가''' 타이틀을 달고서 전현직 축구 스타들과 함께 축구 방송 패널로 출연한다. 그리고 노엘이 한국에서 '''재미난 형님'''으로 통하게 되면서 축구 커뮤니티에서도 노엘의 인터뷰를 당연하게 여기고 꾸준히 번역 업로드 중. 맨 시티 외의 EPL 다른 클럽 팬카페에도 노엘의 인터뷰는 인기가 좋다.
지독한 축덕이지만 생각만큼 잉글랜드 국대를 안 좋아한다[29]. 물론 가끔 응원을 가고 우승을 바라기도 하지만, 생각만큼 간절하게 바라지는 않는다는 뜻. 우승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아무래도 잉글랜드 국대에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의 선수가 거의 없고[30] 노엘이 싫어하는 맨유, 첼시, 리버풀 소속의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있다 보니 마음놓고 응원하기 껄끄러운듯.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피식 웃으며 "4강만 가도 잘한거지"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잉글랜드의 축구 문화는 클럽 축구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축구 팬들 중에는 국대에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은 팬도 없진 않다.[31] 또한 그는 아이리쉬 혈통이며 잉글랜드인의 피가 한방울 섞여있지 않다고 한다. 부인인 사라 또한 스코틀랜드인이다. 모 다큐에서는 한 맨유팬이 "잉글국대의 2번의 월드컵 우승보다 맨유의 1번의 리그 우승이 더 중요하다." 라고 말한 적도 있다.
또한 2010년에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 영입에 대해서 인터뷰를 했는데 '''맨체스터 시티 사장인 개리 쿡이 자기랑 밥 먹으면서 영입할 선수들 목록을 냅킨에 써서 보여줬다고 한다'''
맨체스터 시티의 구단주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종종 밝혔고, 1997년 인터뷰에서는 Be Here Now의 높은 판매량 덕분에 현금을 많이 확보해서 구단 인수에 대해 변호사와 상의하고 있다고 말히고 했는데, 지금은 현재 구단주가 어마어마한 자본을 뿌리면서 클럽을 발전시키고 있는 바람에 그 꿈은 이루기 힘들게 되었다. 물론 이에 불만은 없고 만수르 구단주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중이며, 맨체스터 시티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비난에 "X발. 우리는 그동안 거지였으니까 돈 좀 써도 돼."라고 반응하기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쓰자면 "윤리? 시장 원리? 귤까. 시발 너네들은 돈 물쓰듯 써놓고 우리가 쓰기 시작하니까 난리네. 전통? 우리가 30년동안 거지였다는 그 빌어먹을 전통?"이라고 반응했다.
2011년 4월 17일(한국 시각)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4강전 맨체스터 더비에서 모습을 보였는데, 야야 투레의 선제골을 보자 '''매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축구 관련으로 인터뷰는 심심하면 하는 수준이고 1년에 한두번씩 EPL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인 BBC의 매치 오브 더 데이에 출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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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맨시티가 FA컵에서 우승할때 기뻐하던 모습이다. 맨시티로서도 무려 35년만에 들어올린 우승컵(2부리그 우승컵 빼고)이기 때문인데 1976년 리그컵 우승 이후로 얻은 우승컵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공식홈페이지에는 친절하게도 동영상까지 올라와있다!

심지어 맨체스터 시티의 유니폼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인생의 의미란 프로그램에 나와서 가장 먼저 한 얘기가 축구 얘기였다. 이때 진행자가 "맨시티의 우승이 섹스나, 명성, 가족보다 좋은가요?"라고 묻자 '''물론이죠. 제 아내도 이해해줍니다'''라고 대답했다(...)
'적중률 100%' 갤러거, 맨시티 승부차기 우승 예언 화제 캐피털 원 컵 결승적 직전의 인터뷰가 경기 내용과 승부차기 순서, 결과까지 정확하게 예측하여 영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맨시티 리포터 스컬리와 투어에도 함께할 만큼 절친에다가 공식 채널로 독점 인터뷰 영상, 전용캠 영상까지 갖고 있고 우승 직후 맥주병을 들고드레싱 룸에 난입하여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얼싸안으며 필드에서 함께 기념사진 촬영도 하는 등, 유명인 서포터의 차원을 넘어서 아예 팀의 일원처럼 어울리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인터뷰를 하며[32] 하도 공식채널에 얼굴을 비추다 보니 공식 홍보대사같이 느껴질 지경(...)
2018년 영국에서 열린 FIFA 어워드에서 시상자로 초청받았는데, 인터뷰를 하는 동안 뒤에 지나간 사람이........
2018/2019 시즌 들어 부진에 빠져있는 맨유를 보고 조롱하기도 했다.
18/19 시즌 챔스 결승에서 토트넘을 응원한다고 해서 많은 팬들이 의아해 했으나 그 이유가 리버풀이 ㅈㄴ싫어서라고 한다(...)[33] 팬들 반응은 "그래 어쩐지 저 양반이 순순히 토트넘을 응원하나 했다..."
또한, 우사인 볼트의 팬이기도 한데 우사인 볼트는 하필 맨유 팬이다. 인터뷰에서 이 소릴 듣자 '''"누구에게나 병신같은 면은 있는 법이다.(...)"'''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박지성에 대한 질문을 받자 끝까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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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축구 사랑과는 별개로, 축구는 잘 못하는 듯 하다.

5.1. 유명한 축구 선수들과의 인연


축구 선수들과도 친분이 깊은데 리버풀 FC의 캐러거와 맨체스터 시티 선수였던 조이 바튼, 그리고 유벤투스의 레전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와도 매우 친분이 깊다고 한다. 예전에는 친구인 델피에로에게 전화해 맨시티로 이적하라고 땡깡을 놓는다던지 온다면 주급을 자신이 내겠다고 한다던지...한 적이 있었다. 물론 술 먹고 술주정부린 거였지만, 델피에로의 에이전트는 이 제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실제로 맨시티 행을 고민했었다고. 2006년에는 델피에로의 초대로 2006 독일 월드컵 4강전과 결승전을 보러 가기도 했다. 4강전에서 이탈리아가 이기자 델피에로는 노엘에게 결승 보러 올때 꼭 똑같은 옷 입고 와달라고 요청했고 노엘은 같은 옷을 입고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우승했다.'''
축구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34] 칭찬 뿐만 아니라 비판도 날카롭다. 노엘은 첼시의 주장 존 테리를 상당히 안 좋아한다. 존 테리 항목을 참고하면 알겠지만, 존 테리는 사생활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그런 면이 노엘에게는 무척 좋지 않게 비추어진 듯. 2009년 여름 존 테리와 맨체스터 시티가 접촉했다는 뉴스가 떴을 때도, 노엘은 존 테리의 영입을 반대하는 인터뷰를 했다. 그러다가 존 테리의 불륜 행각이 까발려졌을 때 노엘의 반응은... 게다가 존 테리가 불륜을 저지른 여자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의 웨인 브리지의 약혼녀였다. 평소에 존 테리를 싫어했던 노엘이 이 사건으로 노발대발한 건 당연했던 일. 대충 노엘 갤러거가 했던 인터뷰를 요약하자면 "존 테리 그 자식은 완전히 씨X놈이야. 내가 그 개X끼를 만나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어."
반대로 첼시 출신의 조 콜은 오아시스의 열성 팬으로, 14살 소년 시절 처음 CD플레이어를 구입한 계기가 오아시스 2집 앨범의 Wonderwall을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때 이미 오아시스 콘서트 장에 갔었고 그 안에서 자신이 가장 어린 팬이었을 거라 회상했다. 노엘은 한때 좋아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감독 중 하나가 주제 무리뉴였고 첼시의 주장 존 테리를 싫어하는 것이 첼시 팀에 대한 노엘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듯. 그런데 무리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 된 이후로는 예전처럼 좋게 생각하지는 않는듯. 맨체스터 더비 전 인터뷰에서 "무리뉴는 케빈 더 브라위너다비드 실바를 죽이라고 명령했을거야." 라고 말하기도 했고, 특별 게스트로 맨체스터 더비를 해설 스튜디오에서 시청한 이후 무리뉴의 인터뷰를 보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널 싫어하는 거야. 조세" 라는 식으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무리뉴는 위선자다" 식의 까칠한 반응을 보인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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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웨인 루니와 벌어진 기타 해프닝은 유명하다. 오아시스의 팬인 루니에게 보낼 선물을 위해 루니의 부인 콜린이 노엘에게 '''깁슨 레스폴'''을 보내 그의 사인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노엘은 기타를 맨시티의 상징인 파란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맨시티의 응원가인 Blue Moon 가사를 잔뜩 적어 돌려보낸다. 이에 루니는 크게 재미있어하며 그 해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시원하게 100호 골을 넣은 다음 세리머니 사진을 찍어 노엘에게 보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타는 2015년까지 루니의 집에 잘 보관되어있는 것으로 드러났다.[35]
2015년 2월 27일, 2집 발매를 앞두고 그레이엄 노튼쇼에 출연했는데 맨유의 레전드 데이비드 베컴과 같이 출연했다. 이때 뮤직비디오 찍기 싫다고 투덜대던 노엘은 갑자기 옆에 앉은 베컴을 향해 "내 뮤직비디오에 나올래요?"했는데 베컴은 약간 당황했다가 "좋죠!!(would be lovely)"라고 답했고, 자신은 물론 아이들도 오아시스의 팬이며 맨체스터에서 경기가 있을 때 노엘과 만나 악수도 했다고 밝혔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역시 오아시스의 열성 팬으로 이적 직후인 2009년 인터뷰에서 맨체스터가 그리운 이유 중 하나로 오아시스를 꼽았다. 처음 맨체스터에 왔을 땐 오아시스가 누군지 모르고 테크노 음악을 좋아했지만, '''맨체스터에 있으면서 그들이 누군지 모르고 계속 지낼 수는 없죠. 영국 선수들은 드레싱 룸 안에서 오아시스 노래 듣는 걸 좋아해요. 저는 맨체스터에서 그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너무 긴장해서 말을 걸어보긴 힘들었고요. 쉽게 친근하게 다가갈 외모는 아닌 듯 하지만 창조적인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아요.'''라고 진솔하게 인터뷰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Champagne Supernova라고 한다. 친한 선수들끼리 돈을 모아 오아시스를 초청, 자신들만을 위한 오아시스 공연을 개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고. 맨유 선수로서 오아시스 공연장에 가긴 여러 모로 힘들었을 테니 이런 차선책까지 떠올렸던 모양이다.
리오넬 메시 역시 국대 동료 테베즈의 소개로 오아시스의 팬이 되었고 Don't Look Back In Anger와 Roll It Over를 좋아하는 노래로 꼽았다.
요즘은 노엘이 맨시티 선수들 중에서 다비드 실바를 가장 좋아하는지 인터뷰마다 다비드 실바를 칭찬하고 있다. 2015년 5월 초, NBC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다비드 실바는 내 아내와 함께 자도 된다."고 과격한 애정 표현을 해서 노엘의 지극한 아내 사랑을 알던 한국의 노엘 팬들과 축구 커뮤니티 회원들에게 상당히 충격을 주는 듯 했으나, 이런 류의 비유는 영국 현지에서는 축구 팬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사라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ㅎㅎ 이미 흑발의 작은 남자(노엘)와 함께 하고 있으니 키가 크고 금발을 원해. 데이비드 베컴 같은?"'''하고 더더욱 쿨한 유머로 받아주면서 한국의 누리꾼들까지 빵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실바는 사라에게 차였지만, 캐피털 컵 우승 직후 실바의 유니폼을 선물 받은 노엘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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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짤방


영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독설가로 유명한 노엘인 만큼,[37] 그의 주옥같은 어록 짤방의 수가 매우 많다.
오아시스(밴드)/짤방/노엘 갤러거 참조.

7. 그 외


부의 상징 블랙 아멕스를 사용한다. 2015년 기준 순자산액(net worth)은 $60 million(6천만달러, 한화 약 680억원)정도로 추정된다.
2008년 2월 1일, JAY-Z가 2008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하지만 이전 페스티벌의 표가 2시간 만에 매진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총 137,500석 중 100,000석도 채우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이에 대해 락밴드와는 상반되는 힙합 가수를 내세운 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이 발언 이후 노엘은 집중 포화를 당했으며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게 된다.
노엘은 전통적으로 기타 연주가 주를 이루는 페스티벌에서 제이지를 헤드라인으로 지정한 주최 측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 "만약 부숴지지도 않았고 문제도 없다면 고치려 들지 마. 만약 네가 부숴버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가지 않을 거야. 미안하지만 제이지라고? 어림도 없지. 난 글래스톤베리에서 힙합은 안 볼거야."
논란은 몇 달 사이 가수들, 기획자들, 팬들이 각각 찬반을 다투는 상황으로 번져갔다. 제이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반응했다.
  • "우린 기타를 연주하지 않아, 노엘. 하지만 힙합은 다른 음악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이 헤드라인 쇼는 당연한 진행 과정이야. 랩은 아직도 진화하고 있지. 플라티늄 앨범이 된 Bronx 와 런 디엠씨의 멤버 아프리카 밤바타의 디제잉에서부터 그래미상 랩부문에서 처음으로 수상한 DJ Jazzy Jeff & The Fresh Prince까지, 난 그저 다음 차례일 뿐이야. 우린 서로의 음악 장르를 존중해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해."
제이지는 그의 2008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오프닝을 오아시스의 〈Wonderwall〉의 커버버전으로 막을 열었다. 노엘이 이 사건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말했다.
  •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건 내가 제이지는 글래스톤베리에서 공연할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겠지. 그건 진짜 말도 안되는 헛소리였다니까. 전엔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누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글래스톤베리가 티켓 매진 실패했는데 이게 만약 제이지 때문이라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더라구. 거기서부터 내가 Speakers' Corner(영국에 있는 자유발언대)의 주황색 발판 위에 서서 '들어봐, 형제 자매들. 이번년도 글래스톤베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라고 외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 거지. 그러니까 말이야, 만약 내가 '맥도날드에 있는 치킨 샌드위치들은 말 그대로 틀려 먹었어'라고 한다 해서 그게 세상 모든 닭들이나 샌드위치를 욕하게 되는 건 아니란 소리야. 전에 도쿄에서 제이지를 만났는데 거기서 그의 공연을 본 적이 있어.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괜찮더라. 우린 모두 크리스 마틴을 친구로 두기도 한걸. 난 그저 힙합의 충격적인 표현을 싫어하는 남자일 뿐이야. 랩퍼나 힙합,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진 않아. 80년대 랩이 한창 영감을 주고 있을 때 맨체스터에서 열린 데프잼 투어에 갔던 적도 있어.[38] Public Enemy는 굉장했지. 근데 항상 지위나 재산에 대해서 만 얘기하고 있어서 나한텐 그다지 와닿지 않았어."
제이지가 이러한 노엘의 코멘트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 "노엘이랑 말해본 지는 꽤 됐지만 그가 연락하려고 한단 소리를 들었어. 난 아무 유감 없고, 모든 게 다 괜찮아. 언제나 말해왔지만 난 그냥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내 초창기 인터뷰들을 보라구. 난 언제나 사람들이 쉽게 파악하기 위해 음악에 규정짓는 선들과 분류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말해 왔었지."
또한 앞으로 어떤 가수와 작업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아무나. 오아시스도 뭐. 상관없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밖에도 에미넴과 사이가 나쁘다. 각 미국과 영국을 대표하는 핵이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것. 2019년에는 '지루하다'며 에미넴을 깠다. 약물중독 치료소에 간 얘기로 20년이나 우려먹는다며 극딜했다.[39]
왼손잡이이다. 왼손잡이 항목에서 상당히 늦게 추가되었다. 기타를 오른손으로 치기 때문에 덜 알려져서 그런 듯 하다. 커트 코베인은 원래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기타를 써서 왼손잡이임이 널리 알려 졌듯 기타 치는 손에 따라 어느 손잡이인지 알려지는 정도가 상당히 다른 것 때문에 그런 것. 본인 말로는 오른손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기타 치는 거라고 한다.
스톤 로지스가 밴드를 시작한 이유라고 한다. 더 스미스처럼 밴드를 하려면 대학을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아니면 더 잼의 폴 웰러가 되는 수밖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들과 똑같은 스톤 로지스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 한다. Sally Cinnamon을 처음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터뷰 영상
인터뷰에서 종종 케이크, 초코바 등등 달달한 군것질 거리 들을 언급 하다 보니 단 것 덕후 기믹이 붙기도. 요크셔 티[40] 를 굉장히 좋아해 Love Music Love Food : The Rockstar Cookbook이라는 레시피북 겸 사진집 에서는 아예 요크셔 티와 연결지어서 나오기도. 나름의 밀크티 레시피도 가지고 있다. 아래 이미지는 책에서 나온 노엘식 요크셔 밀크티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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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와 해당 레시피를 적절히 참조하면,
1. 티백과 설탕을 채운다 (요크셔 티백)
2. '''팔팔 끓인''' 물을 컵 위쪽의 1인치까지만 채우고 3분 동안 태운다
3. 티백을 꾹 짜서[41]빼낸다.
4. 우유를 마지막에 넣는다. 이 때 차 색이 노란색 봉지에 든 캐러멜(...)[42] 같은 색이여야 한다.
5. 마신다
참으로 간단하다.
인터뷰에서 초창기의 건방진 이미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당시에는 말로는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같이 아무도 아닌 무명들이 할수 있으면 너희들도 할수 있다"는 얘기를 전달하고자 싶었다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술에 취한 상태로 리암을 욕하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술 취한 자신의 동생이 Red Indian 같아 보인다고 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붉은 색(red)"에 비유하는 것은 인종차별에 해당한다.[43]
GQ 시상식에서 시상식에 참석한 대사 윌리엄 헤이그를 향해 "지금 세계에서 정리해야 될 일이 많은데 여기에 오고 참 잘 하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물의를 빚었다.
연기를 정말 못해서 팬들은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한다. 노엘도 뮤직비디오 촬영이 달갑지는 않은듯. 뮤비 촬영은 재밌냐는 기자의 질문에 뮤비 싫어라고 답했었다.
공연을 할 때 속옷을 입지 않는다고 밝혔다. # 그러나 레딧에서의 AMA(Ask Me Anything)에서 농담이었다고 다시 밝혔다.
런던 지하철에서 자주 보이신다 카더라
데이빗 보위가 사망했을 때 "왕이 떠났다"라고 트윗을 남겼다. 안 깐 가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누구나 다 까는 노엘이지만 데이빗 보위만큼은 인정한 모양이다. 이후 노엘 갤러거의 음악 스타일이 데이빗 보위를 연상케 하는 풍미로 바뀌게 된다.
2013년엔 원 디렉션을 까댔다는 것이 밝혀졌다. 별 다른건 아니지만 특이사항 이라면 노엘에게 한 소리를 들은 원 디렉션은 "노엘 갤러거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초연한 모습을 보였으며, 멤버의 말에 따르면 '''데이먼 알반도 노엘 갤러거와 함께 원 디렉션을 깠다고 한다'''. 그런데 2015년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원디렉션의 곧 출시될 앨범이 오아시스 풍이라면서 화제가 되었는데, 노엘은 '원디렉션에서 해리만 만나봤는데 좋은 녀석'이라 칭찬하면서 멤버 제인이 탈퇴한 것에 폭언을 동원해가며 맹렬히 비판했다.
2012 NME awards에서 "Godlike genius"라는 부문의 상을 받았다. 그야말로 노엘을 위한 상이라 할 수 있다.
수상소감(한국어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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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트로피.[44]
2015년 7월에는 NME를 통해 한 록페스티벌 헤드라이너로 나온 Avicii디스했는데, 또 그뿐만 아니라 EDM이라는 장르 자체를 디스 하다시피 했다.[45][46] 이게 일파만파 퍼지면서 디스당한 DJ들이 NME를 통하거나 간접적으로 노엘을 디스하는. 그런데 NME 독자들은 "그래서 너네는 누구인데?" 하며 듣보잡 취급... 그런데 그 깠던 헤드라이너가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협업을 했다!!
2015년 12월 8일 영국 링컨에서 열린 콘서트에 5년만에 전 오아시스 멤버 겜 아처와 함께 무대에 섰다. 같이 Wonderwall을 포함한 오아시스 시절 노래 4곡과 하이플라잉버즈의 곡, 커버곡 등을 연주. http://www.nme.com/news/noel-gallagher/90186
2016년 6월 23일 브렉시트 당시 민중들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해야하는 정치인들이 맡은 일을 하지 않고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에 대해 질타하기도 했다. # 번역본. 브렉시트 선거 기간 동안 다른 영국 연예인들과 달리 그가 침묵을 지키자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 2017년 11월 노엘 갤러거가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은 브렉시트에 반대했으나, 자신 같은 사람이 이런 중대사에 참여하는 게 옳은지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투표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47] 그러면서 브렉시트를 "파시즘"이라 부르며 선거 무효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보야 말로 "파시즘"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의 도입과 말미에 그는 잔류파들에게 그 자신도 브렉시트를 좋아하지 않으나, 어쨌든 브렉시트는 국민들이 합법적으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밝히며, "씨X 극복 좀 해라"(F**king get over it)라는 정말로 노엘 갤러거다운 멘트를 남긴 후 이젠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주장했다.
2020년 9월 코로나 사태로 인한 마스크 착용이 필수화되는 현상에 대해 자유를 뺏는 것이며 본인은 그냥 벌금 내고 마스크 안 쓰겠다고 발언해 논란이 일었다. 한 술 더 떠 10월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아내의 생일 파티를 지정 시간을 넘긴 늦게까지 열어 한 국회의원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때 동안이었다. 2000~2010까지의 외모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나이가 나이다보니 할배가 다되었다(...) 오히려 53세보다 살짝 늙어보이는 수준...이지만 잘생긴 탓에 미노년으로 진화중이다.
노엘의 출신 계급도 그렇기도 하고, 위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 노동당 지지자이다. 온건한 편인지라 노동당의 강경 성향과는 거리가 있고,[48] 이로 인하여 한때 토니 블레어 총리를 광적으로 지지'''했'''으나[49] 그가 이라크 전쟁 파병, 대처리즘을 통한 우클릭을 시도하자 '''쌍욕을 섞어가며''' 무지막지하게 비판했다. 아무래도 본인이 제일 지지하던 정치인이 통수를 쳤으니 적잖이 분노한 듯하다.
케이트 모스와 친하다. 둘다 약쟁이에(...), 1990년대 중반 영국의 청년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보니 자연스레 문화적 접점이 많았던 듯하다.

7.1. 사생활


어릴 때부터 여자친구가 끊긴 적이 없다고 한다. 오아시스 데뷔 이전부터 평범한 직장인인 루이즈 존스라는 여인과 1988년부터 동거를 해 왔는데, 그녀와의 관계는 헤어지고 재결합을 반복하는 등 대단히 격정적이었다고. Live Forever를 듣고 쓰레기라고 까거나 그녀가 한 말에서 영감을 받아 쓴 Married with Children의 가사를 보면 상당히 까칠했던 듯(...). 1994년 노엘이 오아시스로 데뷔를 하고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넘어가며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노엘은 그녀를 소울메이트라 표현했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진으로는 잘 티나지 않지만 심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다신 사랑을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1집 레코딩 시기 내내 그리워했을 정도.
이후 MTV의 캐스터 레베카 드 루보와 잠시 만나게 되지만 그녀의 룸메이트인 멕 메튜스가 더 마음에 들어(...) 오래가지 못하고 멕과 사귀게 된다. 멕은 언론계열 종사자였지만 재벌과 연예계 인사들과 친밀한 파티광이었는데 마침 한창 약과 파티에 빠져 있던 노엘도 동참한다. 멕은 케이트 모스와도 친분이 있었는데 당시 케이트 모스와 사귀던 조니 뎁도 가세해 신나게 놀러다녔다고. 이후 둘은 1997년 6월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하고 2000년 딸 아나이스를 낳게 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노엘은 약을 끊고 이전과 같은 생활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파티광이었던 멕은 시골 생활을 견디지 못했고 런던의 파티를 그리워했는데, 점점 두 사람 사이의 골이 깊어지며 리암이 당시 부인이었던 팻시 켄짓과 결별을 선언한 지 두 달만인 2000년 9월에 그들도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별거기간 도중 Standing on the Shoulder of Giants 투어 도중 이탈하고 자신의 별장이 있는 스페인이비사 섬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 있던 클럽 '스페이스'에서 홍보 매니저로 일하던 사라 맥도날드를 만나게 된다. 본인 왈, 바람은 빨리 이혼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전까지는 아내에게 불성실했던 적이 없다고. 이후 2001년 1월 정식으로 이혼하고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물어주게 된다.
2002년 경 사라와도 잠시 헤어지지만 곧 재결합하고 2007년 9월 아들 도노반 로이 맥도날드 갤러거, 2010년 10월 아들 소니 갤러거를 낳고 2011년 정식으로 결혼하며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 Dig Out Your Soul의 Waiting For The Rapture은 그녀와의 만암에서 영감을 얻은 곡이고, 솔로 1집의 If I Had A Gun은 그녀에게 바치는 곡이다. 인터뷰나 공연에서 그녀를 '러블리 와이프' '러블리 사라'라고 칭하고 생일 축하를 할 때도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라 부르는 등 사랑꾼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딸인 아나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모델로 활동 중이고 간간히 TV 리포터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는 사진 작가로도 활동하고 대학에서 사진 공부 중. 노엘의 투어에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사라를 포함한 노엘의 가족과도 잘 지내고 있다. 손목에 도노반과 소니의 이름타투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마트에 갔다가 그를 보고 놀란 팬이 "노엘 갤러거, 전설!!"이라고 말하자 "있잖아요... 엄밀히 따져서 전설이 되려면 그 전에 죽어야 하죠." 라고 대답해 아버지에게 비싼 학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리암이 시비를 걸었을 정도로 예전에는 노엘의 친딸이 아니라는 루머가 있었지만 자라면서 금발 노엘이라고 불릴 정도로 노엘과 빼닮았다.
아들인 도노반은 아버지의 절친인 러셀 브랜드면전에서 까고(...) 갖고 싶은 선물을 묻자 '''"날 놀래켜 봐(Surprise me)"'''라고 대답할 정도로 비범하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잘 물려받았는지 뻐큐를 날리는 사진이 상당히 많다.
막내 아들 소니는 엄마를 쏙 빼닮은 천사같은 얼굴과 달리 형 못지 않은 파괴력의 소유자로 추정되며, 이비사에서 헤나를 했다가 아빠를 화나게 했다고 한다.
노엘의 가족은 Team NG라 부르며 리암의 자식들과는 달리 눈썹이 크게 짙은 편은 아니다.

7.2. 노엘의 실제 키는?


프로필상 키는 174cm이다. 본인의 2000년 1월 더 가디언과의 잡지 인터뷰로는 5피트 8과 1/2인치 약 174cm라고 한다.[50] # 실제로는 젊은 시절 약 174cm, 50대가 넘은 현재는 살짝 줄어서 172~3cm 전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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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cm인 제이크 버그와 비교했을 때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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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상 같은 키인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비교해도 노엘이 조금 더 크다. 다만 축구선수들은 스터드가 있는 축구화를 신고 측정한 키를 등록하기에 이는 감안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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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레타의 프로필 키는 174cm지만 축구 선수들은 공식 프로필을 잴 때 스터드를 포함해서 잰다. 즉 2~3cm 늘어난 키를 공식 프로필에 올린다.
노엘은 자신의 키와 몸무게와 신발 사이즈를 간간히 밝혀 왔는데, 자신을 늘 5피트 7인치 정도로 소개한다. [51] 노엘을 만나는 인터뷰어들이 노엘을 보면 생각보다 작은 키에 항상 놀라곤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키가 작지만 그가 이룬 걸 생각하면 그깟 키가 대수냐" 등등)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는 것보단 실제로 더 작게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다.[52] 몸무게는 90년대 당시엔 60kg 정도라고 말했다.[53] 발 사이즈는 서양 기준 240mm~245mm 정도라고. 본인 말로는 발이 유독 작다고 한다. 종종 라디오에서 아무한테나 여자 발이라고 놀리는데 자기 발에 대한 자조적인(...) 느낌도 있다.

8. Discography


Noel Gallagher’s High Flying Birds 문서 참고

9. 콜라보레이션



9.1. 음악



9.1.1. OST



노엘은 OST에도 종종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The X-Files의 OST로 사용하기 위해 작곡한 'Teotihuacan'이다. 이 곡은 노래가 없는 연주곡인데, 전자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노엘은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고[54]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 맥을 집에 들여놓고 사용한다. 실제로 이 곡 역시 컴퓨터 작업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직접 악기를 연주한 다음에 스튜디오에서 여러 효과를 줘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9.2.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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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알려진 사실인데, 2011년에 아디다스에서 노엘 갤러거 한정 스니커즈를 발매한 적이 있다. 한정판매되었고, 지금도 이베이 등에서 종종 미개봉 신품을 구입할 수 있다. 아디다스와 노엘의 관계는 가까웠다. 노엘이 어쿠스틱 공연에서 사용하는 기타 중에 픽가드에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로고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이 있고, 노엘 본인도 아디다스 스니커즈를 꾸준히 수집해왔다. 2010년에는 이안 브라운과 함께 아디다스 광고에 출연했다.


10. 관련 문서



[1] 갤러거는 Ó Gallachóir(오 골리허)라는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비롯된 성이다. 즉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다.[2] 축빠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 팬들은 농담조로 맨시티 서포터가 본직이며 부직업으로 가수뛴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3] 20대 후반까지 일반 노동계급 시민들과 비슷하게 일을 하며 틈틈히 작곡을 하다가, 그 곡들이 붕 떠버리며 순식간에 대스타가 된 예시이기 때문. 그야말로 '될 놈은 된다'의 상징적 예시라고 볼 수 있다.[4] 폴과 노엘이 침대에서 함께 자고 있으면 깨우겠다고 침대를 엎어 버리고, 울면 운다고 때리고, 말을 더듬으면 고쳐야겠다고 때렸다고. 막내인 리암만은 때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폴과 노엘이 집에 없을 때 리암도 종종 때렸다고 한다.[5] 다만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악감정이 없다고 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오아시스 초창기에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토마스 갤러거를 고용하여 오아시스 투어 현장에 데려왔을때 노엘이 보인 반응(아버지를 보자마자 불안한 증세가 나타났다고 한다)과 그 이후로 아버지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보면 어렸을때 많은 상처를 입은듯. 어떻게 보면 아버지에 대해 악감정이 없는걸 뛰어넘어서 아버지로 인정을 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2000년도 Behind the Music 인터뷰에서 비슷한 요지의 발언을 했다.[6] 동생 리암도 1997년 MTV 인터뷰에서 이러한 아버지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앞으로도 용서할 마음 없다고 언급하였다. 1997년 12월 25일 MTV Uncut 인터뷰 [7] 매고 있는 기타는 Epiphone 1964년 쉐라톤. 노엘이 직접 유니온잭으로 리피니쉬했다.[8] 절대 너바나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Lock the box 인터뷰에서 '내가 를 좋아하고 그런만큼, 난 씨발 그런게 싫었다고. 사람들이 헤로인에 취해와서, 씨발 자기는 자신이 싫고 죽고 싶다고 하는 거, 우리는 싫다고. 존나 쓰레기거든. 그렇다고 내가 그거에 반발해서 쓴건 아니고, 그냥 그게 내 생각이였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9] 프로듀서 데이브 사디Dave Sardy. 오아시스 7집 Dig Out Your Soul의 프로듀싱 및 믹싱을 담당했다.[10] 참고로, 일렉트로니카 성향이 매우 짙은 곡이다.[11] 심지어 이미 동년배들 중에서도 그가 데뷔하기 전에 세상을 등진 가수들도 있다.[12] 코카콜라에서 소송이 걸리자 노엘은 공연에서 어쿠스틱 라이브를 하며 "우리 모두 같이 펩시를 마셔요"라고 한다.[13] 아이러니 하게도 조지해리슨의 My Sweet Lord도 표절소송에 휘말린 역사가 있다![14] 나중에 지드래곤이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그 곡이다. 웃기게도 표절시비가 난 부분은 노엘 갤러거가 조지해리슨에게서 베껴온 바로 그 소절. [15] 트래비스가 스코틀랜드 로컬 밴드였던 시절부터 노엘은 트래비스를 오아시스 투어 오프닝 밴드로 세웠다.[16] 덕분에 케미컬 브라더스 등 테크노 계열에 피처링 할 때 어쿠스틱 곡과는 다른 맛의 보컬을 들려준다.[17] MTV unplugged는 Don't Look Back In Anger 한 곡만 모음집에 수록되었다. 나머지 음원은 전부 부틀렉. 2집 리마스터링 버전에 Round Are Way 언플러그드 버전이 수록됐다.[18] "I cannot wait to meet the South Korean guy with a saxophone in hand, lord knows what he'll be dressed in like, but he will be the preeminent saxophonist in all of Korea. Koreans, they are considered the Irish of Asia. They are mental. Have you been to Korea? The gigs are like playing in Dublin. It is insane. Insane." 21:36초부터 나온다[19] 노엘 갤러거는 100%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며, 결혼하기 전까지는 죽으면 아일랜드에 묻히고싶어했을 정도로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편이다. 그러니까 '''집에 온 것 같다'''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20] 여기에서 축구는 '''오로지 맨체스터 시티 FC를 의미한다고 해도 무방하다.'''[21] 맨체스터 시티가 2013-2014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2014년 5월 11일, 그라운드에 내려온 노엘이 주장 완장을 차고 기뻐하는 모습. The Chief라는 그의 별명과도 잘 어울린다. 이날의 엔딩 BGM도 오아시스의 Whatever가 울려퍼졌다. [22] 그래서인지 여담이기는 하지만, 영국의 유명 축구인들 중에서는 노동당 지지자가 많다. 스포츠계가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계급투표 경향이 짙은 영국, 특히 축구계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서민, 노동자들이 즐기는 서민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며, 축구선수들도 노동 계급 출신인 경우가 많기 때문. 대다수 노동 계급의 젊은이들이 어릴 때부터 축구를 즐긴다. 물론, 스스로를 토리라고 밝힌 프랭크 램퍼드와 같은 예외도 드물게나마 있긴 하다.[23] 노엘과 리암 역시 맨체스터 출신으로, 둘 다 맨체스터 시티 FC의 광팬이다.[24] 다만 굳이 영국만 이런 게 아니라 유럽이나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이렇다. 축구 구단 창단 역사를 보면 노동자들이 쉬는 날에 모여 축구하며 만들어진 팀이 그 시작이 많다. 아니면 교회에서 운영하거나 군인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던 팀이 축구팀 첫 시작이다. 다만 영국이 축구의 원조격이고 역사가 매우 길기에 확실히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친생활적이고 로컬느낌이 강한것도 사실.[25] 단 1967년 노엘이 태어났을 때는 맨시티의 전성기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맨체스터에서 두 팀의 팬덤 크기는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굳이 이럴 이유는 없다. 맨시티는 1960년대에 리그 우승 및 컵 위너스컵 우승 등을 했고, 이 때가 맨시티에서 그나마 이전에 전성기라고 해야할 시절이었다.[26] 그냥 외국에서는 거주지나 출생지에 맞춰서 지지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게 아마 들어맞을 것이다. 그레이터맨체스터주 내의 지역별 여론을 보면 맨유 팬덤은 북서쪽, 맨시티 팬덤은 남동쪽에 거의 반반에 가깝게 분포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노엘은 남동쪽인 Longsight에서 태어나 Burnage에서 자랐으므로 자연스레 맨시티 팬이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도 강남이나 서초에서는 FC 서울보다는 성남이 훨씬 가까워서 그리로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27] 이는 오아시스가 패션에 있어서는 캐주얼족으로 분류되는 원인이기도 하다.[28] 사실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마찬가지로 10대 후반~20대 초반 영국의 노동계급 젊은이들중에 의외로 많은 숫자가 훌리건에 가담해 있다. 골수 훌리건 조직인 펌(firm)의 구성원들도 대부분 노동계급 젊은이들이다. 아니, 훌리건 이전에 '''영국의 축구문화 자체가 노동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29] 이전 문서의 해당 각주에서는 '축구팬이라면 국가대표팀을 응원해야 한다'라는 말이 한국팬에게만 해당하며, 프로리그의 축구에 열광하는 유럽 팬들에게는 꼭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는 서술이 있었는데, 이는 반 정도만 맞는 말이다. 사실, 월드컵이나 UEFA 유로를 제외하면 웬만한 A매치에 대한 관심도가 클럽 축구 경기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긴 한데, 큰 국제 메이저 대회가 되면 국가간의 자존심을 건 국가대표팀 경기에 당연히 모든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예외도 없진 않은데, 지역 색깔이 강한 지역의 축구팀의 팬이라면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국제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이상 국가대표팀에 대한 관심은 미지근한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아틀레틱 빌바오인데, 스페인 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에도 이 지역 여론은 마드리드에 비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FC 바르셀로나 팬들의 경우는 다소 미묘했는데, 꾸준히 독립 여론이 있을 정도로 지역색이 강한 카탈루냐 지역을 대표하는 클럽이긴 하지만 당시 국대의 주축이 바르사 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시티 역시 같은 지역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있긴 하지만 해당 지역 내에서의 지지도는 아무래도 맨시티가 더 높고, 지역을 대표하는 클럽이라는 의식도 맨유 팬들에 비해 더욱 강한 경향이 있는데, 노엘 갤러거도 아마 이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래에서 서술한 한 다큐멘터리 속 맨유팬이 한 말대로, 맨유 팬 중에서도 국가대표팀보다 클럽팀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경우도 없진 않을 테지만, 웨인 루니, 리오 퍼디난드 등의 맨유 소속 선수들이 국가대표팀에 승선하기도 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에 대한 주목도도 그리 미지근한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30] 2018년 기준에서도 주전은 카일 워커, 존 스톤스, 라힘 스털링 정도이고 그 외로 넓히면 페이비언 델프정도다.[31] 잉글랜드 국대는 '''선수들조차도''' 클럽별로 파벌이 나뉘어 화합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밥도 클럽별로 따로 먹었다고 할 정도이니..[32] 반대로 팀에서 팀 멤버와 인터뷰를 시키기도 한다. 발로텔리와 펩 등에게 그랬다.[33] 진짜로 '''I fxcking hate Liverpool'''이라고 했다.# [34] 한국 축구 월간지인 베스트 일레븐에서 2014 월드컵을 앞두고 편집장 컬럼에서 "우리도 축구에 진정으로 미친 유명인을 보고 싶다."라는 글이 나올때 거론되던 해외 유명인 중 하나가 노엘 갤러거였다. 이름없던 가수 시절, 팀이 2부리그로 강등당하고 있던 시절에도 맨체스터 시티 경기를 보러 자주 가고,이젠 맨시티가 엄청난 돈다발 구단주를 만나서 리그 우승도 하고 리그 강호가 되자 감격한다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흔하게 보이고 공식자리에서 맨시티 팬을 자랑하고 오랜 팬 경력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부럽다라고 쓰던 적도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월드컵 다가오면 연예인이니 뭐니 갑툭튀하여 자기를 홍보하는데 축구와 월드컵을 쓴다라고 일침을 가했다.[35] 루니의 잉글랜드 국가대표 역대 최다골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루니가 게리 리네커에게 기타를 자랑했다. 그것 말고도 '''폴 매카트니가 사인해준 기타'''도.... [36] 여담으로 박지성이 맨유시절에 영국에서 인터뷰를 할 때 '오아시스 vs 비틀즈'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오아시스를 몰랐던 박지성은 '오아시스가 누구죠?'라고 질문했고 인터뷰어가 '맨체스터를 기반으로 둔 밴드입니다'라고 하자 '그럼 오아시스로 할게요'라고 대답했다(...) [37] 나무위키의 독설가 목록에도 올라가 있다.[38] 참고로 D'You Know What I Mean?은 힙합 그룹 N.W.AStraight Outta Compton#s-3 이라는 곡의 드럼 루프를 기초로 시작되었다고 한다.[39] 자고로 노엘 본인도 에미넴보다 수십배는 극심한 약물중독을 겪은 적이 있는데, 겨우 그거 가지고 우려먹냐며 까는 내용이었다.[40] 요크셔 티는 홍차 중에서 가장 서민 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로 적은 양으로도 향이 진하게 우러나, 주로 스트레이트보단 밀크티로 많이 만들어 마시는 홍차라고. 그러나 노엘이 마시는 요크셔 레드를 국내에서 구하려면 힘들다. 만약 마셔보고 싶다면 직구를 해서 마셔보자.[41] 뭐...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겠지만 '''티백을 꾹 짜는 행위는 차 맛을 아주 해치는 행위다'''. 탄닌 성분이 우러나와 떫어진다. 본문의 경우엔 설탕과 우유를 넣으므로 진하게 맛을 내려면 큰 문제는 안될 수 있지만, 대중적이고 많이 마시는 브랜드인 트와이닝의 홍차조차 티백을 꾹 눌러짜내면 떫은 맛이 나기 쉽고 심지어는 티백의 종이 맛이 나기 때문에 향에 민감한 사람들은 티백 짜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한다.[42] Quality Street Toffees라는 캐러멜.[43] 백인과 흑인을 white과 black으로 지칭하는 것과 별개의 문제이다. 이전 문서에서 "Red Indian"이 Urban Dictionary에 '술 취한 사람을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된다는 근거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이 왜곡된 서술이라고 주장하였으나, urban dictionary에 등재된 표현과 그것의 인종차별적임은 관련이 없다.[44] 원래 NME어워드 트로피는 다 저렇게 생겼다. NME매거진에서 주최하는 행사로, 어워드 내내 술 퍼먹다가 헤롱헤롱 하면서 수상소감 하는 뮤지션들이 일품.[45] EDM을 라이브로 볼 가치가 있느냐, 단순히 무대에서 CD를 재생하는(CD-playing) 것 뿐이라는 발언을 했다. 2011년에는 EDM은 그 어떤 사람 도 만들 수 있다는 말도 했다.[46] 재미있는 것은 1996년에 노엘 갤러거는 케미컬 브라더스의 Setting Sut이라는 곡에 피쳐링한 적이 있다.[47] 참고로 리암은 이에 대해 "투표를 하지 않고 매사에 의견이 있는 놈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Nothing worse than the cunt who doesn't vote then has an opinion on everything)"는 트윗을 올리며 노엘의 태도를 비판했다.[48] 따라서 로저 워터스같은 급진 진보주의자들과는 다르다.[49] 노엘은 브릿 어워드에서 수상 소감으로 토니 블레어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적도 있고 노동당이 발간하는 잡지에 "토니 블레어의 연설에 눈물을 흘렸다"는 인터뷰도 했다. 당시 노동당의 노선은 젊음과 신선함이기도 했고 노엘의 이런 행보가 이쁘게 보였는지 노엘은 토니 블레어의 파티에 초청받아 다우닝 가 10번지에 방문하기도 했다. 오아시스의 선풍적인 인기는 노동자 계급의, 이른바 아웃사이더들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당시의 대중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에 상당부분 기인하는데 노엘이 총리 관저에 방문하자 '노동자 계급 출신이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상류층의 일부가 되었다'며 많은 대중들이 노엘에 실망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노엘은 "약에 취한 상태에서 총리로부터 술 한잔 하러 오라는 편지를 받아봐라. 거기에 안 갈 사람이 있겠냐"며 나름의 자기 변호를 했지만 리암이 "은 거기에 환장(mad fer it)해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정치적으로 꽤나 진성이었던듯. 여담으로 리암은 초청받지 못했고 만약 받았더라도 관심 없어서 안갔을거라 한다. 오아시스의 라이벌이었던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초청은 받았지만 자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게 뻔해서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50] '그러니까 우리 밴드가 예수보다 크다고 했지. 근데 내가 말한건 키가 크다고 말한거야. 예수는 5피트 7인치(약 170cm)라고 알고 있거든. 나는 5피트 8과 1/2인치(174cm)지.'[51] 참고로 5피트 7인치는 약 170cm이다. 위의 프로필 키 170인 제이크 버그보다 약 3~4cm 정도 더 큰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못해도 5피트 8인치(173cm)는 된다. 위의 인터뷰에서도 '예수는 5피트 7인치인데 나는 5피트 8 1/2인치 정도 된다'라고 하는 등 소개가 자주 바뀌는 경향이 있다.[52] 그런데 영상이나 사진에서 보아도 확실히 동생인 리암보다 체구가 작다.[53] 딱 그 키에 맞는 몸무게 혹은 살짝 마른 편이다.[54] 아이팟에 음악을 넣는 것도 겜 아처가 대신 해줘야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