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미스
1. 개요
The Smiths. 영국 맨체스터 출신의 밴드로, 조니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와 모리세이의 사춘기 정서가 넘치는 가사로[1] 80년대 영국 록을 주름잡았다.[2]'''비틀즈 이래로 어떠한 영국 그룹보다 많은 영향을 불러 일으킨 밴드.'''
― BBC, 2013년
그들은 '''80년대 영국의 인디씬을 강타한 전설적인 밴드'''이자 '''후대의 브릿팝과 인디 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3] 로 평가받는다.
2. 결성
더 스미스는 집에 틀어박혀서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딘에 몰두하며 시와 평론을 쓰고 그것을 틈틈이 잡지에 발표하던 모리세이를 눈여겨 본 조니 마가 모리세이의 집에 쳐들어가서 같이 작사-작곡 콤비[4][5] 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6] 마는 집에만 있는 모리세이와 친해지기 위해 모리세이의 지인인 스티븐 폼프릿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그와 모리세이의 집에 갈 수 있었다. 폼프릿은 모리세이가 조니 마에게 아무 관심도 없을거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 달리 모리세이와 조니 마는 음악적으로 공통점이 아주 많았다. 조니 마가 자서전에 묘사하기를, 모리세이는 마를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좋아하는 싱글을 틀어보라고 했는데, 마는 60년대 걸그룹 The Marvelettes의 싱글 'Paperboy'를 골랐고 그에 모리세이는 "Good choice" 라고 얘기했다. 마는 그 싱글의 B-Side인 'You're The One'을 틀었고 그걸 좋아한다는 표시로 따라 불렀다. 그리고 모리세이 역시 B-Side에 있는 곡을 더 좋아했다.[7] 폼프릿의 증언에 따르면 모리세이를 만나고 오는 길에 조니 마는 단 한마디 말만 했다고 한다. "이건 미래야" 라고. 대박을 직감한것. 밴드 이름은 당시 유행하던, 프랭키 고스 투 헐리우드(Frankie Goes To Hollywood)[8] 같은 긴 이름에 대항하여 간단하게 지었다고 한다.[9]
이후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10] 를 영입한다.[11] 그 후 모리세이와 마가 지난 해부터 틈틈히 만들어 놓은 곡을 가지고 데모테잎을 제작하나 조이 디비전을 배출한 전설적인 맨체스터의 음반사인 팩토리 레코드와의 계약은 불발되었다. 이와 관련해 모리세이는 2013년 자서전에서 팩토리 레코드의 사장인 토니 윌슨이 버즈(The Byrds) 노래 들고 장난치지 말라고(...) 한 소리를 했다는 주장을 했다.# [12] 하지만 토니 윌슨은 다른 주장을 했는데, 당시는 레이블 설립 3년차였으며 뉴 오더의 Blue Monday가 히트하기 전으로, 레이블의 상황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스티븐(모리세이)과 그의 훌륭한 밴드가 다른 레이블에 가길 바랐다고.# 또한 윌슨에 따르면, 팩토리 레코드의 또다른 사장인 Rob 또한 스미스를 좋아했고 스미스가 제2의 비틀즈라고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닌 사람이었지만 Rob의 입장에선 스미스의 데모가 끔찍하게 구려서 계약을 거절했다며, 괜찮은 데모를 가져오면 계약 맺었을 것이라 덧붙였다.# 이후, 행동력있던 조니 마가 데모테잎을 가지고 상경해 런던의 인디 레이블인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에 쳐들어가서 몇 시간을 기다려 사장 제프 트래비스를 만난다. 마는 트래비스를 만나자마자 "이런 거 어디서도 못 들어봤을 겁니다."라고 하며 데모테잎을 건네줬다고.# 스미스는 그 테잎을 좋게 들은 러프 트레이드와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13]
3. 활동
스미스는 1983년 <Hand In Glove>를 싱글로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시작하였고, 두 번째 싱글 <This Charming Man>이 성공을 거두면서 영국 싱글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그 직후 'The Tube'를 통한 방송 데뷔, 'Top Of The Pops[14] ' 출연#[15] , 세 번째 싱글 <What Difference Does It Make?>의 영국 싱글 차트 12위 기록에 힘입어 전국적인 지명도를 확보했다. 1984년 2월, 데뷔 앨범 <The Smiths>를 발표하여 영국 앨범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대박을 터뜨렸다.[16] 스미스는 무명시절이 없이 등장하자마자 대중들과 평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모리세이는 훗날 이것에 대해 "우린 성공을 위해 준비(preparation)는 했지만 결코 노력(effort)을 할 필요는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그 해 말에는 BBC 라디오에서의 라이브와 싱글 B-side 곡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Hatful Of Hollow>[17] 를 발표했다. 그 해 글래스톤버리 페스티벌 피라미드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로 섰다.스미스 공연 중 무대 위로 난입하는 관객들[* 지금의 글래스톤베리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 낙하산을 타고 무대를 침범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관중들의 무대난입은 스미스-모리세이 솔로활동까지 이어지는 전통이나 다름 없다. 관중들의 목적은 대개 모리세이에게 키스하거나 그를 껴안는 것이다.]
1985년 2월, 모리세이의 주관이 확실히 드러난 앨범인 2집 <Meat Is Murder>[18] 를 발표하면서 기어이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오른다. 그해 말에는 밴드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3집 <The Queen Is Dead>의 녹음을 끝냈다.[19] 그러나, 앨범은 러프 트레이드 사와의 갈등[20] 으로 인해 1986년 7월에 발매되었고,[21] 앨범 발표 직후에는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가 헤로인 중독으로 인해 밴드에서 해고[22] 당했다가 복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때 크레익 개넌(Craig Gannon)이 임시로 베이시스트를 맡았고 1986년 말, 앤디 루크가 다시 밴드에 복귀한 이후에는 투어의 리듬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다.[23] 이러한 문제들 속에서도 이때가 스미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비평적으로도 <The Queen Is Dead>가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데다가 대중적인 인기도 절정에 다달아 스미스는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밴드가 되어있었다.[24] 마는 훗날에 "개인적으로는 암흑에 있었던 시기였지만 예술적으로는 최고의 것을 창조해냈던 때이다. 락앤롤은 인생을 걸만한 가치는 없는 것이지만 정말 훌륭한 것을 하고 있을 땐 가끔 그럴 가치도 있다"라고 회상하기도.
한편 밴드의 이런저런 일로 힘들어 하던 마는 3집 투어 직전 14살 때부터 사귀던 여자친구 앤지 마와 결혼[25] 하였는데, 모리세이는 마가 결혼하더니 스미스 활동을 소홀히 한다면서 조니 마를 갈구기 시작하였다. 마가 다른 뮤지션들의 세션으로 참여하거나 도와주는 꼴도 못봤다.[26] 후에 조니 마가 록시뮤직의 브라이언 페리와 몰래 작업하고 그의 신곡 뮤직비디오에 나온것을 보고 모리세이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27] 또한 3집 부터 조니 마는 ES-335 등 새로운 기타 사운드와 흑인 음악을 스미스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음악적인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리세이는 흑인 음악의 정서는 스미스의 음악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조니 마가 작곡한 곡들 중 흑인 음악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곡들에는 노랫말을 짓기 거부하였다.[28] 마는 한창 새로운 장르의 개척, 새로운 뮤지션들과의 콜라보레이션에 대한 욕망이 큰 상태였는데 모리세이의 요구로 60년대 여가수들 노래를 커버#s-4[29] 하고 있어야 하니 (자신이 과거에 아무리 그걸 좋아했다 하더라도) 불만이 컸다. 이로 인해 조니 마는 모리세이와의 밴드 활동에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4. 해체
1987년, 메이저 레코드사인 EMI와 계약한 뒤[30] 러프 트레이드와의 마지막 앨범으로 계획했던 4번째 앨범 <Strangeways, Here We Come> 작업을 시작하고, 컴필레이션 앨범 <The World Won't Listen>과 <Louder Than Bombs>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사이 밴드 내부 갈등은 최고조로 올라갔고 조니 마는 밴드 활동에 환멸을 느껴 투어에 불참했다. 이에 모리세이는 대체 기타리스트를 찾아 공연했고 마는 모리세이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다. 이 일로 해체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는 우정이 깨지고 환멸을 느끼게 되면서 그제서야 그들의 음악과 미래의 문제가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해체 직전에 이런일도 있었다. EMI와 계약한 스미스는 본격적인 미국진출을 위해 'Sheila Take a Bow'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뮤직비디오 촬영 당일 모리세이는 또 변덕을 부리며 나타나지 않았다.[31] 스탭들이 당황하여 모리세이를 데리러 그의 집으로 갔다. 마는 그 모습에 "이 밴드는 끝이야"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상술하였듯이 스미스를 인디밴드에서 상업밴드로 만들고 미국진출을 하는 것에 망설였던 사람은 오히려 마였다. 마는 밴드 활동의 안팎을 돌봐야 하는 스트레스와,[32] 이 사건으로 모리세이에게 아주 조금 남아있던 애정마저 없어짐을 느끼며 바로 다음달 LA로 도망갔다.[33] 발빠르게 이 사실을 알게 된 NME는 조니 마가 밴드를 떠났고 스미스는 해체할 것이라는 기사를 냈는데, 마는 그 기사가 모리세이의 언론플레이의 결과라고 오해하고[34] 최종적으로 밴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렇게 영영 밴드를 떠났다.
결국 해체의 중요 원인은 스미스의 유명세로 인해 밴드 안팎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마가 팀을 떠난 것에 있다.[35] 해체 후 마는 스미스의 엔지니어에게 "오늘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일어날 수 있었어. 난 더이상 스미스가 아니니까"라고 했다. 모리세이는 새 기타리스트인 아이버 페리(Ivor Perry)를 영입하여 마의 공백을 메꾸고 더 스미스의 활동을 지속하려 얼마간 노력하였으나 당연하게도 그가 마처럼 하지 못하자 작업 도중 스튜디오를 뛰쳐나갔다. 모리세이는 스미스를 지속하는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Strangeways, Here We Come> 발매 직후 스미스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갑작스런 해체에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리암 갤러거의 증언에 따르면 스미스가 해체를 발표한 날 맨체스터 사람들은 '목 잘린 닭'처럼 어쩔줄 모르며 서성댔다고. 해체 직후 덴버의 라디오 방송국에는 어떤 미친 스미스 팬이 난입해 DJ에게 총을 겨누고 스미스 노래를 계속 틀도록 협박해서 결국 5시간 동안 스미스 노래를 튼 사건[36] 도 있었다.
해체를 주도한 것은 마였으며 그래서 지금까지 그걸로 까인다.[37] 모리세이는 밴드의 활동 재개를 원했다.[38] 실제로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베이시스트였던 앤디 루크의 곡들을 솔로 앨범에 수록하였고 1988년 자신의 솔로 1집 투어의 하이라이트로 울버햄튼에서 열릴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스미스의 멤버들을 모두 불러서 공연을 하고 이후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하여 스미스의 재결성을 천명하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한다. 다른 멤버들은 모리세이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조니 마는 스미스를 재결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공연에도 불참하였다.[39] 모리세이는 이 때의 조니 마가 보여준 태도에 크게 실망하며 직후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스미스를 조니 마는 너무 손쉽게 끝내버렸다."라며 공공연히 조니 마를 비난하였고 3년 동안 투어를 돌지 않는다.
2013년에 발간된 모리세이의 자서전에 1992년 모리세이에게 쓴 마의 편지 전문이 있는데, 여기서 마가 왜 그렇게 완고한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 있다.
Dear Moz,{{{#!wiki style="width=100%"
Sincere thanks for your letter last week and for your concern. I do realize that it must have taken a lot of brainache/heartache to have gotten in touch. The main thing that I want you to know is that I really regret us not being friends. I've only recently come to realize that you genuinely don't know all the reasons for my leaving. To get into it would be horrible, but I honestly hated the sort of people we became. I have no ambitions to be a solo guitar player. I will never point the finger at anyone but myself, and I am glad I took a step towards making my life sane.
After getting your postcard I felt that the only way to explain things would be to come round and see you personally. I also felt bad that you were so unhappy and it's only circumstances that made it possible.
I hope I see you soon.
Love, Johnny}}}
''' 모즈에게, 지난주에 보내준 편지와 배려 고마워. 연락하기 위해서 분명 머리도, 마음도 많이 아팠을 거라는 거 알아. 무엇보다도, 더 이상 우리가 친구가 아니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걸 네가 알아줬으면 해. 내가 왜 떠났는지에 대해 네가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되었어.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끔찍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 싫었어.[40] 난 솔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은 야심같은거 없어. 나 아닌 누구도 탓할 생각 없고, 그냥 내 생활을 정상적으로 되돌리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는 게 기뻐. 너의 엽서를 받고 나니, 이런 얘기들을 자세히 하려면 널 직접 보는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많이 우울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내 마음도 속상하지만. 조만간 볼 수 있기를 바라. 사랑을 담아, 조니 ''' }}}{{{#!wiki style="width=100%"
이 편지를 쓴 직후 조니 마와 모리세이는 스미스의 노래 'Suffer Little Children'의 배경이 된 지역 Saddleworth Moor에 함께 차를 타고 가 대화를 하였지만 입장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모리세이가 뮤지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자 그때는 모리세이 쪽에서 재결합을 거절했다. 1994년 모리세이는 "새삼스레 스미스 앨범의 재발매라구요? 지금 내게 있어 스미스란 강둑에 말라붙어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와 다름없는 의미일 뿐인데도 말입니까"라고 말하면서 더 스미스 앨범들의 CD판 발매를 반대하기도 했다. 또 "스미스를 재결합 하느니 내 불알을 먹겠다(...) 이게 채식주의자에겐 최선이지", "우리가 예전처럼 한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방법은 다 총으로 쏴죽여서 시체를 한 구 씩 갖다놓는 방법밖에 없다." 등의 악명높은 발언을 했다. 2010년대 들어서 오히려 조니 마는 과거의 태도와 달리[41]앤디 루크와 종종 협연하기도 하였다.[42] 스미스 시절의 트라우마에선 벗어난건지 최근에는 스미스 곡을 연주하고 노래도 그냥 자기가 직접 부른다. 현재의 조니 마도 재결합에 대해 회의적이긴 하지만. 모리세이도 물론 백밴드와 함께 스미스 곡을 부른다.[43] 조니 마의 공연 실황에는 '노래를 모리세이가 불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댓글이 달리고 모리세이의 공연 실황에는 '저 백밴드들 치우고 조니마를 데려와라'라는 댓글이 달린다. 노엘 갤러거도 딱 이런 요지로 스미스 재결합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1995년 베이시스트 앤디 루크와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 심지어 크레이그 개넌까지 모리세이와 조니 마에게 스미스 시절 저작권료와[44] 투어 로열티 미지급 문제로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 루크는 합의 후 소취하, 조이스는 승소하였다. 모리세이는 "더 스미스는 나와 조니 마의 것이고 니네는 언제든 대체 할 수 있는 '''잔디깎이'''나 다름 없었어!"라고 하면서 크게 분노하였다. 소송계속의 의욕이 없었던 조니 마도 같이 깠다. 물론 스미스의 리듬파트는 그들만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 특히 앤디 루크는 많이 과소평가 되었고 현재에 와서 재평가 받는 중. 모리세이가 이 사건을 계기로 마이크 조이스에게 바친 노래가 'The more you ignore me, the closer I get'#감미롭다. 모리세이는 지금도 조이스라면 극혐한다(...) 1997년까지 이어진 이 소송 이후 모리세이는 2004년 복귀할 때 까지 솔로 활동을 중지하였으며 팬들과 언론이 계속해서 밴드의 재결성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도 더 스미스가 재결합 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된다.
모리세이와 마가 스미스 재결합공연을 위해 오퍼받아온 금액은 500~600억정도(!)가 평균. 3번의 공연에 말이다. 물론 모두 거절하였다. 모리세이가 최근 받은 가장 매력적인 오퍼는 2012년 코첼라 록 페스티벌에 모리세이와 마 둘만이라도 '''스미스로서''' 헤드라이너#s-1를 서준다면 그 해 코첼라에 있는 모두가 채식을 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45] 머리를 굴려 돈이 아닌 다른 미끼를 던졌지만 물론 재결합 공연은 없었다. 진지한 얘기는 아닐테지만, 마는 스미스 팬인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재결합을 고려해보겠다고 말했다. 2006년 인터뷰에서 모리세이는 "이것은 돈에 관련된 게 아니고, 매우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단순히,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노래할 순 없거든요."라고 얘기했다.# 2008년 모리세이와 마가 재결합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46] 하였지만 다시금 둘 사이에 불신이 싹터 무산되었다고 8년이 지난 2016년에 밝혀지기도 했다.#
5. 해체 이후
조니 마는 프리텐더스, 더 더[47] , 일렉트로닉, 모디스트 마우스, 크립스#s-3 등의 여러 밴드를 돌아다녔다.[48] 국내 락빠들은 더 스미스 이후 조니 마가 있었던 밴드들을 듣보잡이라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모디스트 마우스는 2007년에 낸 앨범 <We Were Dead Before the Ship Even Sank>가 빌보드 1위까지 올라간 밴드. 그것도 조니 마가 밴드에 합류한 뒤에 녹음한 앨범이다. 그러나 그의 레전드로서의 영향력이나 대우는 별론으로 하고, 모리세이만큼 성공적이고 일관된 커리어를 잇지는 못했다는게 중론. 하지만 본인이 어느정도 의도한 부분이 있다. 크립스#s-3나 모디스트 마우스 같은 밴드들은 밴드 자체가 조니 마 개인보다 인지도가 낮은데도 그들의 음악과 같이 작업하는 것에만 끌려 함께 활동하는 등. 2010년대부터는 솔로로 활동하면서 인셉션이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같은 영화 음악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2013년 첫 정규 솔로앨범 <The Messenger>를 냈고 호평에 힘입어 바로 그 다음해 두번째 솔로앨범 <Playland>를 냈다. 평이한 보컬과 구린 앨범 커버와 비디오는 단점이지만 역시 클라스가 있다보니 음악은 좋다라는게 일반적인 평. 2018년 6월에는 3집 정규앨범 <Call The Comet>을 발매하였다. 마치 스미스 때처럼 정력적으로 음악을 만들어내고있다.
모리세이는 왕성한 솔로 활동을 했다. 대표작으로는 1988년 작 <Viva Hate>와 1992년 작 <Your Arsenal>, 1994년 작 <Vauxhall & I>, 2004년 작 <You Are The Quarry>가 있다. 2002년부터는 할리우드로 이주해서 활동하고 있으며, 앨범을 엄청나게 많이 팔지는 않지만 현재도 일단 발매하면 영국 차트에서는 5위권 내이고 빌보드에서도 10위권 초반. 라이브 투어는 인기가 많아서 LA에서는 아레나공연임에도 늘 매진이고 다른 지역 투어도 꾸준히 다닌다. 특히 LA와 멕시코에서 인기가 대단하다. 드물게 미국에서 성공한 영국 뮤지션. 요즘 사람들에겐 뮤지션보다 하나의 아이콘으로 여겨진다. 모리세이의 자서전은 무려 펭귄클래식에서 발매되었다. 스미스 때부터의 온갖 기행과 신랄한 독설로 여전히 팬과 안티가 많다. 스미스는 모리씨의 기행 버프를 받아서 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모리씨가 없었으면 스미스는 좀 더 순수한 록큰롤밴드가 되었을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공연 중 관객이 던진 플라스틱 물병에 맞고 라이브를 중단한 적도 있었다. 유명한 토크쇼들에 나오고, 노벨상 축하공연을 하는가 하면 슈프림 콜라보레이션 등등 락스타로서 모든걸 누리며 산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마이크 조이스와 앤디 루크는 소송 이후부터는 주로 함께 활동하고 있다. 시네이드 오코너, 스톤 로지스의 멤버였던 아지즈 이브라힘,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폴 본헤드 아더스 등 여러 뮤지션들의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스미스의 베스트 앨범은 꽤 많이 나왔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2008년 조니 마가 직접 리마스터링하고 모리세이가 타이틀을 지은 'The Sound of the Smiths'. 입문용으로 적당하고 호평이 많다. 2012년 전 앨범이 리마스터링되어 재발매되었다.
2014년부터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스미스가 미국에서 활동을 하지 않아 인지도가 인지도인 만큼 헌액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는게 중론.
6. 영향
스미스는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의 인디밴드였는데 어떤 곡을 쓸지, 어떻게 만들지, 언제 어떻게 발표할지부터 앨범 커버와 무대구성 등 세세한 컨셉 하나하나까지도 모리세이와 마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었기 때문이다.[49] 따라서 그들의 개성이 스미스 그 자체였다.It’s amazing to think that what we did still means so much to so many people. From the very first writing session that Morrissey and I had in my attic lodgings, we were excited and high with it. We couldn’t get our ideas out fast enough and that feeling remained in the studio for all of us when we were making the records. Greatness is the best achievement, greatness and recognition from your peers and other artists you respect. We had and still have that, plenty of other stuff too, good and bad and dramatic. But that’s The Smiths. We loved each other and we loved what we were doing more than anything. That’s probably why we still sound good. There’s love in it, inspired musicians, great words and some pretty good tunes, too.“Bless you.”
'''우리가 한 일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것을 의미하다니, 생각해보면 굉장한 일이군요. 내 다락방에서 했던 첫 송라이팅 세션 때, 모리세이와 나는 흥분하며 잔뜩 고양돼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아이디어를 가능한 빨리 뽑아내어서, 그 느낌이 남아있는 동안 스튜디오에 가 레코드를 만들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몰랐죠.위대함이란 것은 최고의 성취입니다. 위대함 그리고 당신의 동료와 당신이 존경하는 다른 아티스트들에게서 인정받는 일 말입니다. 우린 그걸 가졌었죠. 지금도요. 우리의 많은 작업물들과 함께 말입니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또 너무 극적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스미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우리가 하고 있었던 것들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음악이 아직도 좋게 들리는 이유일테죠.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영감을 줬던 뮤지션들, 훌륭한 언어들과 꽤 근사한 튠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
조니 마의 찰랑거리는 기타 사운드는 지금도 많은 밴드가 참고하고 있다. 1980년대 당시에 주류 기타 연주라고는 70년대 메탈장르의 기타 솔로 중심의 잔재나, 펑크장르의 3개 코드만을 사용하는 단순한 기타스타일 등으로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화를 중시하는 조니 마의 시도는 신선하면서도 60년대 전통으로의 회귀였다. 기타라는 악기의 본연의 특성에 충실한 그의 스타일은 이후 90년대 브릿팝 사운드의 기반이 된다.[50] 물론 당시에도 펠트, 아즈텍 카메라 등 찰랑찰랑 거리는 기타 사운드를 내세운 팝 밴드들이 있었지만, 몇십 트랙의 기타 음을 채워넣고 또 채워넣어 빈틈없는 사운드를 만드는 조니 마의 시도는 굉장히 독특한 것이었다. 스미스의 모든 곡을 작곡하고 실질적으로 밴드의 음악적 브레인이었던 조니 마의 기타 철학은 '음을 낭비하지 않고 반드시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음을 채워 넣는 것'. 또한 장단조를 넘나들며 기묘한 코드 진행의 작곡법은 사춘기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웨이드의 버나드 버틀러 등 브릿팝의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조니 마 항목 참조.
모리씨는 보컬과 노래가사 뿐만 아니라 팀명, 앨범명, 앨범 커버아트[51] , 의상, 무대소품[52] , 무대매너 등에 고유의 개성을 담아냄으로써 스미스의 독창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53] 모리세이의 가사는 사춘기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담으면서도 뭔가 싸이코틱하며, 날카로운 단어 선택이 돋보이고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는 지성미가 넘친다. 무엇보다 블랙 코미디의 진수인 그의 가사는 엄청나게 많은 추종자를 자아냈다.[54] 가사 일부 번역, 스미스 시절부터 공연장에서는 모리세이에게 날아오는 부겐빌레아 꽃[55] 과 모리세이와 포옹하려고 무대 위에 난입하는 관객들로 야단법석이었다.스미스 시절 깽판 조니 마가 곤혹스러워했던 공연 모리세이의 솔로 시절 자행된 대규모 깽판. 마지막 곡 Everyday Is Like Sunday를 보아라! 스미스는 이러한 관객들의 스테이지 인베이전을 적극 부추기고, 멤버들이 입장할 때는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을 틀어놓는 등 다른 밴드들이 시도하지 않은 특이한 공연문화를 고안해 냄으로써 점점 더 특별해졌다.
한편 스미스 전반을 지배하는 컨셉은 무엇보다 호모섹슈얼리티라고 할 수 있는데, 조니 마와 모리세이가 품고 있었던 70년대 락음악과 컬쳐의 마초스러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이 표출된 결과다.[56] 첫번째 앨범 The Smiths[57] 를 비롯해 여러 싱글의 앨범 커버를 게이 포르노에서 크롭한 것[58] 이나 드랙퀸의 사진을 썼으며 대표곡 'This Charming Man'을 비롯해 많은 노래가 남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 노래 하고 있다. 물론 대놓고 하지는 않고 은유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룬 노래도 없지는 않는 데, 이의 경우는 여자를 불신하거나 저주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남자로 추정되는 화자가 여자랑 결혼하려는 남자를 질타하는 노래(William, It Was Really Nothing)[59][60] , 도 있다. OUT 매거진이 게이 예술가들을 상대로 설문한 가장 게이적인 앨범 100선에서도 스미스는 단일 아티스트로는 가장 많은 앨범을 리스트에 올렸다.# 영국 퀴어 시네마의 거장 데릭 저먼은 스미스의 뮤직비디오들을 만들었다. 한편 이런 동성애적인 성격은 모리세이의 솔로시절 더욱 두드러지는데,[61] Your Arsenal[62] 같은 앨범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다만, 최근 모리세이의 주요 팬층을 차지하고 있는 히스패닉은 마초적인 정서를 가진 이들이 많다. 히스패닉들은 모리세이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데[63] 막상 스미스나 영국 록 음악에는 별관심이 없는 희한한 인기.
스미스의 영향력은 음악에만 국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릿팝 조류에 있었던 밴드가 아니더라도 90년대 영국 밴드라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거의 모두 스미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는 그들의 노래 <1985>의 가사에서 'In 1985, my words they came alive, friends were made for life, Morrissey and Marr gave me choice.(1985년, 내 말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고 동지들이 생겼다. 모리세이와 마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라고 노래했다. 한편 피트 도허티[64] 나 크리스 마틴같은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뮤지션들도 스미스가 음악을 하게 한 원천 중 하나라고 밝히기도.
스미스는 음악적으로는 스미스만의 완전한 오리지널리티로 계속해서 뮤지션들에게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소외받은 계층의 조용한 분노를 대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스미스는 당시에는 5년 밖에 활동하지 않은 영국의 인디밴드였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치며 하나의 팝 아이콘이 되었다.
7. 음반
7.1. 정규 앨범
- <The Smiths>, 1984년
- <Meat Is Murder>, 1985년
- <The Queen Is Dead>, 1986년
- <Strangeways, Here We Come>, 1987년
7.2. 라이브 앨범
-
, 1988년[65]
7.3. 컴필레이션 앨범
7.3.1. 활동기간 중 발매
스미스의 대표곡들은 정규 앨범에는 없고 컴필레이션에만 수록된 싱글곡인 경우가 많아, 스미스를 제대로 듣고 싶다면 아래 앨범을 필청해야 한다.
- <Hatful Of Hollow>[66] , 1984년
-
, 1987년 -
, 1987년
7.3.2. 해체 이후 발매
-
, 1992년 - <...Best II>, 1992년
-
, 1995년 -
, 2001년 -
, 2008년 -
[67] , 2011년
8. 여담
- [image]
- 스미스하면 바로 떠오르는 맨체스터의 Salford Lads Club 앞에서 찍은 사진. Salford Lads Club을 검색해도 제일 먼저 이 사진이 뜬다. 원래는 맨체스터 청소년들을 위한 실내체육관이다. 안에는 스미스 전시관이 따로있어서 덕후들의 성지순례장소. 참고로 조니 마는 이 사진을 싫어했다. 자기가 못생기게 나왔다고. 마의 주장에 따르면 모리세이가 자기를 빡치게 하려고 이 사진을 컨펌했다고 한다.
- 조니 마는 크립스#s-3의 멤버로 2009년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에 참여하면서 내한했고, 모리세이는 2012년에 솔로 공연을 열어 내한했다.
-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이 이 밴드의 광팬이다. 스미스가 해체된 날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또한 스미스의 광팬이다. 마는 이 사실에 질색하며 자신의 트위터에 그가 스미스를 좋아하는 걸 허락치 않는다[68] 고 하였다. 모리세이는 블로그에 이 일에 대해 마를 지지함을 밝히면서 캐머런의 취미인 사냥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마는 캐머런이 스스로 내려온다면 스미스를 재결합하겠다고 딜을 하기도... 맨체스터의 노동자 계층 출신이자 아일랜드 혈통인 그들이 캐머런을 싫어하는 건 일리가 있다. 캐머런은 난 스미스의 전앨범을 가지고 있고 마가 뭐라고 하든 그걸 들을것 이라고 응수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의회에서 캐머런 총리와 노동당의원들은 스미스의 노래 'Cemetary Gates', 'I Know It's Over',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등을 인용하면서 서로를 헐뜯었다. 참고로 조니 마는 열렬한 브렉시트 반대파. 다만, 모리세이는 캐머런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브렉시트의 지지자였다. 브렉시트는 아주 멋진 일이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
- 축구 선수 조이 바튼도 스미스의 열렬한 팬이다. 스미스와 모리세이의 가사를 자주 트위터에 올린다. 평소에도 스미스를 자주 인용하고# 모리세이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하기도 한다. 삼촌이랑 'Meat Is Murder'듣고 일주일간 채식주의자도 됐다고. 현지에서도 정말 의외라는 반응. 조이 바튼은 모리세이의 싱글 뮤직비디오에도 나왔다.#
- 스미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개 모리세이의 적들로 특히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와 80년대에 앙숙관계였다. 로버트 스미스는 "모리세이가 고기 먹지 말라고 하니깐 고기를 먹을 거야. 모리세이가 싫으니까." 혹은 "모리세이는 그렇게 우울한데 왜 자살 안하지? 안하면 내가 죽여줄 수 밖에."라고 말한 바 있다. 다만 로버트와 모리세이의 악연은 모리세이가 자초한 일인데, 먼저 인터뷰에서 로버트 스미스에 대한 악담을 쏟아낸 것이 모리세이다. 빡친 로버트 스미스 또한 가열차게 모리세이를 욕하면서 그들은 사이가 험악한 락스타들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관계가 되었다. 2019년 인터뷰에서 모리세이는 "내가 그때 좀 병신처럼 군 건 사실이다."라고 말해 잡지들은 모리세이가 로버트 스미스에게 사과하다?!라는 식의 제목 낚시를 시전했다. The Fall의 마크 E. 스미스도 모리세이의 열렬한 안티다.[69] 요즘 뮤지션들 중에서는 디어헌터의 브래드포드 콕스도 스미스의 안티인데 그는 "모리세이 개거만한 새퀴. 그 때문에 모피가 입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음악도 픽시즈거가 더 조음ㅇㅇ"(...)이라고 하기도. 콕스는 다른 사람이 스미스를 언급하면 그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척 한다(!) 그런데 브래드포드 콕스는 사실 모리세이 캐릭터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할정도로 꽤 공통점이 많다(!)
- 축구 선수 로비 킨은 모리세이와 친척이라 그와 친하다. 로비 킨의 할아버지와 모리세이의 아버지가 사촌.[70]
- 러시아 듀오 t.A.T.u가 스미스의 대표곡 'How Soon Is Now?'를 커버한 버전이 있다.# 조니 마는 이 곡에 대해 '바보같은 커버'라며 역시 신랄하게 깠다.[71] 반면 모리세이는 호평.[72]
- 제프 버클리는 스미스의 'I Know It's Over', 'The Boy With Thorn In His Side'를 커버했다.# 생전 라이브 실황에서 "80년대 음악은 더 스미스를 빼곤 다 구리다"라고 발언[73] 한걸 보면 의외로(?) 스미스 팬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지금도 스미스에 필적할 수 있는 밴드는 없어. 곡이든 가사든 퍼포먼스든. 모리세이와 조니 마가 한 것들은 엄청난 것이었어. 아무도 그정도 수준이 못되지. 만약 내가 (솔로 뮤지션이 아닌) 밴드를 했었다면 그 정도 수준에 가까워지길 원했겠지."라고 하기도# 한편 제프 버클리의 데뷔작 Grace는 모리세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어떤 교류도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광팬이었던 셈. 라디오에 나와 스미스와 모리시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참고
- 라디오헤드는 스미스의 'The Headmaster Ritual'을 커버하였다.#조니 마는 이 곡에 대해 휼륭한 커버라고 칭찬했다. 다만 전에 에드 오브라이언에게 이곡의 리프를 보여줬었는데 그 때 그가 딴 곳을 보고 있었던것 같다고 가볍게 깠다. 라디오헤드는 브릿팝 조류에 있는 밴드가 아니었음에도 스미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톰 요크가 에드 오브라이언을 영입한 이유도 '모리세이처럼 옷입고 다녀서'라고. 다만 라디오헤드를 Radiodead라고 칭한 것을 보면 모리시는 라디오헤드를 좋아하지 않는 듯하다.
- 뮤즈는 스미스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커버하여 싱글에 수록하였다. 이 곡은 주이 디샤넬의 듀오 She&Him의 커버버전도 있다.
- 스미스의 트리뷰트 앨범이나 밴드도 꽤 있는데 잘 알려진것은 'The Smyths'나 멕시코 출신의 모리세이 트리뷰트 밴드인 'Mexrrissey'등이 있다. Mexrrissey는 최근 결성된 밴드로 꽤 반응이 좋아 북미와 유럽 투어도 하고 앨범도 평이 좋다. 그들의 앨범 'No Manchester'에는 모리세이의 솔로곡들을 자기들 식대로 해석한 곡들이 수록되어있다.#스미스 노래들은 마가 허락하지 않아 수록할 수 없었다고.
- 스미스는 오리지널곡 외에 두 곡의 커버곡을 레코딩했고, 다른 뮤지션들의 곡을 커버한 적은 손에 꼽는다. 레코딩된 곡은 60년대 가수 트윙클(Twinkle)의 'Golden Lights'와 마찬가지로 60년대 가수인 실라 블랙(Cilla Black)의 'Work Is a Four-Letter Word' 커버이다. 이 트랙들은 각각 'Ask', 'Girlfriend in a Coma' 싱글의 B-side로 수록되었다. 또한 앨범에 실린 적은 없지만 60년대 걸그룹 쿠키즈(The Cookies)의 'I Want a Boy for My Birthday', 엘비스 프레슬리의 '(Marie's the Name) His Latest Flame', '(Now And Then There's) A Fool Such As I'[74] , 제임스의 'What's the World'등을 커버했다.
- 마타도어 레이블의 시애틀 밴드 '프리티 걸스 메이크 그레이브스(Pretty Girls Make Graves)'는 스미스의 노래 제목을 따서 밴드의 이름을 지었다.
- 영화 500일의 썸머에서 톰과 썸머가 좋아하는 밴드로 나온다. 톰이 엘레베이터에서 스미스를 듣고있자 썸머가 저도 스미스 좋아하는데! 라고 말하고 톰은 그 모습에 홀딱 반한다
- 영화 월플라워#s-2에서 샘과 찰리가 좋아하는 밴드로 나온다. 영화에 나오는 샘의 방은 온통 모리세이와 스미스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다.
- 스미스 자전영화로는 모리세이의 70년대 삶을 다룬 영화 <잉글랜드 이즈 마인>[75] 가 있으며, 조 맹거넬로가 제작하는 스미스 해체 당시를 다룬 영화
가 제작, 촬영과정에 있다. - 마크 스피츠의 소설
은 스미스의 재결합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 델리스파이스의 대표곡 '항상 엔진을 켜둘께'의 가사 '항상 듣던 스미스를 들으며 저 멀리로 떠나자'의 그 스미스가 이 스미스다. 엘리엇 스미스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 듯.[76]
- 영화 범블비에서 주인공 찰리 왓슨은 더 스미스의 팬이다. 범블비에게 음악으로 대화하는 법을 가르킬때 집어넣은 첫번째 테이프가 더 스미스. 근데 릭 애슬리의 앨범과 함께 뱉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 해체하고나서 한참 뒤인 2016년 밝혀진 일인데, 2008년에 모리세이와 마가 맨체스터의 한 펍에서 만나 재결합을 진지하게 의논했다고 한다. 그렇게 몇일간 연락을 주고받다가 조니 마가 공연 때문에 멕시코로 나가고나서 연락이 끊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