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비셔스

 

프로레슬러 시드 비셔스를 찾아오신 분은 사이코 시드 항목으로.
'''Sid Vicious
시드 비셔스'''

<colbgcolor=#00001b> '''본명'''
존 사이먼 리치
John Simon Ritchie
'''국적'''
영국 [image]
'''출생'''
1957년 5월 10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사망'''
1979년 2월 2일(향년 21세), 미국 뉴욕주 뉴욕
'''소속'''
섹스 피스톨즈
'''직업'''
베이시스트, 작사가, 작곡가
'''활동'''
1976년 ~ 1979년
'''신체'''
188cm
'''장르'''
펑크 락
1. 개요
2. 어린 시절
3. 섹스 피스톨즈 활동
4. 낸시와의 만남
5. 솔로활동
6. 죽음
7. 영화 <시드와 낸시>
8. 여담


1. 개요


'''살아가기엔 너무 타락해버렸고[1]

죽기엔 너무 어리다.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

- 비비안 웨스트우드[2]

'''나는 25세 이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산 후에 죽을 것이다.[3]

'''

'''I'll die before I'm 25, and when I do I'll have lived the way I wanted to'''

-시드 비셔스

1970년대 영국 펑크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 펑크의 상징적 인물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스스로도 잘생긴 걸 알아서, 인터뷰 중 "I just cash in on the fact that I'm good looking, and I've got a nice figure and girls like me.(난 잘생긴 얼굴로 돈 벌어먹는 거임. 여자들은 날 좋아하지.)"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본명은 존 사이먼 리치(John Simon Ritchie). 1957년 5월 10일에 태어나 1979년 2월 2일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것도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이러한 짧고 굵은 삶 때문에 인생 자체가 펑크라며, 수많은 팬들에게 레전설급 인물로 추앙받는다. 시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25세 이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산 후에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걸 그대로 실천해버렸다.'''
쟈니 로튼이 키우던 햄스터 '시드니'가 쟈니 로튼의 아버지를 깨물자, 쟈니 로튼의 아버지가 "이 햄스터 완전 사납구만.(Vicious!)"라고 한 것에서 예명이 비롯되었다. 그런데 쟈니는 그 햄스터를 '세상에서 가장 복슬복슬하고 부드럽고 나약한 존재'라고 묘사했다고(...).
밴드를 자주 옮겨다닌 편으로, '수지 앤 더 밴쉬즈'[4]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5]를 거쳐 섹스 피스톨즈로 영입되었다. 참고로 시드 비셔스는 키도 크고(188cm) 얼굴도 잘생겼지만, '''음악가로서의 능력은 제로였다.''' 이 당시 시드 비셔스는 드러머였는데 그의 드럼세트에는 '''심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게 오히려 더 ''''펑크'스러웠다!'''[6]
이 인물의 영향은 일본에서도 워낙 커서, 일본 서브 컬쳐에 등장하는 펑크 록커는 대부분 시드 비셔스의 스타일과 성격을 따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2.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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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의 어린시절.
시드는 버킹엄 궁전의 보안 요원인 아버지 '존 리치'와 히피 어머니 '앤 비벌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시드와 어머니를 남겨둔 채 떠났다. 그 후 앤 리치는 재혼하여 시드는 '존 베벌리'로 개명을 하기도 한다. 한동안은 모자 둘이서 스페인의 이비자섬에서 살기도 했고, 대부분 히피같은 사람들과 우루루 모여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헤로인을 접하고 곧 마약에 중독된 앤은 시드에게 마약을 가르쳐주었고, 시드도 17살부터 마약을 복용하였다고 한다. 정말로 부모를 잘못 만난 셈. 평소 내성적인 시드는 마약만 빨면 펑크의 화신...이 아닌 개가 되어 맹렬하게 날뛰고 자해까지도 서슴없이 하였다.
학교에서 쟈니 로튼과 가까워진 시드는 섹스 피스톨즈의 광팬이 되었다. 시드와 쟈니는 지역 단과대학교(칼리지)의 동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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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와 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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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쟈니가 시드는 사실 패션 잡지 보고 따라하는 찌질이였다고 폭로했다. 데이빗 보위의 머리나 따라하는 '''패션 빅팀'''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펑크 패션으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데에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영향이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7]

3. 섹스 피스톨즈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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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자해한 상처가 남아있다.
1977년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이자 섹피의 대표곡들을 대부분 작곡한 글렌 매틀록이 탈퇴한다.[8] 이에 매니저 말콤 맥라렌은 후보를 물색하다가, 팬심 충만하던 시드를 만났다.[9] 시드는 끔찍한 첫인상을 남겨주었고, 이 똘끼에 반한 맥라렌은 시드를 베이시스트로 데려오게 된다. 베이스를 치지 못하는데도 데려온 것은 단지 펑크정신 때문이라고.
시드는 원래 드러머여서 모터헤드의 베이시스트인 레미 킬미스터를 찾아가 베이스를 배웠지만 실패로 끝났다. 시드에 대한 래미의 평은 "음악가로서는 가망이 없는 녀석."[10][11] 그래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는 기타리스트인 스티브 존스가 베이스 파트를 연주했고, 공연할 때는 시드의 앰프 볼륨을 0에 맞추고 무대 뒤에서 다른 사람이 베이스를 연주하였다. 막장. 근데 뮤직 비디오를 보면 시드의 손이 틀린 위치가 아닌 제대로 된 위치를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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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는 공연에서 약을 빨고서 깨진 맥주병, 면도날 등으로 자해를 하여 강렬한 풩크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데에 일조하셨다. 또한 매니저였던 말콤이 마약을 못하게 하자 자기 몸에 깨진 병을 그어 '약을 줘'라는 글을 써서 공연중에 호소(...)한 적도 있는데, 팬들은 그저 멋진 퍼포먼스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건 사실 이기 팝이 몇 년 전에 이미 하던 짓이다. 실제로 시드 비셔스는 라몬즈이기 팝의 엄청난 팬이었기 때문에 베이스 연주는 라몬즈의 베이시스트 디디 라몬의 연주를, 무대 매너는 이기 팝의 방식을 엄청나게 흉내냈다. 다만 이기 팝과 똑같은 막장짓을 해도 시드 비셔스는 잘생겨서 펑크정신으로 똘똘 뭉친 멋진 오빠로 인기가 높았다는 것.
후에 발간된 쟈니 로튼의 자서전을 보면, '''처음에 시드는 베이스를 배워볼려는 의지가 있었고 그와 더불어 밴드의 분위기도 최고였지만 여자 친구를 잘못 만나면서 밴드가 꼬이기 시작했다'''라고 평하고 있다.

4. 낸시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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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의 과거 모습. 낸시 역시 시드처럼 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평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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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시드와 함께 있는 낸시의 모습.
시드의 짧은 인생을 논할 때 낸시를 빼먹을 순 없다.
1958년 2월 27일에 태어난 낸시 스펑겐(Nancy Laura Spungen)[12]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아이였다.[13] 어릴 때부터 화를 잘 내고 공격적이어서 11살 때는 박물관에 데려다주지 않는다고 엄마를 망치로 공격했다고(...). 13살일 때 처음으로 마약을 시도했고, 2년 후에는 완전한 중독자가 되었다. 17살 때는 집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낸시는 집에서 쫓겨난 후 엄청난 마약값을 감당하기 위하여 매춘부로 일하며 "구역질나는 낸시"로 불렸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별의별 짓을 다 했다고... 미국인인 낸시는 섹스 피스톨즈의 1976년 영국 전국 투어인 "아나키 인 더 유케이 투어"에 게스트로 초청된 쟈니 썬더스의 밴드 쟈니 썬더스 하트브레이커스그루피로서 영국으로 건너온다. 그런 뒤 섹스 피스톨즈를 쫓아다니는 그루피(Groupie)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 여자는 시드를 꼬시는 데에 성공했다!
참고로 런던 펑크들은 당시에 생각보다 마약을 잘 몰랐다고 한다. 시드 비셔스는 워낙 어릴 때부터 마약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런던의 펑크들은 의외로 마약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쟈니 썬더스가 영국에 도착하고 나서 런던의 펑크밴드들 사이에서 마약의 사용이 급증했다고 한다.[14]
쟈니 로튼은 낸시를 정말로 싫어하고 경멸하여, 시드에게 낸시와 헤어지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낸시는 시드와 꼭 붙어있었고, 시드도 밴드 생활을 등한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시드의 자물쇠 목걸이가 낸시의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당시 밴드 프리텐더스(The Pretenders)의 기타 보컬을 맡고 있던 여걸 크리시 하인드(Chrissie Hynde)가 준 것이다. 물론 별다른 의미가 있는 선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 만화가 야자와 아이의 히트작 나나(NA NA)에서도 낸시가 시드의 목에 어떤 의미를 담아 채웠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그 덕분에 낸시의 선물이라는 얘기가 아예 기정사실처럼 굳어졌으나,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시드와 낸시가 마냥 알콩달콩 연애를 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실로 얀데레적인 연인 관계로, 거의 귀를 물어뜯을 정도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하였고, 시드는 18층에서 창문 밖으로 낸시를 매달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애증으로 얽힌 관계...는 아니고 그냥 '''둘이 같이 약빨아서 이런거다(...).''' 실제로 시드는 낸시에게 잘 대해주었고, 낸시도 시드를 잘 챙겨주었다.
그러던 1978년 미국 순회공연 도중부터 낸시는 시드에게 '''네가 밴드의 리더가 돼야돼!'''라면서 시드 비셔스를 부추겼고 이예 시드는 공연을 할 때면 하라는 베이스 연주는 안하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관객에게 쌩뚱맞는 멘트를 날리거나 욕을 해서 관객을 도발시킨 후, 관객이 화가나서 무대로 올라오면 베이스기타로 관객을 구타하는 등 도가 넘은 막장짓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당시 매니저 말콤 맥러렌 또한 밴드가 곡을 쓰거나 재충전을 할 여지를 주지 않고 무리한 투어일정을 잡은데다가 투어 급여를 받으면 '니네들 돈 받으면 어차피 마약 사는데 쓸 거잖아'하면서 급여의 일부로 마약을 사서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꿀꺽하는 등 밴드 자체로도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티브 존스는 '''"마치 아무동네나 가서 묘기 부리는 곡마단이 된 느낌"'''이었다고 하고 존 라이든은 '''"뭔가 속은 것 같지 않냐?"''' 라고 했으니 말 다한듯... 결국 쟈니 로튼은 시드에게 "네 놈이 낸시에 빠지더니 밴드를 소홀히 하는구나."라며 시드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과 크게 싸우고 다음 날, 공연이 끝나고 미야코 호텔[15]의 로비에서 매니저 말콤 맥러렌과 엄청난 싸움을 벌인 뒤 영국으로 날아갔다. 섹스 피스톨즈의 실질적인 해체였다.

5. 솔로활동


이후 시드 비셔스는 프랭크 시나트라My Way, 에디 코크런의 Somethin' Else, C'mon Everybody, 이기 팝의 I Wanna Be Your Dog, No fun등을 원곡을 제멋대로 부른 리메이크 싱글을 내서 솔로활동을 시작한다. 노래 실력은 굉장히 쓰레기로 알려져 있으나 그건 시드가 꼴리는 대로 막불렀기 때문이다. Somthing else는 꽤 나쁘지 않은 노래실력을 보여준다. I Wanna Be Your Dog은 의외로 원곡에 매우 충실하다. 실제로 시드는 이기 팝의 광팬이었다.
My Way
Somethin' Else
C'mon Everybody
낸시는 시드의 새 매니저로 자청하고 나섰고, 맨하튼의 유명 락 클럽인 '맥스의 캔자스 시티'이 시드의 공연 스케줄을 잡아주었다. 사람들은 그 유명한 시드 비셔스를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지만, 정작 공연은 엉망이였다. 시드가 '관객들? 엿이나 먹어라!' 하며 우스꽝스럽게 불렀기 때문. 이 당시 시드 비셔스는 "비셔스 화이트 키즈"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기도 했는데 재미있는건 이 당시 베이시스트가 섹스 피스톨즈의 초대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이었다(...).
이후 둘은 뉴욕의 첼시 호텔에 머무르며 함께 약을 빨았고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 날은 둘이 약에 취해 자신들의 방 침대 매트리스에 불을 질러서 100호실로 방을 옮기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시드 비셔스는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칼을 수집하고 있었고[16] 낸시는 1978년 10월 11일, 타임즈 스퀘어에 있는 칼 가게에서 손잡이에 재규어가 새겨져 있는 5인치 길이의 사냥용 접이식 칼을 사서 시드에게 선물로 주었다.

6. 죽음


다음날인 1978년 10월 12일 아침, 낸시는 100호실 화장실에서 검은색 브라와 팬티만을 입은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낸시의 하복부에는 어제 자신이 시드에게 선물한 칼이 찔려있었다. 시드 비셔스는 낸시의 시체를 발견하자 마자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울면서 호텔 로비의 카운터로 달려와서 '''"당장 앰뷸런스 불러!!!"'''라며 소리쳤다고 한다. 경찰이 도착했을때 시드 비셔스는 울면서 호텔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시드는 "내가 죽였어요. 왜냐하면 난 더러운 개거든요.(I did it because I'm a dirty dog.)"라고 진술했지만, 유죄나 무죄를 입증할 아무런 알리바이도 없었고 다른 용의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길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어지다가, 결국 1979년 2월 1일 시드는 5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리고 다음날인 1979년 2월 2일, 시드 비셔스는 그의 어머니가 석방을 축하한다면서 가져다준 대량의 헤로인을 스스로 투여하여[17] 영원한 잠에 빠져들었다.[18]
유골함이 히드로 공항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바람에 뼛가루가 에어컨 바람으로 공항 사방팔방에 흩어진 것은 시드의 죽음을 더더욱 막장스럽게 장식했다.[19] 어찌 보면 참 끝까지 기구한 인생일지도...지못미...후에 쟈니 로튼이 자서전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불쌍한 녀석.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다니.'''라고 평했다.
참고로 낸시의 죽음에 관해서는 마약 판매상의 짓이다, 낸시와 싸웠던 누군가가 복수를 한 것이다 등 여러 가지 설이 많다. 당시 시드 비셔스가 살던 방에는 마약상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시드 비셔스는 완전히 약에 취해 있을 때가 많아서 정황을 알기 힘들다고 한다. 쟈니는 비록 시드와 안 좋게 헤어졌었으나, 시드는 낸시를 죽일만한 인물이 못 된다며 그가 유죄일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

7. 영화 <시드와 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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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콕스 감독의 1986년작 영화. 첫 주연을 맡은 게리 올드먼은 외모와 더불어 연기 면에서 시드와 상당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특히 My Way를 부르는 장면은 실제 시드의 동영상과 거의 비슷하다. 심지어 눈 까뒤집는 것까지도(...).
My Way 시드 비셔스 ver.
My Way 게리 올드먼 ver.(신고)
그런데 클로이 웨브가 맡은 낸시의 경우는..... 참고로 낸시 역 캐스팅 당시 코트니 러브가 '''"내가 낸시다!"'''라며 당차게 오디션을 봤는데 떨어지고 낸시의 친구인 그래천이라는 단역으로 출연했다(...).
배우들과 실제 커플을 비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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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Chloe Webb & Gary Oldman
'''(우)''' Nancy Spungen & Sid Vicious
쟈니 로튼은 영화를 제작할 때 자신을 포함한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에게는 연락도 한번 안하고 섹스 피스톨즈와 앙숙이었던 더 클래시 멤버들이나 시드 비셔스 어머니의 증언만을 참고해서 사실을 지나치게 미화시켰다고 싫어하였으며, 시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시드의 어머니는 영화 촬영에 협조해주어 시드의 그 유명한 '''자물쇠 목걸이'''를 올드먼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OST는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가 담당하였다.
이 영화에 쓰인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라는 문구가 유명해졌다. 이 명언은 이 분의 등짝에도 새겨져있다.

8. 여담


프레디 머큐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일화가 유명하다. 1977년에 스튜디오에서 우연히 프레디 머큐리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대뜸 "어이, 네가 관객들 앞에서 발레나 춘다는 그 프레디라는 놈이냐?"[20]이라며 비아냥거렸는데[21], 프레디 머큐리는 "오, 사나운 친구구만.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야.''[22]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또라이 같은 시드의 성격상 프레디가 공격적으로 응수했다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프레디가 그냥 부드럽게 넘겨 준 것. 이 건 외의 섹스 피스톨즈와 퀸이 엮인 일화인 그 유명한 빌 그런디 쇼 사태 때문에 두 밴드의 사이가 나쁘다는 인식이 퍼져 있으나, 이 둘 외의 다른 멤버들은 서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서로의 음악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물론 이들도 시드 비셔스를 싫어했던 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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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나나의 등장인물 혼죠 렌의 디자인 모티브가 되었다.
만화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의 펑크 그룹인 딸랑이 걸즈의 보컬인 니나가 동경하는 뮤지션이기도 하다.(장르가 펑크여서 그런듯.) 그 해당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네기시 소이치가 얼떨결에 시드를 패러디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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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아이콘이라고 하여 마약에 쩔은 미치광이의 모습만을 상상하기 쉽지만, 의외로 바보스럽고,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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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FWCW를 오가며 활동한 206cm 144kg의 빅맨 프로레슬러인 시드 레이먼드 유디의 링네임 중 하나였다. 사실 시드 비셔스는 초창기에 잠시 쓴 링네임이며, 사이코 시드나 시드 저스티스 등으로 활동했지만 가장 유명한 가명은 바로 이 시드 비셔스. 전성기 때에는 레슬매니아에서 헐크 호건과 경기를 가졌던 적도 있다. 초크슬램의 원조로도 알려져 있다.

[1] 옛말이라 거의 쓰지 않지만 fast에는 "타락한, 문란한, 망가져버린"이라는 뜻이 있다.[2] 원래는 1972년 웨스트우드가 말콤 맥라렌과 함께 열었던 패션샵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 문구가 시드의 삶과 너무나도 매칭이 잘 되었기에 시드의 사후에 개봉한 영화인 <시드와 낸시>에서 이 문구가 인용되기도 했다.[3] '''이 말을 실천했다.'''[4] 제대로 데뷔하기 전의 수지 앤 더 밴쉬즈로서, 1976년 9월에 열렸던 "100클럽 펑크 페스티벌"(런던펑크 붐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는)에 출연했다. '''놀라운건 이게 이 밴드의 첫 공연이었다.''' 아마도 섹스 피스톨즈와의 개인적 친분에 의해 라인업에 올려진 듯. 이때는 그냥 그런 펑크록 밴드였으나 후에 재정비를 거쳐 어두운 분위기의 펑크록 밴드가 된다. 이 밴드는 포스트 펑크/고쓰 컬쳐의 파이오니어 밴드가 된다.[5] 상당히 괴상한 음악을 연주했던 밴드로, 변변한 공연은 한번도 못했다고 한다. 딱 한 번만 공개 연주를 벌이고 해산한 초단명 밴드. 훗날 레인코츠(Raincoats)의 멤버가 되는 비브 알버틴이 이 밴드에 있었다고 한다.[6] 참고로 섹피와 클랜시 브라더스의 짬뽕이란 평가를 듣는 포그스도 초창기에는 베이스 하나 엎어놓고 옆에 스네어 하나 붙여서(...) 거의 장구나 다름없는 세트를 두드린 적이 있다.[7]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섹스 피스톨즈의 관계는 섹스 피스톨즈 문서 참조.[8] 탈퇴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여러 설들이 있다. 섹스 피스톨즈 측에서는 밴드가 글렌을 짤랐다고 주장하지만, 글렌은 모든 쓰레기 짓들에 진절머리가 나서("sick of all the bullshit") 스스로 그만 뒀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다른 멤버들에 비해 반항적인 성향이 적었던 글렌과 다른 멤버들 간에 융합이 잘 안되었고, 쟈니 로튼과의 밴드 내 주도권 다툼이 주요 원인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자세한 것은 섹스 피스톨즈 문서 참조.[9] 원래는 쟈 우블이 거론되었다. 쟈 우블이나 시드 비셔스나 둘 다 쟈니 로튼의 친구였으나, 시드 비셔스가 좀 더 멋있다는 이유로 영입되었다. 쟈 우블은 훗날 쟈니 로튼이 본명인 존 라이든으로 돌아온 뒤 결성한 포스트 펑크밴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에 베이시스트로 영입되고, 이때 훌륭한 베이시스트로서 활약한다. 아마 시드 비셔스가 아닌 쟈 우블이 밴드에 합류했다면 섹스 피스톨즈의 역사는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록 역사가들은 주장한다.[10] 훗날 시드가 섹스 피스톨즈에 가입하고 나서 그를 찾아가 "레미, 그거 알아요? 제가 섹스 피스톨즈에 들어갔어요! 섹스 피스톨즈의 베이시스트라구요!"라고 말했다. 레미는 당황하며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베이스 칠줄 모르잖아." 라고 말했지만 시드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뭐 어때요, 이렇게 섹스 피스톨즈에 들어갔는데요!"라고 당당하게 말해 그를 당혹케 하였다.[11] 유튜브 God Save the Queen 뮤직비디오 댓글란에는 '시드가 아직 살아있다면 지금까지도 베이스 배우고 있을 거임.'이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12] Spungen의 실제 발음은 '''스펀진'''이다. 하지만 이렇게 쓰는 곳은 전혀 찾을 수 없다.[13] 참고로 유대계 미국인 중산층 가정의 딸이다. 그것도 독실한 유대교 집안이다.[14] 뉴욕돌즈 시절부터 유명한 졍키(마약중독자)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쟈니 로튼의 자서전에 나오는 내용이다.[15] 현재는 호텔 가부키로 이름이 바뀌었다.[16] 당시 뉴욕은 거의 수라도 같았다. 치안도 불안하고 거리 곳곳에 불량배들이 드글대는 도시였다. 이 당시 풍경을 잘 그린 영화가 바로 택시 드라이버서머 오브 샘.[17] 다른 설로는 어머니가 구해다 준 헤로인이 시드 비셔스가 평소에 쓰던것보다 순도가 높은 물건이여서 평소 쓰던 양을 썼다가 과다복용을 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18] 이 점으로 인해 사실상 자살로 여겨진다.[19] 후에 로튼은 재결성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고인드립('''진공청소기가 필요했겠군!''')을 시전했다.[20] "So you're this Freddie Platinum bloke that's supposed to be bringing ballet to the masses."[21] 뜬금없이 발레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프레디가 데뷔 초창기에 라이브 무대에서 입었던 발레 의상 같은 우스꽝스런 코스튬들을 비꼰 것이다.[22] "Ah, Mr. Ferocious, we're trying our best, dear.''[23] 사실 관객들에게 휘말린 것과 독감에 걸린 것 때문에 정말 어쩌다가 그렇게 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