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유웨이
1. 개요
청말민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변법자강운동을 통해 중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입헌군주론자로서 복벽운동을 펼쳤다. 한국식 독음은 강유위다.
2. 생애
1858년에 광둥성 난하이 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지역의 명망있는 학자인 주차기로부터 21세까지 성리학, 양명학을 공부하였다. 주차기의 문하에서 나온 뒤에 요평을 만난 것을 계기로 공양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과정을 지켜보면서 개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향에 사숙 만목초당을 열고 여기서 량치차오 등 제자를 배출하였고, 1895년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청일전쟁 패배로 인해 양무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 개혁을 위한 상소를 꾸준히 올렸고 이로인해 광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결국 1897년 독일 제국의 키아우초우 점령 사건 등으로 청나라의 주권에 상당한 위협이 가해지게 되자,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직접 캉유웨이를 정권에 적극 등용하면서 개혁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이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의 사상적인 면, 즉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과 같은 공교주의에 치우친 측면으로 인해 조야의 지지를 많이 받지 못했고, 1898년 7월 광서제가 서태후의 재가 없이 수구파 대신을 숙청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서 1898년 9월 21일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들이 일으킨 무술정변으로 광서제가 유폐되고,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 간 캉유웨이는 보황회 등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고수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성장한 혁명파와 대립을 하게 된다.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그의 입지는 확실하게 줄어들게 되었고, 1914년 위안스카이의 제제 운동에 반대하며 선통제를 복위시키려는 복벽운동을 일으켰으나 당시 중국은 이미 혁명파와 군벌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실패했다. 그의 공교주의 사상 또한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신문화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16년 위안스카이에게서 호국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량치차오를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1917년 장훈복벽에 참여하여 선통제 복위를 또 다시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말년에는 중국문화 보존활동에 힘쓰다가 1927년 칭다오에서 사망한다.
3. 저서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1891)
《춘추동씨학(春秋董氏學)》(1987)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1898)
《논어주(論語注)》(1902)
《맹자미(孟子微)》(1901)
《대동서(大同書)》(1902)
4. 사후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조리돌림하며 여기저기 거리에 끌고 다녔고, 강유위의 시신의 머리를 잘라 따로 청도시(靑島市)의 조반유리(造反有理) 전람회에 보내 전시했다.
[1] 한어병음으로 you로 적히는 음절은 외래어 표기법/중국어에서 '유'로 적게 규정돼 있는데, 이는 해당 음절을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서 yu로 적는 것의 영향이다. 한어병음 you의 실제 음가는 '여우'나 '요우' 정도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