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런스 토머스
1. 개요
1948년 6월 23일에 태어난 미국의 법조인. 서굿 마셜에 이어 미국 흑인으로는 두번째로 연방대법관이 되었다. 인종차별이 심한 조지아주 핀포인트에서 태어났다. 핀포인트에는 해방된 노예들의 커뮤니티가 있었는데 클래런스의 아버지는 농장에서 일을 했다. 이들 흑인 커뮤니티는 영어 크리올의 하나인 굴라(Gullah)[1] 를 모어로 사용하는 집단이었다.
메사추세츠주의 가톨릭 예수회 대학인 홀리 크로스 칼리지(College of the Holy Cross)(성십자가대학교)[2] 를 1971년에 졸업했으며,예일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여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징병은 척추측만증으로 인해 면제되었다.[3]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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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리 주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1980년대에는 로널드 레이건 정부에서 일했고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대하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흑인이지만 어퍼머티브 액션을 반대하는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자신은 명문 대학인 예일대 로스쿨에서 JD를 얻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혜택을 받아서 들어갔다는 사회의 눈총 때문에 취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겼었다.[4]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정책은 오히려 소수가 사회에 편입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토머스의 이러한 생각은 텍사스 대학교-오스틴의 "Top ten percent plan"[5] 의 위헌여부를 가리는 Fisher v. University of Texas I (2013)[6] 의 긴 보충의견에서도 자세하게 반영되었다. 똑같이 소수인종이라 많은 고생을 한, 같은 연방대법관인 소니아 소토마요르와는 정 반대.[7]
1991년에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에 의해 대법관으로 지명되었다. 상원에서 인사청문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말이 많았는데 예전에 본인 밑에서 일했던 아니타 힐을 성희롱했다는 추문이 돌아서 그랬다. 하지만 브렛 캐버노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52 대 48로 인준 표결을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2017년 기준으로는 대법관 9명 가운데 가장 반대수가 높았다. 그 다음은 도널드 트럼프 때 지명된 닐 고서치(54-45), 조지 워커 부시 때 지명된 새뮤얼 얼리토(58-42), 버락 오바마가 임명한 엘레나 케이건(63-37), 소니아 소토마요르(68-31) 순이다. 이후 브렛 캐버노가 50-48로 2표차 인준되면서 이 기록은 깨지게 됐다.
3. 기타
법관으로서 판결 성향은 아주 보수적인 편으로 진보적인 편이었던 전임자 마셜과 비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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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라 그런지 극우논객으로 유명한 러시 림보와 친해 림보가 결혼할 때 주례를 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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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인 버지니아 토마스(가운데, 2번째 부인으로 1987년 결혼)도 보수주의 운동가로 유명하다. 버지니아는 1991년에 아니타 힐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겨 남편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의외로 종교적으로는 복음주의 성향 흑인 침례교 등이 아니라 가톨릭이다.
4. 관련 문서
[1] 영어와는 말이 잘 안 통할 정도로 다르다고 한다. 다만 1990년대 이후로는 모어 사용자가 500명 수준일 정도로 소수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2] 학부 중심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이다. 미국에는 전통적으로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계열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 여자대학교가 많다. 대개 학부 중심이지만 로스쿨이나 의학 대학원 등의 전문대학원이 아닌 일반대학원은 있다.[3] 지금은 미국이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70년대 이전까지는 복무기간 1년 6개월의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4] 이렇기 때문에 본인의 자서전 『내 할아버지의 아버지』에서 담뱃갑에 붙어 있는 15센트 가격표를 자신의 예일대 로스쿨 졸업장에 붙여 지하실에 쳐박았다고 술회했다. 또한 다른 대법관들에 비해서 초명문대가 아닌 로스쿨을 졸업한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로클럭으로 고용하는 성향도 여기서 나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단, 민주당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 아래서 로클럭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법학도는 절대 뽑지 않는다. 물론,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 중에서 진보 성향 로스쿨 졸업생들이 로클럭으로 일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고 토마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진보적인 로클럭을 뽑을 때도 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로클럭이 자신의 의견의 모순점을 더욱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고.... 또 다른 보수 성향 대법관인 앤토닌 스컬리아도 소위 "카운터 클럭", 즉 자신의 성향과 정반대인 로 클럭을 같은 이유로 최소 한 명은 뽑곤 했다고 한다.[5] 텍사스 주에 재학 중인 고등학생의 상위 10%에 랭크된 학생들은 원서를 제출하면 인종에 상관없이 바로 받아주고, 나머지는 다른 미국 대학 입학과정처럼 입학사정관의 심사를 거쳐야 하는 제도이다. 신입생의 81% 가량이 저 상위 10% 내에 들어서 합격한다고 한다.[6] 연방 대법원이 2013년에 제5항소법원으로 파기환송했다가 다시 대법원으로 똑같은 이름으로 2년 뒤에 다시 상고되었기 때문에 Fisher I, Fisher II로 구분해서 부르도록 한다.[7] 소토마요르는 Affirmative action이 없었다면 자신은 여기에 없었을 거라면서 이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국민투표로 affirmative action을 폐지한 referendum을 무효화시켜야 한다고 올라온 소송(Schuette v. BAMN)에서 자신의 뜻대로 안 되었을 때도 강렬한 어조로 반대의견을 벤치에서 읽으며 다수의견에 강하게 반대했다.(소토마요로와 긴즈버그는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 나머지 여섯은 무효화 되면 안 된다고 주장. 브라이어는 보통 affirmative action에 호의적인 입장이지만 이건 민중의 뜻이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케이건은 오바마 정부 때 송무차관으로 참여한 경력이 있어서 심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인터뷰에서 Schuette 케이스에 썼던 반대의견은 Fisher v. University of Texas Austin 라운드 1에서 쓰기로 한 반대의견을 여기서 썼다고 한다.(본래는 5-3으로 affirmative action 정책이 위헌 판결 났을 거라고 했다. 보수성향+케네디 vs 긴즈버그, 브라이어, 소토마요르. 케이건은 법무차관으로 일한 경력이 있으므로 심리에 참여 불가.) Fisher 라운드 1은 좀 더 rigorous한 테스팅을 적용해서 다시 심리하라는 의견을 내고 연방항소법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소토마요르의 격렬한 반대의견을 읽고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지겠다 싶다고 생각한 다수파 대법관들이 결국 물러나서 협상한 게 저 결과였다고 소토마요르가 밝혔었다. 브라이어와 캐스팅 보트인 케네디가 협상을 주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