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벳 언더그라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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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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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벨벳 언더그라운드
THE VELVET UNDERGROUND
'''
'''멤버'''
'''루 리드, 스털링 모리슨, 모린 터커, 존 케일'''
'''입성 연도'''
'''1996년'''
'''후보자격 연도'''
'''1992년'''
<:><#0C0000>'''후보선정 연도'''||<:><#0C0000>'''{{{#ffd700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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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멤버들. 왼쪽부터
'''The Velvet Underground'''
1. 개요
2. 경력
3. 영향력
4. 여담
5. 대중매체 속 벨벳 언더그라운드
6. 디스코그래피


1. 개요


1967년에 정식 데뷔하여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록밴드.
시대를 풍미하던 루 리드가 활동하던 밴드로도 알려져있고, 이들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들은 후대의 음악 조류를 개척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1세기 장르 중 펑크락과 드림팝은 벨벳 언더그라운드 1집에 뿌리를 둔다. 현대 대중음악에서 그만큼 1집의 영향력은 크다.

2. 경력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로큰롤 음악의 팬이자 비트시인인 앨런 긴즈버그를 동경했던 뉴욕의 비트족 청년인 루 리드[1]와 현대 전위음악, 아방가르드 매니아였던 웨일즈출신 청년 존 케일을 주축으로 하고 기타에 스털링 모리슨을 영입하여 1965년에 결성되었다. 처음엔 드러머가 앵거스 맥리스라는 사람이었으나[2] 그가 밴드를 그만 두어서 이후 스털링 모리슨의 친구였던 짐 터커의 여동생인 모린 터커[3]가 드러머로 영입되었다. 후일 존 케일이 음악적 견해로 인해 탈퇴하고 더그 율이 들어온다.
로큰롤, 리듬앤블루스, 포크 뮤지션인 밥 딜런, 프리재즈 뮤지션인 오넷 콜먼의 팬이었던 루 리드와, 현대 전위음악에 심취해 있었던 존 케일[4]의 만남은 독특한 음악적 화학작용을 낳았다. 루 리드는 존 케일을 통해 라 몬테 영의 미니멀리즘 음악과 드론 음악 등 첨단적인 현대음악을 접하게 됐고 그런 스타일을 차차 로큰롤 음악에 접목시키기 시작한다. 밴드는 뉴욕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특이한 매력과 잠재력을 알아본 앤디 워홀은 후원자 겸 매니저가 되어주기로 하고 자신의 '팩토리'로 불러들여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일종의 종합예술가였던 앤디 워홀은 음악쪽엔 전문가가 아니었음에도 빼어난 직관력과 통찰력으로 벨벳의 음악 창작과 제작에 여러 조언과 건의도 해주었고 이것들이 실제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예를들어 니코라는 독일 출신의 모델이 가진 중성적인 묘한 음색이 벨벳의 음악 분위기를 더욱 이색적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간파하여 니코를 벨벳 1집의 객원 싱어로 참여시킨 것도 앤디 워홀의 작품이었다.[5] 심지어 앤디 워홀이 이러이러한 내용과 느낌의 곡을 만들어 보라고 제안해서 그에 따라 만든 곡들도 있는데, Sunday Morning과 Femme Fatale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콘적인 지위까지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바나나 이미지의 앨범커버 디자인 역시 앤디 워홀의 아이디어였다.[6] 이렇게 벨벳 언더그라운드 1집의 모든 면에 관여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반영시키는 등 앨범 제작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7] 앤디가 통상적인 의미의 음악 프로듀싱을 한 것은 아님에도 1집의 프로듀서라는 크레딧을 받게 된다. 루 리드는 앤디 워홀이 음악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는데도 오히려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쳤으며 그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과 영향을 받았다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8]
훌륭한 멘토(mentor)였던 앤디 워홀과 함께한 루 리드.
당대에는 인기는 커녕 거의 알려지지조차 않았던 비운의 밴드로, 특히 1집 "The Velvet Underground & Nico"는 당시에 미국 레코드점에 배급조차 거의 안돼서 당시엔 들어본 이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지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하드 록, 헤비 메탈 이외의 다크한 음악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이 밴드의 영향은 교과서급이며, 그외에도 수많은 인디/모던록 계열의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에 그들의 음반을 구매한 사람은 몇 안되지만, 그들은 모두 밴드활동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브라이언 이노가 한 바있는데, 이는 벨벳의 영향력을 함축적으로 재치있게 표현한 말로 유명하다. [9]
한마디로 인디 록 등 비주류적인 음악 계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쳐온,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같은 존재이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로큰롤이지만 60년대 클래식 전위음악과 프리재즈의 영향을 받아 미니멀리즘과 즉흥성을 강조한 음악을 했다. 강박증적인 단순 리프와 반복적인 리듬에다가 당시 지미 헨드릭스를 비롯한 록 뮤지션들에 의해 계속 개발되고 있었던 거친 기타 파열음, 즉 피드백이나 트레몰로 주법 등의 거친 사운드를 대담하게 활용하였다. 현대전위음악에 경도됐던 존 케일의 입김이 강했던 두번째 앨범인 White Light/White Heat에서 이런 점들이 극대화되었다. 불협화음과 짐작할 수 없는 구성의, 난해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사운드를 담고 있다. 루 리드와 음악적 성향 차이 등으로 불화를 겪던 존 케일이 결국 밴드에서 퇴출된 후의 음악인 3집과 4집에선 거친 성향이 줄어든 대신 서정성이 두드러진 음악을 추구하였으며, 음악스타일도 로큰롤, 블루스, 컨트리, 포크, 두왑, 스탠더드팝 등 기존 음악에 기반을 둔 보다 수수하고 복고적인 사운드로 회귀하였다. 물론 벨벳 특유의 개성과 번뜩이는 감성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상술하다시피 팝아트의 대가인 앤디 워홀의 적극적인 서포트가 있었던 밴드이기도 하며, 그 유명한 '바나나 커버'가 이들의 1집인 The Velvet Underground & Nico의 커버이다.[10] 음악적 내용 또한 이들의 최고 걸작이라고 여겨지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당대엔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였고, 이에 좌절한 루 리드가 1970년에 음악활동을 접고 회계사였던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기로 하면서 탈퇴하는 바람에 밴드가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그러나 데이빗 보위의 도움으로 음악계에 복귀한 루 리드는 글램록 스타로 재탄생하여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구가해나갔다. 이전에 밴드를 나간 존 케일 역시 스투지스 첫 음반을 프로듀싱하며 프로듀서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로 본격적으로 솔로 커리어를 이어가며 독자적인 음악성도 어느정도 인정받았다. 다만 70년대의 솔로 시절 글램록 스타 대열에 합류하며 꽤 인기를 얻었고 그 후로도 뉴욕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상징하는 아이콘적인 지위를 누렸던 루 리드에 비하면 존 케일은 튀지 않는 조용조용한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이후 벨벳에 대한 재평가 기류에 힘입어 벨벳의 음악이 뒤늦게 인기를 얻게 되자 1990년대에 다시 뭉쳐서 재결합 순회공연을 가졌다. 하지만 순회공연 중 루 리드와 존 케일의 계속된 불화로 인해 순회공연을 중단하고 다시 해체되었다. 그 후 멤버인 스털링 모리슨의 사망으로 인해 재결합 얘기는 더 이상 안 나오고 있다.
명성에 힘입어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되었다. 비록 불화는 깊었지만 루 리드와 존 케일이 시상식에 참석하는 보기 드문 광경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헌데 존 케일 후임 멤버인 더그 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멤버에 끼지 못했는데, 아마도 3, 4집 참여는 세션 취급인데다가 Squeeze 앨범 때문에 밉보인것으로 추정된다. 잠깐이라도 밴드에 기여하던 멤버도 입성된 사례들과 비교하면[11] 부당한 처우가 아닐 수 없다.
정황상 존 케일이 더그 율을 탐탁치 않게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뮤지션들에 대한 악담으로 악명 높은 루 리드인 만큼, 더그 율에 대해서도 인터뷰에서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폭언을 퍼부은 전력이 있다. 하지만 더그 율이 워낙 대인배여서인지 그런 악담을 듣고도 루 리드 솔로 세션 연주자로 참여하기도 했고, 2009년 같이 모여서 대담을 나누기도 한 것으로 보아 둘의 사이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지는 않다. 더그 율과 모린 터커랑와는 사이는 무난했던걸로 언급되며, 스털링 모리슨은 확실히 더그 율에게 호의적였다고 한다. 재결성 당시 라이브 멤버로 들이자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 [12] 여튼 더그 율은 뮤지션 생활로는 잘 안 풀린 편이라, 슈퍼 그룹이었던 아메리칸 플라이어 말고는 경력은 희미한 편이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인 루 리드는 2013년 10월 28일 간 질환으로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간 이식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아서 한때 건강이 호전되기도 했지만 다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서 결국 사망했다.

3. 영향력


벨벳 이전만 해도, 뉴욕에는 별다른 록 밴드가 없었다. 1960년대까지 뉴욕은 재즈, 스탠더드팝, 포크같은 음악이 주류였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밥 딜런우디 거스리보려고 뉴욕으로 갔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들과 러빈 스푼풀[13]이 등장하면서 뉴욕에도 로컬 록 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기존 뉴욕 예술계 영향 때문인지 뉴욕 로컬 록 씬은 미국 타 지역의 로컬 록 씬보다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런 흐름 속에 70년대 뉴욕 펑크씬의 상징인 CBGB 클럽에서 라몬즈, 뉴욕 돌즈, 토킹 헤즈, 텔레비전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밴드들이 나왔으며, 그 후로 소닉 유스, 예예예스, 스트록스[14] 등이 뉴욕 인디록 음악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4. 여담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당시, 안타깝게도 기타리스트 스털링 모리슨은 전년도부터 앓고 있었던 병으로 인해 사망하여 그의 부인 마샤 모리슨과 나머지 세 멤버만 참여하였는데, 멤버들은 그를 위해 쓴 곡 'Last Night I Said Goodbye To My Friend'을 부르면서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곡은 훗날 모린 터커의 솔로 앨범 'I Feel So Far Away: Anthology 1974-2001'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 헌액 소감 발표에서 존케일은 스털링 모리슨을 추모하는 동시에 이런 말도 남겼다.

This of course is shared by three other people sterling, Nico and andy.

이 상은 다른 세 사람과도 물론 함께해야 한다. 스털링 모리슨, 니코, 앤디 워홀.

And this event makes an astonishing point to all the young musicians in the world.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이 세상의 모든 젊은 뮤지션에게 놀라운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that sales are not the be-all and end-all of rock and roll.

(음반)판매량은 절대 락앤롤의 전부가 아니다.

And everyone should be encouraged through inspiration and artistic freedom that is the cornerstone of rock and rolㅣ.

그러니 모두들 락앤롤의 주춧돌이 되는 영감과 예술적 자유에서 용기를 얻길 바란다.

존 케일,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소감발표

음악학교에서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존 케일은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데, 비올라, 바이올린,기타,베이스 기타, 오르간, 피아노, 하프시코드, 키보드, 하모니카, 첼로, 더블베이스, 색소폰, 멜로트론, 첼레스타로 총 14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고 한다.
드러머 모린 터커는 임신 때문에 4집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모 터커'''(Moe Tucker)[15]라는 명의로 간간히 솔로 활동을 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버락 오바마를 사회주의자로 매도하고 티 파티의 시위에 참여하여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를 독려해서, 리버럴, 진보 좌파적 성향이 주류인 벨벳 팬들을 경악시켰다.
사실 모린 터커 뿐만이 아니라 멤버 대부분 사생활에 풍파가 심한 편이다. 루 리드는 키보드 워리어 기질과 더러운 성질 때문에 타계 후 알고 지냈던 지인 폴 모리시에게도 고인드립을 들을 정도였고, 니코는 인종차별/네오 나치 논란에다[16] 마약 중독자로 막장 인생으로 살다가 요절했다.[17] 상대적으로 얌전했던 존 케일도 심각한 마약 중독으로 고생했는데 다행히도 결혼 후 마약을 끊었다고 한다. 그나마 스털링 모리슨과 덕 율은 평온했던 편. 이 중 모리슨은 성격이 좋았던지 결혼 생활도 사망할때까지 갔으며 투병 당시 찾아온 옛 동료에게 짜증 한 번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남은 멤버들도 애도했을 정도.
tvN의 예능 덕후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에서 장기하가 지금은 의류매장이 된 CBGB클럽 장소를 찾아가는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2019년, 철원 고성에서 열리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존 케일의 내한 공연을 확정지었다.존 케일 트위터 오피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존 케일은 앤디 워홀을 저격해서 워홀을 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린 발레리 솔라나스를 미화한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영화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5. 대중매체 속 벨벳 언더그라운드


한국에서는 90년대 영화 접속에 3집 수록곡 'Pale Blue Eyes'이 실리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당 곡은 한석규전도연 사이를 잇는 도구로 나온다. 한국에서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지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저 시절에 청춘을 보냈던 이지훈신세경이 3집을 듣는 모습이 나온다.) 이 비슷한 시기에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스포팅에 루 리드의 곡인 'Perfect Day'가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Pale Blue Eyes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들 중 특히 듣기에 편한 곡들 중 하나이며, 불협화음과 나레이션으로 이루어진 곡, 묘한 퓨전을 시도한 곡 등 심상치 않은 곡들이 많다.[18]

6. 디스코그래피




[1]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한때 하드보일드 소설가 지망생이기도 했다.[2]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밴드 이름으로 하자고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당시 뉴욕 지하세계에 나돌던 어느 포르노 소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3] 당시로선 드물었던 여성 드러머였다.[4] 존 케일은 라 몬테 영이 이끌었던 전위음악 그룹인 시어터 오브 이터널 뮤직 멤버기도 했다.[5] 이에 대해 루 리드는 처음엔 불만을 가졌으나, 니코를 보컬로 참여시켜서 나온 결과물에 대해 대만족하고 감탄했다고 한다.[6] 앤디의 아이디어와 지시에 따라 바나나 이미지를 직접 제작한 건 다른 사람이다.[7] 심지어 앨범 첫 곡은 나른한 분위기의 곡(Sunday morning)으로 하고 다음 곡인 두번째 곡은 대조적으로 강렬한 곡(I'm waiting for the man)을 배치시키는 것 등 곡 배열순서에도 앤디의 구상이 반영되었다.[8] 루 리드가 인터뷰에서 남을 칭찬하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다. 청소년기에 좋아했던 선배 뮤지션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에게 악담을 퍼붓는게 루의 스타일인데(심지어 벨벳 동료 존 케일마저 예외없이 깠다.) 앤디 워홀에게는 밴드 초창기와 1집 제작과정에 워낙 긍정적인 도움만 받아서인지 언제나 좋은 언급을 한다.[9] 다큐멘터리 로큰롤의 역사에서 인터뷰를 한 이기 팝은 벨벳의 앨범을 듣고는 너무나 노래를 못해서 놀랐고, 그래서 원래는 드러머였고 리드싱어를 해본 적도 없는 자기도 노래를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근데 그의 다른 인터뷰에선, 드러머에서 리드싱어이자 프론트맨으로 전환한 계기가 도어즈의 공연을 봤을때 짐 모리슨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게 계기였다고 밝힌 바 있다.[10] 아니나 다를까 프로듀서, 앨범 커버 디자인 모두 앤디 워홀.[11] 롤링 스톤스의 초기 멤버였다가 데뷔 앨범을 내기도 전에 매니저에게 단지 밴드 이미지에 안맞는다는 이유로 정식 멤버에서 강판당하고 로드 매니저나 투어링 멤버 자격으로나마 참여를 했던 이언 스튜어트, 야드버즈의 멤버로써 첫번째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올랐는 데 밴드에서 남긴거라곤 싱글 몇 개와 라이브 앨범 한 장 뿐인 에릭 클랩튼 등.[12] 때문에 스털링 타계 당시 더그가 조사를 써주기도 했다.[13] 러빈 스푼풀은 뉴욕 포크 씬의 연장선상에 있는 록 밴드인지라 사실상 포크록 계열이 아닌 뉴욕 로큰롤 밴드로는 벨벳이 효시라고 할 수 있다.[14] 전위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먼 밴드긴하지만,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영향을 짙게 받은 사운드를 보여주곤 하며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방법론을 차용한 포스트 펑크의 계보를 이은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을 탄생시키기도 한다.[15] '모'는 모린의 애칭이다.[16] 흑인이 싫다며 혼혈 여성을 폭행하고, 유대인 앞에서 반유대적인 발언을 해대는 등 현지에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공연 도중 나치 시절 국가를 불렀다가 폭동이 일어났을 정도.[17] 어이없게도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뇌진탕으로 사망. 니코의 말년은 니코, 1988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18] 당장 저 곡도 가사 내용은 꽤나 변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