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불라 라사
1. 철학 이론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라틴어로 '깨끗한 석판'을 뜻하며, 철학에서는 보통 영어식 번역인 '빈 서판(blank slate)'으로 통용된다.[1] 이 철학 이론은 태어날 때 인간의 본성은 마치 비어있는 서판과 같으며, 이후 각종 경험으로부터 서서히 마음과 지성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백지설, 성무선악설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굳이 타불라 라사의 근원을 소급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근대의 경험론자인 존 로크의 사상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로크는 그의 저작 '인간 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백지(white paper)'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인간은 정보를 처리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로 태어나며, 정보를 처리할 능력은 오직 감각적 경험으로 인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가정은 로크의 경험론에서 핵심 근거가 되었으며, 또한 그가 주장한 자연권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이후 타불라 라사는 경험론자뿐만 아니라 다른 낭만주의 시대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타불라 라사가 내재된 인간의 형태를 '''고상한 야만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마누엘 칸트의 경우 '순수 이성 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경험론을 반박하여 인간의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순수 이성의 존재를 역설하였지만, 후천적 경험을 처리하게 해주는 순수 이성은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결국 사람들간의 차이는 후천적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사람들의 행동 방식의 대부분은 후천적으로 어떤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는 사상은 현대 사회진보세력들의 교육론와 인간론에서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비율이 남성의 비율보다 적은 것은 사회에서 여자와 남자의 일을 규정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완전한 남녀평등이 일어난다면 남성 공학자 수와 여성 공학자 수가 동일해질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타불라 라사가 진화론의 자연선택설, 유전학, 신경생물학과 같은 현대 생물학이 탄생하기 전에 나온 이론이라는 것을 염두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관찰과 실험의 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지적 능력에서 상당한 부분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이미 태어날 때부터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다른 가정에 입양된 일란성 쌍둥이를 추적한 결과,[2] 성인이 된 이후에 측정한 지능에서 선천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후천적 환경 요인보다 7:3 또는 8:2로 더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3] 물론 그렇다고 해도 후천적 경험이 인간의 지적 세계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2. 빈 서판: 인간은 본성을 타고나는가
인지심리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스티븐 핑커의 책으로 상술한 "빈 서판"(tabula rasa) 가설을 반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4] 2003년에 퓰리처 상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다.
이 책에서 핑커는 경험주의자들의 빈 서판 이론과 이와 연결된 두 가지 도그마(데카르트의 기계 안의 영혼,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를 비판한다. 현대 생물학과 실험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지적 능력의 차이 뿐만 아니라 성격의 차이까지 상당 부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이며, 환경적 영향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작용한다. 즉 인간은 자연이 우리에게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도록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또한 폭력성은 인간의 본성에 숨겨져 있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연구 결과를 무시하고 있다.
또한 핑커는 빈 서판 이론에 논리적 결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이 사회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살인이 폭력적인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교육받지 않음'이라는 이유로 죄가 부모를 비롯한 사회에게 돌려져서 형벌을 피하게 되고, 이렇게 풀려난 사이코패스들은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5] 또한 인간의 마음이 환경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가설은 인간의 모든 면을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인 교육을 불러올 수 있으며, 집과 같은 모든 환경을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만드려는 시도를 낳게 되고, 단순히 남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는 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3. 리처드 개리엇의 게임
리처드 개리엇이 엔씨소프트로 이적하고 제작한 게임.
제작비가 1000억원이나 들었을 만큼의 대작이었으나,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망작/괴작이 탄생하였다.
리처드 게리엇은 울티마 5에서 도입했던 NPC가 밥먹고 잠자고 살아 움직이는 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싶어했고, 몬스터가 리젠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최고로 현실적인 세계를 구상했다. 모든 종류의 온라인 RPG에 끊임없는 몬스터의 공급은 중요한 부분이었고, 그냥 때되면 리젠되는 손쉬운 방법으로 퉁쳐오곤 했다. 그래서 타뷸라 라사는 플레이어의 행동이 실제 세계에 영향을 실제로 끼치도록 설계되었다. 외계인은 우주선으로 부대 단위로 투입되고 죽였을 때 재생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이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면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게 사람들이 하는 '게임'이라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는 것. 낮 시간에 학교나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보통 저녁에 많이 모이고 새벽에는 다들 자러 가느라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한데, 외계인 침공이 사람이 많을 때에만 일어난다는 게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무 때나 쳐들어왔다. 사람들이 저녁에 접속해보면 매일매일 파탄나 있는 세계를 복구해나가는 느낌으로 플레이해야했다.
극단적인 악평을 얻은 끝에 '''1달러에 떨이 판매'''되는 굴육까지 당하고 퇴출되었다. 관련기사 인벤 기사 타뷸라 라사가 망한 후에는 플레이어의 행동이 뭔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 게임 세계를 항구적으로 변화시키고 몬스터가 현실적으로 공격해온다는 개념은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여도 게임을 재미없게 해서 망하는 지름길로 여겨지게 되었고, 온라인 게임은 24시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상인, 맨땅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몬스터 등의 비현실을 타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발전되어갔다. 다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등에서 도입된 위상 변화 시스템 같은 것이 약간이나마 이러한 부분을 구현하고 있다.
[1] slate라는 단어에는 납작하고 넓은 돌판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고대에 필기용으로 쓰이던 밀랍판을 뜻한다. 밀랍판을 첨필로 눌러서 글을 썼는데, 밀랍을 다시 잘 눌러서 고르게 피면 썼던 글자를 지울 수 있었다.[2] 키가 유전으로 결정된다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일란성 쌍둥이를 추적하여 밝혀졌다.[3] '지능 발달에서 선천적/유전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은 그 동안 많은 교육학, 사회학, 인문학 분야의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반박되어서, '지능 발달에서 후천적 환경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천적 요인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크다'고 결론을 내린 연구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사실 90년대 이전까지만해도 학계에서 환경 결정론이 우세했으며, 유전자 결정론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들은 1990년 이후부터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환경 결정론자들도 여전히 엄청난 수의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결국 실험 설계와 데이터 분석 면에서는 유전자 결정론이 더 과학적이고 정교한 반면에, 환경 결정론 측의 연구가 수적으로 압도적인 상황이다. 그래서 현재는 대체로 양자를 절충해서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모두 중요하며, 선천적 요인이 후천적 요인에 비해 6:4 정도로 근소하게 앞선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4] 즉 이름이 빈서판인 것은 일종의 반어법.[5] 참고로 현재까지 잔혹한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교육을 통해 교정하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해왔지만, 아직까지 성공적 방법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