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바

 



[image]
'''제호'''
임페라토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1]
'''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2]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술피키우스 갈바[3]
'''생몰년도'''
기원전 3(?) ~ 69년
'''재위 기간'''
68년 ~69년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2. 황제 즉위와 몰락
3. 평가 및 이야깃거리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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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 암살 후 로마 황제가 된 인물. 최초로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가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로마 전통 귀족 가문 출신이며, 본명은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술피키우스 갈바(Lucius Livius Ocella Sulpicius Galba)이다. 황제 즉위 후 이름은 임페라토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Servius Sulpicius Galba Caesar Augustus). 서기 68년, 오늘날의 스페인 중부와 동부 지방에 해당하는 타라코넨시스 속주 총독으로 있을 당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네로 자살 후 혼란기였던 ‘네 명의 황제의 해’의 맨 처음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Servius Sulpicius Galba)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라치오주의 테라치나와 가까운 곳에 있던 시골 별장에서 BC 3년 12월 24일 태어났다. 위에 형 가이우스 갈바[4]가 있었다. 갈바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유한 명문가 리비우스 가의 미인 리비아 오켈리나와 재혼한 뒤, 그녀의 아들로 입적됐다, 이때 그는 양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스스로 양모의 가문명을 넣고 이름도 루키우스 리비우스 오켈라 술피키우스 갈바(Lucius Livius Ocella Sulpicius Galba)로 바꿨다. 그리고 이 이름을 황제 즉위 전까지 계속 사용했다.
갈바의 가문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로마 명문 귀족 가문이었고 로마 상류층 내에서도 매우 부유했다. 그의 직계 조상 중에는 당대 최고의 웅변가로 이름을 날렸던 집정관 세르비우스 갈바가 있었고, 그 외에도 원로원 소속인 인물들이 여럿 있었다. 갈바의 증조부는 세르비우스 갈바의 손자였으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 갈리아 전쟁에서 활약했고[5], 갈바의 할아버지는 정치인이었지만 역사학자로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갈바의 부친은 서툰 말솜씨를 가졌음에도 법정에서는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변론을 펼치는 변호사로 명성을 날렸다.[6] 아울러 갈바의 친어머니 뭄미아 아카이카 역시 카툴루스의 증손녀이자 코린트를 함락시킨 영웅 루키우스 뭄미우스의 증손녀였다. 이런 까닭에 갈바는 본인 스스로 입상을 세울 때 비문에 “퀸투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의 외증손자”라고 새길 정도로 친부모의 가문 모두 고귀한 혈통임을 자랑스러워 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가 소년일 때, 친구들과 황궁을 방문했다가 아우구스투스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이때 소년 갈바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볼 한쪽을 살짝 꼬집힌 뒤 “이 녀석, 나중에 권력 맛을 조금 보겠구나”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들었다고 한다. 갈바의 본격적인 공직 생활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부터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티베리우스 말년에 그가 황제가 될 거라는 소문 탓에 죽을 뻔 했지만 티베리우스가 쿨하게 무시해서[7]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레피다와 결혼했으며 사이에서 아들 두 명을 뒀는데, 아들 두명 모두 갈바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는 사망해 없었다. 전형적인 명문 귀족인 갈바는 이미 없어진 관습조차도 아주 잘 따르는 인물이었다. 또 성품 자체도 크게 모나지 않았고, 예의바르고 교양도 풍부한 데다 법학 지식도 해박했다. 또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진심으로 늘 예의를 갖췄기에 황실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다.[8] 이런 까닭에 한때 소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재혼 상대로 유부남이던 젊은 갈바를 점찍고 그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장모가 소 아그리피나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고, 황족인 그녀를 상류층 부인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의외로 상류층 여인들에게 아내와 사별한 뒤 재혼 상대로 거론되지 못했고, 즉위한 이후에도 홀로 살았다.
그는 법무관에도 못 올라간 할아버지와 달리 티베리우스-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의 치세를 거치면서 법무관, 집정관(콘술), 황제 수행원, 군 지휘관, 원로원 속주 총독 등 로마 귀족들이 거칠 수 있는 ‘명예로운 경력’을 죄다 역임하며 좋은 평판을 얻었다. 또래 귀족들보다 이른 나이에 공직 경력을 시작한 그는 법무관때 코끼리까지 동원한 축제까지 완벽하게 수행해냈고, 휼륭하게 법무관으로서의 업무도 수행했다. 이후 그는 네로의 친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에 이어 집정관(콘술)이 되었고[9], 칼리굴라 생전에는 군대 지휘관과 속주 총독으로 있으면서 엄하고 고된 훈련을 시키는 등 군율을 엄하고 공정히 다뤄 칼리굴라와 원로원에게 칭찬을 받았다. 또 그는 황숙 클라우디우스의 친구였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른 뒤에도 황제에게 친구로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네로 치세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훌륭한 행정 능력을 발휘했다.

2.2. 황제 즉위와 몰락


네로가 민심을 잃고 각처에서 반 네로 운동이 68년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를 시작으로 불길처럼 일어났다. 이 당시, 이를 주도한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 율리우스 빈덱스는 3월 네로 탄핵을 외치며 봉기할 때 이를 이끌 적절한 인물을 급히 찾았다. 그리고 그때 그와 반 네로파들에게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이룰 적임자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갈바였다.
타라코넨시스 총독이던 갈바는 고령임에도 빈덱스의 반란이 심각한 것을 알고, 대망을 품고 부랴부랴 빈덱스와 오토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는 4월 3일 자신의 임지인 카르타고노바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갈바는 루시타니아, 바이티카, 이집트,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총독들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지지케 한 뒤 동의를 받아냈다. 아울러 그는 휘하에 단 1개 군단 밖에 없었음에도 다른 총독들이 자신을 지지한 것을 의식해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이런 가운데 라인 강 일대의 군단병들이 네로의 명에 따라 5월 빈덱스를 제압했는데, 그들은 고령의 갈바 대신 자신들의 사령관 루푸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푸스는 본래부터 제위에 야심이 없는 터라 이를 거절했고, 갈바의 제안도 무시했다.
한편, 로마에서는 네로의 악랄한 두 근위대장 중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한 다음 네로와 티겔리누스를 배신했다. 그는 갈바 지지를 선언했고,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할 때도 이에 충실히 따랐다. 따라서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네로는 절망감에 빠져 스포루스 등 자신의 애인들과 도주했다가 자살해버린다. 이렇게 네로가 몰락하고 자결하자 갈바는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추인되었다.
갈바는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과거 명문가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공화정 시기를 그리워하는 원로원이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며,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지를 받았기에 쉽게 원로원의 추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원로원이 인정했다는 것으로 인한 안도감 때문이었던지 몰라도, 갈바는 타라코넨시스 속주에서 로마까지 오는데 세 달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아울러 로마에 도착한 이후의 통치도 젊은 시절과 중장년기때의 그와 달리 훌륭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명문귀족인데다 엄청난 부자였던 갈바는 황제에 등극했을 당시, 원로원과 로마인들의 기대는 상당했다. 그러나 갈바는 네로와 마찬가지로 탐욕스러웠고, 이미지와 달리 사생활 역시 더러웠다. 먼저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지만, 유연하지 못했다. 또 그는 민심 수습책으로 로마 황제들이 애용하던 보너스 지급을 거부하는 고지식한 면을 보였으며, 즉위를 도운 오토 등을 홀대했다. 아울러 갈바는 또 자신의 탐욕스러운 측근 인사들을 자신의 통치를 도울 제2인자로 기용하는 실책까지 저질렀으며, 네로의 악랄했던 두 근위대장들을 계속 기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특히 갈바의 인사 기용 중 문제가 된 것은 갈바의 동성애인이자 남첩인 해방노예 이켈루스였다. 이 노예는 자신의 애인 갈바를 믿고 네로의 해방노예들과 측근들이 13년간 가져간 재물을 더 많이 가져가고, 7개월 만에 국고 안의 재물을 훔쳐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거기에 더해 갈바는 자신의 잠재적 정적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루푸스라고 생각해, 루푸스를 해임하고 본국으로 소환시켰다. 당시 라인강 일대 군단병들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열성 지지세력이면서도 갈바가 어떻게 행동할 지 일단 지켜보자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던 터라, 루푸스 해임은 그들을 자극하고 말았다.
이런 까닭에 갈바는 그동안의 실적과 평판들을 깎아 먹었다. 또 갈바는 네로가 돈이나 물건으로 준 선물 가격을 22억 세스테르티우스로 환산해 이중 90퍼센트를 하사받은 이들에게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주기로 한 충성 보너스과 상여금 지급을 거부하면서, "나는 원래 돈으로 병사를 사지 않고 징집한다"는 말까지 하면서 모든 병사들에게 상여금 지급은 없다고 한 뒤 '''진짜 돈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갈바는 이미지와 달리 무능하고 고집불통인데다 네로의 모든 것을 지우려고만 한 행동은 모두에게 실망감만 주게 된다. 그래서 즉위를 도운 오토 등 협력자들과 원로원, 라인 강 주둔 군단들을 모두 자극해서 결과적으로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따라서 이듬해인 서기 69년 1월 1일, 마인츠에 주둔하고 있던 라인 강 군단이 갈바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들은 처음에 갈바를 대신할 새 황제를 추대하는 문제를 원로원에 맡긴다고 결의했지만 원로원을 불신한 나머지 하루 만에 그를 뒤집고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비텔리우스를 추대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갈바에게는 1월 1일의 결의만이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가운데 갈바는 원로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네로 시대에 일어난 '피소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추방되었다가 귀국했던, 30살의 젊은 귀족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양자로 들인다고 선포했다. 피소 리키니아누스는 갈바와 마찬가지로 원로원 의원들이 선호하는 명문가의 자손이었는데, 그는 폼페이우스의 딸 폼페이아의 직계후손이자 크라수스의 직계손자로 칼푸르니우스 가문에 양자로 입적된 사람이었다[10]. 따라서 갈바는 이 조치가 원로원을 안심시키고 국정 불안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별한 아내 레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이 모두 살아있지 않고, 손주들도 없다면서 후계자로 오토 대신 인품 좋은 피소를 선택한 것은 큰 실수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피소는 좋은 혈통, 훌륭한 인품과는 별개로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한 터라 지지기반도 없고, 망명 전에도 공직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들과 원로원의 반응은 기껏해야 무관심이 다행일 정도로 좋지 못했고, 갈바의 평판은 그의 동성애적 성향 등과 맞물려 평판이 나아지지 않았다. 또 갈바에게는 원로원을 불신하는 태도로 나온 라인 강 군단을 달랠 수단이 전무했다.
결국 맨 처음 갈바를 지지했지만 그 대가를 받지 못했던, 오토는 1월 15일 오전 팔라티누스 아폴론 신전 제사 중 황제를 수행하던 일행에서 빠져나온 뒤, 준비된 가마를 타고 은밀히 로마 외곽을 빠져나와 근위대 병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사전 협의가 있던 것처럼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이끄는 근위대에게 1월 15일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얼마 뒤 갈바는 황궁 안에서 오토가 근위대를 대동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애당초 갈바는 게르마니아에서의 군 경력도 눈에 뛸 성과를 얻지 못했고, 빈덱스와 오토가 추대한 덕에 황제 자리를 얻은 터라 반란군과의 교전 전략부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황궁 문을 걸어잠구고 방어전을 펼치기 보다는 과감하게 반란군과 대치하고, 자신은 가마를 타고 대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갈바의 이런 전략은 그가 가마를 타고 포룸으로 가는 순간 들통났다. 가마는 라쿠스 쿠르티우스 근처에서 제15군단 병사들에게 적발됐고, 갈바는 가마 밖으로 비참하게 내동댕이쳐진 다음 카무리우스라는 병사 손에 목이 관통돼 죽었다. 이때 갈바는 오토 측의 기병에 공격을 받고 동료 집정관인 자신의 측근과 양자로 들인 피소와 함께 포로 로마노에서 최후를 맞게 됐는데, 그의 양자 피소 역시 살해된 다음 목이 잘렸다. 그때 그의 나이 72세였고, 갈바의 목은 효수되어 깃대에 목이 걸렸다.
오토는 두 사람을 죽인 뒤, 피소 리키니아누스의 경우에는 곧 머리를 피소의 아내와 가족들에게 돌려줘 장례를 치루게 해줬다. 하지만 갈바의 경우에는 그 머리가 재산관리인 아르키부스가 몰래 빼내온 덕에 되찾았다고 한다. 남은 몸통과 함께 아울렐리아 가도에 위치한 황제 정원에 묻혔다.

3. 평가 및 이야깃거리


로마인들에게 네로를 제외한 네 황제의 해 동안 제위를 차지한 세 황제 중 비텔리우스와 함께 평가가 최악인 황제다.
네로의 몰락이 시작된 68년 빈덱스의 반란 당시, 갈바는 타키투스가 기록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 따라서 제위에 욕심이 있던 이들도 갈바를 앞세워 그를 중심으로 네로에게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갈바는 제위에 대한 야망만 남았을 뿐 젊은 시절 보여준 공정함과 엄격함, 성실함은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1년도 채 안 되는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사태를 스스로 불러들이는 실책을 저질렀고, 결국 이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69년 12월까지 내전이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오죽했으면 타키투스로 대표되는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는 누구보다도 갈바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실제로 제국 통치를 맡겨보기 전까지는'''."라고 까였을 지 알만한 평가다. 이는 후대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도 비슷하게 서술했다. 그는 갈바 전기에서 황제로서의 자질이 나쁘지 않았으며 의지도 충분했기 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에 대해서는 의도는 좋았다는 식으로 평가했지만 무기력하고 측근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네로의 전철을 밟았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아까워하는 사람은 많았으나,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정치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촌평을 덧붙였다.
다만 갈바의 업적은 뜻밖에도 오래 살아남았다. 그는 제10게미나 군단을 포함하여 군단을 세 개나 편성했는데, 이들은 제정 내내 모두 제 기능을 발휘해서 후대에도 가끔 "갈바 군단들"로 불렸다. 이들은 3세기의 위기를 거쳐서도 존속해서 4세기 즈음에는 모두 정예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 개편되었고, 11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로 위기를 겪을 때까지 존속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갈바의 집권기는 공화정 시기부터의 내려온 정통 로마-이탈리아 명문가들이 제위를 차지해 그 주도권을 잡은 마지막 시기가 되었고, 그가 있던 네 황제의 해는 공화정 시대동안 원로원을 차지한 노빌레스의 시대가 끝난 사건이 되었다. 물론 노빌레스 출신으로 제위를 차지한 이들이 3세기까진 있긴 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루키우스 베루스, 3세기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가 그들인데, 이런 경우는 극소수의 케이스였고 제국의 상류층과 귀족 지위를 얻은 이들은 프린켑스 체제 이후 등용되고 로마의 상류층을 차지하게 된 기사계급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이후 로마의 주도권은 이탈리아 레이테 출신의 플라비우스 가문[11], 그 다음에는 오래전 로마화된 서방 속주의 명문가 출신들에게 넘어갔고 세베루스 왕조 이후에는 촌뜨기 취급을 당한 발칸 반도 출신 황제들이 연이어 제위를 차지하고 제국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영화 쿠오 바디스에서 네로 축출후 차기 황제 후보로 이 인물이 언급되며, 마지막 장면에 마차를 몰고 로마로 향하는 모습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 폭군이 물러간 나라를 바로잡을 희망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정작 권좌에 오른 뒤의 행적은 위에 상세히 서술된 바대로이다.

[1] Imperator Servius Sulpicius Galba Caesar Augustus[2] Servius Sulpicius Galba, 태어날 당시[3] Lucius Livius Ocella Sulpicius Galba, 양자 입적 후 즉위 전까지[4] 재정 문제로 위기에 빠지게 되자 로마를 떠났다가 티베리우스가 속주 총독 명단에서 제외시키자 이를 비관한 끝에 자결했다고 한다.[5] 갈바의 증조부는 카이사르의 부관 출신이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을 콘술로 추천해주지 않았다고 해서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내전기 때 브루투스, 카시우스의 편에 가담했다. 그래서 나중에 페디우스 법에 따라 사형을 언도받았다.[6] 갈바의 아버지는 키가 작고 등에 큰 혹이 있어 꼽추같이 보인 인물이기도 했다.[7]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이 말을 듣고 “괜찮다. 그 녀석을 살려줘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8] 그래서 리비아는 죽으면서 갈바에게도 상당한 금액을 상속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유언을 지키지 않고 그 금액도 크게 깎았다.[9] 갈바의 후임은 공교롭게도 갈바의 후임 황제인 오토의 아버지였다.[10]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문은 공화정 시기의 유력 가문이었으며 원수정 시대에도 게르마니쿠스와 갈등을 빚은 BC 7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피소, 네로에 대한 음모에 연루된 AD 41년 집정관 가이우스 피소 등 유력한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또한 피소의 본래 출신 가문은 크라수스 가문으로, 마찬가지로 유력한 가문이었다.[11]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