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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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1968년 개봉작.
아이누족의 전설을 모티브로 해 씌여진 후쿠자와 카즈오의 인형극 "치키사니의 태양"을 각색한 작품이다.
악마 그룬왈드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북의 세계. 호루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룬왈드로부터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다. 성장한 호루스는 바위거인 모그를 만나고 모그의 등에 박힌 태양의 검을 뽑는다. 모그는 호루스에게 태양의 검을 다시 단련하여 새벽에 그것을 가지게 되면 태양의 왕자가 될 것이며 자신 역시 태양의 왕자에게 경배할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호루스는 아버지에게 찾아가고, 아버지는 호루스를 다른 인간들에게서 떼어놓은 것을 후회하며 호루스에게 다른 인간들을 찾아가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둔다. 천신만고 끝에 다른 인간들이 사는 땅에 도착한 호루스였지만 그룬왈드의 부하에게 붙잡혀 그룬왈드 앞에 끌려간다. 그룬왈드는 호루스에게 자신의 동생이 될라고 유혹하지만 호루스는 이를 거절하고 벼랑에서 밀쳐진다.
그러나 벼랑에서 밀쳐진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고 그룬왈드의 부하가 다스리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룬왈드의 부하를 물리친 호루스는 마을 주민들의 영웅이 되지만 촌장과 드라고의 질투를 사게된다. 그룬왈드는 호루스가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늑대들을 마을로 보내지만 호루스의 지휘로 일치단결한 마을 주민들의 저항으로 늑대들은 대부분 죽고 도망친다.
호루스는 늑대들을 뒤쫓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힐다를 만난다. 힐다는 그룬왈드의 여동생으로 그룬왈드로 인해서 마음속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호루스는 힐다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그러나 힐다는 그룬왈드의 부하 토토의 꼬드김으로 악마성이 강해져 호루스를 미혹의 숲으로 유혹해 숲으로 밀어버린다. 미혹의 숲에서 호루스는 갖가지 환상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룬왈드를 쓰러뜨릴 방법 또한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을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칠수 있음을 알게 된것이다. 또한 그룬왈드와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힐다의 갈등도 알게되어 힐다의 마음속에 있던 악마성을 물리치고 인간성을 되찾게 해준다.
호루스가 돌아와보니 마을은 그룬왈드의 마법으로 눈보라에 위기를 맞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피운 불에 호루스는 태양의 검을 새롭게 단련하고 태양의 왕자가 된다. 바위거인 모그까지 달려와 호루스에게 힘을 보태고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치게 된다.
작화감독을 맡은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감독직 의뢰가 왔지만, 그가 대신 타카하타 이사오(당시 27세)를 감독으로 추천해서 타카하타가 첫 극장용 영화 연출을 맡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직 신입 사원이면서 화면설정과 원화로 참가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토에이 동화 노조가 격렬한 노조 투쟁을 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토에이 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작품이다.
아이누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작품의 배경은 북유럽적인 분위기로 스태프들마다 작품의 배경이 어디냐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는 "고대의 유럽.아시아라고 해둡시다."라고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딘지 모르게 동유럽쪽"이라고 하기도. 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확한 배경을 알았다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해서 스태프들도 이 작품의 배경이 어딘지 정확히는 몰랐던것 같다. 다만 레프 아마타노프가 감독한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토에이 동화의 노조활동을 하던 애니메이터들이 스태프로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과정도 스태프들의 합의를 통해 나온 아이디어들을 그때 그때 작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제작되었다.당시 신인급에 불과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서 메인 스태프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일방통행식 제작방식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제작과정에서 설정등이 자주 바뀌었고 각본도 결정판이라고 할만한게 없었다고. 원작자인 후쿠자와 카즈오가 쓴 제5판 각본이 최종적인 각본이 되긴 했지만 이것도 그림 콘티 작업을 거치면서 수정되었다.
하지만 합리적 제작방식을 요구하는 회사측과 해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시도해보고 싶었던 스태프들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타카하타 이사오의 특성상 늦은 제작속도도 문제여서 이로 인해서 프로듀서가 몇 명이나 교체되는 우여곡절도 일어났다. 결국 생각한 대로 작품상의 표현이 시간의 한계와 제작비 초과 등의 사태로 이뤄지지 못하기도 했다. 후에 스태프들의 인터뷰에선 "시간과 예산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들이 많이 토로되기도 한다.
결국 당초 8개월의 제작기간과 7천만엔의 제작비로 예정하고 만들기로 한 것이, 3년의 제작기간에 1억 3천만엔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초과되고 동화매수는 전대미문의 15만 장이나 되는 대작이 완성됐다.
1968년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후의 토에이 만화 페스티벌)에 "울트라 세븐", "요술공주 샐리", "게게게의 키타로"와 함께 동시 상영되었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가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의 주 타깃층인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탓에 결국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판타지 안에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판타지는 앞으로 이들이 겪어야 할 현실 세계를 간접 체험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이였다. 영화는 1960년대 당시의 일본의 안보투쟁, 베트남 전쟁, 토에이 동화의 노조 운동의 메타포로, 집단이 일치단결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라는 화두가 담겨있었다. 함께 영화를 만든 노조원과 미야자키, 오오츠카조차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영화는 웃음기를 쫘악 빼서 시종일관 유머는 없고 진지해서 어린이 관객들은 지루해하고 반응은 최악이었다.
흥행 실패로 이 작품 제작진 대부분이 강등 처분을 받아야 하거나 아예 토에이 동화를 떠나야 했다. 타카하타 이사오와 코타베 요이치, 미야자키 하야오 는 1971년에 권고사직으로 쫓겨나다시피 토에이 동화를 떠나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일하고 있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담당 프로듀서중의 한 명이었고 타카하타 이사오와는 입사동기였던 하라 토오루도 토에이를 퇴사해서 1972년에 애니메이션 제작사 톱크래프트 설립했고, 이 회사는 훗날 스튜디오 지브리로 재창업하게 된다.
이제 와서 보면, 토에이 동화는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게 되는 인재들을 내쫓은 셈인데, 호루스 제작팀(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이 회사를 떠나기 전에 참가해서 만든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흥행적으로 대성공하고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고, 주인공 캐릭터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동화의 마스코트가 된 것만 봐도 이들을 내쫓은 것은 실수였다고 보인다.
한국에서는 1975년 TBC에서 토요 특별 만화영화로 더빙 방영했고 이후 명절특선으로 여러번 방영했다. 90년대 초반에 MBC에서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했으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남녀주인공을 맡은 이미자, 박소현 두 성우가 여기서도 주역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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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금성마그네테크[1] 에서 태양의 왕자라는 제목으로 1986년 비디오로 낸 바 있다. 여기서 주인공 호루스는 최수민이 맡았으며 그 밖에 성우진은 탁원제, 장정진 외.
1. 개요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1968년 개봉작.
아이누족의 전설을 모티브로 해 씌여진 후쿠자와 카즈오의 인형극 "치키사니의 태양"을 각색한 작품이다.
2. 줄거리
악마 그룬왈드로 인해 위협받고 있는 북의 세계. 호루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룬왈드로부터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떼어놓는다. 성장한 호루스는 바위거인 모그를 만나고 모그의 등에 박힌 태양의 검을 뽑는다. 모그는 호루스에게 태양의 검을 다시 단련하여 새벽에 그것을 가지게 되면 태양의 왕자가 될 것이며 자신 역시 태양의 왕자에게 경배할 것이라 말한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호루스는 아버지에게 찾아가고, 아버지는 호루스를 다른 인간들에게서 떼어놓은 것을 후회하며 호루스에게 다른 인간들을 찾아가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둔다. 천신만고 끝에 다른 인간들이 사는 땅에 도착한 호루스였지만 그룬왈드의 부하에게 붙잡혀 그룬왈드 앞에 끌려간다. 그룬왈드는 호루스에게 자신의 동생이 될라고 유혹하지만 호루스는 이를 거절하고 벼랑에서 밀쳐진다.
그러나 벼랑에서 밀쳐진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졌고 그룬왈드의 부하가 다스리는 마을에 이르게 된다. 그룬왈드의 부하를 물리친 호루스는 마을 주민들의 영웅이 되지만 촌장과 드라고의 질투를 사게된다. 그룬왈드는 호루스가 자신의 부하를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늑대들을 마을로 보내지만 호루스의 지휘로 일치단결한 마을 주민들의 저항으로 늑대들은 대부분 죽고 도망친다.
호루스는 늑대들을 뒤쫓다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힐다를 만난다. 힐다는 그룬왈드의 여동생으로 그룬왈드로 인해서 마음속에 갈등을 겪고 있었다. 호루스는 힐다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그러나 힐다는 그룬왈드의 부하 토토의 꼬드김으로 악마성이 강해져 호루스를 미혹의 숲으로 유혹해 숲으로 밀어버린다. 미혹의 숲에서 호루스는 갖가지 환상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룬왈드를 쓰러뜨릴 방법 또한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을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칠수 있음을 알게 된것이다. 또한 그룬왈드와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힐다의 갈등도 알게되어 힐다의 마음속에 있던 악마성을 물리치고 인간성을 되찾게 해준다.
호루스가 돌아와보니 마을은 그룬왈드의 마법으로 눈보라에 위기를 맞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피운 불에 호루스는 태양의 검을 새롭게 단련하고 태양의 왕자가 된다. 바위거인 모그까지 달려와 호루스에게 힘을 보태고 호루스는 태양의 검으로 그룬왈드를 물리치게 된다.
3. 제작 과정
작화감독을 맡은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감독직 의뢰가 왔지만, 그가 대신 타카하타 이사오(당시 27세)를 감독으로 추천해서 타카하타가 첫 극장용 영화 연출을 맡게 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직 신입 사원이면서 화면설정과 원화로 참가해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토에이 동화 노조가 격렬한 노조 투쟁을 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토에이 직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든 작품이다.
아이누를 모티브로 했다지만 작품의 배경은 북유럽적인 분위기로 스태프들마다 작품의 배경이 어디냐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는 "고대의 유럽.아시아라고 해둡시다."라고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딘지 모르게 동유럽쪽"이라고 하기도. 후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정확한 배경을 알았다면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해서 스태프들도 이 작품의 배경이 어딘지 정확히는 몰랐던것 같다. 다만 레프 아마타노프가 감독한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 영향을 크게 받기도 했다.
토에이 동화의 노조활동을 하던 애니메이터들이 스태프로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제작과정도 스태프들의 합의를 통해 나온 아이디어들을 그때 그때 작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제작되었다.당시 신인급에 불과했던 미야자키 하야오는 많은 아이디어를 내서 메인 스태프로 부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방식은 당시 유행하던 일방통행식 제작방식에선 있을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덕분에 제작과정에서 설정등이 자주 바뀌었고 각본도 결정판이라고 할만한게 없었다고. 원작자인 후쿠자와 카즈오가 쓴 제5판 각본이 최종적인 각본이 되긴 했지만 이것도 그림 콘티 작업을 거치면서 수정되었다.
하지만 합리적 제작방식을 요구하는 회사측과 해보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시도해보고 싶었던 스태프들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타카하타 이사오의 특성상 늦은 제작속도도 문제여서 이로 인해서 프로듀서가 몇 명이나 교체되는 우여곡절도 일어났다. 결국 생각한 대로 작품상의 표현이 시간의 한계와 제작비 초과 등의 사태로 이뤄지지 못하기도 했다. 후에 스태프들의 인터뷰에선 "시간과 예산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라는 아쉬움들이 많이 토로되기도 한다.
결국 당초 8개월의 제작기간과 7천만엔의 제작비로 예정하고 만들기로 한 것이, 3년의 제작기간에 1억 3천만엔이라는 거액의 제작비가 초과되고 동화매수는 전대미문의 15만 장이나 되는 대작이 완성됐다.
1968년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후의 토에이 만화 페스티벌)에 "울트라 세븐", "요술공주 샐리", "게게게의 키타로"와 함께 동시 상영되었다. 그러나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가 토에이 만화 퍼레이드의 주 타깃층인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탓에 결국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판타지 안에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아이들이 보는 판타지는 앞으로 이들이 겪어야 할 현실 세계를 간접 체험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이였다. 영화는 1960년대 당시의 일본의 안보투쟁, 베트남 전쟁, 토에이 동화의 노조 운동의 메타포로, 집단이 일치단결하기가 얼마나 힘든가라는 화두가 담겨있었다. 함께 영화를 만든 노조원과 미야자키, 오오츠카조차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영화는 웃음기를 쫘악 빼서 시종일관 유머는 없고 진지해서 어린이 관객들은 지루해하고 반응은 최악이었다.
흥행 실패로 이 작품 제작진 대부분이 강등 처분을 받아야 하거나 아예 토에이 동화를 떠나야 했다. 타카하타 이사오와 코타베 요이치, 미야자키 하야오 는 1971년에 권고사직으로 쫓겨나다시피 토에이 동화를 떠나 선배인 오오츠카 야스오가 일하고 있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담당 프로듀서중의 한 명이었고 타카하타 이사오와는 입사동기였던 하라 토오루도 토에이를 퇴사해서 1972년에 애니메이션 제작사 톱크래프트 설립했고, 이 회사는 훗날 스튜디오 지브리로 재창업하게 된다.
이제 와서 보면, 토에이 동화는 훗날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게 되는 인재들을 내쫓은 셈인데, 호루스 제작팀(작화감독이었던 오오츠카 야스오와 미야자키 하야오)이 회사를 떠나기 전에 참가해서 만든 장화신은 고양이(1969)는 흥행적으로 대성공하고 후속편이 2편이나 만들어졌고, 주인공 캐릭터 고양이 '페로'는 토에이 동화의 마스코트가 된 것만 봐도 이들을 내쫓은 것은 실수였다고 보인다.
4. 한국에서 방영
한국에서는 1975년 TBC에서 토요 특별 만화영화로 더빙 방영했고 이후 명절특선으로 여러번 방영했다. 90년대 초반에 MBC에서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했으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에서 남녀주인공을 맡은 이미자, 박소현 두 성우가 여기서도 주역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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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금성마그네테크[1] 에서 태양의 왕자라는 제목으로 1986년 비디오로 낸 바 있다. 여기서 주인공 호루스는 최수민이 맡았으며 그 밖에 성우진은 탁원제, 장정진 외.
[1] 1987년 금성사로 합병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