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하타 이사오

 


'''高畑 勲
타카하타 이사오 | たかはた いさお
'''
<colcolor=#fff><colbgcolor=#000> '''출생'''
1935년 10월 29일
일본 제국 미에현 이세시
'''사망'''
2018년 4월 5일 (향년 82세)
일본 도쿄도 이타바시구
'''국적'''
[image] 일본
'''필명'''
다케모토 데츠(武元 哲)
'''학력'''
도쿄대학
'''가족'''
아버지 타카하타 아사지로
'''소속'''
토에이 애니메이션
톱 크래프트
'''스튜디오 지브리''' (1985 ~ 2018)
'''소속 정당'''

1. 개요
2. 상세
3. 연출 특징
4. 여담
5.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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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한 애니메이션 감독 중 한 명.

2. 상세


1935년 10월 29일 일본 미에 현 우지야마다 시(現 이세 시) 에서 타카하타 아사지로(高畑浅次郎)의 자녀로 태어났다. 1943년에 부친이 오카야마현에 있는 한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오카야마시로 이사했다. 이후 도쿄로 상경했으며 그곳에서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불문학을 전공해서 프랑스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프랑스의 장편 애니메이션 왕과 새의 원형이 된 1952년 작 "사팔뜨기 폭군"을 본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토에이 동화에 입사하여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에서 연출 보조로 데뷔했다. 이때 감독이었던 세리카와 유고(芹川有吾)에게 영화적인 연출법을 전수 받아 그를 스승으로 언급한다. #
TV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으로 연출에 데뷔했다. 그림을 썩 잘 그리지 못하는데도 연출로 올라가는 속도가 이례적으로 빨랐는데 다름이 아니라 도쿄대학 출신이라 그렇다. 고학력자니까 뭘 시켜도 잘하겠지 하고 토에이에서도 덜컥 큰일을 맡긴 것이다.능력도 출중했고. 이 때의 연출실력을 인정받아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의 연출(사실상 감독)을 맡았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작품성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토에이 동화가 한 번 망할 뻔할 정도로 실패하여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토에이 노동조합의 노사분규의 진통으로, 회사측은 대규모의 인력정리를 감행, 타카하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코타베 요이치와 함께 토에이를 떠나 A 프로덕션으로 이직한다. 미야자키는 바로 떠나기로 결단했으며 코타베는 아내 오쿠야마 레이코가 남는 조건으로 간신히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쿄 무비의 실제작을 맡았던 A 프로덕션에서 오오스미 마사아키가 갑자기 감독직을 그만두고 떠나버린 루팡 3세(1기 TV시리즈)에 긴급 투입되어 연출을 한다. 그리고 극장용 단편 영화 판다 코판다(한국 제목은 팬더와 아기 팬더)와 후속작 비오는 서커스 편을 감독한다.
새로 창립된 즈이요 영상(닛폰 애니메이션의 전신)의 사장이 스카웃해서, 미야자키, 코타베와 함께 옮겨 세계명작극장 시리즈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 "엄마찾아 삼만리", "빨강머리 앤"를 연출했다.
1981년 꼬마숙녀 치에의 첫번째 극장판을 감독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 "첼로 켜는 고슈"를 감독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프로듀서를 맡았고 이를 계기로 하여 1985년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립 멤버가 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 등의 미야자키 작품에서 프로듀서 혹은 음악 연출을 맡는 한편 자신의 작품도 만들어서 1988년 "반딧불의 묘", 1991년 "추억은 방울방울", 1994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감독했다. 1999년, "이웃집 야마다군"을 개봉했으나 흥행에서는 참패했고 한동안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2013년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통해 14년 만에 복귀. 이것이 은퇴작이 된다.
2018년 4월 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연출 특징


타카하타 이사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비해서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고 차분한 스타일을 즐겨했고, 세계명작동화 시리즈들을 만들었지만 미야자키에 비해서 일찌감치 일본색이 강한 작품들을 연출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치밀한 묘사로 토미노 요시유키는 "감히 말한다면 미야자키와 타카하타의 연출실력은 구로사와 아키라보다 위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일본 애니메이션 연출 역사상 최초로 레이아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 레이아웃의 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눈에 쏙쏙 들어오게 만들어진다. 타카하타의 콘티는 정말 대충 그리기로 유명했으며 (최악의 경우 선만 늘어서있는 정도였다고) 나중에는 아예 콘티 그리기 귀찮다고 콘티 담당을 따로 두고 구두로 지시하거나 직접 연기해서 지시를 내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가 지시한 배치대로 만들면 이해하기 쉽고 정돈된 영상이 나왔기 때문에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타카하타 이사오 작품의 특징은 별 거 아닌 이야기를 하는데 굉장하다는 것이다. 전개는 엄청나게 느리고 하는 이야기도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 정도인데 굉장하다. [1] 캐릭터들의 감정 묘사나 행동에 대한 디테일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보게 만든다. 희노애락 같은 단편적 감정 외에도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묘사한다. 대사 이외의 행동과 눈치로만 표현하는 연출도 굉장히 많다. [2] 그의 스타일을 예로 들자면 일류 배우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그래서 그의 작품은 나이를 먹고 봐야 그 진가를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연출의 비결은 집요한 인간 관찰이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늘 타인을 관찰하며 인간이 어떤 상황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를 연구했다고 한다.
남성 연출가이지만 여성을 표현하는데 정평이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성과 소녀를 메인으로 한 작품이 많지만 여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는데는 늘 어려움을 겪었는데 [3] 타카하타는 여성을 묘사할 때 막힘이 없었고 미야자키도 타카하타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가 그리는 여성은 동경, 타카하타가 그리는 여성은 존중. 타카하타가 그려내는 여성이 더 리얼하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 그래서 타카하타 작품은 여성 팬이 굉장히 많다.
부드럽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추구해서 작화 매수 (프레임)을 엄청나게 많이 쓰는 감독이다. 이게 애니메이션 제작에 있어 돈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것인데 그는 돈 걱정은 전혀 안 하고 그저 물 쓰듯이 제작비를 마구 끌어 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상대하던 프로듀서들은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다른 작품의 배는 제작비가 들어갔으며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51억 엔이라는 터무니 없는 금액을 썼다. [4]
벚꽃을 상당히 좋아하는지 작품에 벚꽃이 중요한 포인트로 꽤 자주 나온다. 빨강머리 앤 같은 서양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도 벚꽃 같은 게 나온다. 유럽에도 벚꽃이 있긴 하니까 고증 오류는 아니지만.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선 나무를 심은 사람을 만든 프레데릭 백을 존경하며 말년 작품인 이웃집 야마다 군과 가구라 공주 이야기는 나무를 심는 사람 특유의 색연필 작화를 의식한 영상을 보여준다.
같이 활동하는 애니메이터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콘도 요시후미, 코타베 요이치, 오오츠카 야스오, 타나베 오사무, 하네 유키요시가 있다. 특히 콘도 요시후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으며 콘도를 두고 미야자키와 자주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타나베 오사무가 없으면 작품 활동이 안 된다고 하기도 했다. 연출가로는 토미노 요시유키오쿠다 세이지를 자주 기용했다.

4. 여담


독서광으로도 유명하다. 존경하는 작가로는 자크 프레베르, 미야자와 겐지를 꼽는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꽤나 느긋하고 행동이 굼뜬 사람이었다는 증언은 곳곳에 남아있다. 옛날 사진을 봐도 왠지 소파에 누워있는 사진이 꽤 되는 편이다. 별명이 나마케모노 (나무늘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개봉과 함께 프로듀서가 밝히는 작업 과정의 뒷 비화가 공개되었는데,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이 얼마나 제대로 작업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부렸는지 알 수 있다.(원문) 전성기 시절에도 대부분의 작업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위임하고 본인은 미야자키의 폭주를 통제하거나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주로 해서 작업량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년 개봉) 때는 느린 제작 속도탓에 프로듀서가 서너 명이 교체되기도 했다. 그 중의 한 명이 타카하타 이사오의 입사동기였던 하라 토오루로 호루스의 흥행참패의 책임을 추궁받고 토에이 동화를 퇴사하고 1972년에 톱크래프트를 설립한다. 톱크래프트는 훗날 스튜디오 지브리로 재창립하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오랜 동료이자 친구로서 미야자키의 사상에 타카하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둘은 1963년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미야자키가 네리마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도중 처음 만났다. 미야자키는 타카하타의 첫 인상을 온화하고 영리해 보이는 청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좋은 콤비이기도 했고 미야자키에게 연출면에서도 영향을 끼쳤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두 사람이 함께 작품을 만드는 일은 사라졌다. 타카하타는 자칫 폭주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상에 냉정한 관객의 시선에서 제동을 거는 브레이크의 역할을 했으며 그랬을 때 미야자키는 매우 화를 내면서도 결국은 타카하타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다고 한다. 각종 서적에서도 여러번 언급되고 오오츠카 야스오도 인증한 매우 유명한 일화다. 그래서 미야자키 작품에 타카하타가 별 것도 안 했음에도 프로듀서나 감수 역으로 스태프롤에 올라가는 경우가 있다. 타카하타가 미야자키 옆을 떠나 따로 작업하고부터의 미야자키 작품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모노노케 히메부터 타카하타는 미야자키에게 간섭하는 걸 그만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노노케 히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의 미야자키 작품은 관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인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들면서 폭주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미야자키 본인도 이 점은 알고 있는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스토리가 줄곧 치히로/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해 "이러면 파쿠상(타카하타 이사오의 별명)한테 혼나는데." 라며 콘티를 그리는 내내 노심초사했다고 한다.(스즈키 토시오의 증언) 그리고 평론가 마치야마 토모히로와 후배 감독 오시이 마모루도 이 점을 지적했다.
토미노 요시유키가 스승으로 꼽는 사람으로 "도쿄대까지 나와놓고 왜 이런 시궁창 업계에 들어와있는가"라고 생각했으나 타카하타 이사오가 진심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어서 이 일을 계속해봐도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안 그랬으면 진작에 그만뒀다고.
정치적으로 일본 공산당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인 면에서도 일본제국의 침략 전쟁을 크게 비난했다. 1945년 9세 때 오카야마 공습을 직접 겪었기 때문. 《국경》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주국의 실태와 난징 대학살을 고발하는 작품을 같은 일본 공산당 지지자이며 당원인 콘도 요시후미와 만들려고도 시도했지만 천안문 사태로 인해서 기획은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반딧불이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극우 성향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물론 이건 아주 크게 잘못 알려진 것이다. 반딧불이의 무덤도 딱히 피해자 행세물이 아니다.
친구 코타베 요이치가 만든 드라마 나츠조라의 등장인물 사카바는 코타베 요이치 자신을 모델로 한 캐릭터지만 연출가인 것도 그렇고 극중 묘사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이야기도 섞여있다. 코타베 요이치 + 타카하타 이사오라 보면 될 것이다.
후계 감독으로는 그의 연출기법을 흡수한 미야자키 하야오가 가장 유명하다. 그리고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라 케이이치가 그의 연출 기법의 후계자로 거론된다. 실제로 타카하타 이사오는 생전에도 하라 케이이치를 눈여겨보고 고평가했다고 한다.
도라에몽의 애니판을 살린 인물이기도 하다. 도라에몽은 지금의 장기 시리즈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에 망한 애니메이션이 나온 적이 있어 원작자가 애니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도라에몽의 애니화를 어떻게든 하고 싶던 신에이 동화의 쿠스베 산키치로 사장이 지인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원작자와 방송국을 설득할 기획서를 써달라고 했고 작품이 맘에 든 타카하타는 "이 작품은 매우 훌륭하니 더 추가하지 말고 그대로 만들면 된다." 라고 하면서 각본가도 빼버리고 1화에 2 에피소드를 방영하는 원작 존중의 원칙이 담긴 기획서를 제출했고 모두가 만족하여 도라에몽이 장기 시리즈 애니메이션이 되었다. #

5. 작품 목록


  • 늑대소년 켄(1964) - 86화 중 12개 화 연출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 - 감독, 연출
  • 맹렬 아타로(1969) - 90화 중 9개 화 연출
  • 루팡 3세(1기 TV시리즈)(1971) - 연출 (실질적인 감독) [5]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1972) - 감독
  •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 - 감독
  • 플란다스의 개(1975) - 15화 콘티
  • 엄마찾아 삼만리(1976) - 연출 (실질적인 감독) [6]
  • 미래소년 코난(1978) - 연출 (9화,10화)
  • 빨강머리 앤(1979) - 연출 (실질적인 감독), 50화 중 36개 화 각본
  • 꼬마숙녀 치에(1981) - 감독
  • 꼬마숙녀 치에 TV판 1기(1981) - 감독
  • 첼로 켜는 고슈(1982) - 감독, 각본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 프로듀서
  • 천공의 성 라퓨타(1986) - 프로듀서
  • 야나가와 호리와리 이야기(柳川堀割物語) (1987)[7] - 감독.
  • 반딧불이의 묘(1988) - 감독
  • 추억은 방울방울(1991) - 감독, 각본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 감독, 각본
  • 이웃집 야마다군(1999) - 감독, 각본
  • 카구야 공주 이야기(2013) - 감독, 각본


[1] 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을 하면 상당히 빠르고 비일상적인 묘사의 작품이 많이 나온다.[2] 이런 연출 경향은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이어졌다.[3] 그래서 미야자키가 그려내는 여성은 리얼하다기보단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질 때가 많다.[4] 10억 엔만 써도 돈을 많이 쓴 것인데 51억 엔이면 엄청난 금액이다.[5] 연출이라곤 하나 1기 감독이 도망간 상태에서 이어받은 거라 2쿨 분량부터는 미야자키와 공동 감독이었다. 실질적으론 미야자키가 중심이었고 타카하타가 조언을 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6] 옛날엔 애니메이션 만드는 놈 주제에 무슨 감독 직함을 다느냐하여 감독인데도 감독으로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7] 미야자키 하야오가 프로듀서 겸 제작(製作)한 실사 다큐멘터리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