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츠카 야스오

 

[image]
1. 개요
2. 경력
3. 특징
4. 일화
5. 대표작
6. 제자 및 인맥
7. 기타


1. 개요


大塚 康生(おおつか やすお) 1931년 7월 11일 생. (92세) 시마네현 출신.
일본의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토에이 동화 1기 입사생으로, 타카하타 이사오미야자키 하야오의 회사 선배이자 선생.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으로 불리는 모리 야스지의 제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일본 애니계는 적은 동화 매수로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연출과 스토리로 살려볼려고 하는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 출신(데자키 오사무, 토미노 요시유키)과 캐릭터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중시하는 본래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생긴 이유인 그림을 움직인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토에이 동화 출신(오오츠카 야스오,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1]

2. 경력



초창기 토에이 동화는 디즈니의 영향을 받아서, 캐릭터가 쉴틈없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원화와 원화 사이에 동화를 충분히 사용해서 실사영화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준다.
원래는 애니메이터가 될 생각은 없었고 승려나 기관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그림은 학생 때 본 미군지프에 심취해 지프의 구조가 알고 싶어 지프를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너무 자세히 스케치하자 미군에서 스파이로 알고 취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꿈이 만화가로 바뀌게 된다.
성인이 된 후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후생성 마약 수사과(현 후생노동성 마약취체부)에서 일했다. 사실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고 당시엔 종전 후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세계의 감시를 받고 있어 이동과 거주에 제한이 있었다. 도쿄로 가서 만화가를 하고 싶으면 공무원이 되는 수 밖에 없어 공무원 시험을 친 것이라고 한다. 일명 'G맨' 또는 '마토리'라고 불리는 마약취제관은 직업 특성상 호신용 권총 소지가 허가받았는데, 오오츠카도 일반적인 일본인은 만져보지도 못 하는 본인 권총을 소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권총을 쏘는 장면은 과학적으로 이치에 맞고 리얼리티가 있으며 이때 자신이 다룬 총기는 루팡 3세에 그대로 나왔다.[2] 다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잡일 담당이라 현장에 출동한 적은 없었고 단지 만지고 쏴볼 기회가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공무원 일과 만화가 수행을 병행하며 만화계의 문을 두들겼으나 별로 반응이 없었고 과로로 결핵에 걸려 2년간 요양생활을 보냈다. 이때 프랑스 애니메이션에 심취해 만화가를 포기하고 애니메이터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6년 6월 도쿄 타임즈와 요미우리 신문 기사에 난 토에이 동화 직원 모집 광고의 "토에이가 컬러 장편 만화 영화[3] '백사전'의 제작을 시작한다"라는 글을 보고 신바시의 토에이 교육 영화부에 찾아갔고, 토에이 측에서 니치도 영화(日動映画)로 가라 해서 토에이 동화(토에이 애니메이션) 공식채용 1기생으로 입사했다. 토에이는 모리 야스지에게 오오츠카 야스오를 가르쳐보라고 했는데 원래 재능이 있고 꾸준히 연습을 해서 크게 가르칠 건 없었고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활약을 했다. 처음에 토에이 측에선 공무원을 하던 사람이 애니메이터 같은 시궁창 일을 하겠다니까 기겁하면서 당신은 나이도 많고(당시 26세) 이제와서 그림을 하기보단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좋다고 설득했으나 오오츠카 야스오는 죽어도 하겠다고 했다.1963년엔 신입 사원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도 담당으로 애니메이션 기술을 가르쳤다. 미야자키는 "그림을 움직이는 재미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라고 평했다.
토에이 시절에는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의 작화감독으로 발탁되자, 타카하타 이사오를 연출직으로 추천해서 그가 첫 극장 연출작을 만들 수 있게 했다. 당시의 토에이 동화는 그림을 그릴 줄아는 작화감독의 권한이 훨씬 크고, 연출은 그 아래였다. 작화감독이 전권을 쥐고 연출은 그 보조를 하면서 작업을 돕는 구조였다. 그래서 먼저 작화감독이 정해지고 연출을 작화감독이 정하고는 했다. 막상 타카하타 이사오를 영화 연출로 추천하자 그는 느리다고 주변에서 반대하는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부터 "나마케모노"로 유명했다. 그래서 입사 3년차인 신인인 미야자키 하야오를 연출 보조로 끼워넣었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일을 많이 하고 잘 해서 아이디어를 팡팡 내고 설정 그림을 마구마구 그려서, 오오츠카 야스오는 자서전에서 '난 이 작품에서 작화감독이긴 했지만 사상적이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전혀 관여를 못 했고, 작품의 스토리나 내용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전부 다 하고 자신은 옆에서 지켜봤을 뿐'이라고 글을 남겼다. 심지어 영화 내용이 뭔 이야기인지도 이해하지도 못 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더 잘하고 아쉬움이 없었을 거라고 그게 너무 속상했다는 말도 남겼다.
루팡 3세(1971)를 애니메이션화 하고 싶어하는 도쿄 무비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의 스카웃으로 도쿄 무비 산하의 A 프로덕션으로 옮겼다. 루팡 3세는 실제작에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무민에 작화감독을 맡으면서 참가했다. 이윽고 토에이 노조분규 사태가 발생했고 노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노조 간부였던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 3총사는 권고 사직으로 쫓겨나다시피 그가 일하고 있던 A 프로덕션으로 이적해 온다.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텔레콤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이적해 지금도 자리를 두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루팡 3세(1기 TV시리즈), 미래소년 코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서 작화감독을 맡았고, 그 외 많은 작품에서 함께 일했다. 두 사람은 총기류, 군용차, 군용기, 탱크 등 군병기를 좋아하는 밀덕이기도 했고, 외제차를 좋아하는 취미가 통하기도 해서 사이가 좋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어 강사 생활을 하면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콘도 요시후미도 그가 강사로 있던 학원생 출신이었고,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그가 인정한 수제자 중 한 명. 제자인 사다모토가 소속한 가이낙스가 제작중이던 왕립우주군에는 미야자키와 함께 몇 번이나 찾아가서 격려하고 동화 기술을 지도하기도 했다. 스기이 기사부로도 제자 격이었는데 오히려 그의 재능에 절망하고 연출가로 전향했다. 훗날 오오츠카 야스오는 소식을 듣곤 "그놈 재능있었는데" 하고 아쉬워 했다고 한다.
40대부터는 몸이 많이 상해서 제자를 키우는데 집중하고 일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과 미래소년 코난(1978)에서 작화감독을 할 때는 진짜로 힘들어서 문자 그대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본인은 이렇게 무리 안 하고 스트레스 안 받는 성격을 장수비결로 꼽기도 했다.
토에이 동화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데, 이론서라고 있는 거라고는 미국 영어 원서밖에 없는데 비싸서 사지 못하니까 도서관에서 빌려서 책 한 권을 통채로 복사 수준으로 그림까지 똑같이 그려서 책 한 권을 만들어낼 정도로 학구열이 강했다고 한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서 호루스가 거대 물고기랑 격투하는 장면의 원화를 담당했을 때는 살아있는 메기를 사서 집에 가져와서 그 움직임을 관찰해서 그렸다고 한다.
노동 운동가이기도 하며 애니메이터에 대한 대우가 안 좋았던 토에이 동화의 대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4년에 결성된 토에이 동화 노동조합에서는 제1대 서기장을 맡았다. 제2대 서기장은 미야자키 하야오였다.
2002년 일본 문화청 장관상을 받았다. 감독이 아닌 작화 애니메이터가 상을 받은 것은 이례적. 그만큼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인물이다.

3. 특징


모두 잘 그린다. 그리는 걸로는 제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도 못 따라간다고 혀를 내두른 인물이다. 코가와 토모노리는 애니 업계에서 자신보다 잘 그리는 건 스다 마사미와 오오츠카 야스오 밖에 없다고 했고 오오하시 마나부도 오오츠카 야스오 씨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인정했다. 예로 루팡 3세에서 미야자키도 디자인이 복잡해서 못 그린다는 벤츠 SSK를 가지고 놀았다. 루팡 3세 1화가 전설적인 작화로 유명하다. 토에이에서 일하던 초창기 시절에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수준의 작화를 소화했다. 그 어떤 선 많고 복잡한 디자인의 물체를 움직여도 절대 작붕이 없다. 특히 자동차 작화는 미즈무라 요시오, 무라타 토시하루와 함께 일본 최고급이었다, 이 정도의 천재는 일본 애니메이터 역사에도 보기 드물다.
'애니메이션은 움직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일러스트나 만화를 그리지 왜 애니메이션을 만드냐'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원화와 동화를 매우 많이 쓴다. 예쁘고 공들여 그린 그림을 좋아해서 말년에 체력 부족으로 연출을 하기는 했으나 연출에는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연출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 오프닝 같은 걸 그릴 때는 자신이 연출도 했다. 인터뷰나 비화를 보면 연출 실력을 주변에서도 인정해서 감독을 여러 차례 시키려고 했으나 오오츠카 야스오 자신이 연출하기 싫다고 그만뒀다는 사례가 많으며 [4] 그래서 제대로된 장편 연출을 볼 수 있는 작품은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 리틀 네모 정도이다. 연출할 때는 본인이 성격이 좋은 점도 있고 토에이 방식으로 연출을 배워서 애니메이터들이 그리고 싶다는 장면을 일단 다 넣어주는 식이라 연출력 자체는 뛰어나나 장면 연결이 좀 어색하고 산만한 느낌이 든다는 단점도 있다.
그림체는 미야자키 하야오나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로 알려진 그 그림체이다. 미야자키와 별 차이 없는 그림체다. 이건 그의 스승 모리 야스지로부터 이어져온 그림체이다.
반면 작품 활동은 매우 적은데 본인이 한 작품에 엄청난 원화와 작화수정을 해내며 작품 질을 올리는 장인 스타일의 일을 했다. 그리고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안 되는 걸 계속 붙잡아도 어쩔 수 없다."라는 것이 지론으로 일이 잘 안 되면 갑자기 연락을 끊고 여행을 떠나버리는 경우가 있어 미야자키도 난처해했다고 한다. 오오츠카 야스오의 말로는 루팡 3세 1기 때 일본에서는 거의 없는 외체차가 부서지는 장면을 그리기 위해 자료집을 찾아 봐도 그 엔진구조가 없자, 앞 뚜껑을 직접 열고 엔진 구조를 관찰하려고 미국으로 훌쩍 떠난 적이 있다고 한다. 결코 도망 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원화나 동화 그리는 것을 옆에서 자주 도와줘서 논크레딧으로 참여한 작품이 많다. 대부분 작화집에서 밝혀졌고 그마저도 적어서 위의 작품 활동이 적었던 점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4. 일화


소년 시절부터 증기 기차, 자동차, 군용차 등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5] 취미는 군용차갑옷 프라모델 수집. 특히 지프차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덕력으로 유명하다. 루팡 3세 시리즈가 자동차를 세밀하게 그리는 것도 그의 취향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프라모델 군용차 시리즈의 디자이너를 하려고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을 잠시 쉰 적도 있다. 1968년에 토에이 동화에서 A 프로덕션(훗날 신에이 동화)으로 이직을 한 것도, 루팡 3세를 애니화하고 싶다는 도쿄무비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의 스카웃 제의에, 평소 좋아하는 자동차와 총기류를 애니메이션으로 제대로 그려보고 싶어서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작화감독을 맡은 호루스의 대모험이 토에이 애니메이션 역사상 기록적으로 폭망해서 토에이에 계속 일하는 것이 눈치가 보였던 이유도 있지만)
루팡 3세 특유의 과격한 운전 연출의 창시자이기도 한데 대부분 자신이나 지인의 운전을 통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했다. 루팡 3세가 운전하다 실제로 타이어가 빠지는 연출은 실제로도 운전하다가 타이어가 빠졌던 적이 있어서 그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루팡 3세 1기 TV 시리즈의 미야자키 작업분과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에 나오는 루팡 일당이 타는 차 피아트 500은 당시에 오오츠카 야스오가 평소에 타던 차이고, 클라리스가 자동차 체이스에서 탈출할 때 탔던 차 시트로엥 2CV(초기모델 AZ)는 미야자키가 타던 애차였다.
루팡 3세 시리즈에 특히 애정이 강한데 최근 작품에 대해선 너무 내가 만든 1기 시리즈를 의식하고 있다.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의 애니메이션은 움직임 묘사가 너무 떨어진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니시자키 요시노부우주전함 야마토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공들인 인물이기도 하다. 복잡한 디자인의 야마토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실력파였기 때문이다. 몇 번을 찾아왔는데 '전함이 하늘을 나는 건 말이 안된다'라고 딱 잘라 거절하고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니시자키가 손을 잡고 사정사정하면서 얼마면 되냐고 돈으로 금액협상을 했다고 하는데 굉장히 불쾌했으며 그의 손과 눈은 마치 도룡뇽 같았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니시자키 요시노부가 오오츠카 야스오 대신 영입한 인물이 아시다 토요오토모나가 카즈히데이다.
뒷담화의 달인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지브리의 땀투성이라는 본인이 호스트로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오오츠카 야스오를 초대해서 미야자키 하야오타카하타 이사오를 신입 사원 시절인 20대 초반부터 근접거리에서 지켜 본 경험담을 들려줬는데, 일본어 청취가 가능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흥미가 있다면 정말 재미있는 방송이다. 오오츠카 야스오가 말솜씨가 좋아서 시종일관 유머를 가미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는 열정적으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막 쏟아 내면, 타카하타 이사오는 조용히 다 듣고 나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한 마디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흥분해서 "그럼 선배가 아이디어 내 보라"고 막 화를 냈다고 한다. 다만 사적으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카하타 이사오를 진짜 존경하는 선배로 여겨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후일담 방송을 듣다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라는 개성이 강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두 인물을 중간에서 중재역할을 한 사람이 온화하고 태평스런 성격의 오오츠카 야스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있을 때 오쿠야마 레이코가 패션 센스가 매우 좋고 매일 입는 옷 조합이 바뀐다는 걸 깨닫고 패션 센스 연구차 매일 쫓아다니며 옷 스케치를 그렸다고 한다. 오쿠야마는 처음엔 무슨 스토킹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예술가로서의 심정을 이해하고 평소에 잘해주는 분이라 허락했다고. 그러다가 1달 뒤 오쿠야마는 매일 새옷을 사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옷을 조합을 잘해서 입는 것이었단 걸 깨닫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 노트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오오츠카 야스오의 저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 일화는 오쿠야마 레이코를 모델로 만든 드라마 나츠조라에도 나오며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 시모야마는 오오츠카 야스오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5. 대표작


  • 백사전 - 동화 및 제2원화
  •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 서유기
  •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
  • 안쥬와 즈시오마루
  •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 - 클라이막스 전투신 원화 / 오오츠카 야스오가 다시는 그릴 수 없는 자신 최대의 업적으로 회고하는 작화이다.
  • W3 - OP 작화[6]
  • 늑대소년 켄
  • 소년닌자 바람의 후지마루
  • 걸리버의 우주여행
  • 허슬펀치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 작화감독
  • 장화신은 고양이 - 클라이막스 신
  • 하늘을 나는 유령선
  • 동물 보물섬
  • 거인의 별 - OP
  • 무민 - 작화감독
  • 루팡 3세(1기 TV시리즈) - 캐릭터 디자인, 3화, 6화, 12화를 제외한 전편 작화감독. 작화감독 안 한 에피소드에도 스태프롤엔 작화감독으로 표기된다.
  • 천재 바카본 - 32
  •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 우천 서커스 편 - 코타베 요이치와 공동 작화감독, 원화
  • 사무라이 자이언츠 - 캐릭터 디자인 / 10화까지 작화감독 / 나가하마 다다오 감독과 싸우고 10화 이후로 하차했다. 10화 이후로도 작화감독으로 표기된다. 캐릭터 디자인 작업은 끝까지 계속해서 보내줬다고 한다.
  • 감바의 모험
  • 명랑 개구리 뽕키치
  • 원조 천재 바카본
  • 엄마 찾아 삼만리 - 1화
  • 초원의 아이 텐구리 - 연출, 작화감독, 원화
  • 미래소년 코난 - 전편 작화감독 / 대신 여주인공 라나를 어린 소녀로 해석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거 아니라면서 라나 등장씬은 작화감독을 제치고 직접 전편 수정했다.[7]
  • 루팡 3세 루팡 VS 복제인간 - 감수만 하고 그린 장면은 없다.
  • 루팡 3세(2기 TV시리즈) - 72화 작화감독.[8] 145, 151 원화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 - 작화감독
  • 꼬마숙녀 치에 - 공동 작화감독
  • 스가타 산시로
  • 가오 명인극장 도카이도 요츠야 괴담 - 감독
  • 명탐정 홈즈 - 5
  • The Blinkins : The Bear and the Blizzard
  • Galaxy High School (1986) Key Animator - 2, 7
  • 루팡 3세 풍마일족의 음모 - 감독, 연출
  • 리틀 네모 - 콘티, 원화
  • 몽키삼총사 - 메카닉 디자인 감수
  • 루팡 3세 나폴레옹의 사전을 빼앗아라 - 메카닉 작화
  • 아저씨 개조강좌
  • 무관심 던전 바람의 탑 - 2, 3, ED 연출 및 레이아웃 감수. 오오츠카 야스오 작품 중 유일한 오타쿠 그림체 작품이다.
  • 디지몬 허리케인 상륙!! 초절진화!! 황금의 디지멘탈 - 엔딩 일러스트
  • 무적 철가방 - ED
  • 루팡 3세 안개의 일루시브 - 아이캐치 작화

6. 제자 및 인맥



7. 기타


일본 팬 페이지 오오츠카 야스오 씨의 세계
참가 작품 리스트
관련 영상 - 大塚康生の動かす喜び(2002年)
작화보루에 업로드된 참가컷들.
2015년에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타이틀은 <ドキュメンタリー『飄々~拝啓、大塚康生様~』/Hyohyo -Dear Mr.Yasuo Otsuka->

[1] 실제로 오오츠카 본인이나 제자인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 오사무를 두고 그런 것도 애니메이션이라고 만드냐고 욕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2] 오오츠카 야스오에게 배운 미야자키 하야오도 총기 묘사가 절묘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무스카가 권총을 쏘는 나서 그 반동을 표현한 것을 보면 실제로 권총으로 몇 백발은 쏜 사람이 그린 것 같아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3] 이 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이 용어는 60년대 중후반~70년대나 되어서나 나왔다.[4]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이 그런 경우.[5] 이런 차들을 그린 스케치들을 모은 어릴 적 화집의 그림들을 <오오츠카 야스오 16세의 차 화첩>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6] 무시 프로덕션 애니메이터의 차를 운전하다가 폐차를 해서 미안해서 대신 그려줬다고 한다. 자세한 건 우주의 세 용사 항목 참조.[7] 2화까지는 오오츠카 야스오가 라나도 그렸다. 미야자키 말로는 라나가 정말 예쁘게 나와야 코난이 목숨 걸고 지키려고 하는 개연성이 생기는 것인데 오오츠카 야스오와 다른 애니메이터가 그린 라나가 별로 예쁘지 않아서 화가 났고 자신이 직접 그리기로 했다고 한다. 코난 팬 사이에서도 오오츠카 야스오가 그린 라나는 부스라나(못생긴 라나)라고 불린다.[8] 원화로 크레딧 되어있으나 작화감독이라고 한다. 신인들에게 작화를 시켜봤는데 생각보다 못 그려서 자신이 밤새워 직접 작화 수정했다고 한다.#[9] 오오츠카는 그의 애니메이터 재능을 신인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급으로 평가했다.[10] 오오츠카 야스오는 요시카와 소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타카하타 이사오, 데자키 오사무와 같은 급의 천재라고 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