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남아메리카)
1. 개요
1879년 2월부터 1883년 1월까지 약 4년에 걸쳐 칠레와 볼리비아·페루가 맞서 싸운 전쟁이다. 남동 태평양 일대에서 일어났기에 태평양 전쟁이라 불렀는데, 60년 뒤 태평양을 무대로 하는 훨씬 더 큰 전쟁이 일어나면서, "태평양 전쟁" 하면 다들 제2차 세계 대전만 생각한다. 이 전쟁의 영문명은 'War of the Pacific'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은 'Pacific War'이다.[1] 하지만 전쟁의 해당국들은 이 항목의 전쟁을 Guerra del Pacifico (태평양 전쟁)이라 하고 2차대전 태평양전역도 똑같이 Guerra del Pacifico라 한다. 아무래도 남미 지역은 2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일 전쟁은 남의 일이라 관심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2. 배경
나폴레옹 전쟁 뒤 혼란에 빠진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가 일제히 독립하고 신생 독립국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중남아메리카 정세는 혼란에 빠졌다. 당연히 제대로 된 중앙집권국가 형성도 어려웠고,[2] 그 와중에 명확한 경계선이 없는 관계로 국가간 영토 분쟁도 빈발했다. 즉,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볼리비아의 태평양 연안 지역인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 문제였다. 이곳은 칠레-볼리비아 간 합의에 따라 볼리비아 영토였고, 구아노와 초석, 은 같은 중요 자원들이 많은 금싸라기 땅이자 볼리비아의 '''유일한 태평양 출구'''였다. 그러나 당시 남미 국가들이 다 그렇듯 모자란 인구로 개발이 어려웠고, 볼리비아는 이 지역 개발을 위해 칠레를 끌어들여, 1874년에 자국 내 칠레인 및 칠레 기업에 향후 25년간 무과세 혜택의 제공을 골자로 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876년 볼리비아 내부의 군사 쿠데타와 뒤이은 경제혼란으로 돈줄이 궁하던 볼리비아는 1878년 안토파가스타 주의 칠레인 및 기업들에게 수출세를 부과했다. 이는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고, 조약에 의거해 칠레인들이 세금납부를 거부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이들 자산에 압류조치를 폈다.
뒤이어 볼리비아가 안토파가스타와 수도를 잇는 철도를 개통, 안토파가스타 영유권을 굳히려 들자 칠레는 격분했다. 법적으로는 볼리비아 영토지만 개발은 사실상 다 칠레인이 했는데, 볼리비아가 개발만 다 시켜놓고 그대로 뺏어먹으려 한다는 인식이 커서였다. 더군다나 이 때 칠레도 경제가 나빠서 더욱 민감했다.
여기에 페루도 형제국이다시피 한 볼리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3] 두 나라는 칠레에 맞서는 비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1879년 2월 14일 칠레군이 볼리비아를 공격하여 안토파가스타 주를 강점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15년 전, 친차 제도 전쟁 당시 스페인에 맞선 동맹군끼리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3. 전개
볼리비아는 별다른 해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페루 해군이 칠레와 해전을 벌였는데, 이 지역은 사막과 산맥으로 이루어져 도로가 적어서 육상교통이 지극히 불편했으므로, 주요 거점은 주로 해안 가까이에 있었고 따라서 제해권이 있어야 지상군에게 원활히 보급을 할 수 있었다. 장갑함을 중심으로 전력을 강화해온 칠레 해군에 비해 함선 규모도 작고 수가 딸리는 페루 해군은 안가모스(Angamos) 해전(1879. 10. 8)에서 참패, 해군 사령관 미겔 그라우(Miguel Grau) 제독이 전사하고 기함마저 뺏겨 제해권을 잃었다. 이로써 칠레가 승기를 잡았다.
제해권을 장악한 칠레군은 본격적으로 북진을 개시했다. 볼리비아-페루 동맹군은 칠레군과의 연이은 지상전에서 모조리 패배했다. 이에 칠레군은 이듬해인 1880년에 안토파가스타 주 전역은 물론 페루의 타라파카(Tarapach)와 아리카(Arica) 두 주들을 모두 함락시켰고, 볼리비아군은 안데스 산맥 너머 본토로 쫓겨나며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럼에도 페루가 항복할 조짐이 없자, 칠레는 지상군을 긁어모아 페루 본토를 침공했다. 1881년 1월 15일, 페루는 수도 리마로 가는 길목이자 최후방어선인 미라홀로레스(Miraflores)에 패잔병과 예비군, 갓 징집한 신병에 용병까지 긁어모아 약 1만 명을 배치해 결사항전에 나섰으나 칠레군에게 끝내 패배하여 3천여명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는 와해되었다. 뒤이어 1월 17일 수도 리마가 결국 칠레군의 손에 함락되었고, 뒤이어 페루 해군마저 잔존 함정이 칠레 해군에 모조리 나포당해 항전불가상태에 빠지면서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페루군은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을 계속했고, 볼리비아도 전투를 멈추지 않아 산발적인 교전이 이후 2년여간 이어졌다. 물론 전투가 지속될수록 페루와 볼리비아가 불리해졌고, 끝내 1883년 교전당사국들은 종전에 합의했다.
3.1. 미국의 개입 시도
미국 태평양 함대와 국회의원 몇 명이 페루에 투자된 미국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서 개전 초기에 양측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한참 잘나가고 있던 칠레 측은 이에 대해서 '''이 건방진 미국놈들이 자꾸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면 태평양 바닷속에 처박겠다'''고 답했다.
사실 당시의 미국은 이제 막 식민지에 손 뻗치던 신흥 강국이었고 대외적으로는 큰 파워가 없었다. 태평양 함대라고 해 봐야 목조선 몇 척이 고작이었으니 영국제 장갑함을 가지고 있는 칠레 해군이 보기에는 만만해 보일 수 밖에.
이때까지는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구 식민지 열강들이 세계를 갈라먹으며 현재의 미국의 지위에서 세계를 호령하고 있었다. 오늘날 항모전단을 여럿 굴리며 전세계에 그 힘을 과시하고 언제든 어디서든 미군을 주둔하고 있다가 투사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볼 수 있는 때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질서가 재편된 때이다.
4. 결과와 패전 이후의 페루와 볼리비아
칠레는 볼리비아로부터 안토파가스타 주를, 페루로부터 타라파카·아리카·타크나(Tacna) 등을 병합했다. 이로써 순식간에 칠레의 영토가 남위 18도까지 넓어졌다. 이후 칠레는 1929년에 페루에게 타크나 지방을 돌려주고 대신 타라파카와 아리카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볼리비아와는 '''아직도''' 안토파가스타 주의 영유권 분쟁이 지속 중이다.
다만 페루에게도 당시 지정학적인 가치가 없는 황무지였던 타라파카와 아리카 등과 달리 볼리비아에게 있어서 안토파가스타의 상실이 뼈아플 수밖에 없다. 현재 안토파가스타 주는 칠레의 주요한 광업 지역 중 하나로, 이 지역의 광업 생산액만 봐도 2013년 기준 7조 4749억 페소로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약 150억 달러 정도 되는 수준. # 2013년 볼리비아 GDP가 300억 달러 수준이었으니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다.
볼리비아는 단순히 자원만이 아니라 태평양로 나가는 유일한 연안 영토를 잃어 경제개발에 매우 불리한 '''내륙국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볼리비아는 안토파가스타 주의 영토 전부가 아니어도 좋으니 바다로의 출구를 일부만이라도 혹은 본토와 단절된 월경지가 되어도 좋으니 일부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항구 도시들만이라도 주라며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칠레는 '절대 불가, 현지민들 대다수가 볼리비아로의 영토 반환을 반대하고, 우리나라에 잔류하기를 원함,[4] 그냥 우리 땅 지나가서 항구 빌려 써', '그럴꺼면 아크레와 차코 보레알도 브라질이랑 파라과이한테 돌려달라고 해봐.'[5][6] 라고 일관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해양국 의지는 티티카카 호와 일부 면적이 넓은 아마존 밀림 지대의 내륙 하천에서 경비정 '''173척'''을 운용하며 해군이라고 주장하고 해병대(...)도 조직해놓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하다 못해 페루와 칠레는 공식 수교 관계도 있고 같이 서로 국방, 경제 협력까지 하는 등 그래도 사이가 많이 좋아졌는데 볼리비아와 칠레는 수교관계도 안 맺으며 불구대천 이상으로 대립한다.
물론 페루 역시 태평양 전쟁 당시 칠레에게 패해 영토 일부를 빼앗기긴 했지만 태평양 해안지대를 대부분 유지하였고[7] 아예 내륙국으로 전락하여 패전 후에도 약화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속 약소국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볼리비아와 달리 칠레가 뺏어간 타크나 등 영토의 일부를 반환받았으며, 이후 국력을 어느정도 회복하여 다른 이웃나라들인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로부터 아마존 강 유역 일대의 영토를 뺏어먹으며 칠레에게 빼앗긴 영토들만큼은 아니어도 새 영토를 얻는데 성공했다. 반면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전쟁에서 패전 후 브라질에게 아크레 지역 등 아마존 밀림 지역 일대의 영토를 더 뜯기고 1930년대 파라과이와의 차코 전쟁에서도 패전하여 차코 보레알 지역 등 얼마 없는 내륙 영토마저 파라과이한테 더 뜯기는 등 연전연패와 영토 상실을 반복하며 남미의 약소국으로 추락했다.
5. 종전 후 칠레, 볼리비아, 페루 3국의 태평양 영유권 분쟁과 소송전
이 전쟁 이후 군사적 관점에서 칠레는 전통적인 해군국으로 성장하는 한편, 태평양 일대의 풍부한 어족을 통해 다양한 수산물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아리카와 타라파카, 타크나, 안토파가스타 등 페루와 볼리비아 영토였다가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새로 합병한 칠레 북부 지역의 새 영토에 전쟁 발발 전 원래 살고 있던 볼리비아, 페루 사람들을 볼리비아와 페루 본국으로 대거 추방하거나 학살하고, 칠레인 이주민들을 대량으로 이주시켜[8] 볼리비아, 페루인들이 소유했던 태평양 항만과 공장, 초석 광산들의 경영권을 독차지하고, 이들 지역들을 개간하였다.
이에 페루는 불만을 느끼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걸게 되고 2014년 1월에 승소하여 칠레가 주장했던 영해 및 EEZ 중 일부를 얻게 된다. 기사 그러자 볼리비아도 국제사법재판소에 청원했고 2015년 9월 24일 14대 2로 볼리비아의 승소로 결론이 내려졌다. 영상
칠레의 반대가 있었지만 사실상 볼리비아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기사 물론,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볼리비아로서는 이것 또한 승리로서 간주하고 대환영하는 분위기이다. 볼리비아 내 기사
하지만 페루와 볼리비아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페루의 경우 1929년 칠레와의 평화 조약을 통해 태평양 전쟁에서 칠레에 합병된 타라파카와 아리카 지역을 칠레 영토로 인정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그리고 2014년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육지의 영토가 아닌 영해 및 배타적 경제수역'''에 대한 조정이었다. 반면,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전쟁에서 잃은 영토 일부를 포기한 페루와 다르게 완강하게 해안 영토 전체를 되돌려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실제 칠레는 2014년 페루와의 해역분쟁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판결을 수용했지만 볼리비아와의 영토 갈등에선 절대로 물러서려고 하지 않고 있다. 만약 볼리비아가 칠레에게 빼앗긴 안토파가스타 주를 돌려받는다면 칠레-페루간 협정을 통해 칠레 영토로 공인된 타라파카 지역이 졸지에 볼리비아 땅이 된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가로막혀 월경지가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9] 그리고 결정적으로 볼리비아가 반환을 주장하는 이 지역에는 태평양 전쟁 후 칠레에 합병되면서 원래 살던 볼리비아인들이 대거 추방당하고[10] 칠레 본국에서 이주해온 칠레인들이 다수라서 이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칠레인 주민들 상당수는 안토파가스타의 칠레 잔류를 지지하며 이 지역이 볼리비아로 합병되는 것에 대해 결사 반대하고 있으며,[11] 실제로 칠레 정부에서도 이 지역내 주민들이 볼리비아로의 귀속을 원하지 않는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안토파가스타의 영토 반환 불가 입장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다.[12] 그러나 볼리비아 측에서는 이 지역의 칠레인 주민들에게 안토파가스타가 다시 볼리비아 영토가 되어도 칠레 본국으로 추방시키지 않고 볼리비아-칠레의 복수국적의 허용과 또는 볼리비아 국적을 부여해주겠다며 이들을 전부 볼리비아 국민으로 편입시키려는 유화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볼리비아의 적대국가인 칠레 내부에서도 이 전쟁에서 칠레가 볼리비아와 페루로부터 획득한 아리카와 타라파카, 안토파가스타 등 칠레 북부 3개 주 영토들 중 일부를 볼리비아에게 할양하여 볼리비아와 관계 개선을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국제미인대회에 칠레 대표로 참가한 한 칠레 여성은 작년 2017년도에 칠레 영토 일부를 볼리비아에게 열어주자며 볼리비아의 해안 영토 반환을 지지하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소송이 이어졌지만 2018년 10월 1일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칠레가 볼리비아와 영토반환 협상을 할 의무는 없다며 사실상 칠레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림에 따라 볼리비아의 꿈은 좌절되었다. 물론 정 원한다면 영토협상을 해도 된다는 판결문이 나오긴 했지만, 칠레가 볼리비아보다 월등히 잘사는지라 칠레가 볼리비아에게 손 벌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칠레의 영토라는 것이다.[13] 그리고 이런 저런 문제들을 떠나서 볼리비아에서 칠레 영토가 된지 백년이 넘어가는데다 지역 주민들 대다수가 칠레령 잔류를 주장하는지라 칠레로서는 이 땅을 굳이 볼리비아에게 돌려줘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칠레와의 해안 영토 분쟁 국제 소송전에서 패배한 볼리비아에서는 칠레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만들어낸 판결이라며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칠레와의 해양 영토 분쟁 소송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볼리비아는 현재까지도 해양 영토 수복의 염원을 굽히지 않으며 티티카카 호수와 내륙 하천 지대에 해군을 운용, 유지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개국 초기 볼리비아령이었다가 칠레로부터 빼앗긴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영토 반환을 공공연히 외치며 칠레에게 대항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군사력과 경제력, 인구수에서도 칠레가 볼리비아보다 인구 수도 더 많고 월등히 강력한데다, 해당 지역의 현지 주민들도 볼리비아로의 재합병/귀속을 결사 반대하며 칠레령 잔류를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는 통에 볼리비아 혼자서 쓸쓸히 계란에 바위치기를 하고 있다(...).
여담으로 칠레 내 일각에서는 아예 볼리비아가 영유권 반환 주장과 해양 접근권을 요구하는 안토파가스타 주에 대해서 칠레 정부가 기존의 무시 전략으로 일관할게 아니라 이전 영국이 영국령 잔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서 현지 지역 주민들 대다수가 영국령 잔류 찬성/아르헨티나, 스페인으로의 귀속 반대를 택했던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와 지브롤터처럼 안토파가스타 내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칠레령 잔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현지민들의 지지 확보를 통해서 볼리비아와의 영토 분쟁에서 외교적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데 만약 이 주민투표가 시행되어 안토파가스타 주의 현지 주민들이 칠레령 잔류 찬성과 볼리비아로의 귀속 반대에 손을 들어준다면 태평양 전쟁으로 칠레에게 잃은 안토파가스타에 대한 영토 반환을 주장하며 태평양 연안 수복을 외쳤던 볼리비아로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의 소송 패배에 이어서 다시 적지 않은 타격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칠레 정치권에서는 이미 국제사법재판소와의 소송에서도 볼리비아를 일방적으로 눌러 국제법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한데다 이미 태평양 전쟁으로 볼리비아에서 칠레령이 된 이후 칠레의 실효지배 시기만 거의 100년이 넘어가는 안토파가스타 지역에 대해 칠레와도 국력 차가 크게 나는 볼리비아의 태평양 영유권 주장 시비에 신경쓰지 않으며, 칠레령 잔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1] 전자 War of the Pacific이 태평양 쪽에서 발견된 그들끼리의 이권에서 벌어진 그저그런 전쟁이란 뉘앙스라면 후자인 Pacific War는 태평양 그 자체가 전장이 되어 태평양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이란 뉘앙스가 강하다. 전쟁 규모 역시 이들과는 비교를 불허. 필리핀이고 인도네시아고 중국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린 세력끼리 뭉쳐 기존 열강에 승부를 걸었으니...[2]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뭉쳐 독립한 대콜롬비아 공화국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중미 소국 5개국들이 통합해 결성한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도 금방 무너졌다.[3] 볼리비아와 페루 모두 잉카 문명의 적손,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에는 아예 국가를 통합하려고 국가 연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무력 저지로 인해 실패했다.[4] 실제로도 그렇다.[5] 그런데 정작 정부에서든 민간에서든 볼리비아가 적극적으로 영유권 주장을 하며 칠레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안토파가스타와 다르게 차코 보레알과 아크레는 볼리비아조차도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있다. 볼리비아 측에서도 아예 브라질, 파라과이 땅으로 인정했을 정도. 설혹 볼리비아가 입장 번복하고 영토를 돌려달라고 영유권을 주장한다고 해도 파라과이와 브라질에서도 '이 새끼들 미쳤냐?'라며 반발할 공산이 크고... 다만 아크레 주 등 영토들을 브라질에게 빼앗긴 전적 때문인지 볼리비아는 브라질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6] 만약 볼리비아가 아크레와 차코 보레알 지방도 칠레한테 빼앗긴 안토파가스타처럼 브라질, 파라과이를 상대로 영토분쟁을 일으킨다면 칠레는 파라과이나 브라질과 손을 잡고 볼리비아를 압박하거나 견제할 공산이 높다. 칠레는 남미에서 브라질의 유엔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하는 다른 남미 국가들과 달리 브라질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지하는 등 관광, 무역, 국방 등 여러 부문에서 양국 교류가 활발할 정도로 브라질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7] 태평양 전쟁 이전 태평양 해안 지대에 점유하고 있던 영토와 국경선이 협소했던 볼리비아와 달리, 페루는 해안 지대의 국토 면적이 꽤 방대하여 특정 해안 지대를 칠레에게 빼앗겨도 볼리비아처럼 내륙국으로 전락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8] 미국-멕시코 전쟁 전후 멕시코 땅이었다 전후 미국 영토가 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지역에서 살던 멕시코인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멕시코 본국으로 추방하지 않고 자국민으로 포용했던 미국의 행보와도 사못 대조된다. [9] 이러한 점을 알고 칠레는 1950년대에 안토파가스타 지역이 아닌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로부터 획득한 아리카 등 칠레 북부 지역의 해안 영토 일부를 볼리비아에게 할양하고 볼리비아로부터 볼리비아의 땅인 티티카카 호수의 사용권을 얻는 방안을 볼리비아 측에게 제안하며 볼리비아와의 영토 갈등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티티카카 호수와 인접해있던 주변국인 페루가 이 방안에 결사반대하고, 이외에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 다른 주변국가들도 남미 역내 국가들 간 영토/국경 갈등 해소에 안 좋은 선례를 만들 수 있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했다.[10] 바다와 통하는 해안 지대라는 장점을 제외하고는 황량한 사막 지대였기 때문에 볼리비아령이었을 당시에도 이 일대에서 거주하던 볼리비아인들의 인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물론 일부 볼리비아인들은 안토파가스타가 칠레 땅이 된 뒤에도 본국으로 추방당하지 않으려고 국적을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바꾸거나 전력을 위조, 칠레 사람인척 하며 해당 지역에서 거주, 잔류하기도 했다.[11]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 과반수가 영국 지배를 지지하며 아르헨티나로의 합병을 반대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측의 영유권 주장이 빈약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포클랜드와 달리 이 일대 지역은 칠레에 편입되기 이전에 볼리비아 영토였던 시절도 있었고 볼리비아 측의 영유권 주장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복잡하다. 하지만 포클랜드는 중남미 국가들이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기라도 하지만 안토파가스타는 중남미 국가들도 볼리비아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12] 그러나 칠레는 태평양 전쟁에서 페루로부터 점령, 합병한 타크나 지역을 페루에게 반환할 당시 태평양 전쟁 전후 타크나로 이주해온 칠레인 이주민들과 칠레 국내 여론이 페루로의 영토 반환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음에도 1929년 페루에게 반환했다.[13] 사실 볼리비아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에도 못미쳐서 최빈국 취급을 받은 2000년대 초중반보다는 훨씬 성장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칠레가 볼리비아보다 1인당 국민소득은 4배 이상 많을 정도로 체격 차이가 현저하다. 당연히 칠레로서는 볼리비아에게 무슨 손 벌릴 입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