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멕시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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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미국의 멕시코 침략전쟁. 멕시코에서는 '멕시코에 대한 미국의 무력간섭(Intervención estadounidense en México)'이라고 한다.
2. 배경
2.1. 루이지애나 구입
1803년, 갓 독립한 신생국가 미국은, 미시시피 강의 해운 이용을 위해 프랑스령 뉴올리언스를 매입하고자 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 특사단은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고 뉴올리언스 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까지 덤으로 매입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폴레옹 입장에선 나폴레옹 전쟁과 아이티 혁명 등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제대로 된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다, 황열병 때문에 당시 아직 루이지애나 인구가 충분하지 못해서 개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이지애나같은 놀고먹는 땅 귀찮은데 그냥 미국에다 싸게 팔아 버리자고 결론을 내린 탓이였다.
특사단은 의회가 허락해준 권한을 넘어서는 이 통큰 제안을 받아들이고 귀국, 이후 미국에서는 갑론을박[1] 이 일어났으나 당시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덕에[2] 루이지애나 매입을 인준했다. 이 루이지애나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 수준도 아니었고, 땅주인 프랑스도 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잡히는, 전혀 관리가 안 되는 측량도 안된 땅덩어리 수준이었는데 알고 보니…
'''미국 영토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3] '''
이후, 미국은 미친듯이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에게 루이지애나 대륙은 프랑스로부터 합법적으로 매입한 땅이었고, 자기들이 개척해야 할 영토였다. 물론, 그 땅에 잘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은(...).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서부개척은 불과 30여 년만에 한계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서부지역의 불분명한 경계선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2.2. 멕시코의 등장과 텍사스 문제
독립과 동시에 유카탄 반도 이북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의 영유권을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던 멕시코로서는 동부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1820년, 즉 '''멕시코가 독립하기 불과 1년 전'''에, 이 지역의 공식적 통치국가였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텍사스 일부 지역을 불하받은 미국인 이민자들이 텍사스에 들어와서 정착촌을 건설한 상태였던 것이다. 신생국가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민자들과 협상 끝에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불하권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멕시코의 정치불안을 틈을 타서 미국인 이민자들은 텍사스로 빠른 속도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결국, 필연적으로 조건 따위는 씹어먹은 미국인 이민자들과 멕시코계 주민들, 멕시코 정부와의 충돌이 잦아지며, 미국과 멕시코 양국은 모두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은 텍사스를 3천만 달러에 구매하고자 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멕시코의 중앙정치 혼란은 가속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텍사스의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계속되는 이주로 크게 강해졌는데,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중앙정치의 혼란을 잠재운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무장한 미국 이주민들은 무장해제 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주민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산타 안나가 직접 지휘하는 멕시코군은 알라모[4][5]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진격했으나 정작 산 하신토[6]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고 풀려났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잡혀있던 사이 멕시코 정부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킨 상태여서 산타 안나의 조약엔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이 된 산타 안나는 이를 이용하여 텍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으며, 텍사스 측은 이에 저항하면서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신생 텍사스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파와 연방합류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연방합류파가 승리하여 텍사스는 미국의 주로 합류하기로 하고, 미국 역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커졌다. 한마디로,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이 제멋대로 반란군들이 강점한 자국의 영토를 가져가버린 셈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이웃의 독립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라는 태도였다.
결국 열받은 멕시코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7] 오히려 군사행동은 미국이 먼저 개시했다. 특히 미국은 텍사스 하나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팽창론자로서 공공연히 태평양 출구인 캘리포니아까지 확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1846년 4월 25일, 양군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미군 16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최대한 충돌을 피했으나 미군이 전쟁선포 떡밥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국경에서 집적대면서 충돌을 일부러 일으켰다(...). 이 충돌이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벌어진지라 반전주의파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러온 포크 대통령에게 충돌이 벌어진 장소를 정확히 지도에 찍으라고 했지만 이에 불응하자 반전주의파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반전주의파의 힘이 너무 약해서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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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과 동시에 리오 그란데의 국경에서 미군이 일제히 강을 건너며 공세를 개시했다. 인구도 적고[8] 장비나 훈련 면에서도 뒤떨어지는 멕시코군이 미군의 전면공세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개전 초기부터 여러 전투에서 미군에게 패배하면서 사실상 국경방위는 실패한 상황이었다.
개전 초 미국의 공세는 캘리포니아에 초점을 맞추었다. 7월 7일, 미 해군 프리깃과 슬루프함이 몬테레이에 지상군 일부를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멕시코는 캘리포니아의 미국 정착민들의 대반란까지 겹치며 이내 수세에 몰렸다. 게다가 미군을 요격하기 위한 멕시코군의 반격이 미국의 테일러 장군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내 로스 앙헬레스(로스 앤젤레스)가 포위되었다. 12월 16일에는 애리조나의 주도 투손이 함락되었으며, 1847년 초에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 뉴멕시코 전역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태평양 출구를 확보했음에도, 멕시코가 항복을 하지 않자 미국은 멕시코 본토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압도적인 해군 전력을 활용한 미군은 멕시코 영토 남단이며 수도 멕시코 시티의 동쪽에 위치한 최대항구 베라크루스에 지상군을 기습적으로 상륙시켜 베라크루스를 함락했다. 그 다음엔 제2전선을 형성하여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주력부대도 이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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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9월 13일, 수도 멕시코 시티의 관문인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 수비군은 약 2,600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며 참패, 마지막 방위부대마저 붕괴된 반면, 미국의 공격부대는 불과 200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지체없이 수도 멕시코 시티로 침공했다. 결국 9월 15일, 멕시코군과 민병대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멕시코 시티가 함락되고 멕시코 정부는 피난갔으며 멕시코군은 포로 포함 약 7,000명의 인명피해를 내면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사실상 이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확실하게 갈렸다. 미 해병대 찬가(Marines' Hymn)의 첫 구절 "'몬테수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에서 나오는 '몬테수마의 궁전'이 바로 이 차풀테펙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선 6명의 멕시코 유년 사관생도들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고 멕시코에선 이들을 "소년 영웅(Niños Héroes)"으로서 현재까지도 기념을 하고 있다.
이후에도 군인은 물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결사항전을 지속한 멕시코였으나, 미군이 계속해서 공격해오면서 각지에서 계속 참패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멕시코에게 피해만 늘어나며 불리해졌다.[9] 이렇게 미국의 점령지만 늘어나는 꼴이 되자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이나 다름없는 협상을 제의했다. 안습...
4. 결과
1848년 2월, 양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멕시코는 텍사스의 미 연방 합류를 인정했으며, 미국이 애초부터 주장한 이 지역의 국경을 리오 그란데 강으로 삼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멕시코는 미국에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유타 주,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 주 남부 지역,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텍사스 주의 일부'''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를 겨우 1,500만 달러에 강매했다.
물론, 멕시코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면 캘리포니아 반도는 물론이고 소노라 주와 치와와 주까지 합병당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멕시코는 완전히 미국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멕시코 전체를 미국에 병합하자!"'''라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멕시코 전체를 합병한다면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1/3이 넘는 멕시코인들[10] 을 죄다 학살하거나 추방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런 부담을 무시하고 멕시코 전체를 먹었다면 미국이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국은 계속해서 멕시코 북부 주 영토까지 노렸는데, 위 지도상의 갈색 영토는 미국이 프랭클린 피어스 시기인 1853년 메시아 지역의 국경이 불명확하다는 개드립을 쳐대며 전쟁으로 합병하지 못한 캘리포니아 반도 등을 구입하려고 했으나, 멕시코의 반대로 그 중 일부만 1,0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한 지역으로, 이 사건을 '개즈던 매입'[11] 이라고 부른다.
한편 미국은 남쪽의 멕시코 말고도 북쪽의 영국(오늘날의 캐나다)와도 오리건 지역[12]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양국의 경계를 두고 미국은 "북위 54도 40분 아니면 전쟁!(Fifty-Four Forty or Fight!)"[13] 를 주창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때문에 영국과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당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시끄러웠던 영국과 텍사스 문제로 멕시코와의 전쟁이 임박한 미국 모두 한발짝 양보하면서 타협점을 찾았고 1846년 오리건 조약으로 북위 49도선을 양국의 경계로 확정지었다. 그렇게 북쪽 국경 문제를 확정지으면서 양면전쟁 위험을 없앤 미국은 안심하고 멕시코에 전력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막대한 영토를 뜯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오늘날 광대한 본토가 완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로써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친, 북아메리카의 땅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를 완성했으며, 서부개척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그 후 무서운 속도로 본격적인 발전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멕시코에게 삥뜯어낸 어느 땅에선 황금이 쏟아졌고, 또 다른 땅에선 석유가 흘러나왔으니 미국은 자원의 축복까지 받았다.
한편으로는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노예주와 자유주들이 이 전쟁에서 얻은 새로운 주들을 "노예주로 하느냐? 자유주로 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얻게 된 땅들 중 (북부 출신 이민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점한) 캘리포니아 등 서부 해안은 북부의 편을, 텍사스는 남부의 편을 들었고 이는 남북전쟁까지 이어진다.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아 노예 관련 법이 없는 영토들은 양측에서 그 소유를 주장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잃어버린 영토는 240만 km2[14] 로 1836년 텍사스 독립 이전의 영토 중 절반도 넘는 55%의 강역을 잃었다. 또한 강력한 중앙정부를 제창하던 대통령 산타 안나는 패전 책임으로 실각해버리고 이후 멕시코는 강력한 중앙정부파가 아닌 지방분권적인 연방형성파에 의해 주도된다.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형성한 것과 비교하면… 이후 멕시코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형성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5. 여담
- 미국은 명백한 운명 등 나름대로의 명분을 붙여가며 전쟁을 했지만 땅 뺏긴 멕시코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로남불에 불과했고, 이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이 전쟁에 대해 비판이 많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미 수 세기에 걸쳐서 멕시코의 영토인 곳을 점령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또한 훗날 회고록에서 이 전쟁을 가리켜 남의 땅을 노리는 유럽 군주들의 전쟁과 같으며 미국이 약소국에 저지른 횡포라 비판하였고 남북전쟁은 이 전쟁으로 미국이 받은 천벌과 같다고 적었다. 월든의 작가 헨리 소로는 이런 부도덕한 전쟁을 하는 나라에다 세금을 못 낸다고 버티다가 감옥에 갔고 이후 친척이 세금을 대납하여 풀려났지만 이 전쟁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시민 불복종이라는 책을 썼다. 자세한 것은 시민 불복종 운동 문서를 참고.
- 미국-멕시코 전쟁의 계기가 된 텍사스 공화국의 연방 가입에 대해 멕시코가 강력히 항의하자 미국은 '이웃의 독립국이 요청해서 이를 수락했을 뿐이다'라며 무시했는데, 시간이 흘러 21세기 러시아가 이 논리를 써먹는다. 농담이 아니라, 미국이 러시아의 크림 공화국 합병에 대해 비판을 하고 문제를 제기하자 러시아는 진짜로 이 전쟁을 언급했다.
- 근래 이 일대에 히스패닉(특히 멕시코계)이 늘어나면서 역시나 원래 멕시코 땅이었던 게 맞긴 한가 보다 하는 농담도 있다. 땅은 빼앗았어도 현지에 거주하던 멕시코 출신의 시민들 대부분은 어차피 고향을 떠나 어디 갈 곳도 없으니까 그냥 살던 곳에서 살며 모두 미국인이 되었다.[15] 국경도 붙어있는데 같은 출신 사람들도 있겠다 인구가 유입되기 딱 좋은 조건이다. 몇몇 멕시코인들은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려다가 체포되면 "선조들의 영토로 들어왔는데 왜 체포하느냐?"라면서 딴지를 걸기도 한다(...). 반대로 미국의 구 멕시코령 지역으로 이주한 서게르만계 미국 백인들 중 일부(특히 미국 백인 하층민)가 멕시코 본토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계 멕시코인의 조상이 되었다.
- 휘그당은 새로 편입된 주에서 노예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 68년 후인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독일이 미국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멕시코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들과 함께 싸워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멕시코는 당시 멕시코 혁명으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고는 중립을 지켰고, 이 문서가 영국 정보부에 들켜 미국에 알려지고 말았다. 당연히 미국의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1차대전 참전의 한 원인이 된다.[16]
-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는 둘 다 멕시코 영토에서 미국 영토로 넘어간 같은 처지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정반대이다. 20년 뒤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에서 캘리포니아 주는 연방정부, 텍사스 주는 남부연합을 지지했고 캘리포니아 주는 1972년에 사형제를 폐지한 반면 텍사스 주는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가장 많은 사형 집행 건수를 자랑한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는 동부의 주들과도 다른 매우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성향이 강한 곳이라서 기독교성향과 보수성향이 강한 텍사스 사람들은 LA를 방탕하고 음란한 마귀들의 도시라고 칭하기도 한다.
6. 같이보기
[1] 주된 반대는 연방당(Federalist Party)에서 나왔는데, 이유인 즉 연방헌법은 대통령(행정부)에게 타국과 이러한 거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에 의회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행위였다.[2] 월권행위는 인정하나 미국에 너무나 이득이 되는 거래이기에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3] 실제 제퍼슨이 스스로 명한 묘비문의 내용이다.[4] 미국사의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 유명한 데이비 크로켓을 포함한 개척민들로 구성된 186명의 민병대가 성당을 개조해 만든 알라모 요새에서 10배 이상이나 많은 3천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며칠동안 분전하다 모두 전멸했다. 미국에서는 관련 영화도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투. 덕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클라이맥스 전투에서도 밀러 대위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최후 방어 거점을 '알라모 요새'라고 부른다.[5]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는 알라모(1960년, 2004년 작)와 데이빗 크로켓이 있다.[6] 미국 영토가 된 이후로는 영어식인 샌 자신토로 불린다.[7] 나중에 멕시코가 미국에게 패배하면서 미국의 강요로 외교관계가 회복된다.[8] 멕시코는 890만, 미국은 2320만.[9] 멕시코 군대와 민병대의 게릴라전을 미군이 초토화 전술로 무력화했다. 이 초토화 전술에서 멕시코인들에 대한 살인, 약탈, 강간, 방화가 흔하게 일어났다.[10] 1848년 당시 미국의 인구는 약 2100만 명, 멕시코의 인구는 약 750만 명이었다.[11] 멕시코에서는 '메시아 늑약'.[12] 동쪽으로는 로키 산맥, 남쪽으로는 캘리포니아, 북쪽으로는 러시아령 아메리카,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접한 지역으로 오늘날의 오리건 주를 비롯해서, 워싱턴 주, 아이다호, 브리티시컬럼비아 일대를 포함한다.[13] 북위 54도 40분이 어디나면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알래스카의 최남단 위도가 바로 북위 54도 40분이었다. 다시 말해 알래스카까지 국경을 위로 끌어올려 '''캐나다 서해안을 모조리 잡아먹겠다는 것.'''[14]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1,500만 달러에 강매한 알타칼리포르니아 준주 전체 + 산타페데누에보메히코 준주 일부지역 140만 km2 + 텍사스 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산타페데누에보메히코 준주 대부분, 치와와 주, 코아우일라 주, 누에보레온 주, 타마울리파스 주 일부지역 60만 km2 + 테하스 준주(= 텍사스 공화국) 40만 km2.[15] 당시의 미국은 닥치고 이민을 받던 시기라서 불체자든 아니든 심각한 범죄 경력이 없었다면 이민도 잘 받아주면서 미국 국적도 쉽게 부여했다. 미국이 이민에 통제를 걸기 시작한 건 20세기 중반 이후.[16]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의 현실적인 이유는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한 미국의 자본가들이 영국 & 프랑스가 독일의 맹공으로 고전하고 있어 세계대전에서 독일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빌려준 돈을 못 돌려받을까봐(...) 우려한 것이 원인이었지만 이 전보가 참전 여론을 부채질한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