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아르메니아 관계
1. 개요
터키와 아르메니아의 관계. 이 둘의 관계는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터키의 아제르바이잔 지원 때문에 사이가 험악하다.''' 터키 독립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이 터키를 침공했으나 패전하고 영토를 상당부분 상실한 적이 있으며, 아라라트산은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일부러 터키에 양도하면서 양자 사이의 갈등은 아주 첨예해졌다 다만 요즘들어서 아르메니아의 반터키 감정은 식은편이며 오히려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을 더 싫어한다.
2. 역사적 관계
2.1.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전
사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전 역사만 보면 아르메니아인과 오스만 제국은 서로 윈윈하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중세 셀주크 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많은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당하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에서 십자군을 지원하며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실용적인 이유로 동로마 제국 내에서 활약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권익을 보장했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이란 사파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십수만여 명이 사망했던 것에 비해 근세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의 아나톨리아 내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를 그대로 활용하였다. 오늘날처럼 사이가 나빠진 계기는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카프카스를 정복하고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한 것과, 터키와 아르메니아 양측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부흥 그리고 그 결과로 빚어진 아르메니아 대학살이었다.
2.2. 터키 독립 이후
독립 후 아르메니아는 옆나라인 터키에게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했고 터키는 일부를 시인하긴 했으나 결국 사실상 책임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런 민족감정이 대번에 양국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미국은 NATO 가맹국인 터키를 윽박지를 수도 없고 러시아 남쪽 요충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러시아는 침묵하거나 그냥 아르메니아 편을 들었다. 현재 터키 측에서도 사과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소련 붕괴 이전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및 나히체반 자치공화국 문제로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다. 단지 소련 정부가 힘으로 억누르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탈퇴를 선언하면서 소련-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적극 지원해 아제르바이잔을 탈탈 털어버렸다. 그나마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의 경우, 전쟁을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으로 확대될 경우 터키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군사개입해 아르메니아를 박살낼 것이라고 협박 (실제 군대를 터키-아제르바이잔, 터키-아르메니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해서 큰 문제 없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아르메니아가 점령하고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에 친러시아 성향의 헤이대르 앨리예프(Heydər Əliyev)가 집권하자 러시아의 중재로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아르메니아만 편들 수가 없었는데 아제르바이잔이 아르메니아보다 훨씬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제거한답시고 아라라트산을 터키에 줘버렸기 때문이다. 터키는 친미 국가로 아랍과 유라시아를 둔 중요한 요충지로서 미국이 그동안 터키에서 벌어진 온갖 인권탄압과 쿠데타를 모른 척 했던 것도 터키의 친미정책 및 이스라엘 및 아랍과 유라시아 감시 및 세력권 유지라는 중요한 요충지로서 가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즉 미국과 이스라엘이 터키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점[1] , 게다가 아제르바이잔과 혈맹 관계이자 유라시아 앞마당에 온갖 자원이 가득하고 튀르크족 국가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는 터키를 러시아가 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오세티아 전쟁때 조지아로 쳐들어간 러시아가 조지아 내에 있던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잇는 철도 및 도로 및 송유관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던 것도 두 나라를 염두한 일이다. 또한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 공화국을 일절 인정하지 않으며 필요이상의 군장비 지원은 자제하고 조지아가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통하여 얻는 이득에 대하여 말을 아끼고 있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겐 터키 동북부 지역의 상당수 영토가 옛 아르메니아 땅이기에 되찾을 땅으로 여긴다. 옛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를 비롯하여 성지인 아라라트 산과 많은 땅을 터키 안에 가지고 있기에 영토를 찾지 못하면 그 안에 남은 조상들의 문화재나 유물들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아르메니아로선 무리인 상황. 다만 현실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라는 점에서야 마찬가지지만 관리가 어려웠던 한국과는 달리 당장 터키는 아나톨리아 내륙과 동부 조금으로만 들어가도 당장 백년 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다가 대학살 이후 텅텅 비어 방치와 훼손, 풍화 속에 썩어 무너져 가는 옛 아르메니아 교회, 수도원, 주택 같은 유물들이 카이세리 부터 카르스, 디야바키르, 반 지방 까지 쫙 널려 있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감정이 훨씬 심한 편이다. 사실 문화, 사회사적 측면에서 아르메니아 민족, 문화 공동체의 역사의 중심지는 현 아르메니아 본토 지역이 아닌 아니가 위치한 옛 바스부라간[2] 일대, 즉 현대 터키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일대였으며, 관련 역사적 유물과 문화적 활동의 중심지도 대학살로 쓸려나간 아나톨리아 동북부와 내륙지방이었다. 그 동네의 정치적 지배 세력은 로마/동로마와 페르시아, 이슬람 제국, 몽골, 셀주크/오스만 튀르크, 러시아 사이에 왔다갔다 했다 한들 해당 지방에서 아르메니아인이 계속 살아 왔으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해 왔던 지역들이 100년 만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존재 자체가 '''멸균실'''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청소당해 버리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화예술사적 관점에서 연구 보존되어야 할 유물들은 죄다 터키군 사격 연습 타겟으로 쓰인다든지, 인근 농부들의 헛간 재료로 무너지고 있다든지 하는 꼴을 수십 년간 눈 뜨고 지켜봐야 했으니 아르메니아인들 입장에서 복창이 뒤집히는 건 당연지사.
2.3. 2000년대~2010년대
2007년에는 터키가 화해의 제스쳐로 악다마르 섬 아르메니아 교회를 일부 고쳐준 일이 있는데, 이게 되려 아르메니아에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가 아닌 악타마르 섬이라는 아르메니아어로 섬 이름을 바꾸고 이 섬 교회나 터키 전역에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 유적지들 소유관리권을 양도하라는 요구를 더하게 된다. 그러자 터키 극우들도 울컥하면서 화해 분위기를 작살나버렸다고 한다. 이때, 터키 카르스시에선 거대한 손조각을 조각하면서 평화의 손이란 이름으로 아르메니아와 평화를 기념하는 걸 만들었더니만 극우들이 와서 반발하는 통(카르스 학살 당시 피해자 유족 후손들까지 와서 이 조각가를 죽인다고 분노했다)에 미처 완성을 못하고 조각가가 한동안 피해있어서 몇 달이나 방치되기도 했었다. 나중에 완성은 했지만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쓸쓸히 방치되어 있다.
더불어 몇몇 터키 극우들이나 쿠르드족이나 극단적인 이슬람인들이 보란듯이 아르메니아 교회(터키 전역에 이런 버려진 채 관리되지 않는 교회들이 꽤 많다)에 총질을 하거나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고 쿠르드인 저항세력이 이런 곳에 숨어드는 통에 터키군 전차가 아예 교회를 포격하던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동부 지방에 가득남은 기독교 유적 훼손을 터키 정부가 막은 게 90년대부터였다. 교회 유적이 쏠쏠한 관광자원이라 그런 면도 있지만... 터키 전역에 워낙에 많은 기독교 유적 덕에 알려지지 않은 시골 교회 유적들은 이슬람 차미(Çami, 모스크 또는 마스지드라고 불리우는 이슬람 성원)가 된 곳이 많다.(예수나 인물 그림만 지우고 십자가가 새겨진 벽을 놔두고 그 모습 그대로 이슬람 성원으로 쓴다.) 덕분에 이런 곳 관리양도 요구에 터키 극우들이 화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나라가 없는 쿠르드인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오스만 제국 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치적으로 준동할 무렵 오스만 제국 정부는 인근 쿠르드 부족들을 준동 시켜 아르메니아계 마을들을 학살, 약탈하여 겁 주는 일이 많았고, 역으로 쿠르드 부족들이 정부 말 안 듣고 러시아 측과 내통하든가 할 경우 인근 아르메니아인들을 보내 찍어 누르는 일도 많았다. 이러다가 결국 1915년 봉기와 대학살 당시 주된 현지 진압/테러 겸 시리아 사막행 죽음의 행진 도중 간수로 쿠르드 부족들이 집중 참가한 것으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쿠르드 측도 당장 '''본인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을 사막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도중 영 미심쩍다고 분류 된 다른 부족들도 같이 강제 이주 당했고''',[3] 무엇보다 그 이후 터키 공화국이 수립 된 후 데르심 학살을 대표적으로 본격적으로 터키 측에게 탄압 당하기 시작했다.
이런 막장 사이클을 돌고 돌며 결국 20세기 중후반쯤 되면 남부 카프카스/동부 아나톨리아의 터줏대감 격 양대 민족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과 쿠르드인들은 전자는 아예 그 존재가 사라져버렸고, 후자는 고향 땅에서 2등 시민 취급 받으며 살아야 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이러다 보니 현대 들어와 이라크, 시리아, 터키 현지의 쿠르드계 정치 단체들은 게릴라 반군인 PKK던, 기존 의회 정치 내에서 쿠르드인들의 권리와 터키 전반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하는 인민민주당 측이든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실체와 그 과정에 있었던 쿠르드인들의 참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입장이다. 아르메니아 측에서도 아르메니아 공화국 당국이든, 아르메니아 혁명동맹을 비롯한 해외에 거점을 둔 디아스포라계 정치 집단이든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터키 당국을 공적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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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 성당(1603년부터 2년 동안 지어진 성당) 참고로 이 교회 안에는 1915년 아르메니아 학살을 추모하는 추모비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권에서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 서로가 전쟁을 이겨 차지한 땅에 있던 성당이나 모스크를 자기들 종교 건물로 만드는 경우는 수두룩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물론 이스탄불을 차지한 메흐메트 2세도 정교회 건물을 허락했지만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거대한 정교회 성당을 죄다 모스크로 바꾸고 허락받은 정교회 성당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덕분에 지금도 이스탄불에 남은 정교회 성당들을 보면 그리스나 다른 정교회 나라의 성당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규모가 초라하다. 더불어 그리스 본토에 많은 섬에 남은 정교회 성당들도 엄청 작은데 크게 짓지 못하게 해서 궁여지책으로 일반 가정집 수준 성당을 많이 만들었다.) 즉, 큼직한 모스크를 줘서 마음껏 너희들 종교 건물로 고치게 만들어 내준 게 대단한 셈이다. 뭐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진 경제적 수완이 줄 이득을 위한 점이 컸겠지만 말이다.
2009년 터키에서 다시 화해를 시도하고 2010 월드컵 예선전에서 터키와 아르메니아가 맞붙게 되자 터키 총리가 아르메니아를 방문하기도 하며 학살도 일부 인정했다. 하지만 터키에서도 학살을 조금 인정해왔던 것도 있기에(앞서 언급하듯이 학살이 아예 없었다고 하진 않는다. 그 수가 부풀려졌다는 것과 아르메니아도 학살했다고 따지는 게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반응은 그리 환영하는 게 아니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 원정 예선경기에서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터키를 비난하는 시위도 벌인 바 있는데 경기는 터키의 2:0 승리라서 아르메니아의 기분은(...) 그래도 터키랑 이렇게 공식적인 축구경기를 가지는 거랑 달리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아예 경기를 치루지 않을 정도로 더 사이가 나쁘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에서도 아르메니아인들이 1915년 발생한 터키인 학살 사건(반 사건,사실 터키인보다 쿠르드인들이 더 많이 죽은 사건이라 이들이 격분하여 아르메니아 학살에 뛰어든 원인 중 하나)을 인정 및 사죄하는 등 일부 양보하면서 약간 분위기가 좋아질 듯했고 2010년 9월 19일 터키 악다마르 섬에선 95년 만에 추방된 아르메니아인들의 입국을 허락하며 악마다르 섬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허용했다. 이 자리에는 5천 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참석했으며 200명이 넘는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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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 악다마르 대성당
사실 이 예배는 2010년 4월 24일에 가질 예정이었으나 아르메니아에서 아르메니아 학살 추모일로 기리는 날짜라서 터키 극우들 이 반발하여 무기한 연장된 끝에 9월에서야 이뤄진 거였다.
921년 경 아르메니아 왕 기가크 1세가 세우게 했다는 이 대성당은 아르메니아에서 손꼽는 성당으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1915년 이후로 아르메니아인 추방으로 오랫동안 버려져왔다. 이후로 이곳에서 쿠르드인들과 독립 문제로 벌어진 총격전으로 성당 여기저기에 총탄 자국이 가득했으며 문이 없고 벽 한 곳이 큰 구멍이 뚫려있었으며 아예 천장 한 쪽은 폭발하여 뻥 뚫린 상태로 훼손이 심했었다. 게다가 1951년에는 터키 측이 아예 박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걸 결사반대하며 막은 인물들이 아르메니아인이 아닌 동부에 거주하던 쿠르드인 지식인이라는 사실. 그중 하나인 쿠르드계 터키 소설가인 야샤르 케말(Yaşar Kemal, 1923~2015)은 [4] 문화와 역사를 파괴하는 건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죄악이라며 이 성당의 파괴를 반대했다.
참고로 이 케말은 군부를 비난하고 쿠르드인 차별과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으며 온갖 풍자소설을 쓰다가 오랫동안 투옥당하고 무척 시달림을 받았지만 양심있는 작가로 터키 진보층의 격찬을 받았다.
어쨌든 겨우 파괴는 막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가 지난 2007년에서야 터키 측이 수리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갈등으로 다시 교회 예배는 불허되었다가 3년 만에 예배문제를 허용한 것이다. 아르메니아 극우들은 악다마르 섬(Akdamar Island-터키어는 Akdamar Adası)이 터키 이름이니 아르메니아 이름인 악타마르 섬 (Aghtamar,Akhtamar 아르메니아어는 Աղթամար
[ɑʁtʰɑˈmɑɾ]
)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가 터키 측에게 그런 헛소리라면 앞으로 아르메니아인 출입금지하겠다는 엄포에 굴복해야 했다.아르메니아에선 서로들 오려고 난리가 나면서 3만여 명이 신청했으나 터키 측은 수를 줄여서 예배를 보게 했다. 그리고 교회에 십자가를 일절 세우지 않게 했는데 이에 실망하는 아르메니아에게 터키는 예배를 망치고 싶냐고 못박았는데, 이 섬 주변은 쿠르드인들이 가득하며 터키인들도 보수적인 이슬람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기 때문에 3백명이 넘는 터키 군경이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터키 극우들과 쿠르드인들의 분노 어린 반발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아제르바이잔도 그런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에 남겨진 이슬람 사원을 멋대로 교회로 개조한 주제에 터키에게 무슨 염치로 요구하냐면서 분노했다. 아예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이 당시 터키 대사를 소환하여 실망이라는 뜻을 보여서 터키 안에서도 아제르바이잔 기분을 생각하자는 의견도 엄청났다. 이런 가운데,아르메니아 정교회 주교는 이 예배를 매해 볼 수 없냐고 간청했으나 터키 측은 장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에 결국 화해 제스처라고 하기에는 여러 말이 많은 예배였다. 그렇긴 해도 2011년 터키에서 아르메니아 측 요구대로 이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워주었다. 물론 자국 극우들과 아제르바이잔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2013년부터 터키가 매해 예배를 허용하면서 거의 100년 만에 아르메니아 소년들이 와서 세례식을 이 성당에서 한 바 있다. 2014년도 예배가 허용됐다. 물론 아제르바이잔과 극우파 반발이 여전히 거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위에 서술한 대로 디야르비크르에 있는 수르프 기라고스 아르메니아 성당도 2013년에 복원됐다.
2.4. 2020년대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인해 다시금 터키와의 관계가 매우 험악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을 지지하기 때문에 아르메니아가 분노하는 쪽에 가깝지만. 이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와 터키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평화유지군으로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어 양국의 관계는 이전보다 더 점점이 늘게 되었다.
3. 관련 문서
- 터키/외교
- 아르메니아/외교
- 터키/역사
- 아르메니아/역사
- 아르메니아인
-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캅카스 국가
[1] 그나마 이스라엘은 터키와 2011년 무기판매를 취소하며 사이가 나빠졌으나 그럼에도 이스라엘로선 터키를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다. 온갖 자원 및 여러 가지로 보복당하면 엄청난 국가적 손해이기에 그렇다.[2] Vaspurakan, 서부 아르메니아어 발음으로는 바스푸라칸[3] 사실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가 워낙 스케일이 커서 그렇지, 1차대전기 오스만 정부는 뿐만 아니라 동부 아나톨리아 일대 아시리아인들도 제노사이드라 할만한 강제 이주/인종 청소를 했으며, 폰투스 일대 현대 트라브존 중심의 그리스인들도 대량학살/강제추방, 게다가 종교도 가리지 않고 참 평등하게도(...) 인근 아랍 부족들과 쿠르드인들도 대량으로 학살과 집단 아사를 동반한 강제 추방을 자행했다. 지속적인 반란과 진압성 학살은 있을지언정 전성기 시절 부터 비교적 안정적으로 민족, 종교 공동체 사이 공존 체제를 보장해 온 전 시대 오스만 정치 시스템의 역사와 비교하여 생각하면 1차대전을 통한 해체시기 오스만 제국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의 피바람과 인종 청소를 자행했고, 현대 중동의 정치적 불안과도 연결점이 있는 역사적 유산이다. 문제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서구권은 아르메니아나 그리스 학살에 대해선 위키피디어 영어판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자료도 올리는 반면, 이 당시 학살당한 아랍 무슬림 학살은 대충 한 두줄 글로 언급하는 수준. 이러니 아랍권에서도 오스만 제국도 증오하지만 서구 기독교 색히들도 기독교 쪽 피해만 자세히 캐고 터키를 뭐라고 한다며 무척 기분나빠하며 대든다. 덕분에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언급되면 아니? 그 시절에 아르메니아놈들만 학살당했냐! 기독교만 피해자만 보이는 거냐며 반론하기에 이른다...[4] 바람부족의 연대기같은 작품이 한국에서도 정식번역되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