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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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차흐 공화국의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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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란의 아르메니아인들
1. 개요
2. 상세
3. 문화
4. 유대인과의 관계
4.1. 유대인과의 갈등
4.2.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5. 동유럽의 아르메니아인
5.1. 러시아의 아르메니아인
5.2. 우크라이나의 아르메니아인
6. 미국의 아르메니아인
7. 프랑스어권/아랍어권의 아르메니아인
8.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8.1. 아르메니아계 무슬림
9.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9.1. 우디인
10. 유명 아르메니아 출신, 아르메니아계 인물
11. 아르메니아계 가상 인물


1. 개요


본국인 아르메니아와 미승인국인 아르차흐 공화국에 주로 거주하며, 국외에서도 아르메니아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들 중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에서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아르메니아어가 아르메니아인들의 모국어 역할을 한다. 아르메니아어는 러시아, 키프로스, 이라크,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주요 소수 민족 언어로 대접받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뭉치는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특성상 해외에 나가있는 아르메니아인들 적지 않은 수가 잘 구사하는 편이다.

2. 상세


유대인과 비슷하게도 본국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 공화국은 소국이지만 바깥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는 민족인데, 러시아미국에 백만명이 넘는 아르메니아인이 있으며 프랑스, 조지아, 레바논, 이란, 독일, 시리아, 터키, 키프로스 등에도 아르메니아계들이 살고 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디아스포라가 확산되었다. 전세계적으로 700~900만 명이 있으며 그 중 아르메니아에 300만 명이 거주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추방됐지만, 아르메니아인이 주된 민족으로 거주하는 영역은 확장되었다. 미국에서는 위안부 평화비가 미국 최초로 세워진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이 전 인구 중 3분의 1, 백인 인구의 상당수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일 정도로 아르메니아계가 많이 살고있는곳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국내에는 150명이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의 성씨에는 '얀(-յան; 영어로는 -yan)'이라는 접사가 붙어 미국등 해외에서도 아르메니아계를 쉽게 구별해낼 수 있다. 당장 아래의 아르메니아계 인물 목록만 봐도 다수의 성씨가 얀(안) 혹은 얀 앞에 자음이 붙어 자음+-yan(-ian)으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아르메니아인 유명인사의 성씨를 예로 들어보면 아르메니아의 대통령 아르멘 사르키샨(Արմեն Սարգսյան)의 성씨에서 '''샨'''(սյան)이라는 마지막 음절의 구성은 자음과 얀(յան)이라는 접사가 붙어 있는 형태로 되어있고 아르메니아의 총리 니콜 파시냔(Նիկոլ Փաշինյան)의 성에도 '''냔'''이라는 음절에 자음과 접사 얀이 붙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르키스라는 어간에 얀이라는 접사가 붙어 사르키샨이 되고, 파신이라는 성씨 어간에 얀이 붙어서 파시냔이 된다. 그리고 니콜 파시냔에서 니콜이라는 이름은 니콜라의 아르메니아식 명칭이다.
다만 아르메니아계라도 조상 대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경우라면[1] 이슬람식 성씨를 쓰기도 하며, 이들 중 구소련 국가에 거주하는 이들은 구소련 무슬림 민족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권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변형시켜 만든 성씨(압둘라예프/압둘라예바, 후세이노프/후세이노바, 이스마일로프/이스마일로바 등)를 쓰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백인에 속하나 유럽, 중동인들과 구분되고 뭔가 인도인과도 흡사한 독특한 이목구비[2]가 부각되어 과거에는 아르메니아계를 아르메노이드(Armenoid)라는 독자적인 집단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물론 아르메니아인들 중 이런 특이한 이목구비를 한 사람들 비율이 많다 뿐이지 아르메니아인들이 다 특이하게 생겼다고 단정지으면 곤란하다. 상단에 나와있는 아르차흐 공화국 학생들 사진에서 보듯 다른 동유럽인들과 외모가 흡사한 경우가 더 많다.
동로마 제국 황제 11명을 배출한 민족이기도 하다. #

3. 문화


세계 최초로 서기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전통 때문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가 절대 다수이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는 한동안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던 적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다만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제국 같은 이슬람 국가 치하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중세 초 아르메니아인들의 상당수가 동로마 제국에 군인이나 상인으로 이주하였다. 이들 동로마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로마의 마케도니아 왕조의 기원이 되며 많은 아르메니아계 혈통의 황제들을 배출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아르메니아계 동로마 황제들은[3] 자신들의 조상의 고향이 되는 아르메니아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이 덕분에 아르메니아 문화는 중동보다는 동유럽에 가깝게 발전해나가게 되었다.[4]
페르시아의 황실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을 후궁으로 선호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들 아르메니아 출신 후궁들은 페르시아의 샤한샤들이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적잖은 입김을 넣었다. 이들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페르시아 하렘에 들어가서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같은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보호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수도 있다. 아르메니아인 중 일부는 중동의 상업망을 장악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인도 무굴 제국과 동남아 일대에도 진출하였다 한다. 근면하고 부유한 상인이 많았던 중동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통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나갔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이나 사파비 제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해나갔다. 쇠퇴기 이전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 여러 민족들에 대해 실용주의적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했는데, 여기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그리스 정교회 등 다른 정교회랑 다른 독자적인 교회로 인정받을 권리,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민사 분쟁 등을 아르메니아인 성직자들이 직접 재판하고 해결할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사파비 제국의 경우 조지아인 기독교인들의 경우 이란으로 끌려오는 족족 이슬람으로 개종되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세금을 잘 납부하고 유럽인들과 사파비 위정자들과의 교역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이유로 계속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를 믿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중동 지역의 인문학적 연구 자체가 험악한 국제 정세와 맞물려 굉장히 힘들어서 그렇지, 사실 이런 광범위한 문명권 단위의 규모에서 상업, 문화적 교차로 역할을 했던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는 유럽의 유대인과 위그노, 동아시아의 화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세에는 신흥 포르투갈 세력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결국 오스만, 오만, 사파비조 페르시아 같은 인근 이웃 무슬림 제국들의 힘을 빌어 17세기에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현격하게 약화시켰고,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 오스만 제국, 시아파 사파비조가 서로 치열하고 잔인한 각축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중동, 인도, 동유럽이 여전히 경제적으로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인도양 무역 네트워크가 유지되었던 건 무굴 제국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까지 퍼져있었던 아르메니아 상업 공동체의 영향이 컸다.

4. 유대인과의 관계



4.1. 유대인과의 갈등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상권을 놓고 서로 신경전과 각축을 벌이던 사이였다. 특히 페르시아에서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의 신경전이 엄청났는데,[5]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이 사파비 왕조 통치자들에게 선물 공세를 하며 우위를 점하자, 아르메니아인들의 등쌀에 못이긴 유대인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인들의 손길에서 멀리 떨어진 부하라로 이주해야 했다.[6]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산악 유대인이 아르메니아인들 탓에 밀려나온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입지와 부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밀리는 편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유대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지역은 대개 오스만 제국의 번국인 바르바리 토후국, 크림 칸국 정도가 있었으며, 나머지 지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이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치여서 그렇게 비중이 크기 않았다. 이스탄불 수도 주민의 4분의 1 정도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대신 유대인은 주로 통역 혹은 의료계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던 당시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사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자체가 변경 민족을 둘러싼 오스만, 러시아 두 제국의 국경 패권 분쟁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유대인하고 관계도 적었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오스만 제국 영토가 상당부분 상실되는 와중에 오스만 유대인 거주지들이 이미 다른 나라 영토가 된 영향이 더 컸다.
사실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알력은 생존권 투쟁(...) 외에도 종교적인 이유도 있는데, 아르메니아인들이 '''노아의 방주'''의 노아가 아라라트 산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대인들은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라고 반격을 가하면서 키배를 벌이며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프랑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도 근면한 상인으로 활약하면서 유대인들과 경쟁하기도 했으나 보통 가톨릭 지역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현지 가톨릭 신자들과 결혼하면서 동화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이쪽은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 근현대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심해지면서 유대인들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과 비례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사회 각지로 진출하기 시작한 역사가 있다.[7]
현대에 와서 아르메니아와 영토분쟁을 벌이는 아제르바이잔과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이 사이가 좋아지면서 아르메니아는 더더욱 불만이 커졌다. 이스라엘 무인기를 도입하고 이스라엘군과 합동훈련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견제하는 이란과 사이가 좋은 아르메니아이기에... 게다가 이스라엘 쪽에선 이슬람권에서 유일한 명목상이나마 '동맹', '우방' 국가인 터키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의외로 아르메니아 문제에 있어 미국과 더불어 상당히 냉담하게 나온 편이다. 물론 민간, 학술, NGO 활동이나 정치인 개개인 차원에선 유대인으로서 다른 민족이 겪은 고통을 무시하는건 죄악이다라고 하는 양심적이고 온정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이스라엘과 시오니스트 단체들의 주류 의견은 아르메니아 학살과 홀로코스트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후자가 훨씬 더 심각하고 독보적인 사건이었다는 관점이다. 노먼 핑켈슈타인의 주장마따나 소위 말하는 '산업화된 선진 강대국의 소수 민족 절멸 시도'로선 홀로코스트와 비교 가능한 다른 역사적 사건은 없다는 주장인 홀로코스트 독보론(singularity of the Holocaust)은 이스라엘의 자국 정체성 형성과 대외 선전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두 디아스포라 상업 민족 대표격인 양 민족의 라이벌 관계는 심지어 신대륙의 이주터인 미국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됐다. 크게 보면 아예 전국 정치 레벨에서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를 굴리는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아르메니아계 미국인들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민족이다. 당연히 분야가 겹치는 물류, 상업 등에서 종사하면서 커뮤니티 내 응집력과 단결력이 출중한 소수 민족 로비 집단을 만들었다. 게다가 부정적인 인식 상으로도 두 민족이나 수전노니, 돈밖에 모르는 생물이니 하면서 욕도 비슷한 인종차별 래퍼토리를 먹는 편이다.[8] 게다가 뉴욕, 뉴저지만큼 유대인의 입지가 압도적이지 않은 캘리포니아 같은 다른 지방에선 아르메니아계 자본이 더 영향력이 강한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LA는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의 숫자만 수십만명 단위일만큼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살며, 광역시권 내 도시 중 하나인 글렌데일은 아르메니아인들이 7만명이나 살아서 '리틀 아르메니아'라 불릴 정도이다.
하지만, 2020년 터진 전쟁에서 아르메니아는 패배하여 아르차흐 쪽 영토 70% 가까이를 잃어야 했다. 이스라엘이 터키와 같이 아제르바이잔에 막대한 무기를 수출한 점도 커서 이스라엘에게 아르메니아는 단교를 들먹이며 무기 수출 중단을 요구했다. 물론 이스라엘은 무시했고 전쟁에서 이긴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이스라엘 깃발을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거리에서 들고 휘날리는 모습도 나오기까지 했다. 역사적으로 참 돌고 도는게 산악 유대인 출신으로 아제르바이잔과 러시아에서 재벌로 성공한 유대인들이 아제르바이잔과 이스라엘 우호에 많은 돈을 쓰며 이번 전쟁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4.2.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종교를 제외한 민족 정체성이 아르메니아계에 있는 유대인. 상술한 것처럼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이 역사적으로 라이벌 관계였던 것 때문에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 양 공동체에서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또한 오늘날 아르메니아 본국이 경제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기 때문에 이웃국가인 조지아, 아제르바이잔과 다르게 전통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쇠퇴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가 아르메니아 일대에서 유대인 수천여 명을 포로로 데려왔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대다수는 아르메니아 본국이 아닌 해외에 더 많으며, 그나마 아르메니아 본국에 남아있는 아르메니아계 유대인들은 수도인 예레반을 포함하여 그나마 덜 빈곤한 곳에 거주한다.
러시아의 체스 선수였던 가리 카스파로프가 대표적인 아르메니아계 유대인 유명인사다. 아버지는 아슈케나즈 유대인, 어머니는 아르메니아인이라고 한다.

5. 동유럽의 아르메니아인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대인 외에도 슬라브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러나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정교회로 개종하고 흑해 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면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 용병이나 상인들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신에 해당하는 키예프 루스로도 이주하였다.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아르메니아 본토가 공격받자,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남부 킬리키아 외에도 크림 반도와 루테니아로 이주하였다. 약 2만여 명 정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동유럽에 정착했다고 하는데, 키예프 공국의 중흥기를 이끈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대공의 주치의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한다.

5.1. 러시아의 아르메니아인




5.2. 우크라이나의 아르메니아인


동로마 제국의 방계 국가 중 하나인 크림 반도의 테오도로 공국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연대기에 의하면 13세기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9]의 대공 다닐로는 공국 내 무역과 산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을 초빙했다고 한다.
테오도로 공국의 멸망 이후 크림 반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크림 칸국의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며 우룸인, 카라임 유대인 등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세금 특권 등을 제시하며 이주를 권장하면서 주로 리비우를 중심으로 이주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아르메니아어는 구사하지 못하고 크림 타타르어를 모어로 구사했었다고 한다. 리비우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어를 라틴어로 라틴어에서 다시 폴란드어로 폴란드에서 다시 크림 타타르어로 번역을 거쳐서야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6세기부터는 리비우 시 내에 아르메니아어 학교가 건설되어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616년부로는 역사상 최초의 아르메니아어 서적 인쇄소가 리비우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리비우의 아르메니아어 인쇄소는 아르메니아어 외에도 아르메니아식 크림 타타르어 방언으로 된 기도서도 인쇄하였다고 한다. 리비우와 포돌리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체적인 도서관을 갖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다고 한다.
18세기 말 크림 반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이후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더 이상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으로 흡수되었다.
20세기 초 우크라이나 서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에 속했었던 갈리치아 지역[10]에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가 5,500여 명에 달했었다. 아르메니아 가톨릭의 리비우 주교구는 교황청 직속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으나, 소련에서 폴란드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동방 가톨릭을 일소하는 정책을[11] 벌여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1991년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공식적으로 복권되긴 했으나 소련 시절 사실상 뿌리가 뽑혔던 상황에다 신자들 상당수가 미국이나 프랑스로 이민한 상황이라 우크라이나 내 교세 복구는 요원해보인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 소련의 영토가 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계 우크라이나인 및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사이의 경계가 상당히 희미해졌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바로 러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한 도네츠크, 하르키우 등등의 지역이며, 우크라이나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이며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도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이 비교적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본토 역시 경제적으로 빈곤한데다, 지하 경제까지 포함하면 우크라이나 내 상황이 좀 더 살만했던 이유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로 이주한 상황이라고 한다. 2001년 통계 기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99,894명에 달한다.

6. 미국의 아르메니아인




7. 프랑스어권/아랍어권의 아르메니아인


오스만 제국의 레반트 영토는 근현대 프랑스가 장악했고, 오늘날 해당 지역이 레바논시리아로 독립하면서 레반트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레바논시리아의 국민이 되었다. 중세 십자군 전쟁 경험 및 근세 가톨릭 선교사들의 레반트 지역 선교를 통한 동방 가톨릭 교단의 생성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가 생겨났으며, 오늘날 아르메니아 가톨릭 총대주교청은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아나톨리아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레반트 지역으로 피난하고 다시 레반트 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상당수가 프랑스로 이민하면서, 이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프랑스계 아르메니아인 사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는 러시아, 미국에 이어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 규모가 세 번째로 큰 국가에 해당한다.
시리아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약 1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었으며, 이 중 6만여 명이 알레포에 거주하였다. 오늘날에도 인구 유출은 계속되고 있는데 시리아 내전 및 레바논의 정국 불안 등으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프랑스나 아르메니아로 이민을 가는 추세이다. 미국 이민을 희망하는 경우도 많지만, 시리아, 레바논과 미국은 외교 관계가 냉랭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편이다. 오늘날에는 다에시가 시리아 내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참수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아르차흐 공화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있다.
아르메니아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고대부터 알레포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머무르던 중요한 길목에 해당했다. 중세 동로마 제국에서 아나톨리아 남부에 아르메니아인 군인들을 정착시키고 이후 십자군 전쟁 시절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이 세워지면서 알레포와 예루살렘, 에데사 등으로 유입되는 아르메니아인 인구도 증가했다. 그러나 십자군 국가에서는 유럽계 가톨릭 십자군들이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 현지인들을 이등시민 취급할 때가 많았으며,[12] 무슬림 군대 역시 현지인 입장에서 십자군 혹은 몽골 제국 편을 드는 아르메니아인 포로들에게 가혹할 때가 많았다. 맘루크 왕조가 십자군 국가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여러 혼란스러운 역사에도 불구 15세기에는 알레포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건물이 건설되었다. 17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 순례객들과 거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알레포 시가지 내 아르메니아인 거주지가 확장되었다.
현재도 알레포, 레바논의 베이루트[13]를 중심으로 아르메니아 민족 학교가 운영되어 아르메니아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아르메니아어 등을 가르치고 있다. 시리아와 레바논 일대에서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근현대 가수, 배우, 극작가 및 미술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프랑스 문화의 레반트 지역 유입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이후 레바논과 시리아의 이슬람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점점 입지가 축소되고 있다.
프랑스로 이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레바논과 시리아에서처럼 음악인이나 배우 등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보통 이민자 입장에서 만만한 자영업이 요식업이다 보니 프랑스 내 중동식 레스토랑을 차리는 경우가 많다. 1672년 프랑스 내 최초의 카페를 차린 것도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14] 보통 이런 음식점들은 중동 레반트 지역 요리의 특수성 때문에[15] 같은 요리도 할랄 푸드로 만들면 아랍 요리, 코셔 푸드로 만들면 이스라엘 요리, 돼지고기로 만들면 아르메니아 요리가 되는 식이라서, 프랑스 내 아르메니아 식당들은 그냥 중동 음식을 프랑스인 입맛에 맞게 와인에 맞추어 나오는 편이다.
프랑스나 레바논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캐나다로 이민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역시 같은 프랑스어권인 몬트리올과 근교 라발로 이민을 많이 가는 편이다.

8.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오스만 제국 시절에만 해도 아르메니아인들이 많이 거주했으나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그리고 그 이전에도 꾸준히 아르메니아인 인구유출이 지속되고 또 이슬람으로 개종해 아르메니아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도 많아서 현재는 수가 많이 줄었다. 하지만 그리스계 터키인과는 달리 인구교환이 시행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는 하타이 지역에도 상당수 거주한다.또한 자신의 정체를 숨긴채 살고있는 아르메니아계 터키인들도 동부지방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터키 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교구들에 등록된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의 숫자는 대략 5-10만명 정도이며 자체 학교와 병원, 언론사도 보유하고 있다. 심지어 터키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교단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일 정도. 또한 소련붕괴 이후 터키에 유입된 불법노동자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터키는 소수민족에 대한 통계조사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이며, 소수민족에 대한 터키인 동화 정책으로 인해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들 상당수는 터키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관련 실험 영상[16]. 민족감정과는 상관없이 아르메니아인들은 근면하고 특히 손재주가 많은 민족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8.1. 아르메니아계 무슬림


아르메니아인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혹은 아르메니아 가톨릭을 민족 정체성으로 삼기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아르메니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편이다.
헴신인 여성
그러나 예외도 있는데, 터키 동북부 리제도(Rize ili) 헴신군(Hemşin İlçesi)에 주로 거주하는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인 헴신인(Hemşinliler, Համշենցիներ / Hamshentsiner)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아르메니아어의 서부 방언인 홈셰치 방언(혹은 헴신어)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인 정체성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헴신인 인구는 15만여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해외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로 개종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원레 헴신구는 조지아인의 일파인 라즈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나 중세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면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 지역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은 헴신 일대를 1480년대 평정하였고, 수피들이 해당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을 대상으로 이슬람을 선교하였다.
아나톨리아 서부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오스만 제국과 교역하던 이탈리아인들이 교역 파트너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을 선호하던 이유로 기독교 신앙을 고수할 이유가 충분했지만, 자급자족 농업이 중심이었던 아나톨리아 동북부는 상황이 달랐다. 동부 지역에서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고수하는 아르메니아인들도 많았지만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인구도 적지 않았고, 헴신인들은 이렇게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르메니아인 중에서 아르메니아어를 보존한 경우이다. 조지아계 수니파 무슬림인 라즈인과 비슷한 경우이다.
러시아 제국에서 오스만 제국의 캅카스 영토를 병탄하는 과정에서 무슬림 헴신인들이 러시아 제국 영토 아르메니아 주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20세기 소련에서는 이들을 터키계 불온분자로 간주하여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으로 유배보냈다 한다. 이렇게 강제이주당한 헴신인 후손들은 고르바초프 시절 아르메니아 본토로 다시 이주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정부에서는 이들이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면 사도교회 신도들과 충돌할 것을 우려하여 대신 크라스노다르 일대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터키에서는 터키 민족주의자들이 이들이 아르메니아계 조상을 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사실은 튀르크계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9.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과거 카프카스 전역에 걸쳐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서로 섞여서 살았기 때문에 현재의 아르메니아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이 살았고, 현재의 아제르바이잔에도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서로 분리되어 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은 거의 다 추방된 반면, 아제르바이잔에는 소수지만 수천명 단위의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바쿠와 인근의 숨가이으트(Sumqayıt)를 주변으로 거주하고 있다.

9.1. 우디인


고대 아제르바이잔 일대는 알바니아라고 불렸다.[17] 중세 알바니아인 후손 중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기독교(아르메니아 사도교회와 같은 갈래의 사도교회 일파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고수한 민족을 우디인이라고 부른다. 믿는 종파와 교리는 아르메니아인들과 같지만 사용하는 언어나 거주 지역이 다른 이유로 다른 민족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전통 복식은 아르차흐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디인들은 자신들이 아르메니아인들과 다른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생각하며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직자들이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관할하는 것을 거부하는 편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우디어는 아르메니아어보다는 레즈긴어에 더 가깝다. 오늘날에는 아제르바이잔에 약 4천여 명, 러시아에도 약 4천여 명 정도의 우디인 인구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러시아의 우디인 인구는 아제르바이잔 접경 지역보다는 로스토프에 더 많다고 한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에 약 5백여 명,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도 각각 2백여 명 정도의 우디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우디인들은 약 1만여 명 안팎의 소수 민족에 불과하지만, 중세 초 아르메니아 사료에서 자주 언급되던 민족이었다. 중세 우디인들은 캅카스 알바니아를 구성하는 주요 부족 중의 하나였으며 아르메니아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서기 5세기 무렵에는 아르메니아인 수도사 메르스롭 마슈토츠가 알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 문자를 바탕으로 캅카스 알바니아 문자를 고안하였고 성경의 일부가 우디어로 번역되었다.
우디인들의 역사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근세를 거치며 많은 우디인들이 아제르바이잔인들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아제르바이잔인으로 동화하면서 규모가 계속 감소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일대를 장악한 사파비 왕조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직자들이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관할하도록 맡겼던 적도 있었다. 이는 당시 이미 잔존한 우디인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거나 혹은 아제르바이잔인이 중심이 된 사파비 왕조 측에서 이들을 달갑지 않게 보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조지아인들과 다르게 주로 벼농사를 지으며 쌀밥(필라프)을 주식으로 한다.
아직 우디인 촌락들은 아제르바이잔 산기슭 시골들을 중심으로 일부 남아있다. 계속된 인구 감소로 오늘날 우디어는 소멸위기언어가 되었다. 우디인들은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러시아어나 아제르바이잔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고,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우디인들은 독자적인 알바니아 사도교회를 유지하는 것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바니아 사도교회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소수종파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0. 유명 아르메니아 출신, 아르메니아계 인물



11. 아르메니아계 가상 인물


※ 해당국 작품은 제외.

[1] 상술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당시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도 대거 학살당했다.[2] 예로 들자면 아르메니아인 여성 패션 모델 Armine Harutyunyan같은 경우도 있다. 한국 사람들의 미적 기준과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 외모이기도 하다.[3] 바실리오스 2세 항목 참조. 그 외에도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 왕조가 아르메니아계이며, 동로마 중후기의 귀족이름 중 바르다스(Bardas/Vardas), 바르다네스(Bardanes/Vardanes)는 그리스-로마식 전통 이름이나 기독교식 이름이 아니라 아르메니아 유래의 이름이다.[4] 물론 훗날 오스만 제국이나 이란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실제 동유럽 지역에 비하면 어느 정도 중동풍이 있는 편이다.[5] 자세한 내용은 페르시아계 유대인 항목 참조[6] 애초에 페르시아 지역이 아르메니아 본토랑 너무 가까웠다.[7]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던 러시아 제국에서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에서 유대인의 정착 및 상업 활동을 크게 제한했는데, 이 틈을 비집고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이 두 도시에 대규모로 정착하기도 했다.[8] 힘없는 민족이나 집단이 돈에 집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다. 특히나 로비가 합법인 미국에서는 이렇게 로비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 소수민족들이 몇몇 있다.[9]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이 파괴된 이후 우크라이나 서부에 건설된 왕국으로 러시아와 독립된 우크라이나 역사의 기원에 해당하는 국체로 간주된다.[10] 상술한 리비우가 갈리치아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11] 근현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농노들에게 동방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가톨릭은 이들과 전례나 기원이 달랐음에도 같은 종파로 몰려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12]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 왕국 지도층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자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13] 근교에 부르즈 함무드라는 위성도시에 아르메니아인들이 몰려있다.[14] 파스칼(아르메니아 이름은 하루티얀)이라는 사람이 같은 아르메니아인 친구를 끌어들여 오스만식 카페를 차렸다.[15] 근세까지는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한 지역이었고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 모두에게 있어 성지이기 때문에 종교적 소수자들이 많다.[16] 영상속 화자는 아르메니아계 터키인이다. 처음에 영상속 화자가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는걸 터키인들이 보고 그/녀가 어떤 민족인지 맞추는 실험인데, 터키인들의 추측이 끝난 후 똑같은 내용을 터키어로 말하고, 영상 끝부분에는 터키인들의 소감을 담는다. 터키 시민단체인 Yanyana에서 주최한 실험인데, 이 영상 이외에도 그리스인, 쉬리야니인 등의 영상도 있다.[17] 보통 남유럽의 알바니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캅카스 알바니아라고 부르는 편이다.[18] 다만 중간에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 등 황족이 아닌데 황족과의 혼인을 통해 제위를 차지한 인물들은 아르메니아계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