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역사
1. 고대
아르메니아는 캅카스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아득한 옛날부터 여러 민족의 주요한 이동통로에 위치해 있었고, 덕분에 이민족의 침략에 취약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역사 중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가 있는 최초의 국가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 시절인 기원전 1270년경, 아르메니아 고지에 있는 반 호수의 주위에 있던 철기 시대 비인도유럽어족 Y하플로 G계열인 우라르투(Urartu)가 있었으며, 우라르투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메니아 고원의 패권을 쥐게 된다.
아르메니아에선 고대 유적이 바로 터키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라고 주장하지만 항목에서도 보듯이 논란이 있다. 터키 이전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일단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편이고 그다지 해외에서 터키도 아르메니아도 관련이 없다는 유적이며 관심없는 편이다.
아르메니아가 주장하는 고대 건국사는 바로 노아의 후손인 하야크가 기원전 2492년에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고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아르메니아에서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인 하야스탄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유태인 피가 흐른다고 주장하는 아르메니아인들과 유태인들은 오랜 갈등을 빚어왔다.
아르메니아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인데, 예르반드 왕조[1] 라는 독자 왕조가 있었으나 메디아 왕국의 속국이었다. 이후 메디아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될 때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결국 사트라피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페르시아가 망한 후에야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데, 그나마 BC 201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격으로 예르반드 왕조는 멸망했다.
하지만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아르메니아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던 아르타셰스(Արտաշես)가 곧 반란을 일으켜 아르메니아를 장악하고 아르타셰스 왕조(Արտաշեսյան)를 세웠다. 캅카스 일대에서 차근차근 세력을 키운 아르타셰스 왕조는 기원전 1세기 티그라네스 대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아 시리아, 팔레스타인까지 영토를 가지고 동방의 강자로 부상하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격에 멸망하였다. 이후 서방의 강국 로마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사이에 끼어 안습의 길을 걸었다. 아예 지배 왕조가 파르티아계인 아르사케스 왕조로 교체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아르샤쿠니 왕조라고 하며, 이란 본국의 아르사케스 왕조가 페르시아계인 사산 왕조에게 멸망당한 뒤에도 아르메니아에서 토착화하여 백여 년간 더 존속했다.
2. 고대 말
아르메니아인들은 원래 조로아스터교의 분파를 신봉하는 등 이란과 문화적으로 매우 가까웠으나, 이란에 사산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서기 288년 왕위에 오른 티리다테스 3세는 로마 제국을 모방하여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와 상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4세기 초,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313년)하기도 전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이 392년이니 무려 8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자국이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였다고 자랑하고 있다.[2] 교회는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이후 이 나라 옆에 위치한 아라라트산(구약성경의 노아의 방주가 표착한 산)이 위치했다는 점을 생각했는지 자신들을 노아의 직계 후손이라고 자칭하였다.[3] 아르메니아에서는 지금도 남자 이름으로 아라라트를 사용하는 경우가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안습한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3세기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나라에서도 전란이 끝이지 않았다. 결국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3세와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 사이에 조약이 맺어지며 국토가 반동강나고 페르시아의 통제가 심해지며 멸망했다. 이후 몇 차례 아르메니아 본토나 소아시아 남부 지역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모두 단명했다. 대신 아르메니아 분할에 대응으로 아르메니아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405년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문자가 창안되고 기독교 문헌들이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현대 아르메니아는 동유럽에 가까운 문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공인 이전 아르메니아는 종교(조로아스터교)와 문화, 습속, 인종 등 등 여러 면에서 이란과 유사했기 때문에[4] ,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완충지대라는 정치적 문제와는 별개로 이란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이란의 지배세력이 파르티아계 아르사케스 왕조에서 페르시아계 사산 왕조로 교체되자 아르사케스 가문 출신이던 아르메니아 왕가는 사산 왕조와 적대하게 되었고, 기독교 국교화까지 시행됨으로써 아르메니아와 이란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아르메니아 문자가 창안된 이후로는 아람어와 고대 그리스어로 된 기독교 문헌들이 꾸준히 아르메니아어로 번역되면서, 페르시아인과는 다른 아르메니아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
사산 왕조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중부/동부 아르메니아를 지배하면서 기독교와 친로마파 귀족들을 억압하고 아르메니아를 이란의 일부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대규모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봉기/아바라이르 전투) 전쟁 자체는 이란이 이겼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이 워낙 거셌으므로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어느정도 자치권과 기독교 신앙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 등 아르메니아계 장수들이 사산 왕조 내에서 활약하고 아르메니아계 후궁들이 샤한샤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사산 왕조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서서히 개선되었다.
3. 중세
7세기 이후 이슬람교가 급속도로 파급되었지만[5] 아르메니아인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지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로마 본토의 정교회와의 갈등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보다는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리엔트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세력과 더 가까웠던 아르메니아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는 결국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정교로 발전하게된다.
앞서 말한 대로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키릴로스주의(합성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십자군 전쟁기에 서방교회와 급격히 가까워졌고 잠시 동안은 아예 가톨릭으로 귀의한 적도 있었다. 이런 복잡한 교회사 때문에 아르메니아 정교의 변천은 역사의 중요한 연구과제가 되고있다.
7~13세기 동안은 동로마 제국과 이슬람 제국(諸國)의 통치를 번갈아 받았다. 바스푸라칸 왕국, 아니 왕국, 로리 왕국 등 독립국도 존재했다. 이 동안 아르메니아 본토를 떠난 이들은 동로마 제국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키워 나갔고, 주류층에 편입된다. 심지어 아르메니아 출신의 황가를 두 차례씩이나 배출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동로마가 결코 서방의 주장대로 그리스인들만의 나라가 아님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이따금씩 보이는 바르다스(B(V)ardas), 바르다네스(B(V)ardanes)라는 이름은[6] 그리스어·라틴어나 성경을 통해 들어온 히브리어 이름이 아닌 아르메니아어에서 온 이름이다. 특히 바르다네스는 파르티아 군주의 이름으로 2번(1세, 2세)쓰였다는 점에서, 위에 나와 있듯이 원래 종족, 문화, 언어적으로는 아르메니아가 이란계 국가와 매우 밀접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7세기 동로마의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헤라클리우스와 그가 일궈낸 왕조가 아르메니아 출신. 이 왕조가 단절된 후인 9세기에 한번 더 아르메니아인 바실리오스 1세가 등극하면서 아르메니아계 마케도니아 왕조가 들어선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하에서 동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 아르메니아 본토에서도 바그라투니 왕조(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라고 부르기도 하며 수도는 현재 터키에 있는 아니(4번 항목)였다.)가 등장하여 확고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제들은 자신들의 출신지인 아르메니아에 갖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과 아르메니아는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바그라투니 왕조(또는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조)는 이웃 조지아의 왕실인 바그라티온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이 가문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을 거쳐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바그라티드 아르메니아 왕국 수도인 아니는 지진 및 여러 전쟁으로 버려져서 지금은 쓸쓸한 폐허로 남아있다.
그러나 11세기 이후 아르메니아 왕국이 내분으로 휘청거리자, 동로마 제국이 일부 영토를 합병하였다. 그러나 그 직후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 제국의 침공으로 소아시아의 영토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연히 동로마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결국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남은 영토 역시 셀주크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 지대 킬리키아는 서기 965년 동로마 제국의 니케포루스 2세가 새로 재정복한 지역으로 강경 반이슬람 성향이었던 니키포루스 황제는 원래 이 지역의 무슬림 주민들을 추방하거나 학살하고 이 지역에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 정교회 신도들을 이주시켰다. 셀주크 제국이 아르메니아인들을 계속 공격하면서 일부 피난민들이 계속 킬리키아 지역으로 이주 합류하여 십자군 전쟁의 혼란을 틈타 나라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소(小)아르메니아 왕국 혹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이라고 한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
아르메니아 본토는 13세기 몽골의 대공세 이후 몽골 제국인 일 칸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다. 몽골인들은 이슬람교를 믿었지만 종교에 관대하여 아르메니아 정교도도 간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동서 문화 교류와 경제 교역이 번창하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동로마 제국-아나톨리아-시리아-캅카스-이라크-이란을 잇는 무역로를 활용해 많은 활약을 했다.
11세기 이후에는 아르메니아 문학에도 종교문학 일색에서 보다 세속적 형태의 작품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서기 10세기에는 요한 5세에 의해 아르메니아 역사를 담은 연대기가 출간되었으며, 이는 아르메니아인이 직접 저술한 최초의 아르메니아 역사서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몽골 국가가 몰락한 뒤 혼란이 이어지면서 무역이 쇠퇴하여 아르메니아 왕국은 마침 레반트 지역으로 들이닥쳤던 십자군과 동맹하기도 하고 몽골과도 동맹을 하며 그럭저럭 버티다가 1375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4. 근세
아르메니아 왕국은 몰락했으나, 16세기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의 패권 다툼 아래 아래에 아르메니아 서부를 비롯한 동지중해 근방이 통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타 종교에 관대한 실용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이스탄불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건물 수십여 개가 건설되었으며, 이슬람 율법 대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내에서 자체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였다.[7] 이러한 환경에서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서구 국가들과의 무역을 주도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번영에 이바지했다. 오스만 통치 아래 지중해 동부의 상업은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총괄하여 경쟁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통역 등 여러가지 공식적인 직책은 아르메니아인보다는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 파나리오테스를 중용하는 편이었으나,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부는 유대인들의 그것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8]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상인으로 번영한 것과 다르게 아나톨리아 동부 내륙지방과 아르메니아 서부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다수가 여전히 자급자족하는 농민으로 살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발흥한 이란의 사파비 왕조에서는 율파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30~50만명을 노예로 끌고 가서 이스파한 남부에 정착시켰는데, 이렇게 끌려간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 과정에서 절반이 넘는 수효가 사망했을 정도로 고생했음에도 악착같이 금방 재기하여 사파비 왕조 전역의 상권을 장악했다. 사파비 제국 시기 조지아인들은 주로 이슬람으로 개종된 이후 군인 노예로 이용된 것과 다르게 아르메니아인들은 사파비 제국 위정자들과 서구 국가들 사이의 무역을 돕는 대가로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아라비아 만 일대의 항구도시들을 장악한 서구 국가들은 이란과 교역할 때 무슬림들과 직접 교역하는 것보다는 기독교인 아르메니아인을 거쳐서 통상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은 서로 종파가 달라서 공식적으로 적대하는 관계였으나, 양국 사이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사이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며 양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스파한으로 강제이주당한 조지아인들은 몇 세대를 거치며 이란인에 동화된 것과 다르게 이란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사파비 제국은 아르메니아 동부 일대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을 이스파한 근교로 강제이주시킨 것을 계기로 전체 인구의 20% 정도는 아르메니아인이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들이 갈등 속에서 공존했던 것과 다르게 사파비 왕조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완전히 비주류 상업민족으로 밀어내었다. 근세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등쌀에 밀려서 상당수가 부하라로 이주하여 부하라 유대인이 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에 커피를 유행시키고 최초의 카페를 개점한 것 또한 오스만 제국에서 온 아르메니아인으로 전해진다. 당시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비유적으로 동서로는 무굴 제국부터 폴란드, 헝가리까지, 남북으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예멘까지 중세–근세의 아르메니아인 상업 커뮤니티가 존재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유대인 못지 않은 탄탄한 기반과 견고한 입지를 자랑했다. 특히 아나톨리아에는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자신들의 부와 재력을 고향인 서부 아르메니아 지방의 수많은 유서 깊은 수도원, 교회들에 투자하면서 현대 터키의 동부 지방에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연필 같이 뾰족한 첨탑 수백 개가 들어서 있었다.
5. 근대
이란의 사파비 왕조 몰락 이후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동부의 카라바흐 칸국이 들어서며 아프샤르 왕조와 카자르 왕조의 봉신국 역할을 하였다. 카자르 왕조 봉신국들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영 아니었는지 당시에는 인구가 상당히 희박한 편이었다. 러시아 정복 직전 나히체반 칸국은 보병 800여 명에 기병 2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력을 자랑하던 수준이었고, 예레반 칸국은 인구 14만 명 정도였으며, 카라바흐 칸국은 가구 수 기준 2만여 호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미 중세 말 티무르 제국의 캅카스 침공과 사파비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납치와 강제이주 정책 이후 아르메니아인 인구 상당수가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가깝고 좀 더 비옥한 아나톨리아 동북부 지역 혹은 조지아로 이동하였다.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를 넘어 남하해 오면서 오스만과 이란을 동시에 압박하기 기작했다.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 왕조를 몰아내고 1813년에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하여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대부분을 흡수하였다. 1828년에는 예레반 칸국, 나히체반 칸국,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리고 이란과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하여 지금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과 남캅카스 전역을 정복하게 된다. 그 결과 아르메니아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러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새로 설치한 아르메니아 주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처음에 2만여 명에 불과하였는데,[9] 지역의 무슬림 인구 역시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시아파 무슬림 아제르바이잔인이나 쿠르드인 계열이었다. 러시아 제국이 아르메니아 주를 설치한 이후 이웃 오스만 제국이나 카자르 왕조 영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주를 암암리에 장려하면서 오늘날 아르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은 다시금 아르메니아인들이 주류 민족이 되었다.
이렇게 19세기 초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러시아가 지배하는 동부 아르메니아와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서부 아르메니아로 나뉘었다. 아제리계 군벌정권들의 무능한 학정 하에서 낙후되어 있던 아르메니아 동부 지역에도 러시아의 영향으로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부흥하기 시작했다.[10]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치하로 분리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건과 교육 상태가 열악하여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의 분리주의 운동 탄압도 작용했다. 러시아인들과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의외로 서로 많이 충돌하는 편이었다. 러시아의 여러 민족주의 사상가들은 서구에 비해 낙후된 러시아의 상황을 위로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해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서 아시아의 이슬람으로부터 기독교를 지키는 나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르메니아의 그것과 그대로 겹친다. 19세기 초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믿던 국가 중 하나인 아르메니아가 러시아 영토 일부분으로 포함되자 러시아인 학자들은 아르메니아를 "러시아 제국이 해방시킨 아시아의 신비한 고대 기독교 국가"로 정의하였고, 아르메니아인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제국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11] 이웃 조지아인들의 경우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 시아파 이슬람에서 다시 정교회로 개종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문제가 덜했다. 하지만 무슬림 중앙정부의 지배하에서도 함셴인(Համշենցիներ)과 같은 일부 아르메니아인 무슬림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던 아르메니아인들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갈등이 더 심해졌다.
19세기 말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내부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잔혹하게 탄압했고, 전근대적 체제를 뒤엎고 집권한 터키 군부도 이 부분에선 술탄 시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오히려 근대적 사상으로 무장한 터키 군부가 1차 대전 중에 조직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는데, 이전까지 이뤄지던 전근대적 '진압'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근대적 제노사이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대략 300만 정도로 추정되는 오스만 내 아르메니아인 중에 추정치에 따라서는 100만에서 150만에 가까운 숫자가 학살됐다. 이 중 상당수는 대책없는 강제 이주 과정에서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다 병사하거나 아사했다. 또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내부에서 노선 갈등으로 분쟁이 빚어지기도 하고, 다른 소수민족들이 가세하여 아르메니아인들을 습격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저항 과정에서 터키군이나 쿠르드인 보조부대에 반공하는 때도 있었다.[12] 이때 안드라니크 오자냔(Անդրանիկ Օզանյան, 1865년 2월 25일 ~ 1927년 8월 31일)과 같은 아르메니아인 군사지도자들이 활약했는데 그의 일생은 영웅화되어 지금도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물론 연도를 봐도 알겠지만, 오자냔은 아르메니아가 소련에게 합병당하는 걸 보고 미국에서 살다가 조국을 안타까워하며 죽었지만 말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로 인해 아나톨리아 동북부 아르메니아인들의 전통적인 거주지역[13] 상당수가 황폐화되었으며 제국 내 민족 존립 기반 자체가 와해되었다. 직접적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아르메니아인 상당수는 무슬림으로 위장하고 숨은 후 러시아 제국령 아르메니아로 탈주하였으나, 나중에 아예 무슬림과 동화되거나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등으로 이주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서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부유한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은 대학살 이전에도 이미 오스만 제국 경제가 어려워진 것을 계기로 대거 프랑스나 미국으로 이민하던 상황이었는데,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로 이주가 더 가속화되었다.[14]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대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이루어지던 지역이 아니긴 했지만 이들이 동부에서 자신들의 동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을 리는 없었다. 오늘날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및 아르메니아계 프랑스인 상당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 서부에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의 후손이다.
5.1. 1911년 인구 통계
5.2. 1922~26년 인구 통계
6. 현대
6.1. 소련 치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아르메니아인은 인접한 조지아인·아제르바이잔인과 더불어 독립국가인 아르메니아 민주공화국(혹은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은 조지아·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이후에 세브르 조약에 따라 현 터키의 동북부까지 차지하며 상당한 국토면적을 지닌 나라가 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붉은 군대에 점령당하였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원년 구성국인 자캅카스 SFSR를 거쳐 오늘날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전신인 아르메니아 SSR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한 1921년 모스크바 조약, 1923년 카르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세브르 조약으로 아르메니아에 편입된 영토 대다수는 신생 터키 공화국의 영토로 넘어가게 됐다.
소련 치하에서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서방세계로부터 무시되었다. 때문에 NATO 가맹국인 터키의 전신 오스만 제국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도 터키와의 관계를 껄끄러워 했던 소련의 입김이 작용하면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스탈린은 아르메니아의 강성 민족주의자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 자칭 민족 전문가는 아라라트산을 터키로,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 SSR의 자치주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의 독립의지를 가혹하게 탄압하였고, 아르메니아의 암흑기가 지속됐다.
소련 시절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련 내 민족 중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민족이면서 동시에 소련으로 이민을 오는(...) 몇 안되는 민족이기도 했다.[15] 1926년부터 1989년 사이에 소련 내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소련 해체 전 1989년 통계에 따르면 소련 내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도합 5백만여 명에 달했다.
6.2. 독립 이후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독립을 결의하면서 1991년 소련 국민투표를 거부하였으며, 1991년 말 소련 해체로 인해 비로소 독립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는 독립하기 직전인 1988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지진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2월부터는 아제르바이잔 SSR 소속 영토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거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분리독립 및 아르메니아로의 귀속을 주장하자, 이를 거부한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을 무력 진압하려 하면서 민족 분규로 번지게 되었다. 그나마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소련 중앙정부가 해체되어버리면서 결국 아제르바이잔과의 전면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아르메니아 쪽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중에 러시아의 개입으로 1994년 정전되었지만 덕분에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재난 수준이 되었다. 이후 양국은 첨예한 대립을 이어갔고 때로는 전면전으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기도 하였다. 2020년에는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지대에서 국지전 수준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는 곧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2018년 4월 21일에 대통령이었던 세르지 사르키샨이 총리가 되자 전 대통령 출신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 세르지 사르키샨은 이원집정부제였던 아르메니아에서 2007~2008 총리, 2008~2018 대통령을 지냈는데 대통령 3연임이 법적으로 안 되니까 2015년에 내각제 개헌을 하고 대통령 퇴임 후 바로 총리가 된 것이다. 시위과정에서 7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2018년 5월 8일에 사르키샨은 사퇴했고, 새 총리로 니콜 파시냔이 선출되었다.# 이에 독립 이후 계속 아르메니아의 집권여당이던 아르메니아 공화당은 야당으로 전락했고, 같은 해 12월 총선거에서 0석으로 몰락해 원외정당으로 추락하였다.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초반부는 잘 싸웠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아제르바이잔의 무인기 공습으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10월 들어서 연전연패를 거듭, 11월 초까진 나고르노 카라바흐, 아니 아르메니아어로 아르차흐 지역을 40% 넘게 빼앗겨버린 끝에 러시아 중재로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없는 평화협정을 맺고 아르차흐 지역의 거의 80% 이상을 아제르바이잔에게 넘겨줬다. 아르메니아에서 반발하여 시위가 벌어지고 파시냔 총리는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사임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패전 이후 아르메니아에선 야당의 반 파시냔 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으며 니콜 파시냔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친 파시냔 지지자들도 반발 하는등 정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1] Yervanduni(Երվանդունի). 고대 페르시아어로 용맹하다는 뜻의 "에루안드(Eruand, Երուանդ)"의 변형이며, 그리스인들은 오론테스 왕조(Οροντιδών)라고 썼다.[2] 역사상, 아르메니아가 첫째, 에티오피아 왕국이 2번째, 그리고 로마 제국이 3번째로 기독교를 공인했다.[3] 이 점 때문에 이스라엘과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4]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헬레니즘, 로마 문화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 유적들이 남아있다.[5] 특히 동로마가 소아시아를 상실한 이후부터[6] 고위 군사 귀족이자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초기의 반란군 사령관이었던 바르다스 포카스·바르다스 스클리로스, 9세기 아모리아 왕조의 테오도라 황후의 남자 형제인 바르다스 등이 잘 알려져 있고 이외에도 여럿 더 있다. 또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까지의 20년간의 혼란 중의 황제였던 필리피코스의 본명이 바르다네스였다.[7]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같은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분쟁의 경우 민사 재판을 아르메니아인 성직자 주관 하에 받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라도 대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에서 운영하던 감옥에 수감되었다.[8] 오스만 제국 내 유대인들은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 변방 지대인 알제리, 튀니지 일대에서 무역업을 장악했던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수도 이스탄불의 무역 상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스탄불 거주 주민의 15~25% 정도는 아르메니아인들이었다.[9] 당시 오스만 제국 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2~3백만여 명이었다.[10]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사료가 남아있다.[11] 동로마 제국 전성기 당시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은 슬라브인들은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아직 문명화되지 못했던, 자신들이 우습게 보던 슬라브인이 당시 와서 종주국으로 군림한다는 불만도 한 몫 했을 것이다.[12] 당시 쿠르드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서로 싸우던 일도 있어서인지 디야르바크르에 있는 성 키라코스 교회(Սուրբ Կիրակոս եկեղեցի / Surp Giragos Ermeni Kilisesi)도 당시 쿠르드인들에게 파괴되었다. 그리고 100년 가까이 방치되다가 2013년 디야르바크르시에서 복원했다.[13] 아르메니아인들만 거주한 건 아니었고 쿠르드인, 튀르크인 등과 같이 거주해왔다만 해당 지역들이 전통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지역 중 하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14] 1844년 통계 조사 기준 이스탄불 거주 주민은 89만 1천여 명이었는데 이 중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22만 2천여 명이 아르메니아인이었으나 1885년 인구 조사에서는 15만 6861명으로 인구 비중은 17.9%로 감소했다.[15] 이게 상대적인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조우한 소련인들은 기회가 되는데로 미국이나 다른 서방 진영으로 탈출하려 시도한 것과 다르게, 문화대혁명과 대약진운동 당시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튀르크계 소수민족들은 기회만 되면 소련 영토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