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역사
1. 개요
이 문서는 터키의 역사를 다룬다.
터키에서 역사는 기본적으로 두가지로 나뉜다.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가 그것으로, 학교에서 역사 교육을 할때에도 터키 역사는 이렇게 양분하여 가르친다. 땅의 역사는 인류 최초의 도시문화를 만든 차탈회윅(Çatalhöyük) 문화부터 시작해 히타이트 제국, 그리스, 로마 제국, 아르메니아 등등 터키 영토를 거쳐간, 맨 마지막에 온 튀르크를 포함한 수많은 민족들의 역사를 말하며, 사람의 역사는 튀르크 민족의 역사를 말한다.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를 나눠서 가르칠 필요가 없는 한국 같은 문화권에서는 이질적인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땅의 역사와 사람의 역사를 각각 별개로 인지하며 모두 중시하는 터키의 역사관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 현대 터키인들은 혈통적으로는 고대 및 중세 아나톨리아 반도 주민들의 후손이지만, 언어적으로 따지면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후손이므로 터키의 이러한 역사관은 터키의 역사에 매우 알맞다고 볼 수 있다.
2.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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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인 도래 이전 아나톨리아 반도
3. 터키 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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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크 계 왕조인 가즈니 제국의 첫 술탄 마흐무드가 바그다드의 압바스 왕조 칼리파가 하사한 옷을 입어봄
"튀르크족"과 "터키인"의 개념은 다르다. 터키가 Turk라는 튀르크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표현을 선점해버렸기에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터키인은 튀르크족의 일부일 뿐이다. 터키인은 혈통적으로는 본래 아나톨리아 반도에 살던 인도-유럽 어족 계통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고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고 튀르크족 원형의 혈통은 상대적으로 적다. 때문에 인종적으로 터키인들은 튀르크족들 중에서 매우 방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터키인들의 외모는 중앙아시아인들보다는 유럽, 중동인에 훨씬 가깝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과거 아나톨리아 반도에 거주했던 고대 민족들에게서 찾기 보다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에게서 찾았었다. 이러한 터키인개념은 터키어를 말하면 터키인이라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혈통적이기보다는 문화적/언어적인 것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민족 개념이 대단히 중요함은 유전적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고유 특성을 잃은 한족이나 유대인이 현실적으로 강고한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최근에 고고학의 발전으로 아나톨리아 반도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의 존재에 대한 연구와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고, 특히 람세스 2세 시절 최전성기에 있었던 고대 이집트와도 맞장 떠서 비길만큼 강성했던 히타이트 문명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터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도 변화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를 떠나 유럽의 일원이 되려는 터키의 정책과도 일정 부분 맞물리고 있다. 사실 핏줄로 따지면 튀르크인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인도 터키인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기존의 전통적인 인식에 따라 터키 민족의 역사를 튀르크족에 초점을 둬 기술한다.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돌궐[1] 에서 찾는다. 실제로 돌궐은 과거 6세기 때에 돌궐-고구려-백제-일본 이 4개국 연합 체제에 속해 있었으며, 몇몇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대하는 근거를 여기에서 찾기도 한다. 흉노를 두고도 말이 많지만 튀르크계가 주도한 국가라기보다는 구성원으로 참여한 정도로 이해된다. 많은 튀르크 제족들 중에서도 오우즈 스텝(이 표현은 민족명에서 유래했다)에 정착한 오우즈족이 현대 터키 민족의 뿌리가 되었으며, 현 터키어가 오우즈 어파로 분류되는 것도 오우즈족의 영향이다. 이들은 '오우즈 야구브국'을 세웠으며 이들 중 일부가 남하하여 셀주크 제국을 세운다. 셀주크 제국의 치하에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튀르크인들이 정착하게 되고 이들이 룸 술탄국을 세우면서 아나톨리아 지방에 튀르크족의 영향력이 커진다. 이들 중 오스만 족이 성장해 동로마 제국을 무너트리고 오스만 제국을 세우면서 터키어와 터키 문화의 영향력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확대된다. 잘 나가던 오스만 제국이었지만 근현대에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면서 서구 열강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갈가리 찢어질 위기에 놓인다. 이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를 서구 열강에게서 구하고 터키어를 쓰면 터키인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민족주의 바람을 일으켜 현재 터키인의 터키 민족 개념이 잡히게 된다.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한 오우즈족 외에 다른 오우즈족들은 현지에 남아 투르크메니스탄 성립에 기여하거나 혹은 일부는 북서쪽으로 빙 돌아 발칸반도에 정착해 가가우즈족이 되기도 하였다. 이란으로 흘러온 오우즈족들 중에서 이란 북서부에 정착한 이들은 사파비 제국의 지배층이 되기도 했으며 아제르바이잔의 성립에 기여했다.
현재 터키 교과서에선 559년 중국을 이긴 돌궐을 실질적인 자기들 조상들 역사로 배우며 1959년에 건국 140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그리고 몽골에 있는 톤유크 장군 비석을 연구하는 등의 조상들 역사로 연구에 노력하고 있다. 터키역사에서는 터키 땅의 역사와 터키 민족의 역사를 따로 구분해서 보며, 마찬가지로 오늘날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옛 문명들 - 히타이트, 트로이(윌루사), 프리기아, 그리스, 로마 등등 - 또한 자신들의 문화적 뿌리이며 흔적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3.1. 셀주크 제국
탈라스 전투를 통해 중앙아시아에서 압바스 왕조의 패권이 관철되자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들은 점차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9~10세기 이후에는 튀르크족들이 노예 용병(맘루크)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대거 침투하였고, 이후 압바스 왕조가 약해지자 군사력을 장악하여 아예 자기네 나라들을 세웠는데 결국은 11세기의 셀주크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3.2. 룸 술탄국과 분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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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 경 아나톨리아 반도
하지만 셀주크 제국의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고 산산이 분열되는데 개중 하나가 현재 터키 지방에 자리잡은 룸 셀주크 왕조, 혹은 룸 술탄국이다. 룸 술탄국은 마침 쳐들어왔던 십자군, 동로마 제국과 아웅다웅하며 그럭저럭 살다가 1200년 경 동부 아나톨리아를 다스리던 다니슈멘드 왕조까지 정복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13세기에 전세계를 씹어먹는 몽골군에게 쿼타히야 전투 (1243년)에서 박살나고 이후 일칸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로 카라만, 살투크 등 튀르크 토후국들이 세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오스만 왕조였다.
3.3. 오스만 제국
1299년, 룸 술탄국의 잔해에서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을 개국한다. 아나톨리아 지방의 수많은 튀르크계 군소 군벌 중 하나였던 오스만 왕조의 초기 역사는 주변 소국들, 그리고 동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제4대 술탄인 바예지드 1세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십자군을 니코폴리스에서 발라버리고 발칸반도를 유린하던 도중에 티무르 제국에게 뒷통수를 맛깔나게 털려서 술탄 바예지드 1세는 포로가 되고 나라가 거덜날 뻔한 위기도 있었으나 메흐메트 1세의 노력으로 다시 일어서 당대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대제국이 되었다.
1520년부터 1566년까지 쉴레이만 대제의 시기 동안이 최전성기.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 전체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이란 서부, 흑해 일대를 통치하는 대제국이었다. 포르투갈의 위협에 시달리던 동부 아프리카, 심지어 동남아의 인도네시아 군소 술탄들의 요청으로 함대까지 띄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근대에는 나라가 기울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에게 털리고 이집트나 시리아 등지가 반 독립국이 되는 등 빈사상태에 있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제국과 함께 참전했다 패배한 것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1차대전 이후의 항복협상에서 아랍지역의 영토는 모두 강대국이 뜯어갔다. 러시아 제국은 이란 북부, 영국은 이란 남부와 이라크, 요르단,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보호령으로 삼았으며,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을 위임통치했다. 이 당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하여 아랍인과 유태인 모두에게 차후 독립국가 건설을 보장하는 이중플레이를 했다. 이것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시작이다. 이런 와중에도 프랑스와는 전후 아랍영토 분할 밀약을 맺었다. 즉 처음부터 아랍과 유대인 독립국가 보장은 뻥이었던 것. 결국 이라크, 요르단 일대는 영국의 반식민지가 되었다. 지금의 아랍왕정들은 다 이때부터 출발한 것. 아나톨리아지역도 수도 코스탄티니예(현재의 이스탄불)를 포함해 절반 이상이 연합국에 의해 분할될 위기에 놓였으며, 1920년에는 한층 더 앙숙인 그리스 왕국의 침공까지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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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오스만 제국 시대의 말기는 터키인들에게 다른 면에 있어서 흑역사였는데, 바로 아르메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 그리고 자국내 그리스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그것. 쿠르드인을 제외하면 단일민족 국가와 다름없는 현대 터키와는 달리[2] 당시의 터키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살았는데, 상당수가 민족주의의 시대에 정리되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밀레트(Millet)라는 종교에 바탕한 공동체들이 각자의 대표를 뽑고, 그 대표가 술탄에게 세금을 바치고 행정, 사법업무는 공도체가 자신들만의 관습으로 자체적으로 다루는 식으로 통치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그리스인과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등은 정교회 밀레트에 속했고, 유대인은 유대교 밀레트에 속했고 그 안에서 자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통치는 1821년 그리스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의 열풍에 오스만 지배하의 민족(그리스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이집트인 등...) 들은 독립을 원했고,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이들을 탄압했다. 하지만 서구열강들의 무력에 의해 이들 소수민족들은 하나하나 독립해 민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했고, 한편 아르메니아인들도 1880년대에 들어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리스가 독립할 무렵에도 충직한 오스만 제국의 구성원으로 남았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밀레트' (Millet-i sadıka)라는 별칭까지 받으면서 정부의 요직들을 독점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번번이 대립하던 러시아 제국에서 아르메니아 독립운동가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게 하자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더이상은 좌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해서 아르메니아인들은 두번에 걸친 학살을 겪는데, 1894년과 1915년이 그것이다. 자세한 건 아르메니아 학살 참고.
아르메니아 문제의 시작은 1차 세계대전발발 당시, 아르메니아인들 가운데서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민족주의 과격단체들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반,시바스에서 터키인 5000여명을 학살한데서 비롯되었다. 당연히 오스만 제국은 분노했고, 이들 과격단체들을 색출함과 동시에 이들과 협조가능성이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저 멀리 히자즈(지금의 이스라엘, 요르단, 시나이반도 일대)에 강제이주시켜 이들과 분리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강제이주정책은 과거 알바니아에서도 그러했고, 오스만 제국사에서 선례가 있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의 상황에서는 200여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킬 여력도 능력도 없었고, 결과적으로 코스탄티니예에 거주해서 통제가 용이한 아르메니아인들과 무슬림 아르메니아인들은 이러한 이주에서 제외되었다. 다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강제이주령에 순응했고, 그들은 멀리 이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으니...오스만 제국의 재정상태로는 수백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먹일수도, 기차를 태워 보낼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히자즈 지방조차도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 반군들로 인해 전쟁터가 된 상황이었다. 결국 오스만 제국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강제이주에 동참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상당수가 기아로 굶어죽거나,질병으로 죽어가거나, 겨울철에 얼어죽거나, 혹은 도적들에 습격당해 사망했고 심지어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도 분열하여 서로 죽이기 시작했고 덩달아 학살당하던 쿠르드족이나 시리아인들까지 가세하여(이게 아르메니아놈 탓이라고 분노) 서로 싸우며 죽어간 것도 제법 된다.
그리스야 터키 독립전쟁 당시 서로 정식으로 치고박고 학살도 했기 때문에 억울한 소리를 할 수가 없는 처지지만, 약소 피지배민족인 아르메니아인들과 시리아인들에게는 유태인들의 제노사이드보다도 더 뼈아픈 기억이다. 아니, 사실 이 학살이야말로 제노사이드라는 현대적인 개념을 정립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아르메니아 주장으론 1915년 한해에 아르메니아인들만 무려 150만~200만명이 학살당한것으로 주장'''하되는데, 이는 당시 전세계 아르메니아인 인구의 절반이자 터키 인구의 10%나 되는 수치였다! 이 일로 터키내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던 기독교 인구는 싹 쓸려나가 오늘날의 절대다수 이슬람국가 터키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늘날까지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터키 독립전쟁이후 그리스로 쫓겨난 그리스인들과 달리 이들은 인구교환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터키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름아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이다.
아르메니아 문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아르메니아가 소비에트에 합병되고, 스탈린 시절에 수많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숙청되면서 쉬쉬하다가 냉전붕괴 이후로 수면에 드러나지 시작했다. 하지만 터키정부와 사회 전반의 인식은 일단 '''대학살은 우리의 잘못만이 아님'''이라 빠른 시일내에 빈말의 사과조차 받기는 힘들듯 하다. "조사를 철저히해서 우리의 잘못으로 드러난거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다. 단 같은 아르메니아인들끼리 싸우다 죽은거나 쿠르드족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사례도 알려진게 꽤나 많으니까 일일히 다 따져보자" 라는게 현 터키 정부의 입장이다.
참 비극인 것은 이 당시 이슬람교도인 쿠르드족들도 터키인들에 가세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반대로 학살당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무수한 부족으로 나뉘어져 서로 싸우며 죽어갔고 쿠르드족들이 아라라트산 근처에 세운 아라라트 공화국을 뭉갤때도 같은 쿠르드족 군인들이 싸웠었다. 그리고 터키 공화국이 건립된 이후로는 터키정부의 강력한 튀르크화 정책으로 자기네들이 2등시민으로 간주되었다.
3.4. 아타튀르크와 근현대 터키 공화국
1차대전의 전쟁영웅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아나톨리아의 앙카라에서 협상불복을 선언하고,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를 반역자로 규정. 의회를 소집하고 군대를 모아 그리스군을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고 현재의 터키 영토를 확보하여 재협상을 했다. 소위 터키 독립전쟁의 시작이다. 사실 터키의 국력은 연합군에 비하면 상대가 안되는데[3] 1차대전 직후의 피로로 더 이상 전쟁을 끄는 것을 싫어하게 된 연합국은 이것을 승인.[4] 터키 또한 피해가 엄청나서 빼앗긴 해외 영토들을 되찾을수 없어 본토 보존에만 만족하며 해외 영토들의 독립을 승인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2년 터키 공화국 건국선언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어의 로마자 개혁,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펼치며 현대 터키 공화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지만 한편으로는 철권 독재자였다. 군부가 아타튀르크의 후예를 자청하지만 사실 아타튀르크는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아타튀르크는 1938년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11월 12일 9:05분에 서거했다. 그 시간에는 터키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모두가 하던일을 멈추고 아타튀르크를 추모한다. 아타튀르크 서거 이후, 터키 대국민 회의는 회의를 통해 이스메트 이뇌뉘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 정책을 이어나가 강력한 세속주의를 펼쳤다. 아잔의 터키어 암송 의무화 등을 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로 연합국의 민주화 요구 및 국내의 반발로 이뇌뉘는 1950년에 자유 민주 선거를 펼치고 터키 최초로 이슬람계 정당인 민주당이 집권한다. 아드난 멘데레스는 군부의 힘이 센것을 경계하고 군부의 힘을 억제하려고 했지만 군부는 1960년에 쿠데타로 아드난 멘데레스를 몰아냈다. 1961년 총선으로 이뇌뉘는 다시 재집권 하였다.
이후 1965년에는 쉴레이만 데미렐의 정의당이 승리 하였지만 근로자의 파업등 좌 우익 갈등으로 혼란이 가속되자 군부는 경고장을 날린다. 터키 군부는 술레이만 데미렐에게 내각을 사퇴하고 아타튀르크의 이념을 계승하라고 경고장을 날린다. 경고를 받은 쉴레이만 대통령은 회의를 소집하고 사퇴하기로 결론을 내린다.
1971년 신정부가 구성 되었지만 여전한 좌우익 갈등과 갈등이 중단 되지 않자 군부는 1971년 4월 28일 앙카라와 이스탄불을 비롯한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군부는 강력한 권위주의 케말리즘을 실행시켰다. 1971년 이후에는 연립의 연속이였다. 공화인민당 뷜렌트 에제비트의 연립내각 등의 연립정권으로 정부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1980년에는 간선제로 뽑아야 할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했다. 이러한 위기에 케난 에브렌을 중심으로 한 군부는 행동에 나서 계엄을 선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기성정치인 정치활동 금지와 정당 해산등이 이루어졌고 명분은 아타튀르크 주의의 실천과 이슬람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숙청이였다. 케난 에브렌의 국가안전위원회(MGK)는 1983년 까지 터키를 이끌었다. 군사정부는 1983년에 총선을 실시하였고 투르구트 외잘이 이끄는 조국당이 53%로 당선되었다. 조국당은 자유경제를 펼쳤지만 인플레를 잡지 못했다. 인플레를 잡지 못해 조국당은 1991년에 정권을 내주었다. 1991년 이후에는 정도당과 사회민주당이 연립정권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로 탄수 칠레르가 총리가 되었고 터키의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경제의 혼란으로 터키 역사 최초로 이슬람주의를 공략으로 한 복지당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21%의 지지율이였기 때문에 복지당은 다수당들의 눈치를 봐야했으며 1997년 군부는 이슬람주의를 경고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경고하였다. 복지당 당수였던 네지메틴 에르바칸은 사퇴하였고 복지당은 금지되었다. 이후 정의개발당 집권 전까지는 연정이 계속 되었다.
2000년에는 터키 헌법재판소장 출신이던 아흐메트 네지데트 세제르를 터키의 10번째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2003년에는 복지당의 후신인 정의개발당이 집권하였다. 2007년 이전까지는 세속주의 대통령과 이슬람주의 총리의 공존이 지속되었고 2007년에는 야당과 군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의개발당의 압둘라 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적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자유 정책으로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세속주의의 약화와 우익화로 세속주의 세력의 염려를 받고 있다. 2013년에는 국가에 대한 맹세를 폐지하고 히잡착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터키 공화국 성립 이후 대통령은 간선제로 뽑았는데 직선제로 개헌하였다. 51%의 찬성으로 동부와 중부에서 크게 찬성하였다. 이후에는 터키의 백악궁을 짓고 총리관저와 대통령관저를 맞바꾸었다. 2014년에는 3선 제한에 걸린 에르도안은 터키의 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10년 터키 헌법 개정으로 에르도안은 2019년에 또 대선에 나갈 수 있다.
2016년 7월 15일에는 터키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2016년 터키 쿠데타로 그간 억눌리던 군부가 에르도안에게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동안 터키 군부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던 터키 시민들과 야당 여당은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터키 평화 회의라는 군의 소조직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며 귈렌의 봉사운동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쿠데타 시도 이후에는 귈레니즘 세력이 크게 숙청되고 있고 서방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군부는 제압당했다 해도 터키에서 군부의 지위가 워낙 강하다보니 군부는 기회만 있으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할것이니 터키의 정치는 굉장히 불안하다. 특히 억눌려살던 쿠르드인들도 폭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IS같은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게릴라전과 테러를 일삼아대어 터키는 내전과 테러로 갈수록 불안해지고 있다. 게다가 테러와 정치불안으로 인한 경제난까지 시작되어 터키인의 삶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동의 재앙인 사막화로 인해 터키도 수자원이 갈수록 고갈되어 가고있어 물부족까지 심각해지는 판국이다.
참고로 199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교과서 세계사에선 아타튀르크가 아니라 케말 파샤(케말 장군)라는 이름으로 건국자로 소개하였고, 2000년대 초반, 어느 여행 책자에선 터키를 가리켜 아타, 튀르크, 케말이라는 3국이 통일된 것이라는 주장을 피며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대한항공 기내지'''였는데 당연히 터키인들의 비난 속에 고쳤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해체로 인해 터키와 이슬람권이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잃고 만다. 그러다보니 터키인들은 이에 대한 열등감이 심해져 반서방 감정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5] 제2차 세계대전 때는 1차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변변치 않은 결과를 초래했던 경험을 살려 중립국으로 지내다가 소련의 압력으로 1945년 독일에 형식적인 선전포고를 했다. 그 전에 나치가 1차대전 당시 동맹국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터키로 나치 고위간부들이 방문하면서까지 터키 정부에 참전을 권유했으나 끝끝내 거부했다. 이 덕분에 이스메트 이뇌뉘 당시 터키 대통령의 이런 중립행보는 나중에 훌륭한 업적이라는 찬사까지 듣었다. 나치와 손잡고 싸웠더라면 터키 역사는 아주 비극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미국이 주축인 연합군한테 개박살날 것이 분명하고 1차대전과 달리 나라가 진짜로 분할될 수 있는데다 공산화 크리에 이슬람 내전 크리가 줄줄이...
또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쿠르드족 학살, 정교인 아시리아인 학살 등으로 국제여론에게 비판을 받은 경험이 있다. 세계 최초로 다국적군에 의한 치안유지가 실시되는 등 국제정치에 있어서 많은 선구자적 면모를 가진 국가이다. 안좋은 쪽으로. 쉬운말로 한국이 맞는 쪽이었다면 터키는 때리는 쪽에 가까웠다.
70년대 칠레, 아르헨티나, 남북한과 함께 인권탄압국으로 자주 이름이 올랐고 엠네스티 보고서를 본다면 '''70년대 남한은 인권천국''' 수준이다.[6] 우습게도 이를 다루던 영화로 70년대에 작품성을 인정받았었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최근에는 제작진과 원작자도 사죄하는 터키 왜곡 차별영화가 되었다. 차라리 이 시절 터키의 적나라한 인권탄압을 참고하자면 터키에서 만든 스위스 영화(욜 항목 참고)욜을 보면 꽤 느낌이 올 것이다.
이 당시 터키의 인권탄압이라면 쿠르드인들에 대한 탄압도 유명한데, 현재 1500만명(추정)에 육박하는 쿠르드계 인구에 대해 터키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90년대까지 '그딴거 없다. 얘네들은 그냥 산지에 사는 터키인들일 뿐이야'였다. 쿠르드 문화에 대한 박해는 2000년대 이슬람주의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법적으로 금지되는등, 굉장한 무리수를 많이 두었었다. 하지만 이슬람주의 정권 수립후 쿠르드 문화에 대한 규제가 많이 풀려서 오늘날에는 이 앙금이 점점 풀리는 과정이기는 하다. 그러나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재로 터키의 인권은 과거처럼 심하게 탄압받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급속도로 성장해 각광을 받는 나라이다. 탈이슬람으로 터키를 현대화 시키려했던 아타튀르크의 바람과는 달리, 이슬람주의당인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과 그 당수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의 지도하에 있다. 그러나 에르도안 체제는 터키 정치계의 양날의 검이었던 군부 내 쿠데타 세력을 박살낸 이후 점점 이슬람주의 독재 체제로 나아가고 있고, 때문에 2013년부터 적잖은 저항을 받고 있다.
미래가 어쨌든 일단 에르도안의 지도하에 잠재되어 있던 포텐셜을 살려 상당한 경제/군사대국, 지역강국,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의 롤모델로 성장한 터키는 G20의 회원국으로 포함되었다. 예전까지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시도했지만, 이제는 좀 자랐다고 미련이 없는 듯. EU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유럽연합 회원국과 무관세 무역을 하고 있고 단물은 이미 다 빨아먹고있는 터에 완전가입까지 해야할 이유가 없기도 하고, 현 정부의 이슬람성향 때문에 EU에 발담그기를 회피한다는 분석도 있다. EU의 주요국 국민들도 종교적 차이와 경제적 문제 때문에 약간 꺼려하는 분위기이고.
[1] 돌궐(突厥)은 투르크를 한자로 차명한 글자다. 당시 세워진 오르혼 명문비석엔 '괵튀르크'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며 현대 터키에서는 돌궐을 괵튀르크 제국이라고 부른다. 이후 돌궐 제국은 중국과 대립하다 결국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다.[2] 현대에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계를 내지 않을뿐이지, 터키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의 종은 70여에 달한다. 그중 메이저급만 언급하더라도 쿠르드, 그리스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리인, 튀르크멘인, 보스니아인 등등[3] 지금도 터키와 서구의 국력 차는 넘사벽이다.[4] 특히 초강대국 미국이 터키 문제는 우리와 상관없다며 끼어들지 않았다.[5] 지금도 터키는 서방에 대한 감정이 나쁘다.[6] 박종철 사건때 고문 고발 르포를 취재하면서 터키의 고문 실태에 대해서 신동아 잡지에서 고발한 게 있는데 건전한 청년들은 열람을 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