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 데움(브루크너)
정식 명칭: 테 데움 C장조
(Te Deum C-dur/Te Deum in C major)
1. 개요
레퀴엠, 미사, 소규모 모테트를 비롯한 안톤 브루크너의 종교음악 작품들은 대개 린츠에 머물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곡된 것들이다. 이후 교향곡 창작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규모 종교곡은 한참 쓰지 않았는데, 이 곡과 시편 150은 예외적으로 창작 활동 후기에 작곡되었다.
작곡 시기는 1881년 5월부터 1884년 3월 7일까지. 7번 교향곡과 맞물려 있는데, 창작 우선 순위는 교향곡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7번 교향곡이 이 곡보다는 먼저 완성되었다). 공연 소요 시간은 약 23~27분 정도로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 곡보다 더 대규모인 미사들과 함께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2. 곡의 형태
천주교에서 특별히 기념하는 축일이나 축하 예배 때 가창되는 것이 '테 데움' 이라는 성가인데, 많은 고전 성가들처럼 라틴어로 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였던 작곡가나 천주교 전례용 음악을 작곡한 이들 중에는 이 테 데움 가사에 곡을 붙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곡은 그 중에 최상급으로 평가받을 만큼 고퀄리티를 자랑한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데, 가사의 단락에 따라 다섯 개 섹션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Te Deum laudamus (주여, 저희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2: Te ergo quaesumus (저희는 당신께 갈구하나이다)
3: Aeterna fac cum sanctis (저희도 성인들과 함께)
4: Salvum fac populum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소서)
5: In te, Domine, speravi (주여, 당신께 바라오니)
가사의 내용에 따라 순차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향곡에서처럼 중심 주제를 내세우는 등의 구성법은 쓰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교향곡 창작에서 얻은 각종 스킬을 응용해 집어넣고 있고, 고전 시대의 종교음악들보다는 훨씬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이다.
다만, 곡 자체의 걸작성을 인정하는 이들 중에도 이 곡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더러 있다. 브루크너 당대에는 특히 '체칠리아주의자' 들이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전담 까처럼 활동했는데, 체칠리아주의자들은 종교음악의 원류가 기악 반주 없는 순수 성악의 아 카펠라에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아 카펠라도 엄격한 가창 음역과 발성의 준수나 화성과 대위법의 틀을 따라야 한다는 일종의 원리주의였는데, 이들은 브루크너가 종교음악을 쓰면서 너무 기묘한 화성이나 대위구를 삽입한다거나 지나치게 확대된 교향곡풍 관현악을 사용한 점, 그리고 독창자나 합창단에 부르기 힘든 고음역이나 도약 음정을 많이 쓴 점을 지적하며 깠다. 실제로 이 곡은 정통 전례에 쓰기는 힘든데, 대규모로 구성된 곡이라는 점 외에 연주의 난점도 분명한 걸림돌이다.
체칠리아주의자들과는 별도로 브루크너의 천적이었던 바그너까/브람스빠도 물론 이 곡을 깠는데, 다만 초연 때는 이미 현악 5중주와 7번 교향곡으로 브루크너의 성공 가도가 시작된 탓에 예전 만큼의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브루크너 킬러로 유명했던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도, 이 곡을 평하면서 어느 정도 칭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연주 편성은 독창자 네 명(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과 혼성 4부 합창(마찬가지로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 파트)이라는 성악진에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라는 전형적인 2관 편성 스펙의 관현악이 따라붙는다. 몇몇 공연이나 녹음에서는 오르간도 추가 사용하는데, 곡에 완편된 것은 아니고 옵션으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3. 초연과 출판
일단 완성한 뒤 추가 개정 작업은 없었고, 약 1년 뒤인 1885년 5월 2일에 관현악 파트를 브루크너의 제자인 요제프 샬크가 두 대의 피아노용으로 축약 편곡한 형태로 브루크너 자신이 직접 지휘해 선보였다. 대신 성악부는 원곡 그대로 기용했고, 독창자 네 명과 빈 바그너 협회 합창단이 참가했다. 원래대로 관현악을 쓴 본격적인 초연은 다시 1년 가량 지나서 행해졌다.
'''전곡 최초 공연''': 1886년 1월 10일에 한스 리히터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독창자, 합창단이 빈에서 초연.
초연 무대는 7번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찬사를 받았고, 브루크너 생전에 가장 많이 연주된 종교음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음악학자들의 집계에 의하면, 약 30회 가량 공연되었다고 한다.[1] 출판본은 1885년에 3번 교향곡을 간행했던 테오도어 레티히 음악출판사에서 처음 나왔다.
'''1885년 초판''': ''브루크너와 요제프 샬크의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 단, 샬크 편곡의 피아노 편곡보가 관현악 대신 인쇄되어 있음.''
'''1884년 미개정판''': 1962년에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간행된 악보. 초판과 달리 피아노 편곡보와 관현악 총보 두 형태가 모두 인쇄됨. 초판과의 차이점은 극히 미미함.
노바크의 전임자들이었던 하스나 오렐은 이 곡의 개정 편집에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로 교향곡의 개정판 출간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전까지는 관현악 완편 공연에 브루크너의 자필보나 공연용으로 사보된 필사본을 대여하는 형태로 악보를 입수해야 했는데, 노바크판이 나오면서 악보 입수에 관한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악보가 늦게 나온 것과는 별도로, 이 곡은 나치 집권기 동안 의도적으로 듣보잡 신세가 된 흑역사도 갖고 있다. 나치는 브루크너의 음악을 선전 도구로 활용하려고 어용 음악학자나 음악평론가를 동원했는데, 이들은 종교음악의 중요성을 쌩까거나 심지어 폄하하는 내용의 뻘글을 작성해 신문이나 잡지에 싣는 병신인증도 서슴치 않았다.[2]
이런 탓에 이 곡도 나치 시기동안 연주 빈도가 갑자기 뜸해졌고, 전쟁 종결 후에야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브루크너가 완성하지 못한 9번 교향곡의 4악장 대신 이 곡을 연주해 마무리지으라는 유언을 남긴 것 때문에, 9번 교향곡의 3악장까지 연주한 후 테 데움으로 공연을 마무리짓는 관행이 지금도 간혹 나타나고 있다. 물론 권위있는 유언이라고는 해도, 원곡 자체가 미완성이라 완벽한 해결책은 절대 아니다.
연주 상의 문제로는 성악진, 특히 합창단이 많이 고생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독창자들의 노래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합창단은 묵직하고 강렬한 관현악 사운드를 배경으로 노래해야 하는 데다가 소프라노나 테너 파트의 경우 일반적인 합창 음역보다 윗쪽의 음정을 불러야 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이런 탓에, 이 곡의 공연 때는 숙련된 프로 합창단이 섭외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추어 합창단의 공연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그리고 브루크너빠가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일본에서 간혹 있기는 하지만, 보편적인 사례는 아니다.
[1] 참고로 7번 교향곡은 전곡 공연과 부분 공연 합해 약 32회 연주되었다.[2] 나치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 경멸하고 있었는데, 다만 비당원이 다수인 국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겉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성직자들에게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물리거나 설교와 예배를 방해하는 등 뒷담화식 탄압을 자행했다. 브루크너의 작품을 언급하면서 종교음악을 무시하거나 깎아내린 것도 이러한 행위와 크게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