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티우아칸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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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테오티우아칸의 선(先) 스페인 도시
영어
Pre-Hispanic City of Teotihuacan
스페인어
Ciudad prehispánica de Teotihuacán
프랑스어
Cité préhispanique de Teotihuacan
국가·위치
멕시코 멕시코 주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7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i)[5]
지정번호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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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피라미드에서 본 테오티우아칸의 모습. 좌측에 태양의 피라미드가 보인다.
Teotihuacan
1. 개요
2. 역사
2.1. 탄생
2.2. 파틀라치케 시기(fase patlachique) - 기원전 150~0년
2.3. 차쿠알리 시기(fase tzacualli) - 기원후 1~150년
3. 교통편
4. 치안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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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발 2300여m에 형성된 멕시코의 고대 도시이다.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산 후안 테오티우아칸 데 아리스타 (San Juán Teotihuacán de Arista)에 있으며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큰 피라미드 유적지로서 거대한 건축물들이 특징이다.
인신공양을 시행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 대규모 주택단지였던 '죽은 자의 거리' 등의 유적지가 있다. 특히 케찰코아틀 신을 모셨던 신전과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는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원리에 따라 세워졌다. 이 도시를 세운 문명을 '테오티와카노'라고 일컬으며, 이 문명은 마야 지역이나 베라크루즈 지역에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만큼 그 당시에는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후에 이 문명을 발견한 아즈텍인들에 의해 명명된 것으로 그들이 사용했던 나와틀어로 '신의 탄생지' 또는 '신의 길을 가진 자들이 사는 곳', '신들의 도시'라는 의미이다.[6] 고대 테오티우아칸의 멸망 이유로는 최근의 학설로 기후 변화에 따른 21년 간의 지독한 가뭄과 피지배 계층의 반란설이 유력하다.
추가로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는 건축시기가 아닌 멕히깐 시기의 지배자들이 발굴 후 붙인 이름으로 전해지며 태양의 신전은 폭풍과 번개, 흐르는 물의 신을 모시며 달의 피라미드는 물의 신전으로 통한다. 또한 아메리카 토착 문명이 그렇듯 재규어가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유적지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유적지 식당으로 동굴을 통째로 개조한 라 그루타라는 식당이 유명하다. 물론 여타 식당보다는 비싸니 각오하고 갈 것. 한국 기준으로는 일반 패밀리 레스토랑 가격이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주말 공연 일정에 맞춰서 가볼 만하다. 물론 여의치 않다거나 일부러 저렴하게 먹고 싶은 사람들은 시내 혹은 시우다드 아스테카 (에카테펙)나 멕시코 시티로 돌아와서 먹는 방법이 있다.

2. 역사


당대의 문자기록이 단편적인 단어 이외엔 남아있지 않은 테오티와칸의 특성상 발굴만으로 역사를 예측해야되기때문에 여러가지 이설이 난무하지만, 고고학-과학 분석으로 밝혀진 사실을 뼈대로, 탄생과 번영, 그리고 쇠락등의 커다란 기조는 거의 정립됐다고 할만하나, 구체적으로 그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학계에서 각각 개연성을 지어내는 형국이니 학계 다수설을 다루나 확실한 신뢰성은 보장 못한다. 미래에 학설이 뒤바뀔수는 있다.
다만 이 정보의 출처가 멕시코 제일의 대학이자 세계 대학 랭킹으로 중남미에서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 다음가는 2위를 차지한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면서 직접 마야 유적지들의 발굴과 분석에 참여했고, 그로인해 본 대학에서 메소아메리카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의 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사주를 받아서, 여러 학술서를 내다가 2014년에 우수학술도서에 선출되기도 한 정혜주 교수의 2018년 5월 21일 출판 최신연구결과인 신들의 시간을 바탕으로 영어 위키피디아와 교차확인 했으니, 원어를 배우지 않는 한 이보다 더 신뢰성이 높은 정보원은 없을것이다.

2.1.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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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티와칸의 창립민족에 대해서는 아직 이설이 갈리나, 창립집단의 윤곽에 대해선 밝혀졌다.
바로 멕시코 고원 지대 최초의 피라미드 제단이 건설된 제의 중심도시 쿠이쿠일코(Cuicuilco)[7]의 피난민들이다.
피난사유는 화산폭발로. 바로 남쪽에 시틀레(Xitle) 화산이 존재하는데, 이는 후세 아즈텍에서는 늙음의 신이라고 불렸던 우에우에테오틀로 전해지는등 이 도시사람들은 화산자체를 신으로 모셔서, 화산들과 불의 신으로 숭배했다.
기원전 800년경에 세워진 수로로 둘러쌓인 동그란 피라미드 제단 자체가 바다속에서 솟아나온 시틀레 화산을 상징하는 일종의 미니어쳐의 역할이었다. 인간형으로는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있는 조각상등으로 묘사된다.
이들이 화산주위에 자리를 잡고 숭배까지 하게 된 이유의 추측은, 아무래도 멕시코 고원지대가 해발 2250m로 고도가 높다보니, 저위도 덕으로 상춘기후라고해도, 선사시대의 의류와 주거의 부실로, 겨울이나 밤에 추위를 느끼게 되는데, 화산 주변은 따뜻한 공기가 365일 내려오기에 활발한 야외 활동에 적합하고, 무엇보다 귀중하디 귀중한 화성암계열 흑요석을 대량 생성해냈기에 경외의 대상이 된 듯하다. 덤으로 화산재로 비옥해진 넖은 분지를 풍부한 텍스코코 호숫물로 관개하며 도시가 발달해가기 시작한다. 영 위키페디아발로는 전성기때 인구가 2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면 기원전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인구다.
나름 인상적인 이들의 번영에서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기원전 200~100년쯤에 활화산인 시틀레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과 화산재가 도시를 덮어버린것이다. 오갈데 없어진 난민들은 분화한 화산과 기타 화산들과 멀리 떨어져있는 호수 반대편인 텍스코코 북동쪽의 널찍한 평야 지방의 산후안 강 유역지대에 자리를 잡게 됐는데, 그쪽 지대가 비옥한 평야 중심지이고 .가시를 제거해서 구워 먹을 수 있는 노팔 선인장, 술과 섬유의 재료인 마게이 용설란등 채집 가능한 식량이 많았으며,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입지가 좋은 땅이기도 했으나, 당시 일단 주거지가 급하기 떄문에 얕은 자연동굴들이 무수히 많은 테오티와칸 평야가 피난지로 선정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후에 언급 될 역사내내 이어진 강력한 신권정치체를 유지하고 테오티와칸의 도시내의 수많은 타민족-언어집단을 묶고, 심지어 메소아메리카 전역의 세력들에게 강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해석하기에, 심상치 않은 화산의 징조를 보고, 미리 대피를 권고한 선지자들이 존재해서 이들이 신통력을 널리 인정받는 지배층이 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2.2. 파틀라치케 시기(fase patlachique) - 기원전 15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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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초기에 주민들은 동굴들 내부의 울퉁불퉁한 바닥을 평평하게 깔고, 벽을 세워서, 분할된 주거지와 방들을 구축했다. 필연적으로 어두울수 밖에 없는 상황은 기둥을 세운뒤에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광원을 확보했으나, 여전히 어두컴컴한 지역이 대부분이라서 동굴 곳곳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표시석을 세워두웠다.
토지개간으로 생산력이 증대해 여유가 생긴 후에는 당연하게도 현대기술을 도입하지 않는한에, 어두컴컴하고 퀴퀴할수 밖에 없는 환경을 벗어나, 다른 문명권처럼 바깥 토지에 건물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기존의 동굴은 무덤으로 사용하거나, 혹은 입구위에 제단을 세워, 후세에도 피라미드 내부 통로를 따라, 제의 장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신기하게 위의 선지자 신통력 학설이 맞는지, 멕시코 고원 전역에서 이런 촌구석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심지어 멕시코만 연안의 저지대 정글 우악스테카나, 올멕문명 건설자들로 유력시되는 오악사카 동부의 미헤-소케인들, 그리고 믹스테카 지역등 사방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도시 창립민족들은 극소수이고 다민족 - 다언어를 신앙으로 하나로 묶는 테오티와칸 특성이 도시 극초창기부터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대 말기엔 대략 8km제곱 면적의 5000명 정도되는 마을로 제법 자리를 잡게 된다.

2.3. 차쿠알리 시기(fase tzacualli) - 기원후 1~150년


(탈루드 타블레로 식 피라미드)
이 시기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드디어 우리가 생각하는 메소아메리카 계단식 피라미드(talud-tablero)가 발명됐다는 것이다.
(올멕시기 라벤타 유적지의 피라미드)
올멕 등 그 이전에 있었던 피라미드라는것들은 하나같이 단순히 흙만 언덕형으로 쌓아올린 토둔이나. 탄생목차에 올라온 쿠이쿠일코 피라미드처럼 기껏해야 계단과 모서리만 돌을 두른 피라미드를 전혀 연상시킬 수 없는 원시적인 형태였으나, 테오티와칸인들이 새로 재건한 해의 피라미드는 당대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볼 수 없었던 석재를 기반으로 쌓은 신 건축물이였다.
일명 탈루드-타블레로(talud-tablero)양식이라고 불리는 이 건축공학은,하나의 계단형 층의 구조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랫부분은 대각선-사선(타블레로)으로 비스듬히 쌓아올려서 구조적 안정성을 추구한 뒤 중상부 지역은 수직-직선(탈루드)형태로 쌓아올린 층들이 반복되는 건축 구조로, 지진활동이 빈번한 멕시코의 지질학적 특성상, 견고함을 추구하면서, 각 층마다 평평한 넓은 공간을 창출해 내는등, 공간의 활용이 효휼화된 실용성을 널리 인정받은 양식으로, 테오티와칸을 넘어 전 메소아메리카에 퍼졌다.
촐룰라-티칼-몬테알반-팔렌케-엘 타힌-카미날후유-코판-툴라-치첸 이트사-틀라텔롤코-테노치티틀란의 대다수 피라미드 양식은 이 양식을 따르고, 나머지는 탈루드-타블레로 양식을 개량해서 만든 구조의 피라미드들로, 해의 피라미드는 메소아메리카 피라미드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 피라미드 주위에는 쿠이쿠일코에서 그랬던것처럼 3미터 너비의 수로로 가장가지를 메웠다. 탈루드 타블레로 양식으로 피라미드 한 계층이 만들어질 때마다 제단의 네 모서리에 어린아이들을 인신공양을 시행했고, 남은 어린이 유골들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해의 피라미드는 비와 물의 신인 틀랄록의 숭배 제단으로,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의 보편적인 특징으로 비와 물에 해당하는 신격의 대상으로 하는 제물은 전통적으로 아이들을 고르는 습관이 널리 퍼져있다. 어린아이의 펑펑 쏟아지는 눈물과 피가 섞여 땅에 뿌려지면 비를 부른다고 믿었다.
이런 식으로 한 층 한 층 어린아이의 희생으로 높게 지어진 굳건한 신식 석제 피라미드는 조잡한 흙 둔덕만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과 정치적-종교적 파장을 줄 정도로 인상적인 건축물이였고, 테오티와칸 사제 계층의 권위가 내부적으로 공고해지고, 외부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바탕이 되었다고 추측된다.이 시기부터 여러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민족들이 성지에 몰려들어서 정착하는 형식으로 도시 인원수가 폭증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여겨진다.
피라미드 완공 즈음엔 17km²의 면적에 약 30000명이 살고 있었다.

3. 교통편


  • 멕시코시티 북부종합버스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테오티우아칸 방면으로 출발한다. 운행계통에 따라 포트레로역 (Potrero), 데포르티보 3월 18일역 (Deportivo 18 de Marzo), 인디오스 베르데스역 (Indios Verdes)을 경유하며, 모든 계통이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에 있는 멕시코 85D번 고속도로 (멕시코시티 ~ 파추카 구간) 상에 있는 산 크리스토발 정류장에 중간 정차한다. 테오티우아칸 쪽 치안은 좋지만 중간지점의 에카테펙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고 버스 강도사건이 많이 일어나므로[8] 주의하자. ODT 버스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으며, 테오티우아칸행 버스도 강도에 저항하는 승객에게 실탄을 발사해 1건의 사망사고가 있었다.
  •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에서는 에카테펙 버스 95를 이용하여 갈 수 있다. 그러나 에카테펙이 그야말로 마경인 곳이라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한다면 여러 번의 환승을 통해 이 노선으로 올 생각을 하지 말 것. 게다가 환승할인제도가 없기 때문에 모든 비용을 합치면 시외버스를 타는 게 차라리 나을 지경이다.

4. 치안


  • 관광지인 만큼 치안은 괜찮은 편이나 만약 테오티우아칸 근처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9] 각별한 유의가 필요하다. 도시 자체의 치안은 좋지만 이들의 생활권이 멕시코 시티인데, 중간 지점에 있는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의 치안이 굉장히 나쁘고 가끔씩 버스강도가 발생하니 주의하도록 하자.

5. 기타


  • 멕시코 시티에서 테오티우아칸으로 가는 진입로는 피라미드 입구 1km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속도로와 자동차전용도로로 이루어져있다. 그만큼 테오티우아칸이 중요한 곳이라는 뜻. 물론 본선은 동쪽으로 계속 진행하여 베라크루스 주의 툭스판까지 간다.
  • 수도권 기반 자전거 라이더들의 성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평지 위주로 되어있는 곳이 테오티우아칸과 파추카 데 소토밖에 없기 때문이며[10], 파추카는 왕복으로 갈 경우 200km에 육박하기 때문에 짧고 굵게 라이딩하고 싶은 사람들이 찾는 곳. 주로 인디오스 베르데스를 지난 뒤 고속도로[11]로 이동하나, 2020년 10월에 파추카로 가는 고속도로상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 지점에서 2명의 라이더가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으로 인해 사망하는 큰 사고가 발생하여 그 길로 가는 라이더들이 일부 줄어들기는 했다. 기사[12] 이들은 보통 텍스코코 데 모라 쪽으로 돌아서 간다. 간혹 시우다드 아스테카나 수도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라이더들도 있지만 그 수는 적다.
  • 워해머의 리자드맨의 도시 중 테오티쿠아는 이 테오티우아칸을 모티브로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해당 도시는 아프리카가 모티브인 사우스랜드에 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6] 현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의 마지막 지배 부족 이름이 현지어로 멕히깐으로 발음되며 이후 마야 및 아즈텍 역시 같은 이름으로 불렸고 여기에서 현대의 멕시코라는 국명이 나왔다 한다.[7] 약 기원전 1000년전쯤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고, 멕시코시 서남부인 Tlalpan 행정구에 위치해있다.[8] 테오티우아칸행은 에카테펙 데 모렐로스 시내방면 광역버스 및 티사유칸행에 비해 표적이 될 확률은 낮지만 그래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있다.[9] 산 후안 데 테오티우아칸, 아콜만 등.[10]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획득고도만 해도 최소 1,000은 우습게 나오는 곳이다.[11] 멕시코도 원래 고속도로의 자전거 진입은 불법이나 불안한 치안과 대체도로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대부분 눈감아준다.[12] 해당 인물은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 사이클팀 소속이기도 하기 때문에 선수 생활 중 사망한 스포츠인 명단에도 등재되어있다. 그의 부친도 함께 작고하였으며, 뺑소니 운전자는 음주 상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