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트만 공작

 

1. 개요
2. 배경
2.1. 일본의 확대파와 확대 반대파의 대립
2.2. 중국 내부의 화평론
3. 전개
3.1. 영국의 중재 시도와 실패
3.2. 독일의 개입
3.3. 일본 군부의 반발
3.4. 난징 함락과 강경해진 일본 제국
3.5. "4억의 피"
3.6. 최후의 협상
3.7. "국민정부의 말살"
3.8. 교섭의 종말
4. 결말
5. 후일담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개요


1937~1938년 중일전쟁 당시 중일 양자를 화해시키고자 한 독일의 중재. 이러한 사실상 최후의 평화 기회를 놓친 중일 양자는 8년에 달하는 기나긴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주중 독일 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이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트라우트만 공작(트라우트만 조정)이라고 불린다.

2. 배경



2.1. 일본의 확대파와 확대 반대파의 대립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지나사변이 터졌을 때 일본군은 두 개의 반응으로 갈라졌다. 이 기회에 중국을 박살내버리자는 확대파와 싸움을 자제해야 한다는 확대 반대파였다. 확대파는 몇달이면 국민당을 끝장내고 장제스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으니 이 기회에 중국의 반일운동을 근절하고 중국을 만주국의 후방기지로 삼자는 입장이었는데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상,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차관, 다나카 신이치 육군성 군무과장, 무토 아키라 참모본부 작전과장 등이 대표인물이었다. 확대 반대파로는 타다 하야오 참모차장, 이시와라 간지 작전부장과 그 휘하의 전쟁지도과, 참모본부의 여러 막료들이었다. 그들은 초기엔 일본군이 근대적 장비를 가졌으므로 유리하겠지만 중국의 광활한 영토 때문에 곧 장기전에 빠져들어 일본군이 병참에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므로 일본의 국력이 바닥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틈을 미국과 소련에게 허용하면 오히려 일본의 패망이 찾아올 것이며 중국을 침략하는 것은 만주국 건설의 기반인 오족협화의 이념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황족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등도 가세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이시와라 간지였지만 결국 사단의 증파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얼마 안있어 중일은 사실상의 전면전에 돌입하고 말았다. 일본군이 초반에 넓은 영토를 점령하면서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선 '대지일격론'이 차차 힘을 얻어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시와라 간지는 1937년 9월 관동군 참모부장으로 옮겨지면서 확대 반대파는 동력을 잃어버렸고 전쟁지도과도 작전과에 흡수되어 전쟁지도반이 되었다. 하지만 타다 하야오가 새로 확대 반대파를 이끌며 전쟁지도반을 중심으로 의견을 개진했는데 여기의 대표적 인물로는 전쟁지도반 반장 다카시마 다쓰히코, 전쟁지도반 막료 이마다 신타로, 호리바 가즈오 등이 있었다. 다카시마 다쓰히코는 중국이 체면을 중시하는 나라이므로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는 치욕을 안겨주면 화평이 더욱 어려워진다면서 난징을 함락하기 전에 평화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직접 난징에 가서 장제스와 협상한다면 좋을 것이란 의견을 개진했다. 이에 대해 전쟁 확대파들은 연약하다는 둥, 군인답지 않다는 둥 갖은 비난을 퍼부어댔다.

2.2. 중국 내부의 화평론


사실 국민정부는 일본과 전면전을 벌여 승산이 없다는 것 자체는 일찍부터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과거 만주사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 등에서 적극적인 대일 항전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규모가 훨씬 커진 중일전쟁 때도 이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저조구락부라 하여 일련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움직임에 앞장섰다.
저조구락부는 루거우차오 사건 발발 직후 일본과의 교섭을 주장하는 인물들이 국민정부의 적극 항전 정책에 반대하여 평화적 해결을 건의하기 위해 조직된 모임으로, 왕징웨이, 장쑤 성 교육국장 저우포하이, 외교부 아시아국장 가오중우,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법제위원 메이쓰핑, 장제스 시종실 제2처 주임 천부레이, 행정원 비서 뤄진창, 베이징 대학 교수 타오시성, 후스 등 왕징웨이파, 장제스파, 일반 지식인을 망라한 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저조구락부란 말 자체가 높은 목소리의 주전파에 대비하여 자신들이 낮은 목소리로 평화를 외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저조구락부는 장제스의 결사항전 주장을 현실을 무시한 가식이며 국민을 전쟁의 참화로 내모는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적절한 시기, 빠른 시기의 강화교섭을 주장했다. 이들은 국제연맹 제소와 장기항전은 교섭을 어렵게 만들 뿐이라고 반대했다. 장제스 역시 일본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다는 점에 동의하였고, 이 때문에 가오중우 등을 일본에 파견하는 등 여러 차례 화평을 시도했는데, 트라우트만 공작이 시작되자 이에 응하여 평화 교섭 가능성을 검토하게 되었다.

3. 전개



3.1. 영국의 중재 시도와 실패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중화민국은 이미 1937년 7월 13일 국제연맹에 1차 성명을 보냈으며 9월 20일 보충성명서를 통해 국제연맹에게 일본의 침략을 제재해줄 것을 청했다. 8월 14일에는 자위항전 성명을 발표함으로 일본의 침략행위가 세계 평화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탄했다. 하지만 앞서 만주사변 때 그랬던 것처럼 열강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장제스는 7월 21일 영국대사 휴게센을 만나 영국의 중재를 요청하였고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휴게센의 긴급전보를 받고 하원에서 "화북에서의 사태가 계속되는 한 영일 친선관계 재건교섭을 개시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며 영일 교섭 중단을 발표했다. 이든은 주영 일본대사 요시다 시게루를 소환하여 "영국 정부는 중일간의 평화해결을 중시하고 있다. 일본은 극동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제해야만 한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영국의 초기 대응은 이 정도였고 독일에 대한 견제로 바빴던 영국은 자신들의 이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선에선 일본과 더 이상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미국도 7월 16일 국무장관 코델 헐의 발언을 통해 평화적 협정을 권고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애초에 전쟁의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에서 중국과 일본이 언급되지 않았다.(...) 장제스는 7월 25일 미국 대사 넬슨 존슨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촉구했으나 헐 국무장관의 8월 12일 2차 성명 역시 중국의 미국 재산과 미국인에게 손해가 없다면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장제스는 7월 26일 독일 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 프랑스 대사 나자르와 회담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유럽에 파견된 특사 쿵샹시는 영국 은행단에서 2천만 파운드의 차관계약을 따내고 영국제 전투기 36대를 구입하는 한편 벨기에, 프랑스와의 신용 차관 조인, 프랑스제 전투기 36대 구입과 이탈리아 병기 구입을 성사시켰으나 일본의 8월 25일 상하이 해안선 봉쇄, 9월 5일 중국 전해안선 봉쇄 선언에 각국은 대중 무기 수출을 취소해버렸고 일본은 각국의 미지근한 태도에 더욱 고무되었다. 일본은 9월 19일 각국 외교기관에게 일방적으로 난징에서 대피하라고 통보하고 9월 20일부터 난징을 공습했으며 미영불의 항의를 받았으나 일본은 열강이 중국문제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여겨 얕잡아 보고 씹었다.(...)
1937년 9월 10일 소집된 99회 국제연맹 이사회는 중화민국의 요구를 수용하여 중일전쟁 안건을 23개국 극동자문위원회에 회부했으며 27일 일본 전투기들의 무차별 총폭격 견책 결의가 통과되었다. 하지만 10월 1일 일본이 중일 분쟁의 국제적 처리를 명백히 거부하고 나서자 10월 6일 국제연맹 총회 결의는 후퇴하여 중국에 대한 정신적인 원조만을(...) 결의했다. 이때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갑자기 강경론으로 선회, 10월 5일 시카고에서의 연설에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전염병에 비유하며 강력히 성토했다. 갑작스러운 미국의 강경론에 영국에선 루스벨트의 실언이라고까지 평가했으나 열강이 차차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열린 9개국 조약국 회의는 독일의 보이콧, 일본의 불참, 이탈리아의 비협조와 미국의 소극적 태도가 겹치면서 이도 저도 아닌 결론을 내리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상하이 전투가 격화되면서 상하이와 화중의 권익이 침해당할 지경에 이르자 영국이 나서게 되었다. 영국은 1937년 9월 주일 영국대사 로버트 크레이기를 통해 일본 외상 히로다 고키에게 일본의 강화 조건을 타진하였고 이에 히로다는 톈진-베이핑 선에서 남쪽으로 비무장 지대 설치, 배일, 매일의 정지, 공동 방공, 화북에 있어서 대외적 기회 균등 등의 조건을 '개인적 의견'으로 대답했다. 영국은 10월 주중 영국대사 휴게센을 통해 위의 조건들을 전달했지만 영미를 중국의 우호국으로 적대시하던 일본 군부가 반발하였고 특히 영국과 조정을 의뢰한 히로다를 매국노로 몰아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소리까지 내놓는 바람에 결국 영국의 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3.2. 독일의 개입


한편 일본 군부 내부의 확대 반대파는 새로운 희망으로 독이일 방공협정을 통해 일본과 친밀해진 독일을 선택했다. 참모본부 2부의 바나키 중좌가 주일 독일 육군무관 오토와 접촉, 주일 독일대사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젠에게 접근했다. 독일 역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선 중일 분쟁의 격화를 막아야 한단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에 부응했다. 바나키 중좌는 오토와 함께 상하이로 가서 트라우트만 대사에게 일본 측 의도를 전달했다. 고노에 내각도 이미 어느 정도 전과를 얻은 상태이니 싸움을 멈춰도 좋다고 생각하여 그 후 10월 21일 일본 외상 히로타 고키가 독일 대사 디르크젠을 소환하여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중재에 나서주길 희망한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전달하고 11월 2일 디르크젠에게 평화조건을 제시했다.
1. 내몽고에 외몽고와 유사한 자치정부를 세운다.
2. 화북의 비무장 지역을 평진 철로 이남으로까지 확대한다. 만일 평화가 성립되면 그때는 화북의 행정권은 모두 중국 정부에 속하나 행정장관에는 친일적인 인물을 희망한다. 만일 즉시 평화조약이 체결되지 않고 화북에 신정권이 생긴 때는 그것을 존속시킨다. 단, 현재 일본에게 그러한 의사는 없다.
3. 상하이의 정전 구역을 더욱 확대하고 국제경찰에 의해 관리한다.
4. 배일을 정지하고 1935년의 요구에 따라 교과서 개정 등을 실시한다.
5. 공동 방공을 한다.
6.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를 경감한다.
7. 외국의 재중 권리를 존중한다.[1]
이러한 조건은 트라우트만 대사에게 전해졌고 트라우트만이 11월 5일에 장제스에 이와 같은 조건들을 전달하면서 본격적인 트라우트만 공작이 시작되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나름 온건하다고 여겨지는 조건들이었지만 난데없이 침략당한 중국에게는 있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연일 악화되는 지경인지라 강경파와 온건파가 모두 이를 받아들이자고 했으나 장제스는 수리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거부하고 트라우트만 대사에게 거부의 뜻과 중국의 원칙을 전달했다. 트라우트만은 이에 극비리에 통지했다고 하는 수속만 취하기로 했다. 11월 7일 디르크젠 대사로부터 이러한 결과를 전해들은 히로다 고키는 자신들의 요구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차가운 말을 했다. 트라우트만은 본국에 난징 정부가 타협을 반대한다면서 일본인에 의한 평화는 가망이 없으니 영미의 조정을 제안하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9개국 조약국 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고 옌시산이 일본군에 밀려 타이위안을 내주는 한편 항저우 상륙작전으로 상하이마저 함락됨으로 장제스는 일본과 다시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유리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히로다 고키 외상을 내세워 독일의 중재를 다시 재촉했다. 트라우트만 대사는 11월 28일 우한으로 돌아온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 11월 29일에 외교부장 왕충후이와 접촉하여 장제스의 2차 회담 약속을 잡아냈다.

3.3. 일본 군부의 반발


한편 주독 중국대사 정대방은 1937년 12월 1일 독일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로부터 '중국의 이익을 생각할 때, 일본의 평화 건의는 거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시간이 늦어지면 중국의 국가 해체의 위험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는 권고를 받고 이를 보고했다. 12월 2일 외교부 차장 서모로부터 이러한 상황을 보고받은 장제스는 군사장관 회의를 소집, 바이충시, 쉬융창, 구주퉁, 탕성즈로부터 교섭에 응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들은 끝에 독일의 조정을 거부하지만은 않으며, 화북의 정권, 즉 기찰정무위원회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그날 오후 트라우트만 대사와의 회담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트라우트만 대사에게 4가지 사항을 강조했다.
1. 중국 정부는 독일이 제출한 조건을 담판의 기초로 삼고 싶으나 극히 중요한 조건으로서 1. 평화를 회복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독일의 조정을 통해 협력한다, 2. 화북에 있어서의 중국의 주권과 행정권에서 변화를 가하지 않는다. 는 2가지 사항을 전제한다.
2. 적대 행동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떠한 담판도 불가능하다. 만일 독일의 히틀러 총통이 중국과 일본에 대해 적대행위정지를 제의한다면 중국은 이를 받아들인다.
3. 담판이 매듭지어지기 전까지는 일절 공개하지 않는다.
4. 제출된 조건은 담판의 기초로 삼을 수는 있으나, 최후통첩과 같은 형태로 제출된 개혁 불가능한 요구로 간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화북에 있어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한다면 일본이 요구한 사안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트라우트만은 이러한 조건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돌아갔다.
12월 7일 디르크젠 대사는 본국의 훈령에 기초하여 11월 2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경과에 대해 적은 메모를 히로다 외상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뀐 후였다. 이러한 공작들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국민정부의 무선을 모조리 가로채고 있던 중지나파견군 정보부는 트라우트만 공작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크게 놀라 이를 참모본부 지나과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알게 된 육군성과 참모본부 확대파가 격노했다. 확대파는 군사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장제스와 화해할 이유가 없다고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분노했다. 이미 대본영의 저지도 무시하고 일선 부대는 폭악한 지나를 응징하자 운운하며 난징으로 몰려들고 있었고 난징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화평에 관심을 보이던 고노에 내각마저도 11월 2일의 조건이 너무 약하다는 반응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히로타 고키 외상이 "일본 병사들의 희생을 생각한다면 이런 식의 화평은 곤란하다."라는 말을 지껄였고 고노에 수상도 패배자 주제에 조건을 붙이는 것이 건방지다 운운하며 군부 내부의 화평파를 질책하였으며 스에쓰구 내무상도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빈정댔고 스기야마 육군상도 화평에 반대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11월 2일의 조건조차도 뛰어넘는 고압적인 모습으로 변하기에 이르렀다.

3.4. 난징 함락과 강경해진 일본 제국


결국 1937년 12월 12일 밤의 공세에서 난징이 무너졌고 13일에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일본 전역이 축제 분위기에 빠졌고 확대파들은 좋아서 날뛰었다. 12월 14일 난징의 함락에 흥분한 군중이 황거에서 만세삼창을 외치고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몰려들어 환호하자 일본 육군 막료들은 이에 고무되어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어 군중의 환호에 화답했다. 의기양양해진 고노에 수상은 12월 14일의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남경 함락의 보고를 접하고 우리들은 당연한 승리에 기뻐하기 전에 동문동종인 5억 민중의 입장에 서서 구제해야 할 그들의 미망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 국민정부는 외교적으로도 실력행사에서도 배일의 극한에 달해 있다. 게다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고 수도를 버리고 정부를 분산시켜 바야흐로 일개 지방 군벌로 전락해버린 지금, 여전히 터럭만큼도 반성의 기미가 없음이 분명함에 이르러서는 우리도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없다. (...)"

하지만 '대승도의'란 표어를 내걸고 화평에 집중하던 전쟁지도반은 오히려 불안에 빠졌다. 확대파의 위협에 아예 책상에 장전된 권총까지 가져다놓고 화평을 위해 노력하던 호리바 가즈오 등의 막료들은 발코니에 나와서도 침울해하며 야스히토 친왕과 국민의 환호성이야 말로 전쟁을 멈추어달라는 고통의 목소리라며 트라우트만 공작에 매달리게 되었다.
바로 그날인 12월 14일부터 대본영정부연락회의가 이틀간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 스에쓰구 노부마사 내무상, 육군상 스기야마 하지메, 대장상 가야 등이 참석했다. 전쟁지도반 막료들이 각성 차관들을 설득하며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면 안된다고 외쳤으나 무소용이었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난징 함락에 고무된 확대파와 고노에 내각은 매우 강경하게 돌변, 여러 조건들을 마구 붙여댔고 결국 4개 항목이 추가되기에 이르렀다. 12월 21일에 완성된 화평조건에서 추가된 항목들은 다음과 같다.
1. 중국은 용공, 항일, 반만 정책을 폐기하고 일만 양국의 방공정책에 협조할 것.
2. 필요한 지역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고 또한 그 지방에 각각 특수기구를 설치할 것.
3. 일만중 3국 간에 밀접한 경제 협정을 체결할 것.
4. 중국은 일본에 대해 필요한 배상을 할 것.
이는 중국 경제와 정치의 심장부를 사실상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12월 22일에 위의 조건들을 전달받은 디르크젠 대사는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중국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란 의견을 피력했으나 일본 제국의 강경파들은 완고했다. 그들은 오히려 "종래와 완전히 다른 견지에서 사변에 대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리라는 점을 밝혀둔다."는 협박마저 첨부했다. 12월 26일 이러한 조건들을 전달받은 행정 부원장 쿵샹시는 경악하여 다음날인 12월 27일 "일본이 제출한 조건에는 생각해낼만한 모든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은 10개의 특수 정권과 10개의 비군사구라도 원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은 장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멸망을 초래할 것이다."고 거부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혹한 조건조차도 받아들이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12월 27일 국방 회의에서 화평론이 제기되었으나 12월 28일 장제스는 일본의 조건을 묵살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 1938년 1월 1일 국민정부는 기구개혁을 실시, 장제스가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항일전쟁을 지도하는 장기 항전 체제를 완성했다. 그러면서도 중화민국은 이 4가지 조건에 세부 내용을 알 수 없다고 문의하면서 화평에 대한 희망을 아주 놓지는 않았는데...

3.5. "4억의 피"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트라우트만 대사가 비공식적으로 전달한 일본 정부가 위의 4개 조항에 덧붙인 세목은 중국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었다.
1. 중국이 만주국을 승인하고 그 위에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배제하는 증거를 보인다. 단 방공협정에 대한 가입이나 중소 불가침조약의 폐기를 중국에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2. 비무장 지대란 내몽고, 화북, 상하이 부근의 이미 일본이 점령한 지역의 일부(시가지~소택에 이르는 일대)의 3지역이다. 특수기구란 내몽고에 대해 외몽고와 동일한 국제적 지위를 가지는 자치정부를 말하는 것이며 상하이에는 조계 외의 특수정권을 만든다.[2]
3. 경제협정이란 관세와 상업 업무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4. 배상은 일부는 전비의 배상, 일부는 일본 재산의 손실에 대한 배상이다. 또한 일본군의 점령 경비도 중국측이 부담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일본 참모본부는 중국 대표가 일본에 와서 화의를 행하고 상당한 보증을 얻은 후에야 정전을 고려할 수 있다 운운했는데 중화민국은 중화민족 4억의 피로 국가를 수호하는 길 밖에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장제스는 일본의 요구에 격노했다, 그는 1938년 1월 2일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일본이 내세운 조건은 한 국가로서의 우리나라를 멸절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굴복해서 멸망당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벌이다 패배해서 멸망하는 편이 낫겠다."


3.6. 최후의 협상


일본은 1937년 말을 협상 기한으로 정하고 기다렸지만 애초에 중국과 협상하려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호리바 가즈오는 후일 "외무성의 강화 교섭이 지극히 저조하고 사무적 절충으로 떨어져 일본과 중국의 제휴에 관한 근본이념을 아예 다루지 않은 것이 심히 불만스럽다."고 자신의 저서인 중일전쟁 지도사에 서술했다. 일본은 기한을 1월 5일로 연장했으나 중국은 일본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응대하지 않았고 이에 일본은 1월 15일까지 최종적으로 연장한 후 1월 12일 디르크젠 대사에게 15일까지 답변이 없으면 일본은 새로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전달했다. 사실 고노에 내각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육군 강경파를 제어할 수 없으며, 심한 경우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 이 때문에 초반에 화평을 고려했던 고노에 내각이 난데없이 군부의 확대 반대파를 질책하며 전쟁놀음에 나선 것이다. 여기에 확대파들 중에는 교섭 기한에 대해 떠들어대며 중국은 교섭할 의사가 없으니 중국 전토를 이참에 점령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는 미치광이들도 있었다. 강경파의 일원 사토 겐료는 1953년에 자신들에게 인내심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당시 일본 군부의 강경파는 중화민국의 항전 의사를 분쇄하는 것만이 화평을 찾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1월 9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지나사변 처리 근본방침>이라는 문서를 내각에 보내고 다시 히로히토에게 보고했다. 같은날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는 상하이에서 "국민정부에게는 화평 교섭에 응할 의사가 없다. 현재의 정세에 있어서는 국민정부를 압박하는 것과 점령지역에 신정권을 수립하는 것 2가지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국민정부를 중국의 중앙정부로는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설명을 발표했고 장제스와의 협상을 촉구하는 호리바 가즈오 등에게 육군 강경파는 국민정부는 이미 일개 지방정권에 불과하며 화평을 구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장제스 정권을 부인해야 한다고 보는 시각은 차차 참모본부와 육군성에 압도적인 의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월 10일에는 고노에가 천황에게 천황은 '결국 조용히, 친히 참석하시는 정도로만'의 어전회의 개최를 청하여 1월 11일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확대 반대파와 독일의 영향력에 제재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어전회의가 열리기 직전 히라누마 기이치로 추밀원 의장이 지나사변 처리 근본방침에 관해 제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임시회의가 열렸다. 각료들이 히라누마 의장에 질문에 대답한 후 오후 2시에 25년 만에 어전회의가 열렸다. 히로타 고키 외상이 트라우트만 공작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으므로 '중국과 종전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전쟁을 통한 해결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은 "국민당 정권을 완전히 패배시켰다고 간주하는 정책은, 신중을 기해 지금은 잠시 보류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회의에서 합의된 바를 따랐다. 어전회의는 국민당 정부가 일본이 제출한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일본은 국민당 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더 순종적인' 다른 정권에 화평을 제안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히로히토는 70분 간의 회의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군복차림으로 재가를 내렸다. 허버트 빅스는 그가 중립을 지키는 척 하면서 강경한 군사정책을 지지했다고 비판했다.
1월 12일 트라우트만 대사가 왕충후이를 내방하여 일본에 대한 회답이 결정되었는지를 문의하였고 중화민국은 세목이 비공식적으로 전달되었음을 지적하며 일본정부가 세목을 정식으로 통지하면 회답하겠다고 했으나 트라우트만은 일본은 세목을 분명히 하지 않으리라고 대답했다. 일단 큰 틀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한 다음에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자기 입맛대로 끼워맞추겠다는 일본의 술수였던 것이다. 트라우트만은 중국에 소위 도쿄 정보라고 하는 것을 전했다.
1. 일본 군부는 중국 측이 신속히 명백한 회답을 제시하도록 주장하고 있으며 만일 중국의 회답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일 경우 온건파는 급진파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2. 대중선전, 국민정부의 부인, 베이핑 괴뢰정권(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군사행동의 계속 등의 문제에 대해 어전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1월 13일에 트라우트만과 2차례 회담을 더 가진 왕충후이는 1차 회담에서 일본 외무차관 호리우치가 15일까지 회답하지 않으면 자유행동을 유보할 수 없다는 협박을 했다는 것을 전해들었으며 오후 4시 20분의 2차 회담에서 중국 측의 명백한 태도를 전했다.

"검토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바꾸어진 조건은 너무나도 광범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새로이 제출된 조건의 성질과 내용을 알고 싶다. 상세히 검토한 후에 다시 결정한다."

트라우트만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 통지가 회답인가?"라고 물었고 왕충후이는 "우리는 4가지 조건의 내용을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트라우트만이 "일본이 이를 Evasive answer(회피적인 대답)으로 보면 어쩌겠는가?"라고 되묻자 왕충후이는 "만일 우리가 회피할 생각이라면 다시금 내용이나 성질을 묻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시 답했다.

3.7. "국민정부의 말살"


중국 측의 답변을 전해들은 히로타 고키는 자신들은 이미 중국측에 그 내용을 다 전했으며 이것은 중국에 성의가 없는 증거라고 뻔뻔하게도 날뛰었다. 전쟁지도반 막료들은 마지막까지 화평이냐 전쟁이냐 결정하는 것을 미뤄달라고 로비했다. 회답기한인 1월 15일이 오자 대본영 정부연락회의가 열렸고 전쟁지도반은 타다 하야오에게 최후 요망 사항을 전했다. 먼저 반장인 다카시마가 "쓸데없이 기일에 구애받을 것이 아니라 장기전이 왜 불리한지를 밝혀야 한다. 오늘 연락회의에서는 결론을 보류하고 중국 측의 태도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고 호리바가 울먹이며 "고노에 정부는 지금까지도 장기전이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사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아무래도 장제스 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며 그것은 연락회의에서 결정할 것이 아니라 페하께서 참석하시는 어전 회의에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라고 했다. 타다 하야오도 이를 인정했다. 하지만 오전 10시에 수상 관저에서 열린 회의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히로타가 교섭 결렬을 외쳤고 스기야마가 동조했다. 타다는 끝까지 맞섰지만 스기야마는 타다를 비웃었고 해군상 요나이 미쓰마사도 "교섭이 가망성이 있는지 여부는 외무성이 판단한다. 우리는 그 판단을 따라야 한다."며 타다를 공격했다. 이 시기 해군의 주장은 무척이나 강경해진 상황으로 국민정부를 부정한다는 방침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통수부가 내각을 신용하지 않으면 내각을 총사직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까지 나왔다. 이에 타다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메이지 천황께서 일찍이 짐에게 사직이란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사직한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점심시간이 되어 휴식을 취하게 되자 타다는 참모본부로 돌아와 정보부장 혼마 마사하루와 작전과장 가와베 도라시로, 그리고 전쟁지도반 주요 막료들을 모았고 지치노부야 친왕도 나타났다. 타다의 보고에 참석자들은 모두 좌절했으나 결론 보류를 이끌어내어 이를 어전회의까지 가져간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오후 회의에서 타다는 중국 측의 대답을 2~3일 기다려보자고 했으나 히로타, 스기야마, 고노에, 요나이가 모두 중국 측에는 화평 의사가 없다고 타다를 공격했고 고노에는 1월 20일 의회가 개원하니 그때까지 결말을 짓자고 했다. 타다가 저녁까지도 의견을 굽히지 않자 육군 내부에는 타다 하나 때문에 내각이 붕괴될 순 없다며 타다를 경질하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타다는 오후 6시에 통수부로서 불만이지만 정부에 일임한다는 안을 내놓았고 그것으로 연락회의가 끝났다. 돌아온 타다에게 다카시마와 호리바가 통수부가 동의하지 않지만 정부에 일임하기로 했다는 문서를 천황에게 상주하자고 권했으나 이미 고노에가 정부 방침을 천황에게 상주한 후였다. 그것으로 일본은 중화민국과의 교섭을 끝냈다,
1월 15일 간인노미야 고토히토가 천황을 찾아가 고노에 총리가 발표할 국민정부 말살 성명이 도착하기 전에 상주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날 오후 9시 30분 고토히토는 히로히토를 찾아가 국민정부 말살 방침에 대해 반대했으나 이에 히로히토는 "남방에 중국의 항일 군대가 남아 있는데 일본군은 이를 어떻게 할 셈인가?"라고 물었다. 히로히토는 '되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고문을 이용하여 화북에서 간접적으로 괴뢰정권을 세워 지지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인지, 육군이 중국의 게릴라 전술에 어떤 대책을 계획하는 것인지, 중국측 답변에 어떠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도 질의했다. 즉 질의의 방식을 빌려 확대 반대파를 비판한 것이었다. 천황이 확대 반대파에 냉정한 반응을 보이면서 확대 반대파의 목소리는 더욱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1938년 1월 16일 고노에 내각은 정부 성명을 발표, 국민 정부에 반성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조금의 반성의 기미가 없고 오히려 점점 더 항전의 의사를 보이고 있으니 "이에 제국 정부는 이후 국민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1차 고노에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성명에 디르크젠 대사는 히로타를 만나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향후 교섭의 길이 끊긴 책임은 일본이 져야 할 것이다."고 했다. 전쟁지도반 막료들은 모두 통곡했다. 지치노부야가 천황에게 최후의 상주를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일본은 1월 18일 보충설명을 달았다.

"상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부인한다고 하는 것보다 강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국제법으로 말하면 국민정부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신정권을 승인하면 되는 것이나, 정식 승인할 수 있는 신정권이 발족되어 있지 않으므로, 특히 국제법상 새로운 예를 만들어 국민정부를 부인하며 '''이를 말살하는 것이다.'''"


3.8. 교섭의 종말


국민정부는 고노에 성명에 대해 "대량의 육해공군에 의해 중국영토를 공격하고 중국인민을 도살한 것은 일본이다. 중국은 하는 수 없이 자위에 나서 침략과 폭력에 저항했으나 수개월 동안 중국은 아직 한명의 군사도 일본의 영토를 침입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을 규탄하며 입장을 발표했다.

"중국의 평화에 대한 바램은 시종여일 변함이 없다. 중국정부는 어떠한 상황 아래 놓이더라도 전력을 다해 영토, 주권, 행정의 완비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한 중국은 어떠한 평화회복도 받아들일 수 없다. 동시에 일본군 점령지역 내에 임시로 정권을 사칭하는 비합법조직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내 대외를 불문하고 모두 절대 무효하다."

하지만 일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주중 일본 대사 가와고에를 소환했다. 주일 중국대사 쉬스잉(허세영)도 귀국하였고 28일에 가와고에가 귀국함으로 드디어 공식적 대화 루트가 차단되고 중일 양국의 운명을 건 전면전이 확정되고 말았다. 일본은 1월 24일 다시 오만방자한 성명을 발표했다.
1. 어떠한 정보가 있든, 국민정부와는 교섭하지 않는다.
2. '''중국에 대한 외국의 군사원조를 막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선전포고할 수 있다.'''
3. 일본은 화북의 신정권에 대해 감호인의 지위에 있는다.
4. 제3자에 의한 화평조정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2월 5일 장제스는 외모에 대한 저항과 민족의 부흥이란 연설을 신문에 발표했는데 이는 1934년 7월 루산의 군관 훈련단에서 했던 연설로 일본의 전면적 침략대책에 대한 상세한 방비 대책과 일본이 세계대전 속에서 반드시 패할 것이란 예측을 담은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의 결사항전의 의지를 대외에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 결말


장제스는 일본의 국민정부 말살 성명 이후에도 가오중우를 홍콩에 파견하여 1938년 1월에 창설된 국민당의 선전기구인 예문연구회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교섭에 나서려 했고 일본 육군성 참모본부 지나과장 가게사 사다아키 등이 가오중우를 일본의 여러 장군들에게 소개하면서 호응하긴 했으나 장제스는 반성 운운하는 일본의 모습에 그다지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1938년 6월에는 이탈리아의 중재로 또 교섭이 있었으나 일본이 장제스의 하야를 완고히 주장하고 왕징웨이를 비롯한 친일적인 인물을 중국의 수뇌로 세울 것을 고집함으로 1938년 7월에 중단되었다. 왕징웨이 등은 자신이 장제스를 대신할 수 없다고 인정하였으나 장제스를 배제하지 않고는 일본과의 화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결국 독자적인 일본과의 강화 시도에 나서게 된다. 이후 나치 독일은 중국과 사실상 단교,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 등에게 철수명령을 내린다.
한편 일본은 그간 경고되어 오던 장기전이 계속되자 곳곳에 괴뢰정권을 세우는 것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일본이 국민정부를 지방군벌로 폄하한 것과 달리 국민정부는 굳건했으며, 수도를 충칭으로 옮겨 항전을 지속했다. 일본은 1938년 우한 함락으로 좌절이 심해진 왕징웨이를 포섭, 왕징웨이 정권을 세워 장제스 정부를 붕괴시키려 했지만 처참한 실패만을 맛보았다. 이에 일본은 동 공작이라 불리는 최후의 외교공작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결국 이는 1945년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끝이 났다. 1945년까지 최소 1400만에 달하는 중국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5. 후일담


이후 호리바 가즈오는 전쟁이 끝나자 자신이 주둔하고 있던 조선에서 황급히 돌아와 중일 교섭에 관련된 주요 기밀문서들을 빼돌렸고 이를 바탕으로 중일전쟁 지도사를 편찬했는데 전쟁 당시엔 유약한 군인으로 질타받던 그는 전쟁 후에는 명참모로 평가가 격상되었다. 그는 1953년에 병사했다.[3]
다카시마 다쓰히코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한다.

6. 참고문헌


  •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글항아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일전쟁기 周佛海를 통해본 친일협력, 김정현, 아시아문화연구 11집,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 조우 포하이(周佛海)의 일기를 중심으로 본 항일전쟁시기 대일합작(對日合作) 문제에 대한 한 검토, 황동연, 코키토 62집,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고려대학교 역사학연구소.

7. 관련문서



[1] 쇼와 육군에는 만주국 승인도 조건에 있었다 한다. 요구가 나온 시기에 대해서는 좀 다르지만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과 권성욱의 중일전쟁에서도 확인되는 부분. 이후 일본이 추가한 세목 등에서 중화민국에게 만주국과의 제휴, 교류 등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 만주국 승인을 요구했다는 것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듯 하다.[2] 화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3] 그는 지나사변에 결사반대했지만 만주사변은 매우 고평가했다. 그도 그럴게, 앞서서 지나사변 확전을 격렬하게 반대하다가 쫓겨나간 이시와라 작전부장이나 참모본부의 평화공작을 주도한 타다 참모차장 등은 모두 만주국 공작에 관여한 이른바 '만주파' 출신으로 1936년을 전후해서 참모본부를 손에 쥐락펴락하고 있었는데, 호리바 참모는 만주사변에 관여한 적은 없으나 참모본부의 일원으로서 이시와라의 측근으로 만주파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만주파가 만주침략에 찬사를 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