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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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45대 내각총리대신
일본국 제48-51대 내각총리대신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 | Yoshida Shigeru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78년 9월 22일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67년 10월 20일 (89세)
가나가와현 나카군 오이소마치
'''재임기간'''
제45대 내각총리대신[1]
1946년 5월 22일 ~ 1947년 5월 24일
제48대 내각총리대신
1948년 10월 15일 ~ 1949년 2월 16일
제49대 내각총리대신[2]
1949년 2월 16일 ~ 1952년 10월 30일[3]
제50대 내각총리대신
1952년 10월 30일 ~ 1953년 5월 21일
제51대 내각총리대신
195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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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전처 요시다 유키코 사별
후처 요시다 키요코
'''자녀'''
장남 요시다 켄이치
장녀 요시다 사쿠라코
차남 요시다 마사오
차녀 요시다 에코
삼녀 아소 가즈코
'''친인척'''
처조부 오쿠보 도시미치
처외조부 미시마 미치쓰네
친부 다케우치 츠나
양부 요시다 겐조
장인 마키노 노부아키
친형 다케우치 메이타로[24]
사위 아소 다카키치
외손자 아소 다로
외손녀 노부코 비
외손녀부 토모히토 친왕
외증손녀 아키코 공주
외증손녀 요코 공주
'''신체'''
155cm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셉 토마스 모어)[25]
'''학력'''
가쿠슈인 고등과[26] (졸업)
가쿠슈인 대학과[27] (수료)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정당'''

'''지역구'''
고치 전현구
'''의원 선수'''
'''7''' (중)
'''의원 대수'''
23, 24, 25, 26, 27, 28, 29
'''약력'''
외무성 관료
제12대 외무차관
제35대 내각서기관장
제73-75·78-78대 외무대신
귀족원 의원
제2대 종전연락중앙사무국 총재
제2대 제1복원대신[28]
제2대 제2복원대신
제5대 농림수산대신
제2대 일본자유당 총무회장
제2대 일본자유당 총재
제45·48-51대 내각총리대신
중의원 의원
초대 민주자유당 총재
초대 자유당 총재
초대 황학관대학 총장

1. 개요
2. 생애
2.1. 정치 인생
2.2. 총리 시절
2.3. "이제 일본은 살았다"(?)
2.4. 말년
2.5. 요시다 학교(吉田学校)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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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일본 내각총리대신. '''전후(戰後) 일본의 재건, 국가전략 노선을 기초한 주인공'''이다.[4]
당대에 넘버 원 맨(No.1 Man), 원맨재상(ワンマン宰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사실 넘버 원 맨보다는 '''자기 혼자만 안다는 의미로의 원 맨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성향의 원 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참고로 총리 당시 정당이 55년 이후에 생긴 자민당이 아니라 자유당이다. 자민당에는 57년에 입당했다.

2. 생애



2.1. 정치 인생


학생 시절의 요시다 시게루
도쿄 출생. 그의 생부 다케우치 츠나는 토사 번 출신으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심복이었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상인 요시다[5]에게 입양되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갔는데, 전범으로 사형당한 히로타 고키 전 총리와는 같은 해에 입성한 동기 사이라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타케조선총독을 지낼 당시 비서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으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도 참여했다.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 당시 일본에서 적성국가로 꼽혔던 영국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쪽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 것, 그리고 시게루 본인의 유달리 튀는 성품 때문에, 직업 외교관의 정년이 다 되도록 지도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1939년 퇴직하였다.[6]
이즈음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야쿠자 오야붕이나 마피아 보스 같은 모습이다. 세력을 키운 이후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은밀히 반전 운동을 했는데, 이게 덜미가 잡혀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오쿠보 도시미치 초대 내무경의 차남인 마키노 노부아키 백작의 사위라는 빵빵한 처가 배경 덕에 일찍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빵빵한 가계는 아소 다로(요시다의 외손자)까지 이어진다. 어쨌든 이 반전 경력으로 전후 미군정으로부터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전후 첫 내각인 히가시쿠니 내각의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GHQ의 눈 밖에 나서 사임에 몰리자,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후원을 등에 업은 요시다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히가시쿠니 내각의 사퇴 이후에도 계속 유임했다.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들어 일본 총리직을 수행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외무대신 시절
하토야마 이치로와의 관계에 대해선 애매한 부분이 많다. 자유당 총재로 있던 하토야마 이치로가 과거 전력으로 연합군에 의해 추방당하자 후임을 맡겼던 사람이 요시다인데, 이때 요시다는 하토야마와 '''3가지 약속[7]'''을 했다고 하고, 하토야마는 3가지 약속에서 하나가 늘어난 '''4가지 약속'''[8]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2. 총리 시절


45대 총리 취임 후

1946년에 발족된 그의 첫 내각은 노조의 잇따른 파업으로 상당히 무능력한 내각으로 존재했다. 1946년 말에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재일 조선인총리 관저까지 습격한 사건까지 있었다.[9] 연합군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 1947년의 총선에서 그가 속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 내려앉으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본 위키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가 '''헌정의 상도'''[10]를 지켰다고 추켜세우지만, 아시다 히토시와 별로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보수연립을 무산시킨데다 자유당의 애매한 의석 수로 얼마 가지 못할 정권을 유지시키느니 요시다는 차라리 사퇴하고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확실하게 들어 맞았다.''' 이후 가타야마 데츠의 집권 시기에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집권하자 지속적인 태클과 클레임을 걸어서 아시다 히토시의 민주당에서 나온 탈당파들과 다시 합당을 하면서 민주자유당으로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11]
1947년, 현역 시절.
1948년 다시 집권하자마자 의원 수 불리기의 목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른 결과, 이전 다수당이었던 일본사회당과 민주당[12]을 완전히 격파, 절대적인 과반수를 차지하며 권력을 무난히 획득했다. 당시 요시다는 GHQ민정국과 사사건건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는 GHQ에게도 당당한 '애국자 요시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선거압승의 원동력이 되었다.[13] 특히 이때 요시다가 발탁한 관료, 경제인, 정치신인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요시다파가 일거에 몸집을 불렸고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이후 나는 전설이다를 시전하며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고, 그가 발탁한 관료들은 훗날 총리가 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이 이때 활약한 그의 수족들.
이때 이케다 하야토 당시 대장대신의 개드립이 대폭발했는데,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해당 발언은 이것과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걸 '''신문들이 거두 절미하고 큰 제목으로 써갈기는 바람에...''' 이 외에도 여러 악재가 겹쳐 지지도가 곤두박질쳤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으로 반등.
쇼와 덴노는 본인의 전쟁책임을 인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태평양 전쟁 자체에 대해 반성하기는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기념 행사의 발언에서 쇼와 덴노가 "나는 아무래도 반성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군도, 정부도, 국민도 모두가 하극상이나 군부의 전횡을 놓친 것을 반성해 나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넣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천황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책임을 인정할 위험이 있다.(원문 : 戦争を御始めになつた責任があるといはれる危険がある) 이제 전쟁이라든가, 패전이라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今日は最早戦争とか敗戦とかいふ事はいつて頂きたくない気がする)"라고 반대했다.# #

2.3. "이제 일본은 살았다"(?)


이때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유명한 말 '''"이제 일본은 살았다!"'''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これぞ天佑!コレ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한국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14] 이러한 점 때문에 한국의 일각에서는 요시다를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보는 등 상당히 좋지 않게 보는 계기가 된다.
다만 발언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오간다. '''존재''' 측은 "일본에서도 위 발언이 전해지고 있다"를 증거로 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 회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로,[15] '''반대''' 측에서는 "요시다 시게루는 전쟁기간 내내 한반도가 공산화될 경우 그 영향으로 가뜩이나 당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들이 비등했던 일본이 공산화될 가능성을 걱정했으며, 또한 한반도가 무너지면 일본이 동북아시아공산주의 최전선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우려했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이것이 전면전인지, 국지전인지 어떤 규모로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정보가 거의 없었고, 미국 정부한국 정부 당국도 정확한 사태파악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하여 미국 개입도 대단히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일본/경제 회복을 예측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정말로 저런 말을 했다고 해도, 패전해서 몰락해 있는 일본의 경제력을 회복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야 하는 것은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요시다는 한국인도 아니고 당시 한국은 일본에게 별로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는데 요시다가 한국에서 전쟁났다는 소식 듣고 슬퍼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공산세력 내려올까봐 걱정하는 정도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한국"의 전쟁에 가질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시각이다.
더불어 한국전쟁이 휴전될 분위기가 되자 이걸 안타까워했다는 말 또한 '''진위논쟁'''이 상당하다. '''존재''' 측은 '일설'에 따르면 "전쟁을 더 이끌 수 없는지 관료들과 회의도 가졌던 적도 있었다, 이유는 휴전이 자신의 인기 하락에 원인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로, '''반대''' 측에서는 "일본의 당시 상황상 패전국으로서 일본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던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당장 군대도 없는데."를 내세운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일본에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비를 갖춘 뒤 한국에 파병하라'는, 한마디로 '일본의 재무장과 한국에대한 군사적 개입'(…)을 요구를 해오는데, 요시다 시게루는 "그랬다가는 일본/경제가 파탄난다"며 끝까지 거부 입장을 고수했다. 이는 당시 일본에 만연해 있던 전쟁에 대한 공포에 기인한다. 한국전쟁 중간에는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현직 일본 총리로써 최초로 방문하게 된다.#
하여튼 "이제 일본은 살았다아!" 때문이었는지 한국에선 얄밉고 교활한 기회주의자 취급을 받으며 이미지도 간신배 이상의 취급이다.

2.4. 말년


1954년 10월 27일 영국에서.[16]
어쨌거나 과연 한국전쟁이 끝나자 요시다의 운도 다해가기 시작했다. 대(對)일본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을 통해 미군정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일본국이 성립된 이후 요시다는 계속 총리 자리를 요구하는 하토야마의 세력을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해 계속 의회를 해산했다.[17]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유당의 의석이 쪽박 모드로 향해 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업계에 유리하도록 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고 중의원에서 법안을 처리해준 이른바 조선의옥 스캔들로 붙잡힌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을 위해 법무상을 통한 '''지휘권 발동'''이라는 무리수를 저지르자 요시다를 향한 정계의 반응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결국 버티지 못한 요시다는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기 직전에 사임했다. 그래도 집권 기간 '7년 2개월(86개월)'으로 장수했다. 전후 일본에서 재임 기간이 아베 신조, 사토 에이사쿠 다음으로 긴 장수 총리.
1967년 10월의 모습
89살까지 장수하여 자신과 대립하던 하토야마, 기시 정권의 탄생은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적 제자들인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가 집권하는것까지 모두 보았다.
1967년, 요시다는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 동안 자신이 가톨릭 신자였음을 숨겼으며 자신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영세를 받았다. 결국 요시다는 같은 해 10월 20일,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도쿄에 있는 성마리아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2.5. 요시다 학교(吉田学校)


원래 당내에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데다 기존의 당인(党人)파 정치가들을 경멸했던 요시다는 관료, 젊은 국회의원, 경제계등에서 유망한자를 뽑아 자신의 측근세력을 구축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요시다학교(吉田学校)이다.
이들은 요시다가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요시다를 따랐으며 이는 요시다가 정계은퇴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탕이 되었다 . 이들 중 대표적 인물들이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등이며 그외에도 다수의 중의원 의장 및 정계의 중진들을 배출하며 전후 일본정치를 주도하였기에 요시다학교는 곧 보수본류(保守本流)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3. 대중매체에서


2020년 TV Tokyo에서 스페셜 드라마 <미국에 지지 않은 남자 ~바보 총리 요시다 시게루~>에서 쇼후쿠테 츠루베가 연기했다. 후처 키요코는 마츠시마 나나코.

4. 기타


  • 역대 일본 총리들 중 재임 횟수가 5회로 가장 많다. 45대 총리로 1차 집권했고, 이후 48대부터 51대까지 4대수를 연임하여 연임 횟수도 역대 총리들 중 가장 많다. 아니, 애초에 요시다 총리를 제외하면 3회 초과[18] 연임 총리는 1명도 없다. 최장 집권 총리인 아베 신조도 총 재임 횟수는 90, 96-98대로 4회, 연임도 3회라 요시다 총리에 못 미친다.
  • 노회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뛰어났는데, 한 번은 선거 유세 중에 외투를 입고 유세에 나섰다. 한 시민이 요시다에게 "그 외투(外套, がいとう 가이토-)를 당장 벗으시오!"라고 외치자 요시다는 "여러분! 이게 바로 가두(街頭, がいとう 가이토-)연설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본식 말장난(고로아와세)이었다.
딸인 가즈코(和子)[19]와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외손자 아소 다로에게도 좋은 외할아버지였다나... 그리고 외증손녀 2명이 여왕[20]이다.(...) 외손녀 아소 노부코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했기 때문. 토모히토 친왕과 노부코 비는 두 딸 아키코 여왕(1981)과 요코 여왕(1983)을 낳았다. 참고로 아키코 여왕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미술사)이기도 하다.
잘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 일본 총리가 되기 전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I'm sorry'를 심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 외국 외교관이 요시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Sorry(쏘리)'를 연발하고 다니냐"고 묻자 요시다는 "나는 장래에 총리대신(総理大臣, そうりだいじん 소-리다이진)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이 드립은 곤베에의 아임 쏘리라는 게임 제목으로 패러디된다.
  • 영국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 또 하나. 어느 일본 장관이 영국을 방문해서 요시다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시다가 그를 만나기 싫어해서, 장관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 때마다 "대사는 외출했다고 말하라"고 직원들에게 명했다. 보다못한 장관이 주영일본대사관을 직접 찾아갔고 거기서 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 사람도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요시다였다. 결국 장관에게 들켰다. 이 일화는 2017학년도 수능완성(2017 수능 준비용이므로 2016년에 발매.) 영어 영역에 나왔다.
  •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량 지원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식량 지원량을 더 늘려서 더 많은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맥아더가 통계를 보니 일본의 식량 사정은 지원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요시다에게 "일본의 통계는 참 엉터리요. 믿을 수가 없어."이라고 힐난하자 요시다 왈,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으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거나 이렇게까지 지지는 않았겠지요." [21]
  •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자기 측근 정치인의 이름도 잘못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하며, 특히 쇼와 덴노에게 각료 명단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자기 측근이었던 오자와 사에키(오자와 이치로의 부친)의 이름도 틀려서 천황이 직접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시가 애호가였다고 한다. 평상시 시가를 빼놓지 않았다. 1966년, 사망 1년 전. 헨리 클레이와 코히바를 즐겨 피웠다고 한다.
  • 1953년 1월 방미를 위해 일본을 들린 이승만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 한미일 삼자 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던 이승만이나 외교관 출신인 시게루나 둘 다 영어 실력이 출중해서 통역없이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배석하였던 김용식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22]는 이승만이 "Mr. 요시다. 나나 당신이나 앞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나 일본국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일협정은 정확히 10년 뒤 1963년에 협상이 이루어져 1965년 체결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 요시다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둘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 이들 두 지도자 사이에 '호랑이 일화'라는 야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시다 시게루가 이승만에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이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서 이젠 한 마리도 없다!"라고 날카롭게 응수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내용으로, 당시 이승만을 수행했던 백선엽 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요시다 시게루가 "내가 중국에 근무할 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은 "1명은 관리로 만들고 1명은 으로 만들기 위해 아들을 기본적으로 둘을 낳는데, 아들 하나가 호랑이에 물려갈 때를 대비해서 하나쯤은 예비로 낳는다"며 농담조로 그 말을 긍정했다고 한다.
  • 1954년, 서독을 방문하였을때 아데나워총리와 회담하며 벤츠를 한대 구입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수입 규제때문에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뒤, 10여년이 흘러1963년 벤츠를 선물받고[23] 매우 기뻐하며 아데나워 수상측에게 그때의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며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해당 벤츠는 요시다의 또 다른 애차였던 롤스로이스와 함께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 독일의 아데나워와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둘다 강한 반공성향에 패전국 독일과 일본의 전후 복구에 지도력을 발휘하였고 각각 나치, 군부에 탄압당했으며 전후의 점령군과의 마찰이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또한 위에서 보듯이 요시다와 아데나워는 서로 친분이 있었다.
  • 김성한의 희곡 대본 <오분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담판을 벌이는 사이 중간중간에 곁다리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계 인물(?)들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데, 하토야마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은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전무라고 나온다.
  • 애견인이었다. 많을 때는 10 마리 이상의 강아지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하며 가나가와 현 오이소마치에 위치한 그의 저택 정원 한켠에는 요시다가 길렀던 강아지들의 무덤과 묘비들이 서있다.
[1] 덴노의 내각조성대명으로 임명된 마지막 총리이다. 고로 일본 '제국' 총리로는 마지막이다. 후임 가타야마 데츠 총리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국' 총리라는 직함을 달게 된다.[2] 외무대신 겸임[3] 이 시기에 연합군의 군정이 끝났다.[4] 미국과의 동맹을 기초로, 최소한도의 경무장 방위력만 보유한 채, 경제발전에 주력한다는 것. 흔히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리며,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후임 일본 지도자들도 이를 계승하며 일종의 국가전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그리고 현재의 아베 신조 등으로 대표되는 '보통국가' 노선이 일본 외교안보의 주류가 된 현재는 많이 퇴색된 상태.[5] 요코하마 최대의 무역상이었다. 그덕에 요시다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사치와 정치활동에 탕진하였다.[6] 총리에 임명된 히로타 고키가 요시다를 외상으로 입각시키려하자 육군상이던 데라우치 히사이치가 반대하였다. 이때 육군성 군무국장이던 무토 아키라가 각료 명단에서 요시다의 이름을 붉은색 펜으로 죽죽그어버렸다는 일화가 있다.[7] 돈을 모으지 않고, 하토야마는 인사에 일절 상관하지 말고, 총리직이 부담되면 언제든지 관둔다.[8] 하토야마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총리 자리를 하토야마에게 물려준다. 결과론적이지만 약속은 지킨 셈이다. [9] 당시 일본의 패망이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고, 재일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향상해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끊임없이 일어났던 시기였으며, 일본 공산당까지 가세해 일본 전국에 위력을 떨치는 시기이기도 했다.[10] "총리는 다수당에서 내야 한다"는 원칙[11] [12] 일본사회당은 이미 가타야마 퇴진 직전 열린 총선거에서 완전히 쪽박크리를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내에서 좌우파로 분열되어 결국 1950년에 사회당 우파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듣보잡 신세로 전락했다. 아시다의 민주당은 아시다 퇴진 이후 별일없이 비틀거리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에 의해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13] 비슷하게 독일의 아데나워또한 점령군측과 마찰을 빚다 쾰른 시장에서 잘렸는데 이게 오히려 독일국민들에게 당당한 정치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사례가 있다.[14] 한국전쟁 이전에도 군정청의 경제 부흥책인 닷지플랜으로 일본/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하에 있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물론 닷지플랜에 의거한 여러 정책으로 구 식민지였던 조선을 포함하여 상당한 사회문제가 벌어졌고, 이런 문제를 일시에 해결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점.[15] 해당 발언이 어떤 증거를 토대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천우신조다"라고 말한 것은 요시다 시게루가 아닌 일본의 경단련經團聯의 회장이었던 이시카와 이치로(石川一郎)의 발언이고, "우리 재계도 구원받았다"라는 발언을 한 것은 당시 일은 총재였던 이치마타 히사토(一万田尙登)였다.[16] 그의 신장은 155cm였다.[17] 가장 유명한 게 바카야로 해산. 중의원 질의응답 중에 야당의원의 추궁자세에 질린 나머지 "바카야로"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야당의원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술수 꾸미기로 유명한 미키 부키치가 트집을 걸고 넘어지면서 중의원이 해산됐다. 만화 맨발의 겐 10권에서도 잠깐 얘기가 나온다.[18] 3연속 집권도 하토야마 이치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가 전부다.[19] 2.26 사건 때 20대였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마키노 노부아키를 황도파 장교들로부터 지키고 언덕으로 피신시켰다. 후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아소 다로다.[20]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는 친왕/왕.[21] 농담이 아니고,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 제국은 통계고 보고고 뭐고 간에 제대로 맞는 게 없었다. 패전은 승전이라 하질 않나, 보급받은 건 떼먹지 않나... 요시다의 말대로,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다면 진짜로 일본이 그만큼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통계와 보고가 제대로 들어올 정도면 최소한 정신머리는 잡혀 있다는거니까(달리 말하면, 개망신 당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든 아예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든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22] 훗날 외무장관, 국토통일원 장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주유엔대사 등을 지냈다.[23] S클래스의 전신인 W112 300SE 롱 휠베이스 모델로 일본에 첫번째로 수입된 모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