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강연합자치정부

 



'''몽강연합자치정부
蒙疆聯合自治政府'''

일본 제국괴뢰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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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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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1] ~ 1945년
위치
중국 내몽골자치구 일대,
허베이성 일부, 산시성 일부
수도
쑤니터 우기(1936년 ~ 1937년)[2]
후허하오터(1937년 ~ 1939년)[3]
장자커우시[4](1939년 ~ 1945년)
표어
'收復蒙古固有疆土'
(옛 몽골 제국 고유 영토를 되찾자.)
정치체제
전체주의 군사독재
국가원수
주석 (데므치그돈로브)
주요 고문
가나이 쇼지(金井章次)
언어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문자
몽골 문자, 한자, 가나 문자
종교
티베트 불교
민족
몽골인, 한족, 일본인
주요 사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 수립
1937년 10월 28일 몽골연합자치정부 출범
1939년 9월 1일 몽강연합자치정부 수립
1945년 8월 19일 해체
통화
몽강은행 위안, [5]
성립 이전
찰남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멸망 이후
소련 점령하 만주
내몽골 인민 공화국
1. 개요
2. 역사
3. 군대
4. 경제
5. 상징
5.1. 국기
5.2. 국가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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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몽골에 있었던 일본 제국괴뢰정부. 간단히 몽강국으로 줄여부르기도 한다.

2. 역사


1933년 3월, 관동군중화민국의 영토인 열하성(러허성)을 침공해 합병한 열하사변 이래, 4월 차하르성을 침공하면서 내몽골을 향한 일본의 침략야욕이 본격화되었다. 7월에 내몽골 지역의 유력인사이며 청나라에서 내몽골 지역의 왕공족이라는 귀족의 직함을 맡았었던 데므치그돈로브는 내몽골의 유력자들을 불러모아 국민정부장제스에게 이러한 정세를 바탕으로 내몽골의 자치를 요구할 목적으로 몽골 자치 협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장제스는 데므치그돈로브 휘하의 내몽골 유력인사들이 내몽골 지역을 일본에 송두리째 넘기는 사태를 막기 위해 자치정부를 중앙 행정원 직속으로 설립 해줄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데므치그돈로브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만주국[6]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과 군수물자들을 주고받으며, 그들과 몽골국의 건국을 논의하는 등 비밀리에 지속적으로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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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데므치그돈로브
1936년 2월 10일, 데므치그돈로브는 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시린궈러 맹의 쑤니터 우기 지역에 있었던 덕왕부에서 ''''몽골군 총사령부'''' 성립행사를 가지고 행사 연설에서 스스로 칭기즈 칸의 30대손이라 자칭하면서, 칭기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아 몽골족의 모든 고유한 영토를 되찾고, 민족 부흥의 대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므치그돈로브는 그의 사령부가 소련 뜻대로 움직이는 외몽골에 대항하는 정통 몽골 세력임을 내세웠는데[7], 그 까닭은 데므치그돈로브의 장기목표가 그의 세력을 기반으로 내몽골을 통일한 뒤, 외몽골(몽골 인민 공화국), 소련령 부랴티아까지 합병, 몽골족의 통일을 이루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관동군은 만주국의 불안정[8] 등 여러 사안, 특히 소련과의 충돌을 제일 염려하여 극구 만류했다. [9] 결국 그의 구상은 내몽골의 독립국가 정도로 상당히 수정되었다.
그 후 1936년 4월에 몽골족 총회가 열렸고, 5월 1일 몽골군사정부강령이 채택되었으며, 12일 ''''몽골군사정부''''의 성립이 선언되면서 평소 내몽골 귀족 사이에 명망이 깊었던 왕공족인 운왕을 몽골군사정부 주석직에, 그리고 데므치그돈로브는 총재직에 취임하였다. 1936년에는 다나카 류키치의 부추김으로 수동사변을 일으켰다가 개박살났다. 1937년에 노구교 사건를 빌미로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군의 중국 대륙 침공에 편승한 데므치그돈로브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 몽골군사정부 영토에 주둔했던 중국군과 전투를 하게 되었으나,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몽강군은 유명무실해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이후 관동군의 지원에 따라 영내에 있는 중국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내몽골에는 일본군의 영향이 더욱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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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사정부의 깃발[10]
관동군의 지원하에 1937년 10월 27일, 후허하오터에서 2일동안 개최된 제 2차 몽골족 총회의에서 몽골연합자치정부의 법과 강령의 제정 문제와 2차 몽골 총회의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 등에 관해 논의하였고, 28일 후허하오터를 수도로 하여 '''몽골연합자치정부'''가 공식 출범하였다. 1938년에 사망한 운왕을 대신해 데므치그돈로브가 주석직에 취임하였고 그 후, 몽골연합자치정부는 일본 관동군의 권유에 따라 1938년 일본제국의 황하 이북, 차하르성과 허베이성, 산시성의 기존 괴뢰정부들인 '''찰남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와 함께 몽강공동위를 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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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연합자치정부의 깃발.
몽골연합자치정부의 정부청사
몽골연합자치정부 내각진들의 기념사진
1939년 9월 몽강공동위는 구성원인 세 개의 괴뢰 정권흡수하고 장자커우로 천도하여, 데므치그돈로브를 정부수반 직책인 주석직에 추대한다. 데므치그돈로브가 이를 수락하고, 몽강공동위는 '몽강연합자치정부'로 이름을 바꾸며 몽강국은 정식 출범한다. 하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던 푸이만주국이 미국 등의 묵인, 중화민국의 불가피한 인정, 독일의 외교적 승인 등 추축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데 비해,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일본과 만주국만이 승인해 주었다. 그마저도 1941년에 철회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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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강연합자치정부 수립행사[11]
'몽강연합자치정부'는 1939년 정식 수립했지만 실상은 관동군의 농간으로 산서성 북부와 하북성 북부의 한인 거주지역까지 대거 포함시키는 바람에 인구의 95%가 한족이 되어 버렸다. 이는 데므치그돈로브의 내몽골인의 독립국이라는 구상과 동떨어진데다가 이미 실권까지 모두 일본인이 쥐고 있었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1940년, 왕징웨이 공작의 결과로 난징에서 왕징웨이 정권 (역시 일본의 괴뢰였던) 이 정식 수립되며 일본 제국의 계략으로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완전 독립이 아닌 명목상이지만 난징 정부의 자치정부 형태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분노한 데므치그돈로브는 장제스와 내통한다. 결국 이것은 관동군에 발각되었지만 데므치그돈로브를 대신할 만한 괴뢰가 없어서 데므치그돈로브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렇게 데므치그돈로브가 꿈꾼 내몽골 독립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데므치그돈로브는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였을 뿐이다.
1941년 8월 4일 난징 괴뢰정권하에 속하는 자치정부로 전락한 몽강연합자치정부는 '''몽골자치구'''로 이름을 개명당하고, 그 후에도 일본 관동군의 괴뢰정부로서 존속했었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난징 정권(왕징웨이 정권)하의 자치정부로 전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난징 정부의 영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데므치그돈로브를 수반으로 한 괴뢰정부였다. 몽골자치구가 중화민국의 연호인 민국을 쓰는 대신에 칭기즈 칸을 기준으로 한 것이 그를 뒷받침한다. 2차 대전의 말미에 결국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직후인 1945년 8월, 몽골 군대와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만주 작전으로 인해 소련군 플리예프 기병-기계화 집단이 내몽골 사막을 건너 쳐들어와 8월 19일 멸망하였다. 소련은 아예 내몽고를 몽골에 병합시키려 하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철회하였고 그 후 내몽골 인민 공화국의 수립과 국공내전중국 공산당의 내몽골 인민위원회의 설립을 거쳐 현재는 내몽골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3.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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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강국군의 군기(軍旗)[12]
초기에는 군의 대부분이 기병으로 9개 사단과 4개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9개 사단 중 8개 사단이 기병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러나 노구교 사건 이후에 치명타를 입어 군이 괴멸되다시피하여 총 2만 명의 소규모 사단으로 재편제되었고, 39년 자치정부 수립 이후에는 군대가 다시금 재편되어 5개 사단과 3개 연대를 거느렸지만, 거의가 민병대였으며, 전차비행기는 단 한대도 없었고 기관총 등의 소화기만 소유하고 있었다. 만주 작전 직전에는 2개 보병사단, 4개 기병사단, 3개의 한족 독립여단, 1개의 경비연대를 보유하게 되지만, 여전히 무장은 소화기 정도에 그쳤다. 이 빈약한 무장을 지닌 몽강군은 만주 작전에서 당연하게도 몽강군과 비교해서 전차와 비행기를 보유하며 압도적으로 훌륭한 무장을 갖춘 정규군인 소련-몽골 연합의 기병-기계화 집단을 막지 못하고 전부 무너졌다. 몽강국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26사단, 2 혼성여단, 11 통신연대로 이루어진 소규모 군대가 주둔중이었다.

4. 경제


몽강국에서 일본 정부는 고노에 내각 때 몽강은행의 설립, 흥아원을 내각의 기관으로 설립하여 중국의 경제 장악을 기조로 하고 우선 몽강은행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몽강은행 설립이후 현지에서 화폐를 발행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갑자가 화폐에 실리기도 하였으며, 조폐 시설의 부족으로 몽강국의 화폐에서는 군데군데 중화민국의 흔적이 묻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1941년 몽골자치구로 전락함에 따라 사실상 남경 정권의 화폐를 주로 쓰게 되었고, 이미 실질적으로는 을 사용하고 있었다. 산업 방면에서는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기에 힘든 구조인 몽강의 특성상 이전 찰남자치정부에서 일부 실시했던 아편사업을 가지고 현지 일본군과 일본인 고문들의 계획 아래 대대적으로 확장시킬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아편사업은 몽강국의 주력 사업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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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강국 1938년 몽강은행 발행 주화
몽강국 1940년 몽강은행 발행 1위안 화폐

5. 상징



5.1.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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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군사정부, 몽골연합자치정부,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가 썼던 깃발 색의 공통적 의미는 빨간색은 일본인, 파란색은 몽골족, 노란색은 한족, 하얀색은 회족을 뜻한다.

5.2. 국가



몽강연합자치정부의 국가.

6. 기타


인쇄 시설이 부족했던 탓인지 독자적인 우표를 발행하지 않고 중화민국 우표에 '몽강'이라고 추가 인쇄를 하여 사용했다. 가격은 따로 추가 인쇄하지는 않았다. 원래 중화민국 우표에 표기된 가격 그대로의 가격으로 사용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가격을 변경한 것도 있다. 기념우표는 독자적으로 발행했다. 몽고정부설립 5주년 기념, 우편사업실시 5주년기념, 대동아전쟁 2주년 기념[13] 등이 있다.

7. 관련 문서



[1] 몽골군 정부 수립 연도로 따질 때의 기준이다. 몽강연합자치정부 설립 연도로 따지면 1939년.[2] 몽골군사정부 시기, 뒷날 내몽골 인민 공화국의 수도로도 지정됨[3] 몽골연합자치정부 시기[4]장자커우 지역[5] 몽강국도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자체화폐가 있었으나, 엔이 주로 쓰였다.[6] 만주 지역에 세워진 일본 제국의 괴뢰국.[7] 외몽골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해 위성국화되었고 공산화된 당시 외몽골에서는 칭기즈 칸의 후손인 보르지긴 가문의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8] 만주국의 흥안성 일대에는 몽골인이 다수 거주했다.[9] 관동군이 소련군과 할힌골 전투로 충돌하는 1939년 전인 것을 고려하자.[10] 몽강국은 그 이후에도 이 최초깃발의 색깔의 패턴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화민국옛 국기를 참조하여 만들어짐[11] 사진만 보면 베트남이나 라오스 등지의 일본 제국의 괴뢰국 건국 행사 같아보이나, 사진 우상단의 덕왕이라는 한자가 몽강국 건국 기념식임을 증명한다.[12] 몽골 군사정부의 기와 같다.[13] 몽강국은 일본의 괴뢰정부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