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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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흐마디야 깃발
1. 개요
2. 교리
3. 특징
4. 현황
5. 기타


1. 개요


(Ahmadiyya,الجماعة الإسلامية الأحمدية)
19세기 말 인도 제국에서 시작된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수피 분파로, 추종자들은 '아흐마디'라고 불린다. 수니파시아파로부터는 이단 취급당하고 박해받는다. 자체적으로 칼리파가 있는데 현 칼리파는 5대째이다.
19세기 말 인도 제국 펀자브에서 미르자 굴람 아(흐)마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이 약속된 메시아라고 주장하였다. 주류 이슬람은 무함마드 이후로 더이상 예언자가 없을 것임을 천명했다는 점을 들어 창시자 아흐마드를 무함마드 이후의 예언자라고 보는 아흐마디야 교리를 부정한다.
영어권에서는 모음 A뒤에 H를 묵음으로 발음해서 “아마디야”라고 칭하나 우르두어, 아랍어 발음으로는 احودية 아흐마디야 라고 발음된다.

2. 교리


흔히 아흐마디야를 이슬람 개혁운동이라고들 하지만, 아흐마디들은 자신들이 오히려 이슬람 원리에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 이후로 이슬람은 변질되었으며, 아흐마드는 이를 교정하기 위해 보내진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특히나 예수에 대한 교리가 다른데, 마치 기독교와의 절충안을 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슬람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죽지 않고 하나님(알라)에 의해 구원되었다고 하지만, 아흐마디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에서 살아남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카슈미르로 가서 여생을 보내다 죽었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절충안을 택했다기보다는 당시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성묘 숭배를 하던 수피들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예수,모세,아브라함의 무덤이라 주장되는 수피 성묘들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널리고 널렸다.
또한 비무슬림에 대항한 지하드 의무는 종료되었으며, 지하드를 더 이상 성전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고, 앞으로 “극기”, “노력”같은 의미로 해석할 것도 주장한다. 그 근거로 비무슬림과의 전쟁을 마치고 복귀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작은 지하드(전쟁)가 끝났으니 큰 지하드(극기)에 집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던 하디스를 든다.
아흐마디야에서는 이슬람 경전인 쿠란, 하디스 및 이슬람의 5가지 의무실천사항 모두 중요시 되고 있다. 하지만 와하비즘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아흐마디는 무슬림으로 인정하지 않는지라(무슬림들이 순례를 행하는 메카 카바신전에는 비무슬림 출입 자체가 금지됨), 아흐마디야 무슬림들의 메카 및 메디나에 대한 성지순례는 힘들다고 한다. 파키스탄의 경우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 회원들의 탄압과 박해 정책에 의해 아흐마디는 여권 인적 사항에[1] 무슬림이라고 적지 못하고 아흐마디라고 따로 기입된다고 한다.

3. 특징


타종교에 '''매우''' 관대하다. 같은 아브라함 계통 종교인 기독교유대교는 물론 힌두교, 불교, 신토 등 모두 중요시 하며, 여러 종교의 경전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다고 한다.[2] 이에 대한 근거로써 쿠란에서 "기록되지 못한 예언자가 수 없이 많다"는 문구를 들고 있다.[3]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과학은 모순이 없어야 한다면서,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슬람이 우월하다고는 하지만. 주류 이슬람 세계에서 아주 큰 죄악으로 여기는 '''배교'''에 의해서도 관대한 것이 특징이다.[4] 예언자 무함마드 당시에는 배교가 처벌 대상이 아니었고,[5] 하디스를 읽어보면 이슬람 초창기에는 배교했다가 다시 이슬람에 입교하는 경우도 많았을 거라고도 추정된다. 배교자에 대한 입장 하나만큼은 역설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되는 아흐마디야 입장이 더 이슬람 초창기에 가깝다. 배교자 처벌에 관한 오늘날과 같은 규정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바로 이슬람을 표절해서 새로 종교를 만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형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엄격해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교자가 배교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는게 당연시된 것. 페르시아어우르두어에서는 배교자를 "무르따드"(파멸하는 자)라는 어휘로 칭하는데, 배교자 처단이 이렇게 당연시되는 문화권에서 배교자에 대해 관대한 입장이니 다른 종파의 무슬림들이 이들을 이상하게 보는 게 당연하다.
모든 종류의 종교에 관대하면서, 화합을 중요시하고, 배교에 대해서 관대하기까지 한 종파가 나쁠 리가 없다. 물론 수피 분파로 시작된 만큼 교리에서 현대인들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도 있긴 하지만 이 역시 나중에 개혁이 가능할 수도 있다. 비록 박해받고 있지만, 과학에 대해서 웬만한 기독교 종파보다 열린 모습을 보이는 등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을 제외하면 다른 종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류' 무슬림(수니파, 시아파)들은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라고 보지 않는 종교는 이슬람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인도,파키스탄도 무슬림들은 이들을 친영파 매국노처럼 묘사하나 정작 아흐마디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인도 제국에서는 종교보다 인종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혜택을 받은 적이 없다.'''

4. 현황


전세계적으로 1~2천만 명의 신자가 있는 걸로 추측되나, 아흐마디 신자에 대한 통계는 정확하게 집계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는 인도파키스탄에 신자가 많이 거주했었다. 원래 아흐마디야의 발생지가 오늘날 인도 영토인 펀자브카디안이기도 했고.[6] 그러나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때 아흐마디야 칼리프가 파키스탄의 루브와[7]라는 소도시로 옮겨왔지만, 파키스탄이 점점 이슬람 근본주의화되면서 1974년 파키스탄 헌법은 아흐마디를 이슬람에서 배제했고, 1984년 지아울하크 군부 정권이 Ordinance XX라는 악법으로 아흐마디야가 스스로를 이슬람이라 일컫는 것도 금지했다. 결국 1984년 아흐마디 칼리프는 파키스탄을 등지고 런던으로 본부를 옮겨야 했다.
실질적 창시자인 미르자 굴람 아흐마드가 주류 이슬람의 눈에서는 많이 어긋나 보이는 존재이기도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얻으려는 이슬람주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의 만행도 있어서 파키스탄에서는 힌두교나 기독교보다 더 박해당한다. 힌두교나 기독교를 박해하면 다른 나라들의 지탄을 받고 외교 문제로 번지게 되지만, 아흐마디야 박해는 별다른 부작용 없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만족시켜주는 정책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코를 하기 십상이고, 인도에서는 덜하지만 여기서는 이슬람을 종파 가리지 않고 싸잡어서 통계내는 지라... 파키스탄 출신이면서 '박해당하는 무슬림'이라고 소개되는 자들은 대개 시아파 하자라족과 이들이다.[8]
이론 물리학자이며 무슬림은 물론 파키스탄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79년)인 아브두스 살람(1926~1996)도 아흐마디 신자였다.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내에서 공식적인 취급은 좋지 못하다가[9] 최근에 와서야 재평가되는 분위기이다.# 사실 이슬람 선교 단체에서 맨날 자랑하는 이븐 시나 역시 시아파 소수종파 출신이다. 이단 종파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아브두스 살람기록말살하려면 당장 중세의 유명한 무슬림 학자들 상당수가 이름이 파여야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중 잣대가 심한지라... 이슬람 교리대로 따진다면 선지자는 이슬람 이단을 도와주지 말라고 했지, 기록말살을 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인도네시아에도 아흐마디야 신자가 좀 있는데, 여기서도 박해를 받고 있다. 아흐마디야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막지는 않긴 하지만 2005년 인도네시아 울라마(이슬람성직자)협회에서 아흐마디야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2008년부터는 아흐마디야 선교가 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고. 심지어 라마단 기간에 이상한 핑계로 아흐마디 모스크를 폐쇄하기도 한다.
해외 선교에도 힘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현대 이슬람 역사의 초창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아프리카가 주요 목적지이지만, 전세계를 가리지 않는다. 가나, 말리탄자니아, 수리남, 가이아나 등지에서는 선교의 여파로 신자가 무슬림중 상당비율을 차지한다. 활발한 선교로 나이지리아탄자니아에서는 200만이 넘는 아흐마디야 신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아흐마디야 주석을 단 쿠란이 소량 보급되었고, 아직 아흐마디야 모스크는 없다.[10] 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절대다수가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에서 온 수니파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5. 기타


아흐마디야에 대한 주류 무슬림들의 배척과 적개심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2016년 3월 24일에 영국에서 발생한 아사드 샤(Asad Shah) 살인 사건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다문화 지역으로 알려진 Shawlands에 거주하는 점포 주인이었고 "나의 사랑하는 기독교 국가를 위한다"는 메시지가 담긴 부활절 축하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슬림으로부터 가게 밖에서 칼로 난자당해 죽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일반 수니파 무슬림으로 알려져서 사람들은 그가 무슬림이면서 감히 기독교 국가를 사랑하고 부활절을 축하한다고 표명했기 때문에 다른 무슬림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살해당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후속 보도로 그가 아흐마디 무슬림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아흐마디야에 대한 이슬람 근본주의 특유의 적개심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쪽으로 여론이 바뀌었다. 살인자의 변호인이 전하는 것에 따르면 그가 아사드 샤를 죽인 이유는 아사드 샤가 "이슬람을 모독(disrespected Islam)했기 때문"이라고.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비무슬림, 또는 이슬람 상대 종파들에 대한 각종 폭력과 범죄들을 합리화할 때 쓰는 흔한 레퍼토리 중 하나이다.
이후 기독교, 시크교, 유대교, 아흐마디야 등 종교인들이 모여 반극단주의(Anti-extremism) 행사를 했으나 시아파와 수니파 이슬람 단체들은 불참을 표명했다.(출처: 가디언지) 이 사건은 영국에서도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었던 아흐마디야에 대한 주류 이슬람들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시가 되었고 아흐마디야에 대한 무슬림들의 배척과 차별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1] 사우디 아라비아로 성지 순례를 가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2] 주류 이슬람에서 박해 한다는 점에서 바하이 신앙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바하이교는 이슬람에서 완전 떨어져 나갔지만, 아흐마디들은 자신들이 무슬림이라 주장하는 차이점이 있다.[3] 중세 압바스 왕조 때도 같은 논리로 고대 그리스와 인도 과학, 철학 서적들의 번역 사업을 후원하였다.[4] 세속주의를 추구하는, 그리고 살라피스트라면 학을 떼는 러시아에 인접해 있는 중앙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곤 대다수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슬람에서 타종교로의 개종은 처벌 대상이기까지 하다.[5] 무함마드가 직접 배교자를 처벌한 적은 무슬림들을 죽이고 낙타를 훔쳐 탈취하고 배교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죽인 사례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외의 경우는 대개 비판만 하고 직접 제재하지는 않았다.[6] 이 때문에 이슬람주의자들이 아흐마디야를 부르는 멸칭 중 하나가 까디야니이다.[7] 지금도 주민의 97%가 아흐마디야 신자인데 근본주의에 의해 여기 주민들도 탄압받는 건 마찬가지다.[8] 파키스탄내 아흐마디 수는 60만에서 400만 까지 오르락 내리락 한다. 최대수치라면 파키스탄은 아흐마디 신자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9] 파키스탄의 역사책이나 과학책에서도 소개되지 않았고, 묘비에 적힌 '최초의 이슬람 노벨상 수상자'라는 문구도 정부의 명령으로 삭제당했다. 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몇몇 국내 연구소는 그의 이름을 따 지었고, 파키스탄 출신 과학도는 그를 높게 평가한다. 물론 그가 조국에 기여한 바에 비하면, 일천한 것이 사실이다.[10] 일본 아이치 현에 2015년 아흐마디 모스크가 생겼다. 일본 내 아흐마디 신자는 3백여명으로 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