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전투(3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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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발발한 전투. 백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전투이자, 고구려 역사상 왕이 전사한 유일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 관련 내용은 치양 전투도 참고.
《삼국사기》 제24권 백제 본기 제2 근초고왕}}}26년(서기 371년),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예성강)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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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전략을 예상하고 오히려 매복을 통해 패하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는데, 근초고왕은 2차례의 공격을 물리친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진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근초고왕은 태자 부여수와 함께 백제 정예병력 3만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한다.
3. 전투 양상
《삼국사기》 제24권 백제 본기 제2 근초고왕}}}371년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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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 고국원왕}}}41년(서기 37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에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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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의 정예병 3만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고국원왕은 태자인 구부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평양성 방어에 나선다. 당시 평양성은 수곡성과 함께 대(對) 백제 전선을 상대하는 주요 요충지였다. 《삼국유사》 왕력에는 "고국원왕이 갑오(甲午)년에 평양성(平壤城)을 증축하였다."라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백제의 공격을 대비해 성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이다 보니, 전투는 무척이나 치열하게 펼쳐진듯 보이는데 근초고왕 본기에는 "고려 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高麗王斯由 力戰拒之)"했다는 대목이 보여진다. 고구려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황색 깃발의 백제군의 공격은 매서웠는데 때 마침 고구려의 국왕이자 고구려군의 총 지휘관인 고국원왕이 적군의 눈 먼 화살[1] 에 맞아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현재까지는 고구려군의 방어도 거셌지만, 백제군이 공세종말점에 다다라 퇴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4. 전투 이후
4.1. 고구려
이때 화살을 맞은 고국원왕은 10월 23일에 화살의 상처로 인해 사망하게 되고 이후 고구려는 태자였던 구부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소수림왕이다. 고국원왕은 고국(故國)이라는 지역에 무덤을 만들어 장사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때의 패배로 인해서인지 이후 금석문 등에 백제를 일컬어 백잔(百殘, 백제 떨거지 놈들)[2] 이라는 비하적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공문서에 "북괴" 같은 비하 단어를 쓴 셈(...)[3]
『광개토대왕릉비』}}}'''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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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백제
백제는 대동강 근처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근초고왕은 평양성 전투 이후,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남평양을 빼앗았다고 언급되는데 이 남평양이 평양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현재는 전하지 않는 《고전기(古典記)》라는 책을 인용한 기록이다.}}}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서기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아 수도를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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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삼국사기》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과, 소수림왕 본기에 백제가 평양성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삼국유사의 오류라는 쪽이 좀 더 가깝다.
한편 이 전투는 백제로서는 꽤 자부심이 있던 전투였는지 훗날 개로왕이 북위에 지원을 바라는 표문에도 "그 때 우리가 고구려 왕 목을 벨 정도로 발라버러서 고구려 놈들은 남쪽만 보면 지려버린당께요." 고 쓰기도 했다.
《삼국사기》 제25권 백제 본기 제3 개로왕}}}쇠(釗)가 경솔하게 (우리와의)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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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삼국사기》의 편찬자는 이를 두고 "전공을 과장했다." 고 평가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 고국원왕}}}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나라에 보낸 표문에 ‘쇠(釗)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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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KBS의 사극인 근초고왕 55화에 등장. 하지만 철수가 지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언급되는데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언급되는 기록을 보면 평양성 전투는 371년 겨울인데 반해, 지진이 일어난 건 372년 가을이다. 제작진이 착각을 했거나 드라마 진행을 위해 각색을 한 듯 보인다.
- 천년의 신화에서도 백제 마지막 미션으로 등장. 여기서는 실제 역사와는 달리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전체 미션을 통틀어서 한 국가의 영웅이 유일하게 모두 나오는 미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