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양 전투
[clearfix]
1. 개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고국원왕과 근구수왕의 맞대결이자, '''양 국간의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2.1. 고구려
미천왕 재위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당시 백제는 대방군을 후원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 시기에는 중국에서 너도나도 황제를 자청하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고구려도 여기에 휘말리면서 백제와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게 된다. 고구려가 지속적인 예방 전쟁등을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던 선비족이 급성장하며 모용황의 지휘 아래 급격히 성장해 337년 연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르렀고, 전연의 침공에 환도성이 불타고 미천왕의 무덤이 파해쳐지는 굴욕을 당한다. 전연에게 남소성을 빼앗겨도 태클 한번 못 걸고 스스로 신하국을 자처할 만큼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다소 만만한 남쪽으로 시선으로 돌리게 된다.
2.2. 백제
분서왕-비류왕-계왕이라는 혼란의 시기를 거친 백제는 진씨(眞氏)가문의 힘을 빌린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며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는데, 369년에는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 개로에게 병력을 주어 탁순국을 거쳐 신라의 군대를 격파하게 했으며 이후 남가라, 탁순국 등 가야 7국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 시킨다. 또한 침미다례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도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남쪽을 평정해 안정화시킨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쪽으로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양 국가가 국경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각각 서로를 목표로 정했으니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고, 고국원왕이 먼저 칼을 빼 들면서 향후 300여년간의 백제와 고구려 간 무력 충돌의 서막이 올랐다.
3.1. 고구려의 선제공격
369년 9월,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치양(현 황해남도 배천군)을 기습해 점거한다. 고국원왕이 정예병력을 이끌고 공격한 곳이 위례성으로 향하는 길목인 칠중성(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이 아니고 한강 하류 지역인 치양을 점거했다는 점을 들어 한강 하류 지역을 장악해 백제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고 나아가 서해 주도권을 차지함에 있어서 좀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
근초고왕은 이 소식을 듣고 태자 부여수에게 병사를 주어 고구려와 맞서도록 했다. 부여수는 병력을 이끌고 지름길을 통해 치양에 도착한다.[3]
3.2. 붉은 깃발의 군대
양군은 치양에서 진을 치고 대치하는데, 이 때 사기(斯紀)라는 사람이 고구려 진영에서 탈영해 백제 진영으로 넘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사기는 원래 백제 출신으로, 왕이 타던 말발굽에 상처를 낸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될 처지가 되자 고구려로 도망쳤던 적이 있는데, 고구려군에 종군하다 다시 백제 진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사기는 부여구수에게 다음과 같이 제보한다.
붉은 깃발이 언급되었는데, 고구려의 벽화로 유명한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행렬도에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높은 인물 주위에 있는 병사들이 붉은 방패와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군 중에서도 정예로 추정된다. 고국원왕이 직접 친정에 나섰기 때문에 보통 고국원왕의 친위대로 보는 편.“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 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사기의 말을 들은 부여수는 즉시 붉은 깃발을 든 진영을 집중 타격한다. 과연 그 말이 맞았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하여 줄행랑을 치고 백제는 5,000명이 넘는 포로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이때 얻은 수많은 노획물들은 부여수가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39년(서기 369) 가을 9월, 임금이 병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침입하도록 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3.3. 태자의 말발굽이 이곳에 머물다
영혼까지 털린 고구려군은 수곡성(황해남도 신계군 예천강 일대로 추정)까지 도망치게 되고 부여수가 이끄는 백제군은 기세등등하여 신나게 추격한다.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렀을 때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부여수에게 《도덕경》의 구절 일부를 인용하며 추격을 만류한다.
막고해의 간언에 부여수가 동의하며 추격을 중단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돌을 쌓아 거대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둘러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乎.)
4. 전투 이후
고국원왕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2년이 지난 371년에 또다시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치게 한다. 하지만 근초고왕이 직접 친정한 백제군은 패하(예성강) 강가에 매복하는 작전으로 고구려를 물리친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백제군이 역러쉬를 가서 평양성을 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 이후 백제군은 통일된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황해도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 대방군의 한인(漢人)들을 대거 편입시키며 선진 기술들을 흡수했다.
5. 여담
- 근구수왕이 돌로 쌓은 거대한 단에 말을 타고 올라간 듯 한데, 《삼국사기》에서 그 일화를 소개하며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위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라고 전하고 있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삼국사기 기록.[2] 백제 왕의 말발굽을 상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원래 말 관리를 맡았다고 추측됨.[3] 부여수가 달려간 장소가 근초고왕 본기에는 치양으로, 근구수왕 본기에는 반걸양(半乞壤)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국원왕 본기에도 고구려군이 침공한 곳이 치양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반걸양과 치양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