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플레처

 

1. 프랭크 '프라이데이' 플레처
2. 프랭크 '잭' 플레처
2.1. 일생
2.2. 평가

프랭크 플레처라는 군인은 미 해군사에 두명이나 있다. 각각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군인으로써 '''명장이고, 명예훈장을 같은 날에 받았으며, 제독까지 진급했고 친척관계다.''' 같은 전투의 수훈으로 명예훈장을 같은 날에 받았으니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1. 프랭크 '프라이데이'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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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프라이데이' 플레처'''
'''Frank Friday Fletcher'''(1855. 11. 23~1928. 11. 28)
제1차 세계대전과 베라크루즈 전투에서 활약한 플레처 제독. 미해군 최초로 어뢰전 교리를 개발하기도 했으며 플레처급 구축함의 플레처가 이 사람이다.

2. 프랭크 '잭'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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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잭 플레처'''
'''Frank Jack Fletcher'''(1885.4.29.~1973.4.25)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미합중국 해군 제독. 위의 프랭크 프라이데이 플레처 제독의 조카다. 진주만 공습 이후 산호해미드웨이를 거쳐 과달카날에 이르기까지, 미 해군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최일선에서 지탱해냈던 지휘관.

2.1. 일생


아이오와에서 태어난 그는 1902년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1906년에 졸업한다. 이후 전함 로드아일랜드, 오하이오 및 메인에서 초기 몇년간을 지냈고 이후 이글, 프랭클린 등 여러 함선을 전전하다가 1914년 4월 베라크루즈에서 있던 전투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받게 된다. 베라크루즈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금요일 삼촌에 묻히기도 하지만, 사실 '''삼촌 조카 둘 다 한 전투에서 명예 훈장을 받은 거다. 흠좀무...'''
 
1차 세계대전에서도 여러 함선을 오가며 지휘를 했고 그렇게 커리어를 쌓아가다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웨이크 섬 전투가 벌어지자 14 기동부대를 이끌고 웨이크 섬으로 향했으나 더이상 주력함을 손실할 순 없다는 상부의 결정으로 680km 거리까지 접근하고도 회항한다.
이후 17 기동부대를 이끌고, 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하러 투입된 일본의 5 항공전대를 막으러 산호해로 투입된다. 산호해에서의 전투에서 그의 기함 렉싱턴은 격침되고 같이 출격한 요크타운은 전치 3개월 이상의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일본군 항공모함 쇼호를 격침시키고 일본군의 포트모르즈비 상륙을 저지해 전략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만, 어니스트 킹 제독은 렉싱턴을 특별히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배를 날려먹은 플레쳐 제독은 미 해군 최고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살려온 요크타운은 수많은 정비공들과 수병들을 갈아넣어서 3일만에 살려내고, 함대의 기함으로써 동생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데리고 미드웨이 해전의 대역전극의 주연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기함으로 탄 요크타운은 격침되고만다. 그래서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로 기함을 옮기게 되는데[1] 중순양함에서 제대로 항공전을 지휘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요크타운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이끌고 있으며 여타 특별한 피해를 입지 않고 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플레처 제독이 더 상관이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이양받지 못하면 스프루언스 제독 마음대로 함대 운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이후로도 계속 고마워했다고 한다.[2]
이 두 번의 승리로, 제독의 '목표를 달성하는 역량'에 대한 태평양 사령부 내부에서의 평가는 굉장히 높아졌다. 하지만 홀시 이상의 공세적인 지휘 성향으로 금쪽같은 대형 항공모함을 2척이나 날려먹은 탓에, 그의 상사은 그가 보급과 전략에 관여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것까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건 아니었다.
플레쳐 제독 역시 그런 평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그의 평가를 깎아먹는 사건이 2개월 후 과달카날 전투에서 벌어졌는데 과달카날에 미 해병대가 상륙한 이후 그는 항모부대에 재급유가 필요하다며 기함인 새러토가와스프, 엔터프라이즈를 과달카날에서 빼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두 번이나 기함으로 쓰던 항공모함을 잃은 그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또다시 기함을 잃을 순 없다는 강박증에 걸려 퇴각한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리고 8월 8일 사보섬 해전에서 미군 함대가 제대로 박살나면서 "핑계나 대며 도망쳤다!"라고 욕을 한바가지 먹는다. 해병대와 해군에게 쌍으로.[3]
그래도 8월 24일~25일간 벌어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함대에 맞서 엔터프라이즈와 새러토가를 이끌고 일본군 항공모함 류조를 격침시키고 수상기모함 치토세를 대파시켰으며 일본군의 추가적인 상륙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 후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인 8월 31일. 그가 타고 있던 항공모함 새러토가가 I-26호의 뇌격으로 대파당할 때 그도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니미츠 제독은 그에게 8개월간 쉬지않고 지휘봉을 잡았으니 이 기회에 휴식을 가질 것을 권유했고 그도 권유를 받아들여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휴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동부대의 지휘관들은 항공계통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수상함 출신의 플레처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4] 결국 그는 1942년 11월부터 비교적 한직인 북태평양 방면의 Northwest Sea Frontier의 사령관이 된다. 이 부대는 알래스카부터 시애틀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사실상의 좌천이긴 하였으나, 플레쳐 제독이 부임하는 시기는 과달카날에서의 전세가 미군측으로 기울던 때였고, 미군은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공세를 펴길 원했기에, 플레쳐 제독 역시 공세의 일환 겸 사령부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부임한 것이긴 했다. 여기서 제독은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고, 얄류산 열도 전역이 종료된 이후에는 해당 섬들도 제독의 관리 영역에 들어왔다. 가정이긴 하나, 얄류산 열도를 통해서 훗카이도로 진격하는 북방 루트가 채용되었다면 제독 역시 다시 전장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함대를 이끌고 파라무시르를 포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루트는 결국 채택되지 않았고, 이 포격이 그가 지휘한 마지막 전투였다.
47년에 은퇴한 그는 1973년에 자신의 88번째 생일을 맞기 조금 전인 4월 25일 눈을 감는다.

2.2. 평가


'''"You son of a bitch, if you do that you are yellow!!"'''

'''"이 개새끼야, 그럼 넌 겁쟁이라고!!"'''

-리치몬드 켈리 터너 제독, 사보섬 해전 이후 플레처에게 한 말.[5]

충분히 명장 반열에 들 수 있는 제독이지만 다양한 경력을 제외하면 특출난 장점이 없던 제독이다[6]. 뭔가 위인들이라면 가지고 있던 인생 철학도 없었고 독특한 취미도 없었으며 좋아하는 것도 평범한 아저씨들처럼 알코올이었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다. 그러나 이렇다 할 약점도 없던 제독이기도 하며, 전쟁 초기의 사기도 낮고 경험도 부족한 미 해군을 이끌고 정예병들로 구성된 일본군 해군과 가장 자주 칼을 맞댄 제독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윌리엄 홀시와 달리 전투에 있어서 약간 신중하고 소심해보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제 지휘성향은 홀시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다만 플레쳐는 뺄때 아주 쿨하게 빼는 차이점은 있었다. 덕분에 플레처 제독은 큰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으며, 상관이 지정한 전략적 목표는 매번 달성했다. 하지만 격전이 벌어지면 운이 없었던지. 공세적인 성향때문인지 간에, 큰 배를 '''따박따박''' 잃었다. 미해군은 전간기의 기동훈련을 통해서 항공모함의 공세적인 운용은 신중하게 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은 상태였는데, 수상함 출신의 제독이 항공모함만 잃고 돌아오니 이 부분이 단점으로 확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 초반 미군은 전력상 열세였으므로 실수가 일어나서는 안되는 상황이었으며, 본격적으로 본국의 산업 생산력이 힘을 발휘할 때까지는 전력을 보존하며 버텨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플레처 제독의 이러한 성향과 지휘는 크게 보면 도움이 되었지만, 계속해서 피해가 누적되는 스타일 탓에 언제까지고 계속 기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말그대로 스프루언스의 하위호환이었고, 최고 지휘관으로 기용되는 제독이 여럿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드웨이 이후로 스프루언스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한 이후에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다만, 그가 스프루언스와 홀시에 가려져있어서 그렇지 결코 판단력이 나쁜 제독은 아니다. 산호해 해전에서도 렉싱턴과 요크타운이 심한 손상을 입자 계속 싸우기보단 후일을 도모하며 퇴각시키는 선택을 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스프루언스 이전에 공격대 출격시점을 결정한 것도 그다. 기함을 두번씩 잃긴 했지만 경험이 하나도 없는 미 해군 항공대를 이끌고 수상함 전문가가 두번 다 전략적 승리를 거둔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미 해군 제독들 중에서 가장 제 실력만큼 대우받지 못한 인물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 여기서 그의 상대였던 일본군 제독들과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야마구치 다몬 등 일본 제독들은 이 때까지도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실패하거나 패배한 경우 기함이 침몰하는 중이라면 퇴함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은 그런 거 없이 쿨하게 퇴함하여 다음 임무를 준비했다. 이는 플레처 제독만이 아니라 미군 제독들의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고. [2] 정확히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공격대는 적 항모를 치기 위해 출발했음. '''추가적인 지시가 있는가?'''"라고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추가적인 지시가 있느냐는 질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 플레처 제독은 "'''그런 것 없음. 이후는 귀관의 지시에 따르겠음'''" 이라며 쿨하게 지휘권을 이양했다.[3] 평가 문서에도 크게 써있듯이 과달카날 전역에서 해군의 켈리 터너 제독은 플레처 제독의 결정에 반발하며 자신보다 계급도 위인 플레처 제독에게 이 “개새끼야 넌 그러면 겁쟁이야!”라고 일갈 하기까지 한다.[4] 스프루언스 제독은 예외인 것이 해군참모총장이자 함대 총사령관인 어니스트 킹 제독이 다른 제독들과 달리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신임을 보내고 있었다.[5] 참고로 당시 플레처는 중장이었고 터너 제독은 소장이었다. '''그렇다! 플레처는 그보다 상관이다!!''' 터너 제독의 더러운 성격을 알 수 있는 부분이자 플레처 특유의 지휘방식이 드러나는 일화.[6] 단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 사보섬 해전에서 항모를 물린 것 때문에 당대에는 꽤나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는 플레처 제독의 판단도 반드시 틀렸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평가가 따르고 있다. 사보섬 해전 자체가 워낙 막장스러웠기 때문에 항모가 있었더라도 큰 변수로 작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사보섬 해전은 야간에 일어났다. 아직 비행장이 완전치가 않은 상태에서 야간에 함재기를 날리는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보내는 자살 행위이다.) 괜히 난전에 항모가 끼어있다가 야간 수뢰전에 휘말려 격침이라도 당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사보섬 해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미해군의 병크였기 때문에 플레처 제독이 어느 정도 속죄양으로 희생된 감도 없잖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