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 프레드를 찾으신다면 프레드(1993) 항목으로.
- 유튜브 계정을 찾으신다면 Fred 항목으로.
- 빅 히어로의 등장인물을 찾으신다면 프레드(빅 히어로) 항목으로
- LVMH 산하 보석 브랜드는 사이트 참조.
-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을 찾으신다면 프레드 위즐리 항목으로
1. 개요
브라질의 축구선수로 현재 크루제이루 EC 소속이다. 브라질 전국 리그 역대 최다 득점 4위이자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상 역대 최다 수상자로, 당대 브라질 리그 최고의 공격수지만, 2014 월드컵 참사의 원흉이 된 공격수이기도 하다.
2. 클럽
2.1. 데뷔 초 브라질
2001년 고향 구단인 아메리카-MG에서 축구를 시작하였고, 2003년 1군팀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프로 데뷔 즉시 브라질 리그 역대 최단 시간 득점을 기록'''했다. 당시 프레드가 세운 기록은 '''3.17초'''다.
이후 2004년에는 크루제이루로 이적하였다. 이때 프레드는 '''브라질 전국컵 득점왕에 등극, 역대 브라질 전국컵 단일 시즌 최다인 14골'''[1] 을 넣었다. 여기에 모든 대회 총합 43경기 41골을 넣는 대활약을 보이며 유럽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2. 리옹
2005년 이적료 1500만 유로를 낸 리그앙 올랭피크 리옹으로 이적하였다. 이적 후 첫 시즌에는 14골을 넣으며 프랑스 리그 득점왕 2위에 올랐다.
그리고 2번째 시즌 역시 부상 기간이 있기는 했어도 2자리 수 득점을 기록했지만, 3번째 시즌이 시작되기 전 갑자기 상황이 변했다. 리그 개막 전 브라질 대표팀에 소집되어 부상을 당하고 왔다.
이에 리옹은 대체자로 유럽선수권 대회 득점왕 출신 밀란 바로시를 영입했는데, 팀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던 유망주인 카림 벤제마가 바로 이때부터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했고[2] 결국 프레드는 주전 경쟁에서 밀린 채 2009년 2월 26일 브라질의 플루미넨시로 이적하였다.
- 프레드의 리옹 시절 활약
- 첫 시즌: 리그 득점 2위[3]
- 2번째 시즌: 부상 탓에 20경기만 출장했지만, 리그 득점 공동 6위(1위 15골, 2위 13골, 공동 3위 12골, 공동 6위 11골)
- 3번째 시즌: 프리 시즌에 국대에서 부상당하고 복귀/이때부터 벤제마 포텐 폭발
- 4번째 시즌: 도중에 브라질로 복귀
2.3. 플루미넨세
프레드는 이적 직후 바로 활약을 선보였다. 그리고 '''2012시즌에는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 + MVP + 득점왕을 모두 석권'''했다. 또한 2014시즌에도 득점왕에 올라 현재 플루미넨세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중이다[4] .
프레드가 플루미넨세에서 세운 업적은 다음과 같다.
- 2010, 2012 브라질 전국 리그 우승
- 2012 브라질 전국 리그 MVP
- 2012, 2014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
- 2011, 2012 브라질 전국 리그 베스트 11
- 플루미넨세 공식 경기 역대 최다 득점자로 등극[5]
구단 운영진들이 프레드의 고액연봉과 나이 문제로 팀에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겼고 운영진들이 감독에게 프레드 뒷담화하면서 감독과 선수 불화를 조장했다. 또한 프레드 연봉 정보 외부에 노출했다. 당시 프레드는 2014 월드컵을 앞두고 컨디션 조절하는 대신 팀을 위해 혹사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나한테 나한테 이럴 수 있냐" 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아틀레티쿠-MG가 프레드의 영입 제안을 했고, 플루미넨세 운영진이 이적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의욕을 잃은 프레드는 이적협상 때 플루미넨세 운영진의 권유와 아틀레티쿠-MG측 제안에 전부 알겠다고 대답했고, 결국 사인을 하면서 아틀레티쿠-MG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프레드의 이적 후 플루미넨세 운영진은 '프레드는 플루미넨세 역대 최고 레전드'라고 발표하고 프레드는 이에 더 어이없어한다.
2.4. 아틀레티쿠-MG
많은 진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드의 활약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이적 후 첫 경기에서, 더비전인 크루제이루와의 대결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프레드가 오기 전까지 아틀레티쿠-MG는 하락세를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의 합류 이후 성적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호비뉴와 훌륭한 콤비를 이루면서 득점왕 레이스에서도 1위를 달렸고, 끝내 디에구 소우자, 윌리암 등과 함께 공동득점왕(14골)으로 등극했다. 참고로 이는 '''커리어 3번째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상 수상'''이며, '''전국 리그 득점왕상 역대 최다 수상 부분 공동 1위'''에 해당하는 업적이다.
아울러 프레드는 현재 136골로 '''브라질 전국 리그 역대 최다 득점 4위를 기록 중'''이기도 하다.
-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 3회 수상자: 호마리우, 툴리우 마라비냐, 다다 마라비냐, 프레드
- 브라질 전국 리그 득점왕 2회 수상자: 펠레, 지쿠, 호베르투 디나미테 외 여러명
- 브라질 전국 리그 역대 최다 득점 TOP 10: 1위 호베르투 디나미테(190골), 2위 호마리우(155골), 3위 에드문두(153골), 4위 프레드(136골), 5위 지쿠(135골), 6위 툴리우 마라비냐(129골), 7위 와싱톤(126골), 8위 세르지뉴 출라파(125골), 9위 루이스 파비아누(118골), 10위 다다 마라비냐(113골)
3. 우승
- 크루제이루 EC (2004 ~ 2005 , 2017~)
-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 2004 , 2018
- 코파 두 브라질 : 2017 , 2018
- 올림피크 리옹 (2005 ~ 2009)
- 리그 1 :2005-06 , 2006-07 , 2007-08
- 쿠프 드 프랑스 : 2007-08
- 트로페 데 샹피옹 : 2005 , 2006 , 2007
- 플루미넨시 FC (2009 ~ 2016)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 2010 , 2012
- 캄페오나투 카히오카 : 2012
- 브라질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 2007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 2013
4. 국가대표
2005년 4월 27일 과테말라와의 친선경기에서 교체선수로 A매치에 데뷔하였다. 2005년 11월 12일 아랍에미리트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2007 코파 아메리카 등에 출전하였다. 리옹에서 부상 등의 이유로 부진하고 이후 브라질 리그로 복귀한 사이 둥가 감독은 프레드를 외면하고 루이스 파비아누를 국가대표 주전 스트라이커로 기용했다. 파비아누는 골을 쓸어담았고, 그렇게 프레드는 대표팀에서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둥가호의 실패 이후 마침 브라질 리그에서 프레드는 부활하기 시작했고, 2011년 대표팀에 복귀, 2012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득점한 이후 2013년에는 잉글랜드와의 두 번의 평가전에서 모두 골을 넣고 이탈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도 골을 넣는 등, 평가전에서 그야말로 맹활약을 했다. 특히 그의 대표팀 경력의 화룡점정은 2013 컨페더레이션스컵이었는데, 이탈리아를 상대로 두 번 골을 넣어 조 1위로 조별리그 통과에 기여했다. 이어 4강전인 우루과이전에서도 골을 넣어 결승으로 견인시켰고,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2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하였고, 실버슈와 대해 베스트 11상을 수상하였다[6] .
4.1.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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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선 예상대로 주전 선발 스트라이커로 브라질 팬들의 기대를 받고 출전했으나, 카메룬 전에서 1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브라질 주전 공격수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 역대 브라질의 월드컵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 중 이렇게 득점력과 경기력이 빈약한 선수는 없었고, 결국 독일과의 4강전에서 이 문제가 제대로 폭발했다. 전반전 내내 제대로 된 슛도 못 날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후반전에는 헐리우드 액션으로 패널티킥을 유도했으나 실패하고 교체당하면서 미네이랑의 비극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성난 브라질 관중들은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가장 무능한 스트라이커라며 야유를 보냈고[7] , 한국에서는 프주영이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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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의 부진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부상 탓이었다. 월드컵 전 많은 경기에서 득점행진을 달리며 브라질 주전 공격수다운 모습을 보여 프레드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왔으나, 하필 월드컵 직전 부상을 당해 본래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프레드 역시 이에 대해 "나도 안다. 내가 욕먹을만 하다는 것. 하지만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팀에도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내 피지컬 관리자는 쉬라고 했는데, 팀을 위해서는 계속 뛸 수밖에 없었다. 이게 부상을 촉진시킨 거다."라고 발언했다. 월드컵 시작 전부터 언론들은 그의 부상이 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월드컵이란 큰 대회를 앞둔 상황에서 자기 몸상태를 뒤로 하고 무리하게 소속팀 경기에 충실하다가 부상으로 인해 월드컵에서도 큰 부진을 보였다.
또한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프레드의 역할이 참으로 애매했다. 컨페드컵 브라질호에서 프레드는 주 스코어러였고 네이마르는 플레이메이커 역할로 그를 뒷받침해주며 경기를 폭넓게 조율하고 골까지 노리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1년 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주 스코어러는 네이마르가 되어버렸고 프레드는 앞 선에서 수비수들의 관심을 끌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프레드는 압박을 잘 거는 유형이 아닌 침투와 뛰어난 위치선정으로 골을 노리는 유형의 공격수였다. 그러나 네이마르가 부상으로 빠져서 왼쪽 윙어 자리가 비었고, 대체로 들어간 베르나르드는 결코 네이마르의 빈자리를 채울 수가 없었고, 중앙에서 볼을 운반해야되는 미드필더들은 죄다 투박한 타입인데다 독일의 미드필더진에 대항하기만도 벅차고, 거기에다 주 득점원이 되어주어야할 2선은 네이마르가 빠짐으로 인해 완전히 무게감이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프레드는 자신이 주 득점원인지, 아님 2선을 지원해줘야하는지 완벽하게 역할을 정하지 못했고, 스콜라리 감독도 아무런 방지책 없이 프레드 원톱, 2선 3명, 3선 2명, 포백으로 전술을 짰고 결국 독일전에서 참사가 일어났다.[8] 게다가 프레드가 월드컵 직전까지 활약을 하다 보니 상대팀들도 브라질의 전체적인 전술은 물론이고 프레드에 대해 분석을 하고 막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자 프레드도 힘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수 자체 능력은 호나우두 시절로 돌아가도 대표팀 내 공격진 옵션은 될 정도다. 실제로 프레드는 2006 월드컵 때도 대표팀 선수로 대회에 참가했다.[9] 그리고 호주전에서는 아드리아누가 이미 골을 넣어 리드를 잡은 상황에 교체로 들어가 막판에 골대를 맞고 흘러나온 공을 위치선정을 잘 해서 빈 골대에 밀어넣어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득점도 기록했다.
- 스콜라리 1기(2001.06~2002.06)
호나우두: 9골
히바우두: 8골
- 스콜라리 2기(2012.12~2013.08 기준)
프레드: 9골
네이마르: 7골
[1] 1위 2005시즌 프레드(14골), 2위 2002시즌 데이비드(13골), 3위 2010시즌 네이마르(11골)[2] 당시 벤제마는 리그 득점왕+MVP에 등극[3] 하지만 아쉽게 득점 2위를 한 건 아니다. 이 시즌 득점 1위는 그 다음 시즌에도 득점왕을 차지한 파울레타였는데 21골이나 넣었는데 프레드는 14골을 넣었다. 무려 7골 차이. 물론 파울레타는 리그앙에서 이전부터 잘 했던 선수고, 프레드는 이제 막 리그앙에 뛴 선수인데 이 정도 활약을 하고 우승을 한 건 잘 하긴 했지만.[4] 현재 언론이 프레드 이후의 플루미넨세 에이스인 스카르파에 대해 '넥스트 프레드 시대의 얼굴'이라고 부를 정도다.[5] 비공식 경기를 포함할 경우에는 3위, 비공식 경기 포함 역대 최다 득점자는 1950년대 레전드 와우두 마차두[6] 득점 수는 골든슈 수상자인 토레스와 같은 5골[7] 지금은 이 정도까지 비난 받지는 않는다. 참고로 브라질은 심할 경우 2경기만 부진해도 감독이 경질될 정도로 사람들 성격이 급한 곳이다. 실제로 평균 감독 재직 기간이 고작 5개월이다.[8] 사실 결과적으로 우승을 하긴 했지만 2002 월드컵 때 스콜라리 감독은 호나우두와 히바우두와 너무나도 클래스가 차이가 나는 선수들인 루이장과 에디우손이라는 선수들을 뽑았다. 물론 지오반니 에우베르와 아모로수가 남미 지역예선에서 기회를 줘도 부진했고 루이장과 에디우손은 기회를 줬을 때 알짜배기 활약을 했었다.[9] 다만 2006년 월드컵 때의 브라질 선수단이 결과적으로는 이름값은 높았을 뿐 속은 빈 강정이었다. 전술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호나우두는 점점 하락세를 타던 때였고 프레드보다 딱 한 살 많은 아드리아누도 이미 이 시점에서 자만해지고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슬슬 내려앉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