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비뉴

 

호비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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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코파 아메리카 MVP
호비뉴

호비뉴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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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전 세계 축구 이적료 1위
2007
페르난도 토레스
(3800만 €)

<color=#373a3c> 2008
호비뉴
(4300만 €)


2009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9400만 €)



[image]
<colbgcolor=#093697>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이름
호비뉴
Robinho

본명
호브송 지소자
Robson de Souza
출생
1984년 1월 25일 (40세)
브라질 상파울루 주 상비센치
국적
브라질 [image]
신체
172cm | 체중 68kg
직업
축구선수 (공격수[1], 미드필더[2] / 은퇴)
소속
<colbgcolor=#093697> 선수
산투스 FC (2002~2005)
레알 마드리드 CF (2005~2008)
맨체스터 시티 FC (2008~2010)
산투스 FC (2010 / 임대)
AC 밀란 (2010~2015)
산투스 FC (2014~2015 / 임대)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015)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2016~2018)
시바스스포르 (2018~2019)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2019~2020)
산투스 FC (2020)
국가대표
100경기 28골 (브라질 / 2003~2017 )
1. 소개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플레이 스타일
6. 사건사고/논란
6.1. 성폭행 논란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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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브라질의 축구선수. 네이마르의 어린 시절 우상이자, 한때 제 2의 펠레로 불렸던 선수였으나 불성실한 자기 관리로 대성하지 못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2002년 산투스 FC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데뷔 초부터 브라질 리그 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며 펠레자신의 후계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3]

2.2. 레알 마드리드 CF


2005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다. 이 때 루이스 피구가 쓰던 등번호 10번을 받았으니 어느 정도 기대를 모았는지 잘 말해 준다. 그리고 기대에 걸맞는 활약을 해 주었고, 특히 1월과 2월에만 8골을 넣으면서 팀의 크랙 역할을 맡았다. 다만 2월 이후 득점이 5월 4일이 되어서야 나왔다는 게 흠이다.[4] 어찌되었든 데뷔 첫 시즌에 51경기 12골을 넣으며 갈락티코 세대를 이을 주역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의 떠오르는 신예였던 리오넬 메시와 자주 비교될 정도였다. 특히 호비뉴는 브라질과 레알 마드리드 소속, 메시는 아르헨티나와 바르셀로나 소속이었기에 팬들이 이 둘을 많이 비교했다.
하지만, 2006-07 시즌을 앞두고 자신을 데려온 페레즈 대신 라몬 칼데론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부침을 겪게 된다. 칼데론 회장과 함께 부임한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단순하면서도 실리적인 접근 방식을 택하는 감독으로 변칙적인 플레이 리듬과 개인기가 강점이던 호비뉴와는 맞지 않았고, 이 시기 호비뉴는 주로 교체 자원으로 뛰었다. 06-07 시즌에는 41경기 8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카펠로 감독이 재미없는 축구를 펼친다는 이유로 해임된 이후 부임한 베른트 슈스터 감독의 밑에서 호비뉴는 반전의 기회를 얻는다. 2007/2008 시즌 슈스터 감독은 그 해 코파 아메리카에서 6골을 넣으며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끈 호비뉴에게 공격의 전권을 맡기는 한편[5] 수비 부담에서 해방시켜 공격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고, 호비뉴는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듯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팀을 2년 연속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6] 07-08 시즌에는 리그 32경기 11골, 국왕컵 2경기, 챔스 6경기 4골, 기타 2경기 등 총 42경기 15골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그러나 누구나 레알의 다음 에이스는 호비뉴라고 생각하던 이 때, 칼데론 회장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하기 위해 '호비뉴 + 현금'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미는 위엄을 선보였다.

2.3. 맨체스터 시티 FC


2008년 여름 이적 시장을 후끈 달군 이 트레이드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마음이 돌아선 호비뉴는 레알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떠나기로 결정한다.
가장 먼저 연결된 팀은 첼시 FC로 호비뉴에게 아낌없이 돈을 퍼부을 준비가 된 첼시와 선수의 신뢰를 잃어버린 채 가격 흥정만 하던 레알, 사실상 얘기는 다 끝났고 첼시 유니폼 들고 사진만 찍으면 끝난 상황으로 보였지만 이적 마감인 9월 1일, 호비뉴는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했다.[7] 많은 팬들이 호비뉴가 맨체스터 시티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헷갈린 것이 아니냐고 농담할 정도로 이 당시 맨시티는 중하위권의 그저 그런 팀으로 인식되었다.
돈만 많은 졸부 클럽이라며 조롱받던 맨시티에게 전환점이 된 영입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나, 실제 호비뉴의 영입은 인수 당일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탁신이 팀을 팔아넘기려 하면서 이런저런 루머는 흐르고 있었으나 인수의 주체가 중동의 거부 왕족이라는 사실이 확정난 것은 이적 시장 마지막 날로,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팬들에게 알려진 일이었다. 이후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세계적인 스타 호비뉴의 영입까지 성사된 것. 출근하러 나가면서 중동 왕자가 팀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을 틀어 보니 호비뉴가 영입된 꼴.
이후 맨시티는 성공할 때까지 수많은 추가적인 영입을 거쳐야 했으나 저런 드라마틱한 스타트를 끊은 것이 호비뉴이기 때문에 본인의 활약은 기대에 못 미쳤고 이적 자체도 돈 때문에 이뤄진 흔적이 역력했는데도 지금까지 맨시티의 전환을 상징하는 영입으로 회자되는 것이다.
맨시티 이적 초반에는 대활약을 하였지만[8] 이후 영국 생활 부적응 및 주전 출장 문제[9]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며 산투스로 임대를 가게 된다. 결국 맨시티에서는 리그 기준 41경기 14골, 국내 컵 대회 및 대륙컵 종합 53경기 16골에 그쳤다. 이적 당시 받았던 기대와 초반 활약상에 비하면 매우 아쉬운 결과.

2.4. 다시 산투스 FC


산투스에서 예전의 날카로운 모습을 되찾으면서 다시금 호비뉴의 거취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호비뉴는 산투스에서 계속 뛸 마음이 있었지만, 맨시티는 임대를 연장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2010년 8월 30일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2.5. AC 밀란


2010-11 시즌 시작 전 AC 밀란으로 이적한 후 몇몇 경기에 교체 출전했는데, 이런저런 트러블로 인해 월드컵 이후 훈련을 못한 것 때문인지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폼이 올라오며 날카로운 드리블과 패스 능력으로 밀란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2010-11 시즌, 레알 마드리드 시절의 폼을 되찾으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리그에서만 14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세리에 A 우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11-12 시즌 초반에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가 부상이 회복되고 나서 알렉산드르 파투, 안토니오 카사노 등이 부상으로 아웃되며 많은 경기에 출장하고 있다. 또한 리그 경기 유벤투스 FC전에서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면서 살아나는 듯 했으나, 이후에는 그냥 후반전에 대타로 나오면서 간간히 몸을 푸는 것으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지난 시즌에 비해 매우 부족했던 활약상이다.
12-13 시즌에는 리그 23경기에 출장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보다도 부진했고 교체 출전이 많아서 존재감이 부족했다. 점차 팀 내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13-14 시즌 리그 첫 경기에 선발로 기용되면서 뜬금없이 부활하더니 현재 팀의 주전 공격수으로 기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리그 8라운드까지 2골 4도움으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다. 챔스 조별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비록 메시에게 동점골을 먹히며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났지만, 카카와 함께 어떻게 공격 루트를 만들어 내며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시즌 초반 리그 성적이 영 좋지 않다.
그리고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본인도 팀과 함께 다시 부진에 빠지며 예년과 비슷한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고, 팀은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다음 시즌 구상에서 멀어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14년 8월 7일 산투스 FC로 다시 임대되었다.

2.6. 산투스 FC 3기


AC 밀란이 임금을 지불해 가며 임대를 보냈고 호비뉴는 산투스 FC에서 3번째 생활을 보내게 됐다. 데뷔전에서는 패배했지만 33경기 11골이라는 생각보다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7. 광저우 헝다


2015년 광저우 헝다에 입단했다. 국내 축구 팬들은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충격과 공포로 여기는 분위기.
리그 후반기로 접어든 시점에 이루어진 이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고, 리그 9경기 3골을 기록했다. 팀당 외국인 선수 3명 + 아시아 쿼터 1명으로 외국인 선수 등록 제한이 있는 ACL에서는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2015 시즌 종료 후 반 년 만에 중국을 떠났다.

2.8.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이후 스완지 시티EPL 클럽들과 브라질 여러 클럽의 관심을 받았고, 결국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 입단하며 브라질로 돌아갔다. 계약 기간은 2년이며 주급은 약 1억 7천만 원이라고 한다.

2.9. 시바스스포르


2018년 1월 터키 쉬페르 리그 소속 시바스스포르에 입단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이며, 등번호는 70번을 받았다.
예니 말라티야스포르와의 원정 경기에서 후반 교체 출전으로 데뷔전을 치렀고, 두 번째 경기인 카이세리스포르와의 경기 역시 교체 출전하여 터키 리그 데뷔골을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반 시즌 동안 14경기 4골을 기록하며 무난한 활약을 보였다. 이후 2019년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로 이적했다.

2.10. 이스탄불 바샥셰히르 FK


32경기 4골이라는 아쉬운 활약을 보였고 2020년 8월 7일, FA 신분이 되었다.

2.11. 산투스 FC 4기


산투스로 3번째 복귀가 10월 10일(현지시각) 확정되었다. 재정난에 시달리는 팀을 위해 월급을 1500헤알(한화 31만원)만 받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10월 16일(현지시각) 계약이 종료되면서 복귀한 그의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성폭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어 산투스의 스폰서들이 거세게 반발했다는 것이 이유.

3. 국가대표 경력


2003년 7월 13일, 골드컵 멕시코전을 통하여 A매치에 데뷔하였고,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조별리그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이후 계속해서 대표팀에 발탁되며 2006 FIFA 월드컵 독일과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2006년 월드컵에서는 득점은 커녕 카카, 호나우지뉴 등 초호화 공격진 멤버들에 밀려 벤치만 달구고 있었고, 브라질은 8강에서 노장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이 이끌던 프랑스에게 무릎을 꿇으며 8강에서 탈락했다.
200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6골을 넣어 득점왕을 차지하며 브라질의 우승에 기여했다.[10] 당시 브라질은 카카호나우지뉴가 휴식을 이유로 대회 참가를 고사했고, 제 호베르투까지 국가대표 은퇴 선언을 하면서 전력 공백이 있었던 데 반해 아르헨티나는 풀 전력으로 나와서 브라질의 우승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코파 아메리카에서 호비뉴는 좌측 프리 롤을 맡았는데, 카카와 호나우지뉴가 없었던 게 오히려 호재로 작용했다. 카카, 호나우지뉴, 호비뉴 모두 왼쪽에서 중앙으로 들어가는 플레이를 즐겨 하는 선수들이고 셋을 한꺼번에 경기에 내보내면 동선이 겹쳐서 역효과가 나는 문제점이 있었다.[11]
개막전에서 멕시코에게 0-2로 완패한 브라질이었지만 호비뉴는 칠레와의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몰아쳤고, 에콰도르와의 3차전에서도 PK로 결승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브라질이 조별리그에서 기록한 4골이 모두 호비뉴의 발끝에서 나왔다. 칠레를 다시 만난 8강전에서도 호비뉴는 2골을 추가했다.
우루과이와의 준결승전[12]과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는 득점하지 못했으나 상대 수비의 집중 견제를 받아 다른 선수들이 보다 수월하게 득점할 수 있게 했다. #
한편 대회 당시 최강으로 평가받던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게 0:3으로 패배했고, 이때부터 리오넬 메시의 메이저 대회 잔혹사가 시작되었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후 국대 소집이 뜸하면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도 출전을 못 하며 잊혀졌다가 2016년에서 보인 리그에서의 좋은 활약에 힘입어 2017년 다시 국대에 발탁,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그의 생일인 2017년 1월 25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샤페코엔시 추모 경기가 그의 100번째 A매치가 되었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A매치 주간이 아니었던 날에 경기가 열렸던 탓에 해외파 소집이 어려워 국내파 위주로 팀을 구성하였고, 호비뉴도 소집되었다.
비록 자기관리도 전혀 안 되었고, 사고도 많이 치고, 기복도 심해서 대성하지는 못했지만, 브라질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센추리 클럽 가입자가 되었다.[13]
2017년 이후 아예 소집이 안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은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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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오버플립 플랩을 비롯한 화려한 드리블과 부드러운 볼 터치로 리오넬 메시 이전까지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로 불렸으며, 매우 부드러운 스텝 오버가 그의 시그니처이다. 심지어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너무 많은 스텝오버를 했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은 적도 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브라질리언 드리블러.
좁은 지역에서 밀집한 상대 수비를 가볍게 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눈이 즐겁다. 다만 최전성기 시절에도 월드클래스 기준으로는 득점력이 상당히 떨어지고 스피드도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다. 스프린터나 스코어러 타입이라기보다는 유연한 드리블로 수비진을 뒤흔든 다음에 공간이 생기면 동료 선수에게 패스를 하여 골을 노리는 타입에 가깝다. 실제 패스 센스도 좋은 편. 또한 기복도 좀 있는 편이어서 꾸준히 활약을 이어가지 못했다.
현역 선수들 중에서는 같은 브라질 국적의 루카스 모라와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평이 많지만, 세세히 따져보면 둘의 플레이스타일은 꽤 다른 편이다. 모우라는 호비뉴처럼 화려한 발재간보다는 기본기에 좀 더 충실하면서 간결한 방식의 드리블을 선호하는 편이며, 피지컬도 더 좋다. 모우라는 현 소속 팀에서 윙어로 주로 출전하며, 호비뉴 또한 윙어 포지션으로 플레이는 가능했으나 본인이 선호하지 않아 레알 마드리드 시절부터 맨시티 시절까지 감독과의 불화가 잦았고 자연히 폼 저하로 이어졌다. 호비뉴가 가장 선호하던 포지션은 주로 투톱에서 약간 쳐진 중앙 공격수 위치. 그리고 클래스를 떠나, 멘탈은 확실히 사생활도 깨끗하고 감독과의 불화도 잘 일으키지 않는 모우라가 훨씬 좋다.

6. 사건사고/논란



6.1. 성폭행 논란


2009년 리즈의 나이트 클럽에서 미성년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난 후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2013년 밀라노에서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혐의가 인정되어 밀라노 법원으로부터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대해 호비뉴는 변호인을 통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나는 성폭행 사건에 가담하지 않았고, 혐의에 대해 이미 방어권을 행사했다"며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브라질과 이탈리아 간에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실제 이탈리아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호비뉴, 성폭행 혐의로 징역 9년 선고

7. 여담


  • 별명은 초딩요. 상당한 동안일 뿐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칭찬이나 자신에게 적합한 포지션에 배치하면 맹활약하지만 팀을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하거나 자신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는 인상을 주면 부진하는 면이 강하다.
  •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영입할 수도 있었다. 산투스 유스 시절 브라질에 스카우트하러 갔던 수원 스태프가 당시 16세였던 호비뉴를 보고 영입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가격도 그가 생각하기에는 적절했다. 그러나 윗선에 보고를 하자 겨우 16세를 그 가격에 영입할 수는 없다는 반응이 돌아왔으나 리그가 열려 17세가 된 호비뉴는 전반기에 교체로 뛰더니 후반기에는 산투스에서 풀타임을 뛰었다고 한다.

[1]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2] 공격형 미드필더[3] 펠레가 자신의 현역 시절을 바쳤던 산투스를 방문했을 때, 훈련 도중 한 메마른 아이의 엄청난 활약을 보고 잠시 훈련을 중단시킨 그는 "눈물이 다 나오는구나. 널 보니 내 생각이 난다."며 그 아이를 격려했다. 그 아이가 바로 호비뉴였다고 한다.[4] 애초에 호비뉴는 골을 많이 넣는 스타일이 아니다.[5] 라인업만 보면 오른쪽 윙어 자리에 배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윙어를 두지 않은 채 중앙에서 뛰는 호비뉴와 2명의 중앙 공격수로 변칙적인 3톱을 구성했다. 호비뉴는 전 시즌에 카펠로와 불화가 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카펠로가 자신을 전형적인 윙어로만 쓰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6] 2007년 발롱도르에서 9위를 기록했다. 이것이 최고 발롱도르 순위 기록이다.[7] 첼시의 CEO인 피터 캐넌이 호비뉴의 영입을 공개적으로 자신하는 발언을 하고, 런던에서 뛰고 싶다고 화답하는 호비뉴. # 심지어 첼시 공식 스토어에 호비뉴의 유니폼이 올라와 있는 해프닝까지 벌어질 정도로 당시 호비뉴의 첼시 이적은 단순한 찌라시로 보기 힘든 측면이 많았다. 막판에 첼시가 맨시티의 35m보다 더 높은 이적료를 제시했지만 레알은 챔스에서의 부메랑을 우려해서 당시만 하더라도 챔스 진출조차 못 하던 맨시티로 이적시켰다.[8] 당시 감독인 마크 휴즈는 호비뉴를 세컨드 스트라이커 자리에 배치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이는 전 시즌 맨시티 공격의 핵심이었던 공격형 미드필더 엘라누가 한 시즌 만에 후보로 내려가는 문제를 낳았다.[9] 마크 휴즈가 경질되면서 새로 부임한 로베르토 만치니가 호비뉴에게 왼쪽 윙어를 맡게 하였고 카펠로와 이 건으로 싸웠던 적이 있던 만큼, 이번에도 호비뉴가 거부하면서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10] 2007년이 호비뉴의 최전성기였다. 06-07 시즌 전반기보다 후반기 활약이 더 좋았고, 리그 우승에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까지 했으며 그 활약이 07-08 시즌 초반까지 이어졌다. 07-08 시즌 후반기에는 아르연 로번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다.[11] 2006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8강에 그친 건 카카와 호나우지뉴가 공존이 되지 않아서 공격진의 시너지가 나지 않았던 것도 컸고 끝끝내 대표팀에서 둘의 공존은 실현되지 못했다.[12] 승부차기로 이겼다.[13] 호비뉴와 비슷하게 자기관리가 개판이었던 호나우두, 호나우지뉴도 1~2경기 차이로 아깝게 센추리 클럽 가입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