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바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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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 특별한 역할에 구애받지 않는 프리롤 선수이다. 주로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다. 호나우두 등과 함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브라질 축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또한 FC 바르셀로나에서의 맹활약으로 바르셀로나의 전설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히바우두의 별명은 그의 왼발 플레이스타일에서 기인한 악마의 왼발이다.내가 유스 클럽에 있었을때 나는 호마리우의 플레이를 보면서 자랐고 1군에 콜업됐을 당시 호나우두의 플레이를 목격했으며 호나우지뉴와 함께 필드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최고는 '''히바우두'''다.
- 차비 에르난데스
2. 유년기
히바우두는 브라질 파울리스타에서 태어난다. 그는 다른 브라질 스타들처럼 빈민가에서 축구스타의 꿈을 키워나갔고 지역팀인 파울리스타의 유소년팀에서 실력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나 1989년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히바우두는 좌절하지 않고 꿈을 계속 이어갔고 1991년 산타크루스 FC에서 프로 데뷔를 한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데뷔하자마자 26경기 16골의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준 그는 바로 모지미링을 거쳐 코리티안스로 간다. 또 21경기 11골을 넣은 그는 파우메이라스로 이적한다. 총 3시즌동안 97경기에서 60골을 넣으며 브라질 주리그 우승 2회와 전국리그 우승 1회를 경험했고 브라질리그를 떠난다. 그가 이적한곳은 스페인의 데포르티보였다. 데포르티보는 당시 그래도 라리가에서 꽤 먹어주는 중상위권 팀이었고 히바우두는 그에 걸맞는 활약을 했다. 그 결과 데포르티보는 리그 3위로 번쩍 뛰고 만다. 유럽 특히 스페인 내에서는 난리가 났고 모든 빅클럽들이 그를 노렸다.
물론 당시 라 리가를 제패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데포르티보에서는 차기 시즌을 히바우두 중심으로 구상했기 때문에 히바우두를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호나우두를 인테르로 이적시키고 호나우두의 대체자를 찾던 FC 바르셀로나가 히바우두의 바이아웃을 질렀고, 그로 인해 히바우두는 데포르티보를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3]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히바우두는 탄탄한 성공가도를 달린다. 바로 전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승점 2점차로 리그 우승을 빼앗겼기에 바르셀로나는 독기를 잔뜩 품고 있었고, 히바우두 -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 루이스 피구로 이어지는 스리톱[4] 을 형성하고 뒤에서 과르디올라가 킬패스를 쭉쭉 질러주는 공포의 스쿼드를 갖추게 된 바르셀로나는 이듬시즌 4년만에 라리가 챔피언 자리를 탈환함과 동시에 국왕컵에서도 우승, 한 시즌 '''더블'''을 이룬다.
그 다음시즌인 1998-99 시즌도 리그를 우승하며, 라리가 2연패와 함께 본인은 국대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미친 활약과 겹치며, 트레블한 데이비드 베컴을 제치고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게 된다.[5]
2000-01 시즌은 53경기 36골이라는 미친 기록을 찍어내지만 아쉽게 라울에게 밀려 득점 2위로 피치치는 얻지 못한다. 이 시즌에는 특히 팀의 상황이 개판(피구 레알감+팀노쇠화)이었고 마지막 리그 최종전에 팀의 챔스 진출권이 걸려있었다(무조건 이겨야 챔스진출가능). 결과는 1:0>1:1>2:1>2:2>3:2로, 바르샤 승. 후반 89분, 히바우두가 극적인 해트트릭을 성공하고 특히 마지막골은 오버헤드 킥으로 넣는 기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인생경기를 펼침. 하지만 그 이후에는 반할 감독과의 불화로-[6] 결국 주전스쿼드에서 점점 빠지게 되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우승으로 아직 건재함을 알리며(5골득점+호나우두의 득점을 대부분 어시스트) 30살의 나이에 AC 밀란으로 이적한다.[7]
히바우두는 주전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전술상에 녹아들지 못했다. 당시 AC밀란은 셰브첸코와 인자기가 주전공격수로 뛰고 있었고, 미드필더에도 후이 코스타가 지키고 있었는데다, 피를로가 포텐이 제대로 터져,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뤄냈다.
히바우두도 나름 두자리수 득점을 하며 우승에 기여한다.
그의 인생의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경험한것이다. 하지만, 03-04시즌부터는 AC밀란이 영입하자마자 뛴 연습경기에서부터 돋보였던 카카를 두고[8] , 이미 30대가 넘어간 히바우두를 기용할 이유는 없었기에, 벤치신세가 되며 주전 선수로 뛰기 위해 떠돌다 크루제이루 EC를 거쳐 2004년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올림피아코스 FC로 이적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림피아코스에서의 맹활약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혼자 미쳐 날뛰면서 레알 마드리드나 리버풀 등 온갖 강팀들을 때려부수는 활약을 보였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거의 리버풀을 때려잡고 2라운드에 진출할 뻔했으나 리버풀의 스티븐 제라드의 극적인 중거리가 터지면서 고배를 삼키게 된다. 그리고 2007년에는 올림피아코스 생활을 마치고 수페르리가 엘라다의 AEK 아테네로 이적해 1시즌동안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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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8년 또다시 이적을 감행했는데, 새로 입단하게 될 팀은 우즈베키스탄의 FC 분요드코르. 당시 분요드코르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아시아 축구계의 신흥강호로 올라서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고, 히바우두 영입에 이어 감독으로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앉히며 일약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세로 2009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렸으나 포항 스틸러스와의 8강전에서 2차전 연장 혈투까지 가는 끝에 결국 4-5로 패해 좌절되었고, 2010년도 알 힐랄에게 밀려 중도하차했다. 이후 팀에서 방출되었다가 2011년 상파울루와 1년 단기계약을 맺었다.
2011년, 커리어 내내 영혼의 파트너라 불렸던 호나우두가 은퇴함에 따라 이제 히바우두 역시 은퇴를 준비하는 듯했으나 페이크였고 2013년 기준으로 자신의 커리어 15번째 팀인 브라질 1부리그 상 카에타누에서 뛰었다. 2014년 브라질 3부리그 모지미링 FC로 이적하였다.
저니맨이라고 하지만, 이미 발롱도르,챔스우승,리그우승,월드컵우승 이룰건 다 이룬 선수가 여자,술,담배에 관심을 가지지않고,축구선수 생활을 은퇴하고도 남았을 40대임에도 축구를 계속하는걸 보면 축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수인것 같다.
끝내, 브라질리그에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경기도 뛰어본 히바우두는 2015년 41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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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한국시간으로 3월 16일, 은퇴를 선언했지만, 2015년 7월, 모지미링 구단주 히바우두는 팀의 성적이 좋지않자 스쿼드에 들어가기 위해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팀원들은 저를 보고 할아버지라 부릅니다. 저도 그게 그리 싫지는 않아요. 저는 현재 경기를 뛰기 보다는 애들에게 조언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요... 그래도 귀를 잡아 땡겨가며 억지로 조언을 해주지는 않죠. 은퇴...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선수에게 있어 은퇴는 첫 번째 죽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저는 절대 죽지 않을 겁니다. 선수는 자신이 언제 은퇴해야 하는 지에 대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전 아직 아닙니다."'''
2013년 상 카에타누에 있을 당시의 인터뷰 中
'''그리고 경기에 출전해 팀의 시즌 첫 승을 이끌었다.''' #
2015년 7월 8일 나우티쿠와의 11라운드 경기에서 공격포인트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환상적 프리킥을 보여주는 등 2:1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7월 15일, 페널티 킥으로 '''현역 복귀 후 첫 골'''을 넣었다고 한다. 원래 자신이 안 차려고 했으나 관중이 히바우두의 이름을 연호해서 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경기에서는 히바우두의 아들인 히바우지뉴가 멀티골을 넣었다. 결국 팀은 그 날 3대 1로 승리했다.
2015년 8월 14일, 히바우두는 왼쪽 무릎 통증이 재발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2번째 은퇴를 선언한다고 구단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3.2. 국가대표 경력
1994년 미국 월드컵에는 자국에서의 대활약에도 아쉽게 엔트리에는 포함되지 못한다. 호나우두가 포함된거에 비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과 1997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들어가기는 하지만 몇경기 나오지 못해, 활약이 미미했다.
진짜 그의 활약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다. 당시 브라질에는 호나우두의 파트너에는 베베투, 2선 미드필더에는 레오나르두 아라우주와 히바우두 본인이 있었다. 또 든든한 주장이자 지난 대회 우승의 주역 둥가와 아우다이르, 카푸와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양쪽 풀백으로 버티고 있던 어마무시한 팀이었다. 그는 백넘버 10번을 받았고 주전으로 뛰기 시작한다. 브라질은 조별예선을 3경기를 2승 1패로 올라왔고 히바우두는 예선 3경기에서 1골을 기록한다. 16강에서 만난 칠레는 삼파이우와 호나우두가 2골씩 넣으며 4-1로 격파한다. 8강에서는 덴마크에게 1-0으로 지고있는 상황, 히바우두가 역전골과 결승골을 넣으며 3-2로 역전승을 거뒀고 4강 상대 네덜란드는 호나우두의 1골에도 1-1로 승부가 나지 않자 승부차기 끝에 승리한다. 그렇게 오른 결승전 상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지네딘 지단과 '철의 포백'이 버티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는 기적적으로 올라온 프랑스였기 때문에 압도적인 모습으로 올라온 브라질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히바우두와 호나우두는 경기 내내 이전경기와는 다른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팀은 3-0으로 대패하고 만다. 히바우두는 그래도 3골 2어시로 꽤 괜찮은 스탯을 찍었다.
1년 뒤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우승을 차지하는데 히바우두는 호나우두와 함께 5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호나우두-히바우두 투톱의 수많은 골은 거의 다 히바우두의 어시스트였다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어시도 많이 해냈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대회 MVP까지 석권하는 기염을 토해낸다. 브라질은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하며 다음 월드컵 역시도 기대되었다.
그러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팀의 조직력 문제로 말이 많았다. 지역예선도 힘겹게 올라온 상태였고 호나우두는 부상에서 복귀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하지만 본선에서 그들은 각성한다. 당시 공격의 삼각편대 3R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히바우두는 막강한 모습을 보여줬고 조별예선에서는 C조에 걸려 터키[9] , 중국, 코스타리카를 모두 꺾고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라간다. 히바우두는 3경기에서 3골을 넣는다. 16강에서는 벨기에를 상대로 히바우두와 호나우두의 2골로 2-0 승리, 8강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또 다시 호나우지뉴와 히바우두가 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거둔다. 다음 4강 터키전에서 호나우두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고 결승에서 독일을 만난다. 당시 독일은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었지만 호나우두가 이를 뚫어내며 2골을 기록했고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데 성공한다.
4. 플레이 스타일
히바우두는 미드필더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공격수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 스트라이커부터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유연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선수였다. 투톱이나 쓰리톱에서의 한 자리를 차지한 상태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는 선수이다.
익히 악마의 왼발로 알려졌을 정도로 '''왼발슛과 크로스의 정확도와 파워 모두 최고 수준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강력한 왼발은 프리킥, 중거리 슛, 페널티 킥, 크로스는 물론 아크로바틱한 바이시클 킥 역시도 위력적이다. 심지어 거의 모든 볼터치를 의식적인지 본능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왼발로만 하며, 차는 것도 전부 왼발이다. 발 하나를 거의 안 쓰는데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 멋진 플레이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는 헝가리의 유명한 레전드 페렌츠 푸스카스와 흡사하다. 물론 둘이 뛰었던 팀은 철천지 원수긴 하다.
몸싸움도 주력도 뛰어났다. 주력의 경우는 사실 좀 애매한데, 최고속도는 굉장히 빠른 편이고 최고속도에서의 순간적인 감속능력 역시 뛰어나지만, 가속도와 민첩성이 떨어진다. 전 국대 선수였던설기현을 생각하면 비슷하다. 등지는 플레이 등의 피지컬로 수비수들 사이의 좁은 틈새에서 자신의 공간 확보 후 왼발 테크닉으로 폭풍 돌파나 패스로 수비라인을 박살냈다.[10] 즉 말하자면 무시무시한 킥력에 덤으로 몸빵과 주력을 얹은 선수다. 수비 입장에서는 들러붙자니 이긴다는 자신이 없고 좀 떨어져 있자니 발도 빠른데 킥력도 좋다.
아르연 로번이 자주 쓰는 드리블 스킬로 유명한 컷 인 드리블의 달인이기도 하다. 로번의 컷 인 드리블이 몇 번을 연속해서 같은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서 수비진의 허점을 찾는 형태의 드리블이라면, 히바우두의 컷 인 드리블은 꺾어들어가는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언제든지 슈팅할 수 있는 각을 만들어버리는 형태이다. 또 로번보다 컷 인 동작이 훨씬 역동적이라는 것도 차이점이다. 히바우두는 상체각도를 매우 자주 바꿔가며 온 몸을 페이크 동작에 사용한다.
또한 히바우두는 유독 큰 경기에 강했는데, 딱히 멘탈甲이라 불릴만한 강한 멘탈을 지닌 선수는 아니었고, 오히려 호나우지뉴처럼 경기를 '''즐기는''' 타입이었지만 그는 유독 큰 경기, 혹은 위기 상황에 강했다.
상술한 대로 바르셀로나에 합류하자 마자 리그 트로피와 국왕컵 트로피를 안긴 것으로 시작해 1999년 루이 판할 감독의 대삽질[11] 로 바르샤 스쿼드가 휘청댈 때도, 히바우두만은 변함없는 활약을 하며 해당 시즌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따냈다. 물론 직후 반 할은 경질되었다. 지난 2010년 11월 어느 꼬마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는 그의 몫이었다. 통산 27골이다.
그리고 지금도 회자되는 00-01시즌 리그 최종전. 팀 분위기가 개판이 되다 못해 막장가도를 달리던 중 난적 발렌시아 CF를 홈으로 불러들여 마지막 38라운드를 치러야 했다. 그때까지 바르샤는 발렌시아에 승점 3점이 모자란 5위였고, 무조건 이겨야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날, 히바우두는 영웅이 되었다. 결과는 '''히바우두의 해트트릭'''으로 3-2 승리.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일격이 된 그때 그 '''바이시클 킥'''은 기회가 된다면 꼭 찾아보라. 숨 넘어간다. #
그리고 이러한 그의 위기대처 능력은 월드컵 국대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특히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그 진가를 볼 수 있었다. 조별예선 1차전인 터키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역전골을 넣어 2:1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잉글랜드전에서도 동점골을 넣어 역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12] 그리고 월드컵 내내 기존의 히바우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탐욕이라는 단어가 꼭 따라붙던 기존의 캐릭터와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게 호나우두의 득점력을 배가시키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잉글랜드전에서 동점골을 성공시켰듯이 호나우두의 능력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는 자신이 결정하는 모습이나, 추하게까지 비춰졌던 할리우드 액션 등은 저게 정말 그 히바우두인가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날카로운 모습이었다.
다만 히바우두의 가장 큰 약점으로는 탐욕을 꼽을 수 있다. 선수 생활의 최전성기인 바르셀로나나 브라질 국가대표 등에서 쉐도우 스트라이커나 인사이드 포워드 등의 역할을 많이 했지만 원래는 골 사냥꾼에 가까운 선수이고 멘탈리티 역시 그러했다. 물론 본인의 능력이 출중해서 큰 문제는 없었지만 본인이 결정적인 순간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컸고 그렇게 날려먹은 찬스도 제법 되는 편이다. 요한 크루이프는 히바우두를 두고 훌륭한 테크니션임에도 포지셔닝이 좋지 않아 항상 어렵게 플레이를 한다고 깠다.
5. 2인자
흔히들 발락을 '''콩락'''이라 부르며 축구계 2인자의 대명사로 칭하는데, 이 사람 역시 콩라인으로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뭐 결국 둘 다 축구로 정점 찍은 사람들이니 우스개소리긴 하지만. 히바우두의 경우 브라질의 10번으로 1998년 월드컵 준우승을 시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우승에 기여했고 99년 한 해는 독보적인 에이스였다.[13] 그리고 발락은 히바우두가 팀 내 2인자 이미지가 컸던 것에 반해 독일의 에이스로서 여러 차례 독일 올해의 선수 수상을 했지만 아무래도 국대가 준우승에 머물렀던 점, 팀 우승도 첼시 시절 한 번을 제외하면 왠지 당연해 보이는 뮌헨 시절에 몰려 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겠다.
히바우두는 놀라운 공격 포인트에 비해 전성기가 짧은게 옥의 티라면 옥의 티였다. 1996년 올림픽 국가대표를 시작으로 1997년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도 출전했지만 그 때는 아직까지 호마리우가 건재했던 시기였고 호마리우가 은퇴한 때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약 5년 간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줬지만 아쉽게도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국대에 선발되지 않은 점이 그를 콩라인 반열에 들게 한 큰 이유일지도.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의 스트라이커였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약간 비슷한 신세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데포르티보와 FC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를 완전히 휘어잡았던 왼발신이었음에도 네임밸류가 잘 알려져있지 않은 편인데, 다른 건 둘째치고 '''소속팀에서 에이스로 군림했음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갖는 상황'''이 커리어 내내 지속되었다. 다만 이전 서술에서는 사람들이 루이스 피구를 더 주목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서술'''로 히바우두가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네임밸류도 피구보다 앞섰다. 혹자는 피구가 3년 연속으로 외국인 선수상을 받은거를 근거로 드나 피구가 드리블과 플레이메이킹 등으로 평점은 더 높았기 때문에 당시 평점으로 주던 돈발롱 mvp를 가져간 것이지 명실상부 에이스는 히바우두였다. 다만, 혼자 누렸어야할 스포트라이트를 분명히 피구 등 다른 선수들과 나누어 갖는 상황이 벌어졌던건 사실이고 일개인 득점랭킹 또한 97-98, 98-99, 00-01시즌 리그 득점랭킹 2위를 차지했다. 특히 00-01시즌의 활약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골 차로 2위였다.
브라질 국가대표에서도 다를 건 없다. '''기세등등하게 국가대표에 승선했을 때는 밤새 술마시며 클럽을 전전하면서도 미친 듯이 골 넣어대는 어떤 아저씨가 버티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한물 가자 이번에는 황제라는 양반이 등장해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고, 가뜩이나 늙어가는 처지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웬 외계인 및 엄친아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괴물까지.'''[14]
1998 월드컵에서는 '''3골 2어시스트''', 2002 월드컵에서는 '''5골 1어시스트'''를 찍는 활약을 펼쳤음에도 그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그에게 오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15]
그러나 브라질이 원래 그런 동네고 자기 자신 역시 다른 동네 같았으면 국대 붙박이였을 사람들 앞길 막은 건 마찬가지이다. 당장 베베투만 해도 노구를 이끌고 참가한 98년 거의 경기마다 교체당했으면서도 히바우두와 같은 수의 득점을 올렸다. 자르데우, 지오반니 에우베르, 마르시오 아모로소, 아일톤 곤칼베스 다 실바 같은 유럽 4대 리그 득점왕들조차 히바우두와 전성기가 겹쳐서 쓸쓸한 국대생활을 보냈다. 이들보다 한 끗발 떨어지는 선수들이 국가대표를 노리기는 거의 언감생심에 가까웠으니[16] 남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는 히바우두도 남의 앞길 많이 막은 셈이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SE 파우메이라스 (1994~1996)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1994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94, 1996
- AC 밀란 (2002~2003)
- 코파 이탈리아: 2002-03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2-03
- UEFA 슈퍼컵: 2003
- 크루제이루 EC (2004)
- 캄페우나투 미네이루: 2004
- FC 부뇨드코르 (2008~2010)
-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2008, 2009, 2010
- 우즈베키스탄컵: 2008, 2010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2002
- 코파 아메리카: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997
- 엄브로컵: 1995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99
- FIFA 올해의 선수: 1999
- 옹즈도르: 1999
- FIFA 100: 2004
- FIFA 월드컵 실버슈: 200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98, 2002
- 코파 아메리카 MVP: 1999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999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9-2000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17] : 1997-98
- 코파 델 레이 득점왕: 1997-98
- 수페르리가 엘라다 최우수 외국인 선수: 2006, 2007
- 우즈베키스탄 슈퍼리그 득점왕 : 200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99
- 옹즈 드 옹즈: 1998, 1999
- 트로페오 EFE: 1998-99
- FIFA XI: 2002
- ESM 올해의 팀: 1998-99, 1999-2000
- lFFHS 최고의 골: 2000
- 볼라 지 프라타: 1993, 1994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7. 여담
- 히바우두의 아들 히바우디뉴[18] 도 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브라질 리그에서 얼마 안있고 일찍 해외로 진출했다. FC 디나모 부쿠레슈티로 이적하여 리그에서 30경기 5골을 넣으며 그렇게 나쁘지 않은 첫 시즌을 보냈고, 2018년에 불가리아의 레프스키 소피아 소속이 되었다. 2019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게오르게 하지가 구단주 겸 감독으로 있는 비토룰 콘스탄차로 임대를 오게 되었다. 하지의 지도 아래 꽃을 피운 선수들이 다수임을 봤을 때 히바우지뉴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아직 나이가 젊은것을 감안하여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2020년에는 폴란드 엑스트라클라사의 크라코비아로 이적.
- 2015 코파 아메리카 칠레에서 브라질이 8강에서 탈락하자 쓴소리로 비난했다. "요즘은 브라질 국대에 아무나 들어온다. 나만 해도 2006년 월드컵 당시 그리스 리그나 뛴다고 하여 퇴물처럼 취급되어 국대팀 선수가 되질 못했다.[19]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적어도 30년은 브라질 국대팀이 발전이 없을 것이다." 이외에도 요즘 축구는 예전만 못하다, 퇴보했다는 식의 인터뷰를 간간이 하며 눈길을 끌고 있다.
- 캡틴 츠바사 road to 2002에서 주인공 츠바사의 포지션 라이벌이자 조언자 정도의 위치로 등장했으며, 작품 내에서 츠바사와의 공존에 성공한다.[20]
- 폐인 양성게임으로 악명높은 풋볼 매니저에서 불혹의 나이지만 능력치가 매우 높은편이라 에디터로 나이를 의도적으로 낮춰 사용하는 유저들이 많다. 나이 때문에 신체 능력은 형편없는 상태에서 기술/정신 부분만 굉장한 상태인데,[21] 나이를 낮춰버리면 안습했던 피지컬이 미친듯이 상승하면서 전천후 괴물이 탄생한다.[22]
- 2019년 5월 22일, 히바우두가 네이마르에 대한 언급을 했다. 히바우두는 네이마르가 바르샤를 떠난게 최대의 실수라고 했다.
[1] 전천후 프리롤 공격수로 뛴다. 투톱으로 배치 될 때 전형적인 스트라이커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며, 스트라이커 보다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와 비슷한 역할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인다. 2선과 전방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움직이며 플레이메이킹과 득점을 노리는 프리롤 포워드이다. 기본적으로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제로톱 등등 거의 모든 공격수 역할이 가능하다.[2] 공격형 미드필더[3] 데포르티보 팬들은 이 사건을 두고 통칭 '히바우두 사건'이라 부르고 있으며, 히바우두를 바르셀로나로 이적시킨 것에 크게 분노한 렌도이로 회장은 이후 알베르트 루케의 바르셀로나 이적설이 나오자 바르셀로나 이적을 차단하기도 했다.[4] 사실 이때의 히바우두는 자신의 최적의 포지션인 쉐도우 스트라이커가 아닌 바른발 윙어로써 왼쪽 윙포워드에서 뛰었다. 원톱 롤도 소화하는 전천후 스트라이커인 클라위버르트와 프리롤에 가까운 오른쪽 윙포워드였던 피구가 있었기 때문에 반 할식 쓰리톱을 세운다면 윙어로 뛰기엔 어정쩡한 위치였지만 측면에 있는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10.5번에 가까운 롤. 그럼에도 득점력이나 파괴력 자체는 죽지 않아서 바르셀로나에서 맹활약 하긴 했다. 반 할이 사임하고 나서 투톱체제로 전환했을때 AC 밀란으로 이적.[5] 참고로, 당시 트레블을 달성한 괴물 스쿼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유일하게 못 이기고 결국 비긴팀이 히바우두의 바르셀로나이다.[6] 반할이 킥이 좋은 히바우두를 아예 크로스용으로 쓰려고 했지만, 히바우두는 중앙에서 공격을 도맡는 프리롤을 원했다.[7] 참고로, 당시 최고 에이스인 히바우두를 내친 바르샤는 그해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고, FC 바르셀로나는 팀을 망친 반할 감독을 데려온지 1년도채 안되어 경질시킴[8] 웬 미션스쿨 학생처럼 생긴 녀석이 수비를 다 뚫고 골을 넣어서 가투소가 쌍욕을 했다고...[9] 이 경기에서 히바우두는 역대급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데 코너킥 볼을 받으려 기다리던 히바우두가 터키 선수가 찬 공에 다리에 볼을 맞지만 히바우두는 안면을 감싸안고 넘어지며 할리우드 액션을 시도했다. 이를 본 주심은 터키 선수에게 퇴장을 주는 병크가 일어난다.[10] AC 밀란에서 두각을 못 보인 것은 갑자기 닥친 수비부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피지컬 능력의 하락이 눈에 띄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쭈욱 하락세였다.[11] 쉐도우 혹은 플레이메이커 위치에서 활약하던 히바우두를 좌측면 미드필더로 고정시키려 했다. 쉽게 예를 들자면, 메시를 좌측 미드필더로 고정시키는 것과 거진 같은 상황이라 보면 된다.[12] 잉글랜드전 최고 수훈으로는 히바우두에게 천금같은 어시스트를 선사하고, 역전골을 성공시킨 호나우지뉴를 꼽을 수도 있겠다.[13] 오죽하면 당시에는 이 사람의 어시 덕분에 '호나우두가 주워먹기를 했네, 황제소리 들었네'라는 풍문이 있었을 정도. '''호나우두가 1인자였을 시기에도!'''[14] 그러나 공격형 미드필더였던 호나우지뉴와 카카는 스트라이커 내지는 공격수인 히바우두와 포지션이 약간 달라 히바우두에 명성에 누가 갔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사람들의 주목도를 얘기하는 것이니까. 사실은 같은 피지컬 괴물 계열인 탕아, 아드리아누에게 밀렸다고 봐야 한다.[15] 최종보스가 스포트라이트를 죄다 가져가버렸고, 오히려 사람들은 터키전에서 그가 잠시 보여줬던 할리우드 액션만 기억해줄 뿐이었다.[16] 루이장 에딜손처럼 국대 승선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17] 돈 발론 어워드[18] 1995년생[19] 이런 말이 나올 만 한 것이 히바우두가 뛰던 당시에는 빅리그 득점왕들도 히바우두, 호나우두, 베베투, 호마리우 등 괴물 공격수들의 아성에 밀려 나오지조차 못할 정도였으나 2015년 브라질 국대에 중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20] 작내 이름은 리바울. 히바우두를 영어로 읽을 경우 리발도를 조금 바꾼것이다. 애초에 해당작품에는 실축에 나오는 선수들 죄다 이름이 살짝 바뀌어 나온다.[21] 간단히 말해서 피지컬을 제외한 능력치는 20~30대 현역 공격수 중 그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22] 훈련 방향에 따라 개인기, 골결정력, 드리블, 볼트래핑, 중거리슛, 코너킥, 크로스, 패스, 페널티킥, 프리킥 등 공격관련 기술 모두 20이 나올 수도 있다. 그걸 평균 이상으로 돌아온 피지컬이 받쳐준다.
분류
- 1972년 출생
- 브라질의 축구선수
- 공격수
- 미드필더
- 산타크루스 FC/은퇴, 이적
- 모지미링 EC/은퇴, 이적
- SC 코린치안스/은퇴, 이적
- SE 파우메이라스/은퇴, 이적
- RC 데포르티보 데 라 코루냐/은퇴, 이적
- FC 바르셀로나/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크루제이루 EC/은퇴, 이적
- 올림피아코스 FC/은퇴, 이적
- AEK 아테네/은퇴, 이적
- FC 부뇨드코르/은퇴, 이적
- 상파울루 FC/은퇴, 이적
- AD 상카에타누/은퇴, 이적
- 브라질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선수
- 브라질의 올림픽 참가 선수
- 브라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발롱도르 수상자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