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평왕

 


<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29대 국군
13대 왕
평왕
平王
'''[1]
''''''
미(羋)
''''''
웅(熊)
''''''
기질(棄疾), 거(居)
'''아버지'''
초공왕(楚共王) 웅심(熊審)
'''아내'''
맹영(孟嬴)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1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28년 ~ 기원전 516년
1. 개요
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
2.2. 왕위에 오른 뒤
2.3. 오자서와의 악연
2.4. 중원의 일에 개입
2.5. 오나라의 침략
2.6. 사후
3. 평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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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제29대 군주. 제13대 .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이름이 웅기질(熊棄疾)이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는 웅거(熊居)라고 개명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진공(陳公)과 채공(蔡公)을 역임했다. 초장왕의 손자, 초영왕, 자오의 아우. 초공왕의 막내 아들.

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초 공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 영왕 때 채나라진(陳)나라가 망해 진공, 채공을 역임하였다. 오나라를 쳤을 때 제나라의 최악의 권신 경봉(慶封)을 죽이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후에 초 영왕이 죽자 초 영왕의 아우인 웅비가 자오로 즉위했으나 초 평왕이 속임수를 써서 영윤인 공자 웅흑굉과 자오를 죽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2.2. 왕위에 오른 뒤


초 평왕 원년(기원전 528년), 초 평왕은 왕위에 오른 뒤, 형과는 달리 대외적으로 팽창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陳)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진애공의 아들인 진도태자 언사의 아들 공손오를 군주로 세우니, 그가 진혜공이다. 채(蔡)나라도 역시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채경후의 아들이자, 채영후의 아우인 공손려를 세우니, 그가 바로 채평후다. 초 평왕 덕에 이 두 나라는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
초 평왕은 처음에는 이렇듯 초 영왕의 대외 원정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맛이 가기 시작했는지 간신배인 비무기(費無忌)[2]를 총애하였다.

2.3. 오자서와의 악연


초 평왕 2년(기원전 527년), 초 평왕은 진(秦)나라와의 우호를 위해 사돈을 맺으려 했다. 그때 사신으로 간 비무기가 일단 태자비가 될 진의 공주 맹영을 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초 평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녀를 초 평왕과 연결했고, 초 평왕은 그런 그녀가 매우 아름다웠는지 덥썩 차지해버렸다. 그리고는 태자에게는 잉첩 중 가장 예쁜 여자를 골라서 태자비로 주었다. 한편 비무기는 나중에 일이 들킬 것을 우려해 태자를 음해하였다. 그 음해에 넘어간 초 평왕은 태자 웅건(熊建)을 국방 수비 명목으로 변방에 보내버렸다. 비무기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자 않아 태자를 계속 음해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초 평왕 6년(기원전 524년), 비무기는 결국 태자의 스승인 오사를 잡아 감금하였다. 그 이유는 태자를 잘못 가르쳤다는 명목에서였다. 그리고 비무기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 그 아들인 오상과 오운마저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오상만 오고 오운(오자서)은 거부하고 정나라로 달아났다. 태자 건도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정나라로 도주한다. 결국 비무기는 닭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결국 오사와 오상만 참수했다. 그후 오자서는 정나라에서 태자 건이 엉뚱한 생각을 하는 바람에 정 정공에게 죽자 정나라를 탈출한다. 이때 태자의 아들인 공자 승을 데리고 오나라로 가야했는데, 오나라로 가려면 반드시 초나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신포서의 조력을 받아 오나라로 갔고, 그는 거기서 새 둥지를 틀며, 초 평왕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했다. 결국 후술하듯 그는 성공했다.[3][4]

2.4. 중원의 일에 개입


초 평왕 10년(기원전 520년), 송원공은 화씨 가문의 당주 화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나라, 진(晉)나라, 위(衛)나라, 오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초 평왕은 오나라와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화씨를 도왔다.
초 평왕 11년(기원전 519년), 송 원공은 제나라, 진나라, 위나라, 오나라의 힘을 빌어 화씨 가문을 초나라로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2.5. 오나라의 침략


초 평왕 12년(기원전 518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쳤다. 대장은 공자 희광, 즉 합려였고 부장은 오자서였다. 초 평왕은 영윤 자하와 사마 위월을 보냈으나 자하는 병으로 도중에 죽고 말았다. 계보 땅에 이르러 초나라와 오나라가 싸웠는데, 오나라에게 패하고 말았다.
초 평왕 13년(기원전 517년), 이때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는데, 오나라는 변경 비량에서, 초나라는 변경인 종리에서 일어났다. 그 내막이 뭔고하니 오나라 처녀와 초나라 처녀가 누에를 치려고 뽕나무 잎을 뜯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해 그것이 마을 싸움으로 번져서 비량의 사람들이 몰살되자 분노한 오왕이 공자인 희광을 보내 초나라를 치게 하였다.
초 평왕 14년(기원전 516년), 초 평왕이 죽었다. 그 뒤를 그와 진나라 공주 사이의 자식인 웅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초 소왕이다.

2.6. 사후


초 평왕은 죽은 다음에 편히 쉬지 못했다. 오군이 초나라를 박살낸 뒤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그곳에서 시신을 파냈는데, 그 시신이 썩지 않아서 기뻐하였고, 시신에 구리 채찍으로 수백대를 쳐박살냈다. 그 일로 인해 숨어있던 신포서에게 쓴소리 들었지만 오자서는 듣지 않았다.[5] 이때가 주 경왕 14년(기원전 506년)이었다. 결국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가 구원을 청해 오군을 쫓아내고 초 소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초나라는 전국 시대가 될 때까지 천하에 대한 영향력을 적지 않이 상실했다.[6]

3. 평가


초나라가 멸망할 뻔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일단 평왕은 3가지 잘못을 저질렀는데 우선 하나는 초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진나라에게 명분을 준 것이다. 초 평왕은 원래 며느리로 삼을려고 했던 진나라의 공주 맹영을 후궁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맹영이 당시 진나라 15대 군주 애공이 아끼던 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궁이 아닌 태자비 즉 미래의 왕후로 삼는다고 해서 보냈더니 아끼는 딸이 노인네의 왕후도 아닌 후궁이 되었다고 하자 애공은 상당히 열받았고, 얼마나 열받았는지 초나라가 오나라 왕 합려의 침입으로 원군을 요청하자 초나라는 신의를 버린 나라라고 거절하였다.
또한 평왕은 비무기를 총애하여 충신가문인 오씨 가문을 도륙했다. 그중 오씨 가문의 차자 오자서는 오나라로 망명했고 복수심에 불타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공격, 초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평왕의 시신을 모욕했으며 맹영을 자결시켰다.
마지막으로 평왕은 맹영이 태자를 좋아하자 그를 내쳤고 이로 인해 태자의 후손들은 조국인 초나라를 원망하게 되었다. 후에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초나라를 박살내는 춘추전국시대의 명장인 백기가 평왕 본인의 직계 후손이자 그토록 미워했던 태자 건의 후손이다. 평왕 본인이 맹영을 태자비로 받아들이고, 태자 건에게 양위했다면 초나라의 멸망은 늦춰질수도 있었으나 한순간의 잘못으로 강대국이던 초나라는 망국의 테크를 타게 된다.
개인적 면모로도 아들며느리를 본인의 색욕을 주체하질 못해서 가로채는 콩가루 집안의 개막장 행각은 덤. 성욕이야 누구나 있는 것이고 초평왕이 일개 돈많은 제후였다면 그냥 집안의 상속문제가 꼬이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문제는 초평왕은 국가의 왕이였다. 이러한 풍기문란을 말리고 단속해야하는 왕이 되려 이를 행하고 나선 것이다.

4. 여담


1973년, 호북성 당양의 초나라 성터에 있는 무덤에서 청동 용종이 발견 되었는데, '秦王卑命, 競(景)平王之定救秦戎'이라는 12자가 세겨져 있었다. 중국의 학자 이령(李靈 : 중국 명 리링) 등의 여러 명의 학자들이 고증하기를 경평왕(競坪王)은 경평왕(景平王) 즉 초 평왕을 나타낸다고 해석하였다. 경평은 초 평왕의 2글자 시호인 셈이다. 일단은 문헌이나 유물 상에서 초나라에서 2글자 시호를 최초로 사용한 군주인 샘이다
[1] 달리 경평왕(景平王, 競坪王)이라고도 한다[2] 춘추좌씨전에는 이름이 비무극(費無極)으로 기록 됨.[3] 하지만 사실 오운이 오나라에 가서 출세했을 때는 이미 초평왕은 사망했던 뒤라 원수를 갚지는 못하고 그저 구리 채찍으로 초평왕 시체를 치는 화풀이밖에 하지 못했다. 성공이라기엔 매우 미묘한 경우.[4] 이 사건 이후 붕어한 왕의 시체를 훼손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됐고 120여년 뒤 초나라의 귀족들의 권한을 뺏으면서 왕권을 강화시킨 오기를 죽이기 위해 초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이 손을 잡고 초도왕이 죽자 거사를 단행했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간 오기는 일부러 물귀신 작전을 쓰면서 도왕의 시체에 가서 자신을 인정해준 도왕을 끌어안고 그들의 가문의 표시가 적힌 화살에 맞아 고슴도치가 된 상태로 죽었다. 그런데 시체를 훼손한 자는 멸족시킨다는 법에 의해 그당시 오기를 죽이는데 가담한 귀족들과 왕족들은 그들이 쏜 화살이 당연히 도왕의 시체를 고슴도치로 만드는 바람에 그들 역시 남녀노소할 거 없이 죄다 멸족당하게 된다.[5] 여기서 일모도원이 유래했다.[6] 그래도 전국시대에는 오와 월을 흡수할 정도로 위용을 되찾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