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운

 


'''당나라 추존 왕
오운
伍員'''

'''시호'''
영렬왕(英烈王)
''''''
(伍)
''''''
(員)
''''''
자서(子胥)
'''증조부'''
오삼(伍參)
'''조부'''
오거(伍擧)
'''아버지'''
오사(伍奢)
''''''
오상(伍尙)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484년
1. 개요
2. 생애
2.1. 배경 및 전반기
2.3. 황혼
3. 후대의 평가
4. 오자서를 다룬 문학작품
5. 오자서를 차용한 문학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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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 이름은 운(員)[1]이고 자서는 인데, 이름보다 자가 훨씬 더 유명하다.[2] 춘추시대 오(吳)나라정치가이자 군인.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라 자신의 가족을 죽인 초나라에 잔혹한 복수를 하였고, 자신을 받아준 다음 복수를 도와준 오나라에겐 비록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어도 최후까지 충성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춘추시대의 영웅호걸이다.
역사에 남을 성공한 복수귀이자 인생 자체가 무협지인 인물이다. 간신의 참소로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왕실에 쫓겨 타국을 떠돌다 20여년 만에 끝끝내 복수하는 초특급 근성가이. 웬만한 소설 주인공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는데, 모두 엄연히 야사가 아닌 정사에 기록된 사실이다.[3] 그리고 고사성어 제조기.[4] 사마천이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둘 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굴욕을 참았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 게다가 다른 열전은 주인공이 몇 명씩 되는데, 오자서 열전만은 오자서 하나만 주인공이며, 내용도 타 열전에 비해 풍부하다. 실제로 사론에서도 오자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2. 생애



2.1. 배경 및 전반기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측근에서 초(楚)나라의 국왕을 보필한 명문가로서 초장왕의 용장 오삼(伍參)를 배출하였고, 오자서의 할아버지는 초영왕의 충신이자 명신으로서 춘추시대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떨치게 만든 오거(伍擧)이고, 아버지 오사(伍奢) 역시 조정의 고관으로서 태자 건의 스승 겸 보좌 역인 태부 벼슬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성왕이 터를 닦고 목왕장왕이 그 위에 쌓아올린 강대한 초의 패업도 이 시기에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왕실의 내분은 일상사가 되었고, 어질고 총명한 왕으로 촉망받던 평왕[5] 역시 재위가 길어지면서 점차 간신을 가까이 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왕실의 인척들은 속국들에게 가혹한 뇌물을 요구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다. 나라 밖으로도 초에 적대적인 동쪽 해안 부족들의 국가오(吳)나라, 월(越)나라가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없지는 않아 당시에도 강대국 소리를 듣던 진(秦)의 힘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고, 그 계획에 따라 양국은 초의 태자 건과 진의 공주를 혼인시켜 혼인동맹을 맺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큰 사태가 터졌으니, 바로 '''며느리''' 될 진의 공주 맹영(孟嬴, 백영伯嬴이라고도 함)이 굉장한 미인이라 '''시아버지'''인 평왕이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왕의 측근 비무기(費無忌)[6]는 오히려 왕을 부추겨 결국 왕이 며느리를 가로채게 만들었다. 대신 태자 건에게는 공주를 따라온 제나라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 어찌어찌 혼인을 시켜버렸다.
여기까지만 해도 심각한 국제 문제에 콩가루 집안의 훌륭한 사례인데, 진짜 문제는 평왕과 진의 공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 다음 불거졌다. 비무기가 태자 건에게 당할 후환이 무서워, 평왕을 부추겨 태자와 그 후견인인 오사[7]와 오사의 두 아들까지 제거할 계획까지 도모한 것. 막상 당사자인 태자 건은 별 불만도 없이 아내가 된 시녀와 알콩달콩 애까지 낳고 잘 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평왕은 처음에는 아들 건을 죽일 마음은 없었으나 결국 간신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고[8] 결국 비무기의 음모를 눈치챈 태자 건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정나라로 도주했다.
그러나, 사태가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오씨 삼부자도 녹록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결국 오사는 둘째인 오자서에게 태자 건과 그 아들인 왕손 승을 모시고 초를 탈출하도록 하고, 자신은 장남 오상(尙)과 함께 남아 초왕에게 처형당하는 쪽을 선택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다르게 표현되는데,[9] 초평왕이 아버지인 오사를 먼저 인질로 잡은 후, 아들 둘이 직접 찾아오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거짓 편지를 보낸다. 편지를 본 오자서는 평왕이 오씨 삼부자 모두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알아채고, 형에게 복수를 위해 도망치자고 말하지만, 형인 오상은 아버지에게 가고 오자서만 도망친다.

我知往終不能全父, 然恨父召我以求生而不往, 後不能雪恥, 終爲天下笑耳. 可去矣, 汝能報殺父之讎, 我將歸死.

나는 가더라도 끝내 아버지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데 가지 않으면 한이 될 것이고, (둘 다 가서) 뒷날 치욕을 씻지 못한다면 종국에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너는) 가거라. 너라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가 함께 죽겠다.

실제로 꼿꼿하고 꼬장꼬장한 노인네였던 오사는 오자서에게 자신의 복수를 부탁하지도 않았고, 왕을 원망하지도 않았지만, 오자서의 성격을 잘 알았는지 죽으면서 '''"오자서가 무사히 도망갔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연히 평왕은 오자서를 곱게 살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일찍이 문무겸비한 데다 강직한 의지의 인물로 소문났는데,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여놨으니 말 그대로 둘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상황이 된 것. 때문에 자객을 잔뜩 풀어 수색했지만 허탕만 쳤다. 열국지에 따르면 몇몇 자객들이 따라잡았으나 오자서가 죄다 로 쏴 죽여버렸다는데, 그 상황에서 굳이 한 명을 살려 보내면서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고 불필요한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도피 행각이 더욱 고달파졌다고 한다(…). 다친 채로 돌아온 자객에게 이걸 전해 듣은 평왕은 이젠 진짜로 오자서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탈출한 오자서는 강대국 초와 (晉)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명맥을 유지하던 정나라(鄭)로 향했다. 여기서 탈출한 태자 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된다. 명재상으로 유명했던 자산이 강력한 외교 카드로 사용 가능한 태자를 비호해 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지만, 오자서가 정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산은 병사하였고, 재상을 잃은 정의 정국은 혼란상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국 정의 혼란은 친 평왕 세력의 집권으로 마무리되었고, 오갈 데 없는 태자 일행에게 정나라 왕과 집권 세력은 따뜻한 환대를 해줬다. 그러나, 태자는 혼란기의 정을 집어삼키겠다는 되도 않는 야심을 가지고 획책하다가[10] 분노한 정나라 왕[11]에게 아내랑 같이 살해당한다.
오자서는 기겁하고 '정나라같이 작은 나라로선 복수할 힘도 없거니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짓이라 그렇게 왕이 되어봐야 오래갈 수도 없고 더불어 초나라의 허수아비가 될 뿐이니 그만둬야 합니다' 라고 태자 건을 말렸으나 욕심 부린 태자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다가 결국 자업자득으로 화를 입고 만다. 당연히 태자 건의 아들 승과 오자서는 정나라에서도 상금이 걸렸기에 둘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오자서는 고심했다. 초 일족의 복수도 해야 하고,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구해온 왕손 승도 제대로 된 어른으로 키워야 하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것. 결국 오자서는 초의 동쪽에서 초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는 동방의 신생국가 오(吳)나라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에서 오로 가려면 초의 광대한 국토를 북에서 남동쪽으로 '''완전히''' 횡단해야 한다는 점.
당시 초-정 국경의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친구 신포서의 호의로 일단 재입국에는 성공[12]했지만, 돈도 없이[13] 반역죄로 쫓기면서 어린아이까지 딸린 여정이었으니, 때로는 사냥꾼으로, 때로는 장강의 뱃사람으로 위장하면서 어렵사리 초-오 국경까지 왔지만 당시 분쟁지역이라 군대가 주둔 중이던 국경을 통과하는 일이 쉬울 리는 없었을 터. 이 마지막 관문을 넘는 방법을 고심하느라 하룻밤새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어버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게다가 오자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매우 눈에 띄는 용모였기 때문에 탈출하기가 더 어려웠다. 물론 그 실력이 어디 안 가 추격대가 떼로 몰려오면 피했지만 소수일 때는 단신으로 때려눕히거나 호신용 검을 빼들어 몰살시키고 도주했다.
이때의 일화 중 한 개가 사기에 적혀있는데, 마침내 왕손까지 데리고 초-오 국경의 강까지 도주하는 데 성공했으나 뒤에서 병사들이 추격해오고 배는 없는 상황에서 한 늙은 사공을 통해 강을 건너고 밥도 얻어먹게 된다. 물론 강 건너에서 군사들이 사공에게 소리를 쳤으나 귀머거리인 척 하고 위장. 이후, 강을 건너게 된 오자서가 감사의 표시로 집안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가보인 보검을 사공에게 주려하나 사공은 '''"지금 오자서란 사람을 잡으면 천금을 준다고 하던데, 그깟 보검을 받아 무엇하겠소?"'''라며 사양한다. 그래도 오자서는 훗날, 늙은 사공에게 감사라도 하기위해 성함을 물었는데 "당신은 죄인인 것 같고, 나도 죄인을 도운 죄인이 되었으니, 서로 잡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모른 척 하기 위해 그런 건 묻지 맙시다." 라고 잘라 답하였다. 오자서는 그곳에 무릎 꿇어 깊은 감사를 표하고 길을 떠났다.
야사에 따르면 오자서가 사공에게 '제가 어디로 갔는지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세 번이나 의심하며 부탁하자, 자신이 신임을 얻지 못한다고 느낀 사공은 탄식하며 '그대가 나를 어찌 못 믿소! 내 목숨을 죽여 그대의 의심을 씻어내겠소'라며 물에 몸을 던져 죽어서, 오자서는 이에 길게 탄식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하였는데, 거기에 피난해있던 사공의 아들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오자서에게 정나라에서 군사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사공이 쓰던 노를 오자서에게 보이자 이를 알아본 오자서는 "그때 사공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텐데, 어찌 그 은혜를 잊었겠는가. 내 사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군사를 물리겠다." 라며 정나라에서 군사를 철수시켰다. 당연히 정나라에선 그에게 대부의 지위를 주며 모셨고 (자손 대대로 대부가 되었다고도, 대부를 사양했다고도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어대부(漁大夫)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또한 열국지에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의 묘사가 더 추가되었다. 오자서는 우연히 동고공이라는 노인의 도움을 얻게 되었다. 이때 동고공이 한가지 묘책을 고안해 주었다. 동고공의 지인인 황보눌을 변장시켜서 관문의 병사들이 오자서로 오인하게 만들고 그 혼란을 틈타 빠져나가게 한 것.[14] 이로 인해 오자서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오자서가 복수에 성공한 후 동고공에게 보답하기 위해 거처를 방문했으나, 이미 동고공은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졌다는 이야기로 끝난다.

2.2. 복수


여차저차 오에 도착한 오자서는, 오에서 나름대로 환대를 받는다. 이미 그의 명성이 오에도 널리 알려진 것. 게다가 당시 오와 초는 견원지간이었으니 초에 크나큰 원한을 품고 있는 오자서는 오에 안착한다. 그리고 조용히 농사 일을 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오도 나라 안이 평안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의 선선대 군주였던 수몽은 똑똑한 막내아들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막내 계찰은 어리기도 했거니와 왕위에 오를 뜻이 없었던 터라 수몽 사후 일단 맏형 제번이 왕위를 잇게 되었고, 효자인 제번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해 계찰이 왕이 되게끔 몰아갔고, 나머지 두 형도 막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 다들 찬성했던 모양이다.[15] 그런데 초와 오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제번에 이어 둘째인 여제도 전쟁노예에게 살해당했고 셋째인 이매한테까지 왕위가 넘어갔는데, 막내인 계찰은 이매가 사망한 후까지도 끝끝내 왕위 승계를 극구 사양했던 것. 결국 그는 평생 야인으로 머무르고, 이리하여 차후 왕좌가 누구에게 돌아갈지 애매한 상황이 발생했다. 혈통으로 따지자면 첫째아들 제번의 장남인 공자 광이 왕이 되어야 하겠지만 셋째 이매의 아들인 가 왕위를 덥석 물어버렸다.
광은 참고 넘어갔으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오나라의 사정을 알고 양 세력을 냉정히 저울질한 오자서는 야심가에 능력도 출중한 공자 광을 차기 오왕으로 낙점했고, 오자서의 협력을 얻은 공자 광은 쿠데타를 일으켜 요왕을 살해하고[16] 스스로 왕위에 올라 오왕 합려(闔閭)라 자칭하게 된다. 한편 이 사태의 원인이 된 두 사촌형제의 숙부 계찰은 뭘 했냐 하면, 합려의 쿠데타 당시에는 다른 나라에 가있다가 돌아온 후 합려의 즉위를 인정하면서도 죽은 요의 무덤을 찾아가 곡을 했다 한다(...).
이리하여 화려하게 재상 자리에 취임한 오자서는 본격적으로 복수를 준비한다. 오가 새롭게 떠오르는 유망주였고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오자서가 전면에 나서고 보니 각국에서 인재들이 와글와글 몰려왔다. 20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최고의 군략가로 손꼽히는 손무와 내정의 명인 백비[17] 등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오도 신흥국 때를 벗고 점차 초와 겨룰 만한 국력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게 된다.
드디어 기원전 506년, 손무와 오자서가 이끄는 오군이 초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쾌진격 앞에 초군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고, 불과 3개월 만에 수도 코 앞까지 적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었다. 당시 초의 수도는 초 문왕 시대에 건설되어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영(郢)이었으나 손무의 수공(水攻)에 허무하게 함락, 왕과 몇몇 대신들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 수도에 오군이 입성한 이후에 대규모의 방화와 약탈과 강간이 이루어졌다.
매우 아이러니한 것은 손무는 손자병법에서 민심을 얻는 것을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이 오자서를 따라 종군하였음에도 이 학살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학살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 때문에 전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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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묘사된 모습.
한편 오자서의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세상을 떠난지 오래였다.[18] 하지만 영성을 함락시킨 오자서는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아 평왕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 뒤 구리 채찍으로 수백 대[19]를 쳐 시체가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20]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이때,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차마 못 할 짓이 아니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 말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을 뿐이오(도행역시)'라고 답한다.[21]
그러나 오(吳)도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간신히 탈출한 초 소왕은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군을 괴롭히기 시작했고, 신포서는 서방의 강대국 진(秦)사신으로 가 원군을 얻어냈다.[22][23] 본래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왕손 승(王孫勝)을 초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의 속국으로서 재건하려 했으나, 초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하게 되고, 진·초 연합과 오군과의 전쟁이 시작하게 된다. 손무는 이에 오로 회군하여야 한다 경고하였지만 백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같은 생각이었던 오왕 합려도 백비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진·초 연합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진나라 명장 화련에게 된통 당하고 손무가 파견한 전의 장군의 구조로 귀환하게 되는데, 이러한 만만치 않은 대패의 결과로 오의 왕족 출신 장군이었던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 등 몇몇 장수들을 남겨 지키게 하고 부개의 모반을 평정하러 원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손무의 뛰어난 전술전략으로 초나라를 대파하여 깨뜨렸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연승의 쾌진격과 그 단맛에 방심하고 손무의 진언을 어겨가며 과욕을 부리다 일을 말아먹고 끝내 발등에 불이 떨어진 탓에 작금의 초나라를 멸망시켜 오에 복속 혹은 왕손 승을 이용한 괴뢰국으로 재편하여 오의 속국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시킬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은 대승이라, 오는 결국 본토로 철수하기로 하는 대신 초가 막대한 재물을 오에게 매년 바치기로 한 조공의 약조와 왕손 승을 백공(白公)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공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를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 승은 이 전쟁의 결과로 초 혜왕이 불러들여 초나라로 귀환, 공의 지위에 올라 백공(白公)으로 일컬어지며 나름 대우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훗날 아버지인 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를 치고자 하였지만 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끝끝내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서라도 정나라를 쳐 복수를 완수하고자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나 심제량(沈諸梁)[24]에 의하여 반란이 진압되며 자살하였다.[25]

2.3. 황혼


초의 숨통을 끊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오는 이제 중원 진출을 넘보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더불어 오왕 합려의 자신감도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오와 비슷한 시기에 오의 남쪽에서 일어난 월(越)이 세력을 키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오왕 합려는,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월 정벌을 강행하였으나 월의 책략가 범려(范蠡)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 본인도 큰 부상을 입고 귀환하던 중 끝내 사망하고야 말았다. 당시 합려는 적자가 없었던 터라 후계문제가 불거졌고, 당시 오의 최고 실력자였던 오자서는 합려의 차남인 부차를 지지하여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이때 부차를 옹립한 것이 훗날에 오자서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26]
아버지 못지 않게 야심이 컸던 부차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국력을 키우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오자서도 이를 도와 다시 한번 원정길에 올랐다. 실로 압도적인 오군의 전력 앞에 월은 월왕 구천이 부차 앞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오자서는 월은 쉽게 치료할 수 없는 질병과 같은 존재라 지금 멸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닥친다고 간언했지만,[27]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고 결국 월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오자서의 시대도 슬슬 저물어가고 있었다.
강화의 결과로 월왕 구천은 오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온갖 아첨과 뇌물을 총동원하여[28] 오왕 부차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끝내는 월로 귀환, 오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다. 여기서 구천이 패배의 굴욕을 되새기고자 곰 쓸개를 핥았다는 일화와 부차가 원한을 잊지 않고자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잤다는 일화와 묶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한다.
이들의 No.1 타깃은 바로 오자서.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월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는 이 노신(老臣)을 제거하지 않고는 오를 뒤엎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월의 범려와 대부 문종은 당시 조정에서 오자서 못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바쳐 조정에서 오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한편, 오자서를 어려워하던 오왕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잇따른 승리로 교만해진 오왕 부차는,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중원의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이를 반대하는 오자서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오자서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 꺼림직했던 부차는 제에 말도 안 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보냈다. 제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게 하고 이를 구실로 제를 침공하겠다는 뜻이었으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제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는데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특히 오자서가 오의 멸망을 예감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의 유력자인 포씨에게 맡긴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그의 명줄을 재촉하게 된 셈, 사기의 판본에서는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고 다만 제에 아들을 맡기고 돌아온 것을 알게 된 백비가 오자서는 선왕과 달리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부차를 원망해서 두 마음을 품고 있다며 참소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저술되어 있다.
어쨌든 오자서는 그자리에서 한바탕 간신 백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내가 죽으면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어 그 나무로 부차의 관짝을 짜도록 하고, 내 두 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어라. 내가 기필코 오가 월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다."'''는 유언을 남긴 다음 촉루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물론 이 유언을 전해듣고 부차는 대노하여 이런 불충한 자에게 무덤 같은 것도 필요없다며 그 시체를 가죽부대에 넣은 채로 장강에 던져버려서 찾지 못하게 하여 저승에서도 결코 편히 쉴 수 없을 꼴로 만들었지만, 주민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 주었다.
이후 월의 신하 범려는, 구천이 오 정벌 성공 이후 문종 등의 공신들을 주살하는 것을 보고는 하야하여 제나라로 건너가고, 오자서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개명하였다.
과연 오자서의 사후 채 10년이 지나지 않아 오는 월에 의해 멸망당하는 비운을 맛보게 된다. 오가 중원에 패자랍시고 제를 털어버린 후에 한창 패자로 공인받기 위한 회맹을 벌이고 있는데, 이 틈을 노려 월이 오의 수도 고소성에 쳐들어와 빈집털이를 감행한 것이 성공한 것이다. 월은 오가 영성을 공략할 때 사용하였던 수공으로 고소성을 함락시켰다. 부차는 급히 회군하여 돌아왔으나 월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포위당한다. 이후 구천은 부차에게 너도 내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너도 목숨을 살려주며 백호의 장으로 봉해준다고 말했으나[29] 오왕 부차는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자결한다. 여담이지만 오자서의 최후에 가장 큰 역할을 한 백비는 오나라가 멸망하자마자 월의 신하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오히려 구천에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간신배'라는 이유로 공개처형당했다.[30]
여담이지만 먼 훗날 동오손침이 오자서의 사당을 훼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자신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당한 셈이다. 그 후 손침은 손휴에게 암살당했고 손휴도 5년 뒤에 있다가 요절했다.
오나라 멸망 후의 서시의 행적에 대한 설 중에 오자서를 본래 사모했던 까닭에 임무를 마친 후 죄책감에 자결했다는 설도 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3. 후대의 평가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복수를 위해 충(忠)을 버린 사람이다.'라는 평가와 '폭군을 몰아내는 것은 충(忠)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상존한다. 사실 오자서가 과거부터 비판을 받은 이유는 왕을 들이받아서가 아니라 시체를 훼손한 것 때문이 훨씬 크다. 그러나 워낙 이룬 업적이 업적인 데다가 인생역정에 비장미가 넘치다보니 후대에도 그 이름을 널리 전하고 있다. 또 유교라고 해서 왕에게 무조건 굴종하는 것을 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맹자에도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 則易位(임금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간언을 하고,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꾼다. <만장 하>)'라고 나와있듯이 자격 없는 왕은 왕이 아니라고 하며 오자서의 고사를 드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그가 신포서를 만났을 때 복수를 위한 집념을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한 표현인 일모도원(日暮途遠)[31]은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는 의지 관철의 위험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마천사기 <오자서전>에서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라고 평가하였다.[32] 사후 1000년 후 당나라 시대에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쑤성 쑤저우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사당인 우샹츠(오상사: 伍相祠)가 있다.
열국지에서는 부차에게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혼령으로 남아 고소성을 지킨다. 하지만 범려의 설득(우리는 모두 각자의 주군에게 충성하지만 당신은 혼령이고 나는 살아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이기는 법은 없다)으로 단념하고 저승으로 떠난다. 이후 구천이 백비를 죽이며 "이것은 오자서의 복수다"라고 한다.

4. 오자서를 다룬 문학작품


  • 오자서전: 오자서의 일대기를 다룬 조선 시대의 국문고전소설로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오자서실기라고도 한다.
  • 소설 손자병법(정비석 作)[33]
  • 동주열국지

5. 오자서를 차용한 문학작품



[1] 員은 보통 '원'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람 이름으로 쓸 때는 雲과 동음으로 운으로 읽는다.[2] 자로 더욱 널리 알려진 또다른 인물들이 관중, 고장공. 제법 중국사에 빠삭한 사람이 아닌 이상 오자서의 이름인 '운'처럼, 중과 장공이 자이며, 이오와 숙이라는 이름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3] 오자서 이야기는 사기뿐만이 아닌 춘추좌씨전에도 나온다. 춘추좌씨전은 오자서와 거의 동시대에 저술된 책으로, 관찬이 아니라서 정사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역사적 가치와 위상은 사기를 능가한다. 오자서의 거의 동시대를 살았을 춘추좌씨전의 저자에게도 오자서의 파란만장한 생애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건 춘추의 주해서 몇 권과 좌구명 국어 정도뿐이지만, 춘추전국시대 많은 나라들이 자기네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사기를 편찬하면서 당시까지 남아있던 여러 사료들을 보았을 테니, 단순히 야사를 옮겼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4] 실제 오자서에게서 직접 유래한 고사성어만 6개(동병상련, 굴묘편시, 일모도원, 부관참시, 도행역시, 심복지환(心腹之患))에, 와신상담에도 영향을 미쳤으니 7개다. 또 오월동주와도 무관하다고 하기 어려우니, 이것까지 포함하면 8개다. 한 인물에게서 이렇게 많은 성어가 이루어진 일은 흔치 않다. 그만큼 네임드였다는 이야기.[5] 쿠데타를 일으켜 영왕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나, 즉위 후 백성들을 편안히 쉬게 하고 관리들에게 공정하게 상과 벌을 내렸으며, 국경의 방비도 튼튼히 했다.[6] 사기 오자서 열전 기준,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극(費無極)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오자서의 아버지인 오사 다음가는 태자의 스승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상 자리였고 태자를 직접 가르칠 권한은 없었다.[7] 하지만 비무기 역시 직책은 오사의 벼슬보다 한 단계 아래인 소부였다. 즉 오사와 마찬가지로 태자의 후견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8] 춘추좌씨전에는 비무기가 평왕에 건의하여 태자 건과 오사를 성보에 보내어 초나라의 북방을 방비하러 보내도록 해서 건과 오사가 성보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건과 오사가 주변국들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비무기가 모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9] 사기 66권 오자서열전 제6권.[10] 정확히는 정나라 왕이 된 다음 그 군사력으로 초나라로 쳐들어가 왕위를 되찾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이게 될 리가... 열국지에서는 진나라로 가서 군대를 동원해줄 것을 부탁하니 진나라 쪽에서 우리가 밀어줄 테니 일단 정나라 왕이 된 다음에 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칠 때 같이 호응하자는 제의를 받고 거기에 솔깃해서 정나라로 돌아온 걸로 설명된다.[11] 열국지와 십팔사략에선 태자 건의 노예가 일러바쳤다고 한다.[12] 이때 오자서가 신포서에게 '''나는 반드시 초를 엎어버리고 말 테다.'''라고 말하자, 신포서는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초를 지키고 말 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에 나오듯이 훗날 두 사람 다 자신의 말을 지켰다.[13] 정나라군에게 태자가 살해될 때 왕손만 데리고 급히 나왔기 때문에 여비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14] 또한 이때 동고공이 황보눌을 데려오는 사이에 오자서는 동고공의 집에서 동고공이 초나라 군사를 데리고 올까 봐 고심하다가 머리가 세었다고 저술한다.[15] 이민족 국가라 중원의 부자 세습과는 다르게 형제 세습이 원칙이었다.[16] 쿠데타의 자세한 내막은 어장 항목 참조.[17] 오자서와 비슷한 처지로, 초의 중신인 백주리의 손자였으나 비무기의 참소로 조부를 포함한 일가가 몰살당하고 혼자 오로 도망쳐왔다. 이때 관상을 볼 줄 알던 피이라는 사람이 백비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으나 오자서는 동병상련을 내세워 듣지 않았다. 다만 이후 월나라 일로 갈라진 걸 생각하면 장기적으로는 오자서의 실수였다.[18] 연전연패로 초나라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영윤 낭와는 비무기를 역적으로 몰아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이때 백성들이 좋아하면서 침을 뱉었다고 나온 바 있다.[19] 사기 오자서 열전에는 300대로 기록되어 있다.[20] 십팔사략에선 평왕의 시체가 수은을 칠해서 그다지 썩지 않았기에 오자서는 더 기뻐하며 두 눈을 후벼파고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21] '어차피 오나라 국력만으로는 초나라를 그리 오래 점령 못하니까, 지금은 도리를 어겨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놓겠다'는 뜻이다.[22] 이때 신포서는 진왕에게 가서 구원군을 애원했다. 하지만, 진왕은 '그 나라는 자업자득이다. 평왕이란 자부터가 아들의 아내를 빼앗고 벌인 일이다. 망하던 말던, 괜히 내 나라 병사들 피를 흘리기 싫다'며 거부했다. 그러고는 다시 애원하던 신포서를 신하들을 시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그럼에도 궁궐 문 앞에서 신포서는 1주일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며 군사를 청하니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하던 진왕도 신포서의 충심에 감격하여 '저런 충신이 있는 나라는 아직 망할 때가 아니다'며 군사를 내주었다 한다.[23] 다만 초 소왕이 바로 위에서 말했던 초평왕과 진나라 공주의 아들이다. 즉 진왕에게 있어서 초 소왕은 완전히 가까운 건 아니어도 일단 친척 정도의 위치였으니 그런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24] 오왕 합려가 초나라를 침공할 당시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자 충신이었던 심윤술의 아들. 섭현(葉縣)이란 고을에 봉해졌기 때문에 섭공(葉公)이라 불렸다. 섭공호룡의 그 섭공이다.[25] 그러나 백공 승의 자손들도 초나라에 복수를 뼈에 새김으로서 초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게 됐고 웅씨 성을 버리고 백공의 백을 성씨로 쓰면서 진나라에 정착하게 됐다. 결국 200년 뒤 그의 후손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성을 함락시키면서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으면서 백공 승의 원한을 갚게 된다.[26] 부차가 차남이 맞는지는 역사서마다 이야기가 다르다. 장손이라거나 장남이라고 서술한 책도 꽤 있기 때문. 하지만 장손이라는 주장은 부차와 합려의 생몰을 추정해 봤을 때 믿기 어렵다. 오히려 오강과 태자가 결혼한 뒤, '''운우지락을 알지 못하는 나이라 태자비가 요절'''하고 태자가 오강을 그리워하다 그 뒤를 따랐다는 이야기로 봤을 때, 부차는 차남으로 봄이 더욱 바람직하다.[27] 여기서 유래한 고사가 심복지환(心腹之患)이다.[28] 이때 부차의 똥맛을 보면서 건강을 살펴주었고 미녀, 서시를 바쳤다.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유명한 서시가 이때 등장한다.[29] 호는 가정을 세는 단위. 즉 100가구 정도 동네의 이장 자리로 만족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당신은 왕 노릇 할 자격이 없어'''라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 부끄러움을 아는 자에게는 사형 선고와 다를 것이 없다.[30] 다만 이는 사기열전 기준, 그 이전의 역사서들은 백비가 여전히 등용되었다고 한다.[31]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32] 사마천 본인도 궁형을 당한 후에 치욕을 감내하며 동서고금을 통틀어 위대한 사서로 추앙받는 '사기'를 집필한 것을 미루어, 상당히 후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처럼 역경을 이겨내고 합려를 패자로 옹립했다는 데 의의를 두었을지도.[33] 제목은 손자병법이지만, 주인공 오자서와 손무 둘 중에서도 활극의 중심에 있는 오자서의 비중이 더 높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