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터브먼

 


1. 개요
2. 노예들의 모세
3. 생애
4. 남북전쟁 당시의 활약
5. 여담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미국의 여성주의흑인 인권운동가.

2. 노예들의 모세


1860년 4월 20일, 뉴욕 주 트로이 법원청사에서 도망노예 찰스 넬의 판결이 내려지려 했다. 판사는 이미 도망노예 송환법을 적용할 의욕이 만만했고, 그렇게 되면 넬은 노예사냥꾼의 손에 넘어가 버지니아 주의 주인 집으로 끌려가 채찍질, 불에 달군 낙인 찍기, 철가면 씌우기 등등의 끔찍한 보복을 당할 터였다.
법정 뒤쪽에 숄을 두른 한 작달막한 흑인 여성이 빵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는데, 아마 집에서 구운 과자를 팔러 나온 잡상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잠시 뒤, 넬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간수들에게 팔을 잡힌 채 끌려나오자 흑인 아줌마가 갑자기 바구니를 집어던지더니 격투 끝에 간수들을 쓰러뜨리고 어안이 벙벙해진 넬을 잡아끌고서 공범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법원계단을 달렸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경비들의 곤봉이 몇 번이나 여자 괴한의 머리를 내리쳤지만,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허드슨강 너머까지 숨막히는 추격전이 이어졌지만, 마침내 넬은 노예 사냥꾼들도 올 수 없는 "약속의 땅" 캐나다로 가는 마차에 무사히 몸을 실었고 그렇게 해리엇 터브먼이 해방시킨 300명이 넘는 노예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3. 생애


흑인 노예로 태어나 어렸을 때 주인에게 머리를 심하게 구타당한 후로 평생 두통, 경련, 환청[1]에 시달리면서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잃지 않았던 해리엇 터브먼은, 결국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탈출을 하였고, 북부로 건너와 필라델피아 호텔의 평범한 청소부로 지내다가 1850년, 노예 해방을 위한 비밀결사 "지하철도"의 일원이 된 이래, 북부에서는 "노예들의 모세"라는 빛나는 명성을, 남부에서는 농장주들이 다 길바닥에 나앉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인 미친 여자라는 악명을 누렸다.
트로이 법원 습격사건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남북전쟁 전까지 은밀하게 열아홉 번 노선(탈출로)을 운행하여 300명이 넘는 화물(탈출노예)을 빼낸 그녀는 가장 유명하고 수완이 좋은 차장(요원)이었다. 남부의 주정부들은 이 '미친 년'[2]의 모가지에 4만 달러가 넘는 현상금을 걸었고 노예 해방을 위해서는 혁명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돈키호테적이지만 숭고한 이상을 가졌던 초강경 노예해방론자 존 브라운은 터브먼에게 '제너럴'터브먼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이 별명이 말이 씨가 되리라고는 존 브라운도, 터브먼도 상상하지 못했다.

4. 남북전쟁 당시의 활약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연방군을 위해 기꺼이 협조한 터브먼은, 남부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흑인 첩보원들과 접촉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맡았다. 또한 그녀가 노예구출 작전을 여러 번 수행하면서 쌓은 남부의 지리에 대한 정보는 연방군에게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1863년 6월, 터브먼은 제임스 몽고메리 장군의 군사 고문으로서 컴바히 강 습격 작전을 함께 지휘하여,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장군이자 여장군이 되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의 강줄기를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는 터브먼의 인도에 따라 세 척의 증기선에 나누어 타고 컴바히 강 일대의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들을 습격한 연방군은 남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히고 많은 식량과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700명 이상의 노예 동포들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한 '제너럴' 터브먼은 농장이 불타고 '재산'들이 몽땅 도망간 노예주들의 곡성을 흥겨운 BGM삼아 개선했다.
구출된 노예들 중 남자 장정들은 거의 모두가 즉시 연방군에 자원입대했고 북부의 신문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애국심, 지혜, 힘, 그리고 능력"을 기사로 다루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터브먼은 해방된 노예들을 돌보고 버지니아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했다. 부당하게도 그녀의 지위가 비공식적이라는 이유로 정부는 전쟁 중 그녀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을 뿐더러 무려 1899년까지 그녀에게 군인연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터브먼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흑인의 인권과 여성 참정권을 위한 새로운 싸움을 평생 계속했으며 새로운 고향이 된 뉴욕 주 오번에서 인종을 초월해 미망인, 고아, 가난한 참전용사들을 돕기 위해 그녀의 모든 수입과 저축을 자선사업에 쏟아부었다. 1913년, 터브먼이 많은 이들이 애도 속에 숨을 거둔 뒤에도 그녀의 박애주의 정신은 그녀가 나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보금자리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5. 여담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6년, 미합중국 재무부는 그녀의 정신을 기념하여 20달러 지폐의 새 모델로 그녀를 선정하려 했으나 이후 들어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러나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재무부에서 해리엇 터브먼을 20달러 지폐 모델로 선정하는 작업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현지시간 25일 브리핑에서 20달러 지폐 앞면 인물 교체와 관련해 "재무부는 해리엇 터브먼을 20달러 지폐 앞면에 넣는 작업을 가속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원유나이티드 은행에서 터브먼이 그려진 신용카드 도안을 올렸는데 와칸다 포에버 포즈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생일이당으로 출마한 카녜 웨스트가 유세 출정식에서 "터브먼은 흑인들을 해방시킨 적 없고 백인들 밑에서 일하게 했다"는 망언을 하며 흑인 유권자들은 물론 대중 모두에게 빈축을 샀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도미네이션즈에서 유니버시티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2019년 영화 "해리엇"은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다.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겸 배우인 신시아 에리보가 터브먼역을 연기했다. 2021년 현재, 넷플릭스에서 시청가능하다.
그녀의 일생을 다룬 어린이용 전기 '모세'는 2007년 칼데콧 아너 상을 받았고,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1] 본인은 이 환청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의지했다.[2] 처음에 남부인들은 해리엇이 흑인인 줄도 몰랐다. 흑인은 열등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낼 수완이 없고, 분명히 노예 해방에 찬동하는 백인의 소행이라 여겼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