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파제트

 

억스브리지 남작
초대 헨리 파제트 시니어[1]

2대 '''헨리 파제트'''
앵글시 후작
초대 '''헨리 파제트'''

2대 헨리 파제트 주니어[2]
[image]
(1768년 5월 17일~ 1854년 4월 29일)
1. 개요
2. 생애
3. 프랑스 혁명 전쟁
4. 나폴레옹 전쟁
5. 그 이후


1. 개요


초대 앵글시 후작이자 19세기 영국 육군의 별들중 한명이며 워털루 전투의 주역중 하나.
1790년에 영국 의회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는 정치인이었으며, 이후 사임하여 1796년 부터 군에 종군하여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였고 제7 후사르 기병대의 총책임을 맡아서 활약하였다.[3] 프랑스를 상대로 1804년1808년에 연달아서 피해를 입혔고 반도 전쟁에서 종군하다가 1809년에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1815년 워털루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우며 영국 국왕의 배우자인 왕비 정도가 수훈받는 바스 훈장과 앵글시 후작 작위를 임명 받는다.

2. 생애


1769년 5월 17일에 헨리 베일리[4]와 제인 샹파뉴의 아들로런던에서 태어났다. 파제트 자신은 웨스트민스터 스쿨[5]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6]

3. 프랑스 혁명 전쟁


1796년 파제트는 군에 입대하게 된다.[7] 파제트는 군에 입대 하자마자 프랑스 혁명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하원에서 일을 하면서 1793년에 일시적으로 중령으로 업무를 보게 된다. 사실상 정치를 포기한것 역시 이일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한것이 아니라 군인 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인인 특수한 사례에 해당된다. 플랑드르 전역에 참전하였고 1795년 부터 본격적으로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일시적인 중령이 아닌 그해 5월 30일에 푸트 제80연대의 중령이 되었으며 6월 15일에 제16 여왕의 랜서부대로 옮겼다.[8] 16부대에서 그는 대령으로 진급하게 됐으며, 1799년홀란트 침공 당시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기병여단을 이끌고 참전한다. 하지만 만 팔천명이 숨진 이 전투는 끝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4. 나폴레옹 전쟁


1802년 소장으로 진급한 파제트는 존 무어경과 함께 스페인 전역에 참전한다. 사하그 전투에서 13명의 프랑스 장교를 체포하고 300여명의 포로를 잡은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니콜라 장드듀 술트가 이끄는 프랑스 주력군이 근방에 다가오고 있기에,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1808년 12월에베나벤테에서 프랑스의 엘리트 부대를 격파한뒤 기병부대 마저도 제압하였다. 하지만, 코루나 전투에서 무어 경이 술트에 의해 사망하면서 사실상 후퇴할수 밖에 없게된다. 결국 1809년에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궁내부 대신직 역임을 완료하고 사퇴했다.[9] 1809년 마지막으로 그가 군을 이끈것은 발체렌 전역에서 보병사단을 이끈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본토에서 활동하였다. 1810년에 본토 생활도중 아내와 이혼하고 샬럿 부인과 결혼하였다. 2년후인 1812년 부친인 헨리 파제트 시니어가 사망하면서 억스브리지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이것은 완전한 정치적 은퇴였다. 그의 군인 생활과 함께 정치 인생도 이제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정치은퇴와 달리 군인으로써의 은퇴는 찬란하고 후회없는 일이었다.
1815년나폴레옹이 돌아온 시기에 다시금 군에 복귀해 영국벨기에 점령지역에 해당하는 기병사령관을 맡았으며 그해 6월 16일 콰트레브라 전투에서 영국군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전투의 결과는 패배로 끝나며 아서 웰즐리는 군을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론 동맹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것에 대해 분개하였다. 프랑스는 미셸 네 원수가 동맹군을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그의 전략이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교차로 조차 통제하지 못한것을 웰즐리가 눈 여겨봤다. 이틀후 장 바티스트 드루에가 이끄는 프랑스 군을 상대하고 있었으며 중기병의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지속했다. 전투 도중 나라온 포탄에 의해 파제트는 부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여담으로 그는 포탄을 맞을당시 웰즐리와 같이 있었는데 그는 웰즐리에게 "웰즐리 경, 나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라며 오히려 군의 사기를 위해서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고, 웰즐리는 "경이 정말로 다리를 잃게 되었네." 라고 주고 받으며 주변 상황을 수습하였다. 당시 수행관인 토마스 와일드만이 회상하길 "파제트 경은 수술 동안에도 웃으면서 난 꽤 오랫동안 이자리에서 있었네, 나는 47년 동안 멋진 경험을 했고, 나말고 다른 젊은이들이 다치면 안되니 내가 그 부상을 대신 입었다." 라고 말하였다.
결국 워털루 전투가 동맹군의 승리로 마무리 되면서 그역시 영웅이 되었다. 파제트는 초대 앵글시 후작에 임명되었고 1818년 그간의 공로를 높이사 가터 훈장을 서훈받았다.

5. 그 이후


1819년 8월 12일 대장 진급을 마지막으로 군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1812년에 자작 지위를 물려받았으나, 1821년 조지 3세 사후부터 최고궁내경 [10]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전의 의원시절 보다 더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1826년 3월 25일 왕립 요트 편대의 명예대령 [11]에 임명되고, 웰즐리 내각에서 아일랜드 주지사 [12][13]를 무려 두번에 걸쳐 임명되었다. 아일랜드에서 그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으며 13년간 내각에 참여해 영향력을 행사했다.[14] 총리가 웰즐리에서 찰스 그레이로 바뀐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846년 1차 러셀 내각[15]에도 참여하였다. 1846년 11월 9일 그는 드디어 영국육군원수로 추대되었으며, 3년 후에는 아일랜드에서 임기를 마치고 스태포드셔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52년 드디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파제트 경은 죽을때까지 제7 후사르 기병대 대장직을 맡았는데, 빅토리아 여왕 재위 내내 왕립 기병대 등 왕실 소속부대를 맡으면서 그에대한 신뢰를 보냈다. 그러나 1854년 4월 29일 뇌졸증으로 8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는 사후 리치필드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그의 앵글시 후작 작위는 장자인 헨리 주니어에게 넘어간다.

[1] 파제트 경의 부친으로 1770년에 파제트란 성을 택하였다. 원래는 베일리란 성을 가졌다.[2] 파제트 경은 4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헨리라는 이름을 고수했다. 본인 생전에는 그와 구분하기 위해 주니어로 불렸다.[3] 여왕의 제7 후사르 기병대는 영국 왕립군 소속으로 당시는 조지 3세 치세로 국왕의 직속부대였다. 이는 그에 대한 신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위치라고 할수있다.[4] 헨리 경을 낳은건 1769년의 일이므로 그는 아직 성씨를 바꾸지 않았다.[5] 12세기에 웨스트민스터 성당과 함께 건립된 학교로 7살에 입학하여 교육과정을 밟는 초등학교와 같은 기관이다.[6] 정확히는 옥스퍼드 대학 안에 가장큰 건물중 하나인 그리스도 교회라는 종교적인 교육에 진학했다.[7] 어찌보면 1806년에 다시 복직했지만 궁내부 대신을 1810년까지 역임하고 이에대해 이전인 1804년에도 맡았기에 불만을 표하며 다시 군에 복귀한다.[8] 조지 3세 이전에 창립되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에서 군을 지휘한 존 부르고인과 격변의 19세기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육군 원수 윌리엄 하코트가 지휘한 부대이다.[9] 사실상 이베리아 반도에 줄곧 있었기에 1806년의 잠시적인 복귀는 의미가 없었다. 궁내부 대신직도 임기 4년 중에서 3년은 거의 허성세월로 명예직에 불과했다.[10] Lord High Steward, 파제트의 경칭이 Sir, 경이긴 하나 직위상으로는 공에 더 가깝다.[11] 말년에 그는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달렸으나, 군에서 은퇴에 가깝긴 하지만 평생을 봉사하였으니, 군에서 그에게 직위를 주면 군인으로 활동은 가능하긴 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그는 나폴레옹 전쟁 후에는 군인으로써 생활은 거의 끝난것 이나 다름없다.[12] Lord Lieutenant of Ireland,아일랜드는 17세기 부터 영국에선 주로 봤으며 실체적으로도 1171년에 이직책이 형성되었고, 1922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아일랜드의 통치자격을 가진 직책이었다.[13] 이직책은 주지사가 아니라 총독의 개념으로 봐야한다.[14] 파제트의 인생 직책이라고 봐야한다. 그의 전성기는 워털루의 영웅이 된 이후지만 1827년이 진정한 전성기라 할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구가했다.[15] 존 러셀글래드스턴 이전에 휘그당과 자유당이 배출해낸 총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