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전쟁
French Revolutionary Wars, Great French War
1. 개요
2. 배경
3. 전개 과정
3.1.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2~1798)
3.1.1.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 왕들의 선언문
3.1.2.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왕국의 '입법의회' 전쟁 선포
3.1.3.2. 1793년, 대프랑스동맹 참여국의 증가
3.1.3.3. 국민개병제 실시
3.1.3.4. 1793년, 전쟁 시작
3.1.3.5. 스페인 전역
3.1.3.6. 플랑드르 전역
3.1.3.7. 해상
3.1.4. 총재정부 체제
3.1.4.1. 플랑드르 전역: 1795년, 네덜란드 멸망시킴
3.1.4.1.1. 1795년 4월 6일, 프로이센의 동맹 이탈
3.1.4.2. 스페인 침공
3.1.4.2.1. 1795년 7월 10일, 스페인의 동맹 이탈
3.1.4.3. 피에몬트 공격
3.1.5. 왕당파의 반란
3.1.6. 서기 1795년
3.1.7. 서기 1796년
3.1.8. 1797년 10월 17일, 평화조약
3.1.9. 서기 1798년
3.2.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9~1801)
4. 관련 국가 및 인물들
1. 개요
1792년부터 1802년까지 진행된,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프랑스인들이 유럽에 전파시키기 위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프랑스의 혁명 이념이 유럽에 전파되어 왕권, 귀족 신분제가 무너지던 것이 두려웠고 프랑스의 국력이 투쟁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를 분할 점령, 정복 통치하려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군주들이 팀먹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프랑스 혁명전쟁은 나폴레옹 전쟁까지 이어지게 되어 실제적으로는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게 됨으로써 끝나게 된다.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대프랑스 동맹을 맺어 전쟁을 치뤘기 때문에 이후의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대프랑스 동맹 전쟁'''(Coalition Wars)에 속한다. 사실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기 시작하는 프랑스 혁명 전쟁 후반부터는 프랑스 혁명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과 구분짓기 애매하지만 일반적으로 1802년 프랑스와 영국이 체결한 아미앵 조약을 프랑스 혁명 전쟁의 종결 시점으로 본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크게 1792년부터 1797년까지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전쟁, 1798년부터 1802년까지의 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Second Coalition)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시기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제패하게 될 먼치킨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2. 배경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부르봉 왕조가 뒤집어진 뒤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1791년에 프랑스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했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바렌 사건) 이것은 당시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레오폴트 2세의 지대한 관심과 함께 그의 어그로를 끌었다.[1] 레오폴트 2세는 당시의 프로이센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망명 왕당파를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필니츠 선언을 함으로써 프랑스가 선빵을 날리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이미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혁명을 일으켜 새롭게 정부가 들어선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절대왕정국가들과는 서로 가지고 있는 이념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고, 혁명 전까지 대부분 프랑스로 넘어간 '''알자스 지방'''[2] 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제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3. 전개 과정
3.1.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2~1798)
1791년, 유럽의 위대한 절대왕정국이었던 프랑스가 그들이 무시하던 시민들에 의해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국왕 일가 전원이 연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3.1.1.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 왕들의 선언문
이 사태를 지켜본 많은 유럽의 왕들은 이를 위태위태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이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드레스덴 근교의 필니츠 성에서 회담을 가진 후 선언문을 통해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국왕의 명령으로 국외 도피를 하는 망명 귀족들 및 왕당파 대원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선언은 프랑스에 남아있던 왕정주의자들과 귀족들에게 그리 큰 어필을 하지 못했지만, 이것은 프랑스 혁명정부에게 있어서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되는 사건이었다. 거기에 첨언하자면, 앞서 말한 신생 프랑스 공화국과 유럽의 왕국들과의 이해관계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다.
원래 필니츠에서 열린 회담은 폴란드 분할 문제에 관해 양국이 협력한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프랑스 문제는 주된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선언문은 아르투아 백작의 설득으로 인해 형식상 그냥 발표한 것으로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너네들이 너네 '''국왕이랑 그 가족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너네들 싸그리 조져버릴겨!'''"이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국왕에게 손대지 마라는 외교적 압박이었지, 전쟁 위협도, 선전포고도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 모두 전쟁 준비가 안 되어 있기도 했고. 그러나 이 선언문은 그 대상인 프랑스에게 사실상 선전포고라는 오해를 사게 되어 오히려 전쟁 여론을 부채질하게 된다.
사실 '레오폴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처음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일의 신변과 전쟁 확대 가능성으로 인해 신중하게 나가려 했지만 아르투아 백작이 '''프랑스 침공해 달라고 졸라서''' 선언문 내는 것으로 퉁치려다가 결국 일이 커지고 만다.
3.1.2. 1792년 4월 20일, 프랑스 왕국의 '입법의회' 전쟁 선포
결국, 안 그래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뒤무리에즈 장군 앞으로 무수한 민원이 올라오게 되자, 당시 프랑스 왕국 '입법의회'는 1792년 4월 20일에 부쳐진 투표에 의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뒤무리에즈 장군은 혁명의 첫 목표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네덜란드 + 벨기에의 네덜란드 지방은 원래 '스페인'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영토였다. 그중 북부 7주는 30년간의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으나 '남부' 10주는 스페인에게 굴복,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남게 되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의 결과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되었고,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하나의 지방이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나뉘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1.2.1. 당시 혁명군의 상태
그러나, 혁명으로 인해 군대는 지휘계통에 혼란이 생겨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군대를 지휘하는 장교들은 거의 다 귀족 출신이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후 (구 체제를 따르는) 귀족이란 꼬리표가 붙은 대다수의 장교들은 죄다 숙청당하거나 도망가버린 탓에 지휘할 사람이 텅 비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3][4] 완전히 제멋대로가 되어버렸고, 인재가 부족해서 제대로 지휘할 사람이 없자 부대의 전력이 유지되지 못하는 등의 역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제대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사들이 집단 탈영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상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5]
게다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라인강 근처의 코블렌츠에 집결했고, 7월에 프랑스 본토로 침공을 시작, 롱위와 베르뎅을 점령,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 성명[6][7] 이란 걸 발표해서 프랑스 공화국을 "국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역도의 무리"로 규정, 전 유럽이 프랑스의 적이라고 협박을 했다. 게다가 그 브라운슈바이크 성명에 쓰인 것은 "우리들은 왕정복고를 위해 신성한 의무를 다하려 출정한 군대이며, 만일 우리에게 대항한다면 그 어느 누구라도 군법에 회부해서 죄다 사형때리겠음"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기세등등하여 망명간 귀족들이 콩드 대공의 지휘하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하자, 프랑스 공화국은 위기에 빠졌다.
3.1.2.2. 혁명정부의 군대 재조직
일이 이쯤되자, 혁명정부에서는 마치 '''신병을 붕어빵마냥 찍어낼 기세'''로 미친듯이 징집하기 시작했고, 부대를 새롭게 예편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타개될 기미가 안 보이는 데다 슬슬 국민들이 염증을 내기 시작했고, 자코뱅파와 같은 과격주의자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정권을 잡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8월 10일, 시민들은 튀일리 궁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국왕 일가는 의회로 도망치기에 이르렀으나 결국 분노한 시민들에게 넘겨졌다(1792년 8월 10일 봉기).
3.1.2.3.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 승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계속해서 진군을 해 왔고, 이대로 프랑스 공화국은 끝나나 싶었다. 그런데 9월 20일, 발미에서 뒤무리에즈와 켈레르만이 이끄는 혁명군이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했다(발미 전투).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혁명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아졌고, 한창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해야만 했다.
3.1.3. 1792년 9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 '국민공회' 탄생
그리고 발미 전투에서 승리한 그날,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제1공화정이 수립되었다.[8]
3.1.3.1.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제1공화정은 왕정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는 유죄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3.1.3.2. 1793년, 대프랑스동맹 참여국의 증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은 전 유럽을 충격과 놀라움에 빠트렸고, 이는 전 유럽으로 하여금 프랑스 공화국이 '''"국왕을 처형한 놈들의 나라"'''로 찍혀 대프랑스 전쟁이 시작되는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3.1.3.3. 국민개병제 실시
그리고 전쟁에 대비하여 프랑스는 국가적 정책으로 국민개병제를 실시, 1793년 2월 30만 명 징병령을 발표하였고, 동년 7월에는 국가총동원령(Levée en Masse)을 발표, 18세부터 25세 사이의 모든 독신 남성을 마구잡이로 징병하면서 가용병력을 최대한으로 늘렸다. 신병 찍어내기가 정점을 찍었던 1794년 8월에는 병력이 '''150만 명'''에 달했다. 물론 실제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가용 병력의 절반 조금 넘는 8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혁명군은 '''늘어나는 군인의 수에 그 보급량이 한참 못 미치는''' 현상을 겪게 되었고, 혁명군은 결국 보급 방침을 현지에서 강제 징발하여 보급을 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 인구가 3천만 명을 조금 넘긴 수치였는데, 산업 혁명으로 인한 근대화 및 행정체계의 체계화라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18세기 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80만 명이라는 숫자는 전근대 국가가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한계를 한참 뛰어넘은 미친 수치가 맞다.
3.1.3.4. 1793년, 전쟁 시작
1793년 플랑드르 전역이 시작되었으나, 혁명군은 생각지 못한 돌발상황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3.1.3.4.1. 1793년 5월 31일 이후, 지롱드파 도시들의 반란
1793년 5월 31일 자코뱅파가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아예 쓸어버리려 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비교적 지롱드파가 많았던 도시들인 리옹, 아비뇽, 님즈,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3.1.3.4.2. 1793년 말, 툴롱 반란(나폴레옹의 등장)
그러던 와중에 툴롱의 왕당파가 이러한 틈을 비집고 다른 혁명파들을 죄다 쫓아내버리고 영국군과 스페인군을 받아들이자, 이것은 공화국에 있어 상당한 타격이 되었다. 툴롱은 프랑스 해군의 지중해 기지였는데, 그곳을 빼앗긴다는 의미는 사실상 제해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결국 공안위원회에서는 라 발레트 두 바를 함락시킨 장 프랑수아 카르토와 장 프랑수아 코르누 드 라 푸아프[10] 를 사령관으로 해서 툴롱을 다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11] '''그러나...''' 카르토는 군인이 아닌 캔버스와 붓만 잡던 화가였고, 그런 주제에 공동 사령관이었던 라푸아프와는 전선의 지휘권을 두고 알력다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르토 같은 이가 군대의 고위장교로 있던 탓에 프랑스군은 툴롱에 주둔해 있던 대프랑스 동맹군보다 거의 두세 배나 많았음에도 절대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12] 전과가 시원찮자, 11월 11일, 공안위원회에서는 카르토를 자르고 도페라는 이름의 장군을 보냈는데, 이 사람은 카르토만큼이나 군대와는 거리가 먼 의사 양반이었다(…). 아니 그것뿐만이라면 뭐라 안 하겠는데[13] 이 양반이 피만 보면 식겁을 하는 피공포증이 있다는 것[14] 때마침 영국군의 산탄포가 미처 준비되지 못했을 때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돌격할 때에 의사 양반의 호위대가 영국군의 포격 한 발에 사람 좀 죽자 도페는 식겁하며 철수명령을 내렸다.[15] 결국 그렇게 도페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그 대신에 뒤고미에 장군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실전파였던 뒤고미에가 이끄는 혁명군은 12월 18일 결국 툴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그해 마지막에 군대는 더욱 증강되었고, 침략자를 격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공포정치는 한층 레벨을 올려서 더욱 더 많은 '''반혁명분자'''(라 쓰고 정적이라 읽는다)들을 색출, 대거 참살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3.1.3.5. 스페인 전역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숙련치가 거의 만렙을 찍고 있던 혁명군은, 더욱 적극적으로 공세작전을 감행했다. 1794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령 산세바스티안을 접수했다.
3.1.3.6. 플랑드르 전역
플랑드르 전역에서는 플로이루스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벨기에와 라인란트를 떼어먹었다. 승세를 몰아 피에몬트까지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성과는 대략 좋지 않았다.
3.1.3.7. 해상
해상에서, 프랑스는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과 코르시카는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상실했으나 프랑스의 대서양 함대는 미국에서 오는 곡물 수송을 받는 해로는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3.1.4. 총재정부 체제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공포정치의 시대는 가고 5명의 총재들이 집권하는 총재정부 체제로 전환되었다.
3.1.4.1. 플랑드르 전역: 1795년, 네덜란드 멸망시킴
플랑드르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 공화국은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기습공격해 멸망시키고, 괴뢰정부인 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3.1.4.1.1. 1795년 4월 6일, 프로이센의 동맹 이탈
혁명군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본 프로이센은 기겁했고, 때마침 발생한 폴란드 분할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프랑스 공화국과 1795년 4월 6일 바젤 평화조약을 맺고 먼저 리타이어 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프로이센은 라인 강 서쪽의 모든 독일 영토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가 점령한 라인 강 동쪽의 프로이센 영토를 돌려받았으며 프랑스로부터 영국이 동군연합을 겸한 하노버 선제후국의 병합을 인정받았다.
3.1.4.2. 스페인 침공
혁명군은 스페인령 카탈루냐로 쳐들어가 빌바오와 비토리아를 뜯어갔고, 카스티야까지 진군했다.
3.1.4.2.1. 1795년 7월 10일, 스페인의 동맹 이탈
'''역시나''' 놀란 스페인도 그해 7월 10일, 산토도밍고[16] 를 떼어주고 리타이어했다. 그러나 그 대신 프랑스 공화국은 스페인 왕국의 원래 영토였던 땅들을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차라리 스페인 땅 좀 받는 게 나았을 거다. 나중에 산토도밍고에선 반란이 일어나고 파견된 원정군은 괴멸하게 된다(...). 안습.
3.1.4.3. 피에몬트 공격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서 싸웠던 혁명군 부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알프스 방면군과 연합, 피에몬트를 공격하러 갔다.
3.1.5. 왕당파의 반란
3.1.5.1. 방데
그러는 사이, '소피트' 총리의 영국은 방데의 왕당파 반란군[17] 을 움직여 퀴베론에 상륙했다.
3.1.5.2. 파리(나폴레옹(27세)의 부활)
파리에서는 왕당파 군인들이 공화국 정부를 뒤엎으려고 했지만, 나폴레옹이 포도탄을 이용한 무자비한 진압을 하자 결국 실패했다.
3.1.6. 서기 1795년
3.1.6.1. 라인 전선
라인 전선에서는 피셰그루 장군이 추방당한 왕당파 당원들과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 후, 피셰그루는 당장 만하임과 마인츠에서 강제적으로 철수할 것을 군대에게 명령했다. 그 결과 프랑스의 영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3.1.6.2. 이탈리아 전선
그런 반면에 북이탈리아의 혁명군은 로아노 전투에서 승리했고, 얼마 안있어 맺어진 조약으로 북이탈리아의 영유권을 얻어냈다.
3.1.7. 서기 1796년
3.1.7.1. 라인군과 이탈리아 군을 합쳐 빈 공격 작전 개시
1796년, 혁명군은 대담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과 이탈리아에 있는 나폴레옹의 군대를 움직여, 티롤리아로 진주시켜 빈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르당과 모로의 라인군은 독일 남부를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고, 주르당과 모로는 목표한 지점에 거의 도달해 가고 있었다. 특히 모로가 이끄는 중앙군은 바이에른을 지나 9월에 목적지인 티롤리아에 거의 도달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주르당은 카를 대공과 조우하여 신나게 털린 다음 쫓겨나고 있었다.
이어서 카를 대공의 오스트리아군은 마리 모로의 군대까지 덮쳤는데, 이때 카를은 프랑스군의 후위를 맡은 '미셸 드 보퓌' 장군을 전사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모로의 적절한 대처로 프랑스군은 추격당하는 입장이었음에도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실제로 사상자 숫자는 비슷했으며 카를 역시 휘하의 장군 한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3.1.7.2. 이탈리아 전선(나폴레옹의 활약)
주르당이 개털리고 모로가 퇴각하고 있을 당시, 드디어 혁명전쟁에 참여한 나폴레옹(28세)은 이탈리아에서 목적을 이루고 있었다.
3.1.7.2.1. 4월 23일, 사르데냐
우선 사르데냐와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합류하지 못하게 갈라놓았고, 점점 강도를 높히면서 사르데냐를 협박한 결과 만토바를 공격하고 있을때쯤 사르데냐로부터 평화조약을 맺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사르데냐는 리타이어 했다.
3.1.7.2.2. 만토바
그리고 만토바를 공략하던 중인 나폴레옹을 찌르기 위해 뷔름저 공작의 오스트리아 군대(1차 구원군)가 치사한 뒤치기를 하러 오자 나폴레옹은 만토바에 있던 공성용포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만토바를 포위해제한다. 되살아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른 우회기동을 통해 뷔름저공작 군대의 후미를 공격하였고 뷔름저는 비어있는 만토바입구로 재빠르게 도망쳤고 일단 만토바요새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주르당과 모로의 삽질로 인해 라인강방면군은 전멸당했고 라인강방면군 방어에 치중했던 카를 대공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급히 군대를 틀어 뷔름저가 갇혀있던 이탈리아 만토바를 구원하기로 결정한다.(2차구원군) 순식간에 나폴레옹은 3만의 군대로 7만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야할 위기에 쳐해있었고 나폴레옹은 최초로 야전에서 패퇴를 거듭한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적의 보급을 끊어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굶겨죽이려는 발상을 생각해냈고 또다시 한번 본대를 아르콜로 보냈다. 당시 아르콜은 오스트리아의 식량창고가 있던 곳으로 3000의 수비대가 주둔 중이었는데 나폴레옹은 기병대를 이용 우회기동을 통해 다리를 돌파하고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다시 한번 식량문제 때문에 주춤하고 티롤에서 군대를 모집 중이었던 알빈치장군을 보내 만토바를 구원하려하였으나(3차구원군) 이미 식량문제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1,2차구원군은 전투에서 비협조적이었고 나폴레옹은 손쉽게 리볼리전투에서 알빈치군대를 격파. 이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지역을 장악하고 포위 중인 만토바에 총공세를 가한다.
3.1.7.3. 아일랜드 원정
3.1.7.3.1. 호셰의 원정군: 실패
그해에 방데의 왕당파 반란군은 호셰에 의해 완전히 박살났고, 한동안은 조용했다. 그후 호셰는 아일랜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원정을 나갔지만 보란듯이 영국 해군에게 무참히 박살나고 끝났다. 호셰는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다.
3.1.7.3.2. 1797년 2월, 생 빈센트 곶 해전: 패배
1797년 2월 브레스트의 프랑스 해군과 합류하려는 호세 데 코르도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해 존 저비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출진, 생빈센트 곶 해전이 벌어졌고, 역시나 영국 해군은 승리했다.
3.1.7.4. 빈 방면
해상의 전투와는 상관없이, 육상의 전투는 선전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미친듯이 만토바를 구원하러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차례차례 격파하고 만토바의 오스트리아군 1만 8천여 명의 항복을 받아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를 '''안드로메다 관광 태울 기세'''로 티롤리아로 진군, 빈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나폴레옹군에 맞서러 나갔는데, 이 상황보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4월에 모로와 호셰의 혁명군이 오스트리아를 샌드위치로 만들기 위해 다시 한번 진군하고 있다는 것.
3.1.8. 1797년 10월 17일, 평화조약
오스트리아는 결국 이 이상은 털리고 싶지 않았는지, 나폴레옹에게 평화 조약을 맺자고 GG쳤고, 결국 1797년 10월 17일 캄포포르미오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고 라인 강 서안의 모든 제국 영토를 할양, 리타이어하면서 일단 유럽전선의 제1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은 끝이 나게 된다.
3.1.9. 서기 1798년
3.1.9.1. 이집트 전선(1798 ~ 1801)
1798년 나폴레옹은 지중해를 점유하던 영국 해군과 인도에서의 영국의 입지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침공하면서, 얼떨결에 오스만 제국도 대프랑스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몇 번의 승리를 거두나 전투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영국의 견제가 심해지고 본국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 때문에 전선을 이탈하여 본국으로 돌아간다.
자세한 전개는 이집트 원정을 참조할 것.
3.1.9.2. 스위스 전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외에도, 프랑스는 스위스를 침공, 말 잘듣는 헬베티아 공화국을 세웠다.
3.1.9.3. 아일랜드 전선, '코노트 공화국'
비밀리에 아일랜드를 돕기 위해 아일랜드 코노트에 혁명군을 상륙시켰다. 장 조제프 아마블 훔베르가 이끄는 혁명군 1천 명은 코노트의 북서부에 있는 킬쿰민에 상륙했고, 다른 아일랜드 반란군 5천 명과 연합했다.
캐슬바 전투에서 2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제라드 레이크가 이끄는 영국군 6천 명과 대치하게 된 훔베르는 150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영국군 300명 가까이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그 후 '코노트 공화국'을 세우게 되나, 9월 8일에 롱포드 주에서 일어난 발리나묵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훔베르는 미국으로 도망쳤고, 코노트 공화국은 세워진 지 약 1달 만에 멸망했다.
3.1.9.4. 로마교황 폐위, 로마 공화국 설립
이탈리아 방면의 혁명군은 로마로 쳐들어가서 교황 비오 6세를 폐위시키고 로마 공화국을 세웠다.
3.2.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1799~1801)
제2차 이탈리아 전쟁 항목도 참조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전쟁 피로가 누적되자 스웨덴의 중재 하에 프랑스와 동맹군 간의 강화 회담인 제2차 라슈타트 회의가 열렸으나 아직 멀쩡하던 영국, 여기에 회의를 질질 끄는 메테르니히의 책략까지 더해지면서 대프랑스 동맹군은 강화를 체결하기도 전에 동맹을 재결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1799년 영국은 다시 오스트리아를 끌어들이고, 아예 프랑스를 제대로 밟아주기 위해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제2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했지만 8월이 되도록 별다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탈출, 프랑스로 귀환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영국은 빨리 러시아를 불러 네덜란드 침공을 감행할 것을 요청, 요크 공작의 지휘하에 영국-러시아 연합군은 홀란드의 북쪽 끝단에 상륙했다.
그러자 놀란 프랑스 정부에서는 기욤 마리 안느 브륀을 파견, 네덜란드 방어전을 지휘하게 했다. 혁명군과 바타비아 공화국군은 브륀의 지휘하에 방어전을 수행했고, 10월 6일에 카스트리쿰 전투에서 영국-러시아 연합군을 쳐바르면서 방어전에서 승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그해 1월 혁명군의 공세가 펼쳐졌고, 혁명군은 나폴리 왕국군을 추격해서 끝내 수도 나폴리를 탈취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방면군을 지휘하던 셰레는 팔 크라이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되자 GG치고는 지휘권을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에게 넘겼다.[18] 그러나 모로도 전황을 타개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여서 카사노 전투에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가 이끄는 군대에 처절히 발렸고, 프랑스는 북이탈리아의 영토를 점점 상실하고 있었다. 6월에는 수보로프가 맥도널이 이끄는 혁명군을 트레비아에서 발라줬고, 도망가는 혁명군을 쫓아 알프스와 제노바로 각각 추격을 개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프랑스 여론은 총재 정부의 무능을 힐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한창 승세를 타고 혁명군을 버로우시키면서 진군하던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제2차 취리히 전투에서 앙드레 마세나가 이끄는 7만여 명의 혁명군에게 분노의 고자킥을 맞고 제대로 작살났다. 제1차 취리히 전투 때에는 마세나가 수적 열세로 패배하긴 했지만 카를 대공의 발을 묶는데 성공했었고 또한 사상자 숫자조차 수적 우세를 겸했던 카를이 더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전쟁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마세나가 수적 우세로 찾아오니 버틸 수가 없었던 것. 게다가 이때 카를 대공은 보급 문제로 잠시 아린 강 방면까지 이탈해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심하게 데인 탓인지 러시아는 점점 소극적 자세로 나가다가 1799년 결국 2차 대불동맹에서 리타이어했다. 결국 전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해 마지막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떠나서 프랑스로 귀환, 자기를 아예 떠나보내려 했던 총재 정부를 싹 갈아버리고 3인 통령의 통령 정부를 수립, 자기가 제1통령이 되었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한편 나폴레옹이 떠나간 이집트에서는 나폴레옹에 의해 사령관으로 임명된 장 밥티스트 클레베르가 이 상태로는 원정을 진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프랑스로의 무사 귀환을 위해 영국 함대 소속의 시드니 스미스와 엘 아리시에서 쇼부를 쳐서 합의를 보지만 케이스 제독이 제대로 배신때리고 엿을 선물하자 빡친 나머지 진군해 오는 6만의 오스만군을 상대로 헬레오폴리스에서 개전, 오스만군 3천 명을 전사시키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저항하는 카이로를 재점령했고 잠시 업무를 보게 된다.
근데 그러다가 시리아 출신 대학생 솔레이만 엘 할라비에게 끔살당했고[19] , 클레베르의 지휘권은 메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남겨진 이집트 원정군의 사령관이었던 클레베르가 암살당한 뒤 자크 프랑수아 메누가 그 지휘권을 잡았으나 제2차 아부키르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지는 알렉산드리아 공방전에서 병사들의 대부분이 병에 걸려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결국 항복하고 영국 함대에 실려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1800년 나폴레옹은 모로에게 독일 공략을 지시했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디종에서 스위스를 지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에 도착했다. 상황을 판단한 오스트리아군은 즉각 포위망을 뚫기 위해 군대를 집결, 마렝고에서 결전을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드제의 별동대가 다시 돌아와 스스로 오스트리아군 중앙에 닥돌하게 되자 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군은 알아서 괴멸했다. 그러나 드제는 여기서 전사했다(마렝고 전투).
나폴레옹이 북이탈리아에서 다시 프랑스의 입지를 넓히고 있을 무렵, 모로는 바이에른을 침공,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고(호엔린덴 전투.1800) 그대로 빈으로 진군하여 오스트리아로부터 화평 제의를 받아냈다.
1801년 2월 9일 뤼네빌에서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루드비히 폰 코벤츨 백작의 서명으로 뤼네빌 조약(Peace of Lunéville)이 맺어졌고, 오스트리아가 리타이어하여 2차 대프랑스 동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가 (기존의 정부를 갈아엎고 새로 만든) 새로운 공화정 체제의 국가들(바타비아 공화국(네덜란드), 헬베티아 공화국(스위스), 치살피나 공화국(북이탈리아), 리그레 공화국(제노바))에 대한 승인을 재확인 받았고, 프랑스의 라인란트 병합을 다시 한번 재확인 받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가 갖고있던 토스카나 대공국을 프랑스에게 넘겨줬고, 이탈리아에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했다. 여러모로 오스트리아에게 안습인 해였다.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 또한 1801년 프랑스와 플로랜스 조약(Treaty of Florence)을 맺어 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이탈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대프랑스 동맹 회원들이 리타이어했지만 영국은 아직도 프랑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영국은 영국의 몰타 섬 점령에 항의하기 위해 결성한 무장 중립 동맹 가맹국인 프로이센, 덴마크, 러시아, 스웨덴이 아니꼬왔고, 결국 호레이쇼 넬슨을 시켜서 덴마크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 덴마크가 어디에 줄을 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다(코펜하겐 해전).
1802년 이도 저도 뜻대로 되지 않고 대프랑스 주전파였던 피트가 총리 자리에서 퇴진하고 후임으로 대프랑스 주화파인 애딩턴이 임명되면서 영국은 프랑스와 아미앵 조약을 맺었고, 이로서 길고 길었던 혁명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미앵 조약의 결과로, 영국은 바타비아 공화국에게 남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돌려줬고, 서인도 제도 중 네덜란드 영토인 섬들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후퇴하게 되었지만, 대신 트리니다드, 토바고, 실론을 양도받았고, 몰타와 고조, 코미노 섬의 성 요한 기사단을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보호령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의 결과, 유럽의 모든 나라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인정하게 되었고, 혁명전쟁 기간 동안 보여준 프랑스 혁명군의 무지막지한 전투력은 다른 나라들에게 프랑스는 '''절대 깔봐선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크게 어필했다. 프랑스는 공화국 체제를 인정받았으며 왕정 시절부터 그렇게 부르짖던 자연국경을 달성해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유럽 곳곳에 동맹국 및 위성국들을 만들어 나름대로 세력도 두었다. 하지만 대프랑스 동맹국들은 프랑스를 여전히 꺾고 싶어 했고 프랑스와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프랑스 아래에 꿇리고 싶어했으니 두 세력의 충돌은 곧 제3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4. 관련 국가 및 인물들
- 프랑스 공화국 및 기타 연합, 속국
- 프랑스 혁명정부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26인 원수들[20] 대부분
- 라자르 니콜라스 마르게리트 카르노
- 라자르 오슈
-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
-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 샤를 빅토르 에마뉘엘 르클레르
-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즈
- 자크 프랑수아 뒤고미에
-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
- 장 봉 생 안드레
- 장 빅토르 마리 모로
- 프랑수아 세브린 마르소 데그라비에
- 아일랜드 연합[21]
- 버게날 하비
- 시어발드 울프 톤
- 폴란드 군단[22]
- 바타비아 공화국
- 헬베티아 공화국
- 프랑스 혁명정부
- 대프랑스 동맹[24]
- 프랑스 왕당파
- 콩드 대공 루이 조제프 부르봉
-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
- 다고베르트 지그문트 폰 뷔름저 백작
- 미하엘 프리드리히 베네딕트 폰 멜라스 남작
- 요제프 알빈치
- 페터 비투스 콰스다노비치
- 프로이센 왕국
-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 호엔로에 대공 프리드리히 루이
- 영국
- 러시아 제국
- 프랑스 왕당파
[1] 기존의 군주정 체제를 위협하는 혁명세력을 경계해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사적으로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이며 루이 16세의 처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전쟁은 피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2] 이미 프랑스의 소유가 되었지만, 거기는 게르만계 언어인 알레만 독일어의 방언인 알자스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심지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알자스에는 아직 독일 제후국의 영토가 있었다.[3] 그로 인해 1793년 툴롱 공방전에서 지휘하는 사령관이 '''캔버스와 붓만 잡던 화가 출신 장군'''과 '''피만 보면 식겁하는 의사 출신 장군'''이 임명되는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4] BBC에서 제작한 Heroes & vilains라는 다큐 드라마 나폴레옹편에서 나폴레옹 상관으로 '페리윙클'이라는 장교가 오는데, 대단히 수다스럽고 감상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전투가 시작되고 피를 보자 울먹이면서 벌벌떨며 스스로 모랄빵에 빠진다(...).[5] 테오발드 디용이 이끌던 부대는 전투(마르칸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병사들이 "우리가 진 원인은 너님 같은 귀족이 우리 상관이라 그런거라능!"이라며 디용을 끌어냈고, 디용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끔살당했다(…).[6] 이런 것을 쓴 사람이 다름아닌 망명한 콩데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양반은 루이 16세의 종친이었다. 콩데가 망명 후 만든 군대가 소위 '망명자 군대 (emigre)'라고 하는 집단으로 다수의 귀족이 여기에 가입했다. 여담이지만 이름 보면 알 수 있듯이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대 콩데의 고손자다. 하긴......대 콩데도 프롱드 난 이후에 에스파냐의 멜로, 돈 후안 호세 등과 함께 프랑스에 맞섰으니[7] 그런데 영국이나 프로이센은 콩데를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프랑스에게서 영토를 더 뜯어내는 것이었다. 당장 영국만 봐도 절대왕정 체제에 대해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는 혁명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헌법 체계에 대해서는 일부 공감했다.[8] 이때부터 그 유명한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9] 게다가 당시 스페인은 보르본 왕조로 프랑스의 왕족들과는 가까운 친척 관계인 것도 한몫 했다.[10] Jean François Cornu de La Poype. 귀족 장교 숙청 당시 공화파를 지지해서 살아남았다.[11] 이때 나폴레옹도 툴롱 공방전에 포병 대위의 자격으로 참가하게 된다.[12] 나폴레옹은 거듭 상관인 카르토에게 작전을 입안하여 신청했지만 무능한 카르토는 "한낱 '''대포 대위'''가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며 시원스럽게 나폴레옹의 작전을 씹었다(…). 그리고 오로지 무한 닥돌로 병사들의 희생만 잔뜩 늘리고 있었다...[13] 의외로 뒷배경이 이런데 출세한 사람들이 혁명기에 꽤 됐었다[14] 사실 내과의였다[15] 이때 젊은 대위 나폴레옹은 대놓고 도페에게 나아가 "후퇴 명령을 내린 얼간이가 당신이오?" 라고 물었는대 도페는 무서워서 감히 뭐라 하질 못했다고(...)[16] 현재 카리브 해의 히스파니올라 섬에 위치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이다.[17] 여기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 수준은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프랑스 역사 전체에서도 흑역사로 취급될 수 있을 만큼 잔인했다. 방데 전쟁 문서 참고.[18] 당시 모로는 왕당파로 변절한 샤를 피슈그뤼(Charles Pichegru)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아 퇴역한 상태였는데 이탈리아 전황이 악화되자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19] 그가 클레베르를 죽이게 된 이유는 세금을 못 내서 갇힌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재정적 부채를 탕감해 주는 대신 클레베르를 죽이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 클레베르를 죽인 후 그는 카이로 광장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20] 나폴레옹 전쟁 문서 참고.[21]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아일랜드에서도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 만들어진 단체가 "아일랜드 독립 연합" 이었다.[22] 1790년대부터 1810년대까지 프랑스군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폴란드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23]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딸이 이 사람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사위다. 이 딸의 경우 어머니가 바람을 피우다가 아버지와 이혼을 했는데 그 어머니의 오빠, 즉 외삼촌이 위의 페르디난트 원수다.[24]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유럽의 거의 모든 왕정국가들이 프랑스 공화국을 엎어버리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개중에는 오스만 제국(!)도 포함되어 있다. 그냥 대부분의 왕정국가들이 공화제를 타도하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고 보면 쉬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