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장드듀 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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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s Jean-de-Dieu Soult
(1769년 3월 29일 ~ 1851년 11월 29일)
1. 개요
2. 생애
2.1. 전투의 달인
2.2. 잇다른 실패
2.3. 부르봉 왕조 복귀 후
3. 평가


1. 개요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때의 프랑스군 장군이자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 원수 중 한 명. 초대 달마티 공작.[1] 그리고 왕정복고 때 프랑스대원수까지 오르며 21세기 현재까지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대원수로 이름을 남기고 있다.
휘하 부대의 규율과 기강, 보급을 늘 만반으로 준비 해놓는 운용 능력도 보여주었지만 그의 전술적 기량은 그가 상대한 영국군 지휘관들에 비해 약간 부족했고, '''참모로서는 유능하지 못해''' 스페인 전선을 망치는 단초를 제공했으며 워털루 전투의 패배에도 일조했다.

2. 생애


1769년 북프랑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16세에 이등병으로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이등병으로 군력을 시작했음에도, 그가 유년기 받은 고등교육 덕택에 그는 복무 5년 만에 하사관으로 진급하고 1792년에 혁명정부가 들어서고부터는 자기 부대에서 차출되어 신설된 자원병 대대의 훈련 교관에 임명, 교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장교가 부족했던 혁명정부의 눈에 띄어 1년만에 대위로 파격적인 진급을 한다.
1794년에는 대대장, 1796년에는 여단장에 오르는 등 진급에 진급을 계속했고, 1799년에는 앙드레 마세나 휘하에서 복무하며 스위스 전역에 참전, 쮜리히 포위전에서 도시 공격의 일부를 담당했으며 그 때의 공으로 인해 사단장에 임명된다. 술트는 계속해서 마세나 밑에 복무하며 1800년의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했는데, 이 때 제노바 전투에서 그는 나폴레옹의 눈에 든다. 나폴레옹은 이 때까지 술트에 대한 칭찬과 명성만을 들어보았을 뿐이었고 직접 대면한 바 없었는데, 그는 술트를 눈여겨보고 마세나에게 술트가 그 명성만큼의 장수냐 물었다. 이에 대한 마세나의 대답은 '''"그의 판단력과 용기로 보면 그보다 더 뛰어난 지휘관은 드물겁니다."''' 였다. 나폴레옹은 이 때 즉각 술트를 중용하기 시작, 1804년에는 원수로 진급한다.

2.1. 전투의 달인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적지 깊숙히 들어와 병력면에서 우세한 동맹군과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술트는 , 뮈라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후퇴를 설득하기로 합의했는데, 나폴레옹을 직접 설득하는 건 가장 나폴레옹과 친한 란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란에게 후퇴를 제안받고 몹시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술트는 그 자리에서 "저라면 절대로 후퇴를 건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여 란의 뒤통수를 쳤다(...). 빡친 란이 결투를 신청하자 나폴레옹이 중재를 나서서 어떻게든 무마되긴 했지만 이 일로 란과 사이가 틀어져 버린다.[2] 그러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일, 나폴레옹군의 우익을 담당한 술트는 오스트리아군이 포진한 고지를 '''20분이면 충분'''하다며 실제로 '''15분만에 점령'''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그 후 예나, 아일라우등지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과 싸우다가 1808년 혼란에 빠진 이베리아 반도를 수습하기 위해 출동한 나폴레옹을 따라 스페인으로 향한다. 여기서 스페인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중이던 영국군을 패퇴시키고 사령관 무어 장군을 전사하게 하는 성과를 올린다.

2.2. 잇다른 실패


그러나, 이후 포르투갈로 너무 느리게 진군하다가 신임 사령관 웰링턴 지휘하에 전력을 재정비한 영국군에게 패배, 스페인으로 후퇴하여 웰링턴과의 악연을 시작한다.
이후 술트 원수는 스페인 국왕이 된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군사자문관으로 스페인 주둔 프랑스군을 지휘하지만, 판단착오와 우유부단함으로 스페인 게릴라를 키우고, 영국군의 증강을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1811년, 마세나 원수와 양동으로 포르투갈의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출동, 영국-포르투갈연합군이 주둔하던 바다호즈 요새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마세나 원수의 부대가 패하는 탓에 요새 주둔군을 놔두고 퇴각한다.
그해 4월, 영국-포르투갈군이 바다호즈 요새를 제공격하자 구원, 1812년까지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낸다.
1813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돕기 위해 독일로 호출되지만, 독일에 도착할 무렵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함으로써 러시아 전투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해 5월 뤼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활약하지만, 웰링턴의 영국군이 스페인으로 재침입,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하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 남부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영국군이 스페인을 석권했기 때문에, 술트는 프랑스 남부에서 예비군을 중심으로 급조부대를 편성, 피레네 산맥에서 영국군이 프랑스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전투를 벌였지만, 일주일만에 8만명의 프랑스군이 영국군의 맹공으로 와해되어 술트는 잔여병력을 이끌고 영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프랑스로 퇴각한다.
1813 ~ 1814년 겨울 동안 술트는 와해된 프랑스군을 재규합하여 남부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웰링턴에게 번번히 패배, 하여 툴루즈까지 후퇴한다. 그리고 1814년 4월, 툴루즈를 포위한 웰링턴의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과거 여러차례 웰링턴에게 털렸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아주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오히려 도시로 들어오려던 연합군을 격퇴 해버리는등 예상외로 선전하였다. [3] 하지만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4일 전 나폴레옹이 황제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선 결국 대불동맹군과 휴전을 하게 된다. '툴루즈 전투'는 백일천하 이전 프랑스군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 되었다.
나폴레옹 퇴위 후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하자, 곧바로 달려가 나폴레옹의 총참모장이 된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에서 술트는 나폴레옹의 명령을 잘못 전달하거나 늦게 전달하는 등[4] 참모로서의 재능이 부족했음을 보이며 패배에 일조하고 만다.[5]

2.3. 부르봉 왕조 복귀 후


부르봉 왕조 복귀 후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지만, 1819년 루이 18세에게 용서받고 귀국, 국방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1830년 7월혁명으로 샤를 10세(루이 18세의 동생)가 퇴위하고 루이 필리프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자 즉시 루이 필리프에게 충성을 맹세, 그의 아래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1838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식에 특사로 파견, 나폴레옹 전쟁기간 중 치열하게 싸웠던 웰링턴 공작과 재회한다. 여기서 웰링턴은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달려들어 술트의 팔을 잡아 그를 놀라게 하며 "드디어 잡았다!!"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이유인 즉슨, 전쟁 내내 술트가 여러번 그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 갔던 것에 대한 장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트 역시 넉살 좋게 웃으며 옛 숙적과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눴다.
1839년부터 1847년까지 루이 필리프 밑에서 총리를 역임, 무난하게 직무를 수행했으나 몇차례 뇌물수수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필리프를 버리고 자신 열성적인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하며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술트의 정치 생활은 길었으나 딱히 특기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총리직을 여러번 지냈으나 이는 대부분 무난하게 흘러갔다. 어떤 이는 그의 정치 감각에 대해 "그는 적군 앞에서만 용맹했다.'"고 평했을 정도였으니. 뇌물 수수 혐의도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다.
결국 나폴레옹과 동갑으로 30년이나 더 살며 당시에는 엄청나게 오래 산 82살 천수를 누리고 1851년에 눈을 감았다.

3. 평가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으로 불리기에는 부족했으나 '''야전지휘관으로서는 유능한 인물'''.
나폴레옹 → 루이 18세의 왕정복고 → 루이 필리프의 입헌군주체제로 계속 변화하는 시류에서 내내 고관의 자리를 유지한 '''처세술에 뛰어난 인물'''.
사석에서 나폴레옹은 술트에 대해 '''"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유인 전술가."''' 라고 평했을 정도로 유능한 야전 사령관이었지만 참모로서 능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권교체기에 약삭빠른 행동으로 인격적으로는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다만 파리 방어를 맡아놓고 조금 불리해지는 낌새가 보이자 바로 항복해버린 마르몽과는 달리,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 웰링턴한테 두들겨 맞으면서도 홀로 끈질기게 버티었고, 나폴레옹이 하야 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은 높게 사줄만 하다.
또한, 코루나 전투에서 적장인 영국군 무어 중장이 전사했을 때 남겨진 그 유해를 예우를 갖추어 제대로 묻어준 점이나, 영국군 포로들을 원칙에 맞게 잘 대우한 점, 그리고 반도전쟁과 피레네전투, 남프랑스의 전투들에서 '웰링턴의 호적수'로 활약한 점,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 대관식에서 프랑스 대사로 참석한 것 때문에 술트는 영국인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1] 정식명칭은 1st Duc de Dalmatia.[2] 출처: 그레고리 프리몬-반즈,토드 피셔 작, <나폴레옹 전쟁-근대 유럽의 탄생> p.81~82[3]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숫적으로 근소하게 불리했지만, 웰링턴측 보다 사상자도 적게 냈다. 그러나 영국군이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고지대를 선점하자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철수 해버렸다. 참고로 영국과 프랑스 양측은 현재까지도 서로 자신들이 이긴거라고 주장하고 있다.[4] 대표적으로 숲속탐험을 하느라 헤매던 에마뉘엘 그루시를 찾으라며 명령했을 때 술트가 단 한 명의 장교만 보내자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라며 질책했다고 한다(…). 그 전령도 가다가 영국군의 포탄을 맞고 죽어버렸고.[5] 다만 웰링턴에게 털려본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군을 얕봐선 안된다며 나름 최선을 다해 직언을 하긴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걸 '''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