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레코드
1. 개요
'''형레코드'''는 1980년대말~1990년대 중엽에 걸쳐 서울 명동 회현지하상가에 있었던 레코드 가게의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형음악실'. 이 정식명칭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주로 형레코드라고 많이 불렀다. 로고는 커다란 원 안에 형이라는 글자. 지하철 명동역에서 5번 출구로 나와 쭉 내려가면 나오는 회현지하상가의 입구로 들어가서 계단을 내려가면 맨 첫번째로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수도 없이 많이 있던 레코드(그리고 CD)가게의 하나일 뿐으로 보이겠지만 한국의 오덕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기념비적인 곳이다.
2. 서론
형레코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테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1963)이래로 언제나 최고의 애니메이션 강국이었고, 특히 그렌다이저등의 수퍼로봇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최소한 한국에서 봤을 때, 한일간의 기술력 격차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고, '만화영화'는 어차피 애들이나 보는 것이었다. 비록 편수가 많은 TV시리즈는 일본 애니를 방영해주더라도, 방학 시즌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로보트 태권 V등 한국 애니로 충분히 대응가능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래서 70년대까지는 일본애니를 지상파 TV를 통해 충분히 시청할 수 있었고, 그 당시 어린이 세대는 마징가 Z, 그로이저X등 일본 애니를 나름 볼 수 있었던 시기였다.
80년대에 오면서 얘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 유명한 기동전사 건담(1979)[1] 부터 일본 애니는 한 단계 위의 레벨로 올라가게 된다. 내용면에서 주 타겟을 어른으로 삼고, 영상 표현은 고도로 진화해간 것이다. 이 변화를 한국 애니는 따라잡지 못하고 뒤쳐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1980년대 내내 한국은 일본 애니메이션 쇄국 체제에 돌입한다. 이런 식의 특정 국가에 대한 문화 보이코트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일본의 경제호황을 바탕으로 제작된 80년대의 수많은 걸작 애니메이션들은 오직 한국에만 수입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의 영부인이 일본 애니를 싫어했다든가 하는,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루머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 성인 애니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당국이 꺼렸던 것이다.[2]
일단 TV에 방영하는 일본 애니는 소공녀 세라, 개구리 왕눈이등 어린이 명작동화 수준으로 통제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상영금지되어 있었다. [3] 정보도 차단되어서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토모 카츠히로의 애니가 해외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고 있었을 때 한국의 미디어는 철저히 이를 외면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나 AKIRA라는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마니아들을 제외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암흑시대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고 있었다.[4] 형레코드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3. 상세
형레코드에서는 아래의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일본의 오타쿠 문화를 한국인에게 소개하는 일을 담당했다.
1. 일본의 음악 CD를 직접 사와서 판매했다.
2.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LD로 사온 다음에, 고객의 주문에 맞춰 그것을 VHS비디오테이프에 복사하여 판매했다.
구매대행의 선구자라는 시각도 있으나 단순한 구매대행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일반적인 구매대행은 단순히 돈받고 물건 사오는 심부름꾼에 불과한데 반하여, 당시에는 일본에서 도대체 어떤 문화가 창궐하고 있는지를 한국의 소년들이 전혀 알지 못했다. 즉, 형레코드가 사가지고 온 물품의 리스트를 통하여 한국에 일본 서브컬쳐가 전파되었던 것이다.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형레코드의 사장은 문화의 전파자, 그리고 한국 오덕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의 오덕 1세대중에서 이 가게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5][6]
압구정동의 상아 레코드도 비슷한 영업을 했고,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는 외국 서적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있고[7] , 전진상 기념관에서는 애니메이션 동호회 애니메이트가 비정기적으로 상영회를 여는 등[8] , 명동은 한류가 판치는 지금과는 정반대로 일류의 최첨단 같은 곳이었다. 심지어 인천이나 천안등 좀 심하게 먼 곳에서도 CD와 비디오를 사러 여기까지 천리길을 마다않고 찾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지갑을 열었다. 정확히는 천리길을 마다않고 '''두번을''' 찾아와야 했다. 주문하러 한번, 몇 주 후에 도착한 물건 찾으러 또 한번(...) 그런 수고를 들여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전영소녀>같은 비디오 몇 편에 불과했다. 게다가, 형레코드측에서 영상에 자막을 입히는 서비스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객중에서 극히 일부의 능력자를 제외하고는, 흘러가는 영상을 뜻도 모른 채 바라봐야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9][10]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소년들은 명동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토록 명동 중국대사관 및 회현상가는 '''한국 1세대 오타쿠들의 쇼핑 요람중 한곳이었다'''.
형레코드의 사장은 딱히 '문화의 전파자'라는 선구자 의식은 없었고, 가격은 대체로 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덕들이 오덕오덕거리면서 찾아와 기꺼이 지갑을 여니 땅짚고 헤엄치는 장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디오 복사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편당 가격을 받았다는 점이다. 즉, 30분짜리 애니메이션도, 120분짜리 애니메이션도 단돈 만원(1990년대 초반의 만원이다!)[11] 만 내면 복사를 해줬다는 것이고,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은 별도였다. 이제와서 보면 악덕 장사가 따로 없다(...) 그래서 돈이 튀지 않는 소년들은 길이가 가장 긴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몇십편이나 되는 TV 애니메이션 등은 그림의 떡이었다. 리스트를 보며 그저 군침만 흘릴 뿐.
형레코드가 시간당이 아닌 편당으로 가격을 매겼던 것은, 오덕들의 돈을 더 긁어모으려고 하는 악의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비디오 테이프의 더빙에는 애니의 러닝타임하고 같은 시간이 요구되는데, 30분마다 LD를 교환하고 비디오 테이프를 바꾸고 하는 식으로는 한 사람이 TV 앞에 계속 매달려 있게 된다. 상대적으로 극장판 2시간을 걸어놓는다면 그 여분의 시간에 다른 부업을 더 할 수 있으니 현실적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연비가 좋아지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형레코드의 가격 정책은 오덕들이 상대적으로 더 저렴하고 편수가 적은 극장판 애니와 OVA쪽으로 쏠리게 만들었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극장판 역습의 샤아는 누구나 봤지만, 47화짜리 기동전사 건담 ZZ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습의 샤아는 1만원(테이프 가격 별도)으로 볼 수 있지만, ZZ건담을 보기 위해서는 47만원(테이프 가격 별도)을 질러야 한다. 지금 돈으로는 약 2~300만원이 녹아 사라지는 느낌일 것이다. 학생들에게 절대로 쉬운 결정이 아니다.[12]
ZZ건담은 그래도 당대 최고의 인기 애니로서 해적판 서적도 많이 돌아서 내용이 일반에도 잘 알려진 편이나, 80~90년대 초중반 3~4쿨이 흔했던 일본 TV 애니의 황금기에 제작된 애니들은 거의 한국 오덕들의 레이더에 들어오지 못한 채로 넘어가고 말았다. 루팡 3세나 우루세이 야츠라등 80년대의 걸작중에는 끝내 한국인에게 추억도 뭣도 되지 못한 채 그냥저냥 사라진 작품들이 종종 있다. [13]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1만원은 착한 가격이 아니었다... 형레코드에서 역습의 샤아를 조용히 사서 보고 끝내는 건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2~3차 더빙이 일어났다. 혹은 친구들 사이에 사온 비디오를 돌려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화질이 열화되고 마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에 어쩌다 친구따라 애니를 본 사람들중에는 화이트 노이즈가 양 옆으로 막 생기고 음성도 분명치 않은 복사 비디오를 접하게 된 경우도 있었을테지만 그건 뭐 형레코드의 탓이 아니다. 이제는 사라진 형레코드의 명예를 위해서 말해두자면, 형레코드에서 흘러나온 1차 더빙판 테이프는 화질도 선명하고 음성도 깨끗하게 들렸다. 당시는 LD시대였고 LD를 기준으로 영상이 만들어졌기에 그 이후에 나타난 DVD보다는 차라리 LD의 테이프 더빙쪽이 우월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건 추억보정으로 하는 얘기도 아니고, 부심같은 것도 아니다. 지나간 매체인 LD나 레코드를 선호하는 이들에겐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
음악 CD의 얘기로 넘어가면, 형레코드가 자체적으로 들여와서 판매하는 CD들도 있었지만, 손님이 주문을 하여 일본에서 직접 사오는, 정확한 의미의 구매대행 서비스도 했다. 주문할 때에는 비슷한 CD를 잘못 사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확한 제조번호(SURF-0001따위의 번호)를 손님에게 요구했기 때문에, CD의 제조번호(우스개소리지만, 다른 명칭으로는 품번이라고도 부른다)는 꽤나 중요한 정보였고, 이러한 정보와 CD광고등이 실려있는 뉴타입같은 잡지는 한국의 오덕들에게는 무척 실질적이고 중요한 정보의 매개체였다. 지금이야 뭐 그저그런 애니메이션 평론이나 실리는 몰락한 잡지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가뭄의 단비같은 알짜 정보를 한국의 오덕들에게 제공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형레코드에서도 자체적으로 전화번호부같이 두꺼운 CD 연감을 비치하고 손님들의 요구에 대응했다. 오덕들이 CD연감을 뒤지면서 원하는 CD의 품번을 찾는 모습은 그 당시 흔한 광경이었다.
음악 CD의 가격은 소위 '형레코드 환율'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엔화 가격에 13~14배를 곱한 것이 원화 가격이 되는 것이다. 원래 환율보다 높게 받는 것 자체는 심부름값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 형레코드는 일본 현지에서 정가를 꼬박꼬박 주고서 CD를 사지는 않았을 것이고, 도매등으로 훨씬 싸게 사오는 루트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형레코드는 오덕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하여 좋은 돈벌이를 하던 보따리 장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바가지를 쓰고 듣는 음악들은 정말 천상의 음악처럼 아름답게 들리고, 돈값을 충분히 하고 있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형레코드에서 가장 인기있던 음악 CD를 굳이 이제와서 예상하면 부동의 1위가 키마구레 오렌지로드였을 것이고, 그 다음 정도에 버블검 크라이시스, 란마, 마크로스, 전영소녀 등이 있었을 것이다. 다들 돈이 궁해서, 한 CD에 히트곡이 상대적으로 많은 히트곡 모음집이 잘 팔렸다.
그러나 일본 음악의 경우는 카세트 테이프에 복사한 길보드 음악[14] 이나 Sonmay Records .Ltd로 대표되는 대만제 복제CD[15] 도 많이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16] 형레코드에 절대적인 시장 지배력이 있었다고 단언하기는 좀 어렵다. 단 양호한 음질로 음악을 듣고자 하는 하이엔드 오덕들은 형레코드 환율을 각오하고서 CD를 구매하던 것에 가깝다.
형레코드는 1991년에 운영자가 경찰에 구속되기도 하는 등 실정법에 의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영업을 이어갔다.[17] 이들이 문을 닫은 것은 대략 1997년경의 일로 추정된다. 그 즈음에서 시중에 한글 자막을 입힌 VCD의 형태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유통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형레코드는 그 존재 의의가 사라지고 영업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게다가 해방 이후부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까지 50여 년간 '''일본 문화는 철저히 봉인 및 봉쇄 처리'''되었던 그런 시절이라 일부 아동급 일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청소년이나 성인급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철저히 수입이 엄금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아동급 애니메이션이라도 정부 훈령 및 방송위원회 심의규정에 따라 캐릭터 이름이며 분위기까지 일본색이 첨가된 경우 모두 삭제 및 수정 처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는 반일 정서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시 홍대거리에도 지금처럼 일본요리 전문점도 거의 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일본 문화 대개방 공포에 따라 일본 문화가 어느 정도 국내에 유입되면서 이를 계기로 홍대거리에 일본요리 전문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심지어 노점상에도 타코야끼를 파는 푸드트럭조차 없었으며 레코드 가게에서도 일본 가수가 녹음하여 불렀던 노래 CD조차 국내에서 팔거나 살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일본영화도 극장에서 상영조차 할 수 없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18] 이라 서울 이외에 지방 거주자나 토박이들은 그곳의 소재를 알지 않은 이상은 아예 몰랐다거나 처음 알았다는 반응들이 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 검색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은 이 곳의 존재를 알 길이 없었다. 서울에 살았다고 해도 이 곳의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 당시만 했어도 종이 전단지나 광고로 알려줘야 가게 존재를 알릴 수 있지만 이 곳의 경우 당시 시대가 그러한 편이라 광고로 알릴 수단도 없었다.
현재 형레코드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여전히 옛날 LP나 CD 등을 판매하는 중고 레코드 가게가 남아있다. (단 영업 주체는 바뀐 모양. 사장이 형레코드에 대해서 모르고 있음) 이 회현 지하상가는 현재 LP판의 메카같은 곳이 되어, 전국 100여개의 레코드판 가게중 15개가 이 주변에 몰려있다. 왕년에는 해외 CD와 LD, 현재는 복고풍 LP라는 차이는 있지만 아무튼 오덕을 상대하는 장사를 하는 곳이라는 점만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4. 관련항목
[1] 일본 애니가 한국에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 시초는 기동전사 건담일 것이다. 누구나 이름은 들어본 이 인기 애니메이션은 80년대와 90년대를 넘어서 2010년대가 되어서야 한국 TV에서 처음으로 방영된다.[2] 1980년 8월 19일, 한국방송협회에서 저질 프로그램 퇴출, 생리대 광고 금지등의 내용을 담은 '방송자율정화방안'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일본만화의 선정성, 폭력성을 문제삼았다. 사실 선정성, 폭력성이라고 하는 심의기준은 영화등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가령 람보 2같은 영화는 폭력적인 장면이 커트되어 누더기가 된 채라도 최소한 극장에서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본 애니의 경우는 TV방송국이 외면을 하면 아예 접근을 할 방법 자체가 없어지기에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한 것이었다.[3] 원래 일본 영화는 1960년대이래로 '왜색'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상영금지되어 있었고, 일본 애니메이션도 일본영화에 포함되므로 그것이 계속 이어진 것임. 일본영화 금지조치가 해금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본문에 나와있듯이 형레코드가 문을 닫은 것이 1997년으로 단 1년의 차이가 있다. 형레코드는 일본영화가 정식 해금될 때까지 운영되고, 그 후 존재의의를 잃은 채 사라진 것임.[4] 영화나 대중음악의 사정도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항목을 참조할 것.[5] 이 항목에서 설명의 편의상 오덕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실은 오덕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의 이야기이다.[6] 오덕 1세대를 몇년부터 몇년까지로 잡느냐에 이견이 있어서 이 서술을 1.5세대 혹은 2세대로 적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터넷이 나타나서 오덕판을 완전 바꾸기 전까지를 넓은 의미의 1세대로 칭한다. 아무튼 대단하게 중요한 구분은 아니다.[7] 주로 영미권과 일본서적을 취급하는 가게들이었는데, 일본 코믹스는 팔지 않았지만, 《The Art of My Neighbor Totoro》같은 지브리 관련 설정집이나 미키모토 하루히코등의 작가 일러스트집을 다수 들여놓았으며, 게다가 사지 않고 서서 읽기만 하는 손님이라도 타박하지 않는 대인배같은 면모가 있었다. 가게가 좁아서 오래 있기는 정말 어려웠지만 말이다.[8] 이 명동의 상영회에 올라갔던 애니의 라인업을 돌이켜보면, 「여기는 그린우드(ここはグリーン・ウッド)」,「바람의 이름은 암네시아(風の名はアムネジア)」,「어셈블 인서트(アッセンブル・インサート)」등 어딜 봐도 당시의 주류라고 말하기 어렵고, 지금 와서는 나무위키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부류의 애니들을 용케 구해와서 틀어주곤 했다. 요컨대 이 상영회에 들르는 이들은 대개 형레코드의 고객들이고, 그들 모두가 보지 않은 애니를 찾다보니까 결국 마이너한 취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영회가 끝나면 같은 자리에서 동호회의 시솝 선거등도 행해졌는데, 한 후보는 "지금 물건너에서 한창 뜨거운 에반게리온을!! 전격 공수해와서 틀어드리겠습니다!!"같은 어처구니없는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기도 했다. 이게 대략 1996년 초엽의 일인데, 그때까지도 일본에서 방영중인 애니(신세기 에반게리온은 1995년 10월 4일 방영 시작)를 직접 보기 위해서는 비행기 타고 일본에 가서 지인이 녹화한 비디오를 갖고 돌아오는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9] 이렇듯 형레코드등의 영향으로 90년대 초중반에 애니메이션 '자막'에 대한 수요는 급증하고 있었으나, 비디오에 한글 자막을 입히는 기기는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일반인은 소유할 수 없었고, 그보다는 PC통신에 대본 자체를 전부 번역하여 올리는 방법이 유행했다. 극장판은 다하면 분량이 4~50페이지정도 되는데, 그걸 프린터로 출력해서 비디오 보면서 같이 보는 것이다. 또한 대학가 등에서는 축제때에 동아리나 학과별로 자막을 입힌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 써있는 대부분의 행위들이 그렇듯이 이것도 불법이었다.[10] 물론 능력만 있다면 개인이 자막을 입힐수는 있었다. 슈퍼 임포즈/디지타이즈 기능을 지원하는 MSX와 녹화용 편집용 VCR이 각각 1대씩 그리고 번역할수 있는 사람까지 필요하다(...)[11] 참고로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한편 빌리는 데에 300~500원 정도였다. 즉 같은 러닝 타임의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서는 약 20~30배의 돈을 지불해야 했던 것.[12] 만약 형레코드가 비디오 테이프 당 만원을 받기로 하고, 테이프 하나마다 ZZ건담 4편씩을 채워서 팔았다면 전편을 감상하는데 10만원 초반대로 떨어진다. 10만원도 큰 돈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손이 닿는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형레코드가 올바른 선택을 했더라면, 오덕들의 르네상스는 훨씬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13] 본문에서 예로 든 루팡 3세는 TV판의 1기가 23화, 2기가 155화, 3기가 50화이다. 우루세이 야츠라는 TV판이 195화이다. 이 작품들은 일본에서는 애니메이션의 시청률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높던 80년대에 장기 방영을 하여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국민애니의 대접을 받지만, 한국에서는 TV등에서 전혀 방영하지 않고 오덕들도 거의 손을 대지 않아서 인지도가 제로에 가깝다.[14] 당시 시세로 3~5천원 정도. 동네 게임샵 같은 곳에서도 가끔 다루는 지역이 있었다.[15] 대략 1만~1만 2천원 정도. 음질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가사집이 없거나 인쇄질이 저열해서 읽기 힘들었다.[16] "어디서 유통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냥 어느 날 보통 문방구나 서점, 레코드점등에서 뜬금없이 이상한 물건을 들여놓고서 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따리 장사가 놓고간 물건이 다 소진되면 그걸로 끝이다. (혹은 단속에 걸려서 전부 압수당하거나) 90년대가 끝날 때까지 카세트 테이프에 음악을 복사하여 파는 길보드 장수들은 흔히 볼 수 있었다. 엑스 재팬같은 인기 그룹은 길거리에서 밀리언셀러를 달성했다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17] 링크의 기사만으로는 구속 이후의 처분이 불분명하지만, 그 이후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영업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그만큼의 수익이 보장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명품의 밀수나 짝퉁업계에서는 사장이 구속되면 가족들이 그 뒤를 잇는 식으로 계속해서 가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던 일이다.[18] 물론 PC통신은 있었으나 당시 컴퓨터의 가격과 전화요금 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해 천천히 보급되었으며 인터넷역시 별도의 요금을 받았던 시절이라서 98년도까진 없는 셈 쳤고 야간정액제는 97년도에 서비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