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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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12월 15일에 상용화한 최초의 광학식 영상 미디어이다. CD보다도 4년 일찍 나왔다.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미국의 MCA[1] 가 각각 개발하고 있던 광 비디오 디스크 규격을 통합하면서 만들어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광 비디오 디스크를 연구하고 있던 일본의 파이오니아가 MCA와 합작 회사를 설립하여 상용화하였다. 레이저디스크라는 명칭은 파이오니아의 등록상표이기 때문에 파이오니아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었고, 타 회사에서는 레이저비전(LaserVision)이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다 1989년에 상표를 무료로 개방하여 타 기업에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약칭으로 LD라고도 한다.
2. 상세
외형은 지름 30cm(12인치)에 두께 1.8mm이며, 재질은 PVC에 내부에 반사층이 있다. LP와 크기가 같아 정말로 크기가 크고 아름답다. 더불어 은근히 무겁다. 크고 무겁기 때문에 보관에도 주의가 요구되었는데, 오랫동안 가로로 놓아두면 자칫 휘어버리는 일이 있어 세로로 보관해야 했다.
양면 기록이 가능하며, 등각속도(CAV)와 등선속도(CLV) 기록으로 면당 30분 또는 60분 기록이 가능하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큰 사진 및 일러스트를 수록할 수 있지만, 대신 무겁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단점이 있다. 녹화가 가능한 규격도 있지만 비싼 가격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파장이 CD의 파장보다 넓은 적외선 파장이어서 밀도가 낮아 넓었다. 그렇다 해도 면적대비 용량이 CD 정도 밀도로 환산해도 EP 레코드나 SP레코드[2] 정도 사이즈 이상은 되는 듯하다.
2.1. 규격
- 영상은 NTSC/PAL 등의 아날로그 TV 방송 규격 기반의 아날로그 영상을 주파수 변조 방식으로 변조하여 기록한다. 수평해상도[4] 는 약 420선 정도로, VHS의 약 240선, TV(NTSC 규격)의 약 330선에 비해 더 좋은 화질을 보여주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밝기 신호와 색 신호를 분리하여 수록한 VHS에 비해 밝기 신호와 색 신호를 혼합한 컴포지트 신호로 저장했기 때문에, 플레이어나 TV 등의 성능에 따라 화질의 차이가 상당히 큰 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발매된 기종의 경우 S단자를 탑재한 제품도 있었는데 보통은 밝기 신호와 색 신호를 플레이어 내에서 분리하여 각각 영상 처리를 한 뒤 출력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몇몇 플레이어(특히 중저가 제품)의 경우 이런 영상 처리 회로로 인해 컴포지트 영상 출력을 바로 하지 못하고 분리된 신호를 다시 합쳐서 전송하기 때문에 화질에 열화가 발생할 수 있기도 하였다.
- 음성은 타이틀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대체적으로 후술할 4가지 규격 중 1~2개를 수록하는 형태이다.
- 처음에는 음성을 아날로그로만 수록했는데, 아날로그 스테레오 음성 신호를 주파수 변조 방식으로 변조하여 기록하는 방식이다.
- 1984년 파이오니아에서 LD/CD 겸용 플레이어를 발매할 쯔음에 생긴 '디지털 오디오' 규격이 있다. 이쪽은 아날로그 영상과 음성을 기록하고 남은 대역에 음악 CD(CD-DA)와 거의 동일한 규격(펄스 부호 변조 방식, 16bit, 44.1KHz)으로 기록하는 방식이다.
- 1990년대 초중반에 당시 영화관에서 도입되었던 5.1채널 디지털 오디오 포맷인 돌비 디지털 신호를 수록한 LD가 (주로 할리우드 영화를 중심으로) 등장했다. 돌비 디지털 신호의 경우 아날로그 음성 신호를 대체하는 형태로 기록한다. LD에서의 돌비 디지털 신호는 주파수 변조 방식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복조 기능을 가진 AV리시버나 전용 디모듈레이터 기기가 필요하였다. 당연하겠지만 LD가 몰락하고 DVD가 대세가 되는 시절부터 디모듈레이터는 죄다 단종되었고 AV리시버에도 해당 기능은 빠져버렸기 때문에, 현재 LD로 돌비 디지털 음성을 들으려면 해당 기능을 지원하는 중고 제품을 구해야 한다.
- 1990년대 중반에는 돌비에 이어 DTS 신호를 수록한 LD도 등장하였다. DTS의 경우 디지털 오디오 신호를 대체하는 형태로 기록하였고, 광출력으로도 신호를 뽑을 수 있기 때문에 현행 제품으로도 호환이 된다.
3. 보급
3.1. 대한민국
1996년도 삼성전자의 레이저디스크 데모 영상.[5]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타이틀은 아니나다를까, 살색이 잘 나오는 포르노 타이틀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명동, 돈암동, 이태원, 신촌 등 당시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모이던 거리에 해외 뮤지션의 공연이나 뮤직비디오, 국내 미개봉 영화(특히 그때도 상영 금지던 일본 영화)LD를 프로젝션 TV나 레이저 프로젝터로 틀어 놓고 술, 음료와 안주거리와 간단한 식사를 파는 A/V카페가 여러 군데 영업을 하고 있었다.(식당, 술집의 영업이 끝나는 밤 12시 이후 심야가 되면 문을 걸어 닫고 슬쩍 야리꾸리한 것을 틀어주는 일도 많았다. 자정 넘어 영업하면 단속하던 시절.) 2000년대가 되기 훨씬 전에 유선방송, MTV가 활성화되고 노래방 등에 밀려 다 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국내에서는 비싼 가격 때문에 가정에는 거의 보급되지 않아[6] 매우 소수의 타이틀[7] 만이 발매되어 거의 매니아들의 전유물이었고 잠시 동안만 팔리다 말았다. 동네에서 비디오 테입을 쉽게 대여할 수 있었던 시기였으니 새로운 포맷의 영상물에 손을 잘 대지 않았다. 전축 위의 사치스런 부속품이란 인식도 컸을 것이다.
레이저디스크를 재생하기 위해선 레이저디스크뿐만 아니라 전축의 부속품이기도 한 앰프를 전축과 공유하는 것이 경제적이었으며. 레이저 디스크 재생만을 위해 크고 비싸고 무거운 재생기와 앰프를 둘다 사는건 대형 전축 중심의 오디오 시대였던 당시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비효율적인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에서는 아직 댄스음악이나 아이돌 같은 '''보는 음악''' 시대가 아닌, 라디오나 카세트테이프 등으로 팝송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던 '''듣는 음악''' 시대였으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가정용 전축이나 음반 산업이 이제 막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결정적으로 컬러 TV수상기의 보급이 막 시작될 쯤이어서, VHS보다 훨씬 나은 화질을 추구할 단계까진 아니었다.[8][9][10][11] 그 당시에도 토토즐 같은 TV 음악방송 쇼에 무대장치를 당시로서는 화려하게 내세우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지 않았지만, 뮤직비디오라기보다는 즉석 무대에 가까워서 뮤직비디오 문화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이후 1990년대 이후에서야 '''보는 음악''' 시대가 갓 생겨나기 시작한다.
다만 소수 수요 중 예전 1~2세대 오타쿠의 경우 LD 한정매체를 VHS로 보기 위해서 용산과 더불어 자주 찾아갔다는 회현역 지하상가가 있는데 형레코드를 위시한 몇몇 미디어샵에서 LD영상을 VHS로 떠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당시 직수입 LD를 보려면 외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해서 리지텍이라는 업체에서 캡션 표시기를 생산한 적이 있었다.
3.2. 미국
한편 미국에서 LD는 오늘날의 DVD 및 블루레이 시장을 예고한 홈미디어 매체로서 주로 사용되었다. 비록 플레이어 및 타이틀의 비싼 가격 때문에 대세는 VHS가 쥐고 있었지만, LD는 고급 홈미디어 매체로서 VHS와는 다른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영화광들은 언제나 더 좋은 화질을 원하기 마련이지만, 80년대에는 35mm 필름 영사기를 집에 설치할 수 있는 갑부가 아닌 이상 집에서 영화를 보려면 VHS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VHS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LD의 뛰어난 화질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적절한 구매력을 가진 영화광들은 영사기 없이도 LD 플레이어로 화질을 향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매체였기 때문에 발매되는 타이틀들 역시 이에 발맞춘 전략들을 내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날 DVD 및 블루레이를 사면 언제나 따라오는 서플먼트다.
배급사들은 LD 타이틀에 촬영장 B롤이나 각종 인터뷰를 담은 서플먼트 디스크를 추가하여 홍보를 위한 도구로 삼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영상들 중 일부는 이후 DVD나 블루레이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빠지는 바람에 지금도 오로지 LD로만 볼 수 있다.
이렇듯 미국의 LD는 열성적인 덕후들을 공략하기 위한 고가의 시장을 형성했고, 그만큼 훌륭한 타이틀들도 많이 나왔다. 오늘날에도 이베이 등지에 가서 LD 타이틀들을 찾아보면 디스크 크기에 걸맞는 크고 아름다운 패키지 안에 여러 장의 디스크가 들어 있는 모습이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일 것이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역시 지금이야 블루레이 사업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만 LD 시절에 LD 사업으로 시작해 인지도를 얻었다.
3.3. 일본
일본의 경우 상당히 인기를 얻어 미국보다도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대만을 포함해 잘사는 편에 속하는 자본주의계 중화권인 홍콩과 마카오, 싱가포르에서도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OVA 중에서는 불꽃의 전학생과 같이 LD로만 발매된 타이틀도 있다.[13]
당시 거품경제를 바탕으로 한 문화산업 전반에 정상적인 매체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비롯한 각종 영상물, 게임과 더불어 카라오케 산업에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일본 고유의 아날로그 HD 방송 방식인 MUSE 신호를 고밀도로 저장하고 적색 레이저를 이용하여 재생하는 MUSE LD라는 규격도 있었는데, 비싼 전용 플레이어와 역시 비싼 외부 디코더(그리고 고화질을 지원하는 비싼 TV)가 필요하고 발매된 타이틀의 수도 적었지만, 1080i 영상을 지원하는 등 DVD 화질을 훨씬 넘어 현재의 블루레이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주로 영화가 발매되었다.
DVD나 블루레이로 나오지 않은 애니메이션이 P2P에서 고화질 립 파일로 돌고 있다면 십중팔구 LD판을 재생시켜 디지털 소스로 변환한 것이다.
4. 쇠퇴
1996년 DVD의 등장으로 1999~2000년경부터 급속도로 사양길에 접어들어, 2002년경에는 플레이어 및 타이틀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다.(아직 플레이어의 재고는 남아 있다.) 2006년 12월에는 엔카 가수인 카와나카 미유키의 '카나자와의 비'가 마지막 발매 작품이고, 2007년 3월까지는 가라오케용 소프트웨어가 발매되었다. 2007년 3월에 결국 생산 라인이 전부 정지되어, 30여년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5. 기타
80년대 말 일본의 초창기 가라오케 시스템은 LD를 이용하여 일종의 뮤직비디오인 영상과 음악을 틀어주고 나오는 자막을 따라하는 방식이었다. 요즘 노래방처럼 영상이 노래와 가수만 같거나 엉뚱한 열대 지방 바닷속처럼 전혀 안 맞는 것이 나오는 게 아니라, 노래 내용까지 일치하는 것이라 노래방의 각 노래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상당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OST라면 그 장면이 나오기도 했으나, 대부분 무명 배우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때로 윤현숙, 음정희 등 나중에 유명해진 연예인의 데뷔 초창기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합성한 반주가 아니고 원곡의 실제 반주가 들어가 있고, 배경도 그 곡을 위해 따로 제작한 거라서 음질과 화질은 디지털 방식 노래방의 상대가 안 되었다. 반대로 노래방 측 입장에서는 가수, 신곡마다 크고 비싼 LD를 전부 구비하고 신청곡이 들어오면 맞춰 갈아끼워야 해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번호만 누르면 알아서 LD를 골라넣어 선곡하는 기기가 나오는 지경이 이르었다. 물론 LD 부피가 있어서 이러한 기기는 크기가 어마어마한편이다. 업소용 외 민간용 노래방 LD가 따로 팔리기도 했으며, 이것을 레이저 디스크 가라오케(LDK)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도 LD는 물론 마이크를 꽂으면 LDK 기능을 지원하는 LDP가 1992년부터 약 3-4년까지 생산되었다. 인켈, 삼성 등 여러 회사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LD가라오케의 보급보다 우리가 노래방기기라고 부르는 영상컴퓨터노래반주기가 먼저 개발되면서 LDK는 노래방 유행과 전축 유행을 같이 타고 나온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레이저디스크에 음악을 저장해서 트는 시대가 훨씬 지나고 디지털 파일로 노래를 저장해서 틀어주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깔끔한 배경화면을 꾸미기 위해 레이저 디스크에 저장된 배경화면을 깔고 노래방 기계를 작동시키는 경우가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는 남아있었다. 물론 정보기술이 발달해서 노래방 기기 안에 배경영상마저 저장할 수 있게 된 90년대 말 이후부터 시작해서 2천년대 초반에 가서는 본격적으로 사장되었다. 이유는 노래방기기 자체적으로 배경영상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자체적으로 배경화면이 지원되지 않는 노래방기기의 신곡이 단종된 것이 주 원인이다. 90년대 이전 세대라면 노래방에서 열대 바다 같은 풍경이 나오는 것 따위를 보다가 보이밴드가 뜨면서 노래방에서도 엠넷의 영상이 반영되는 현실을 맛보았을건데, 이 시기가 바로 반주기 발달속도가 빨랐던 시절이다. 다만 엠넷 실시간 방송을 배경화면으로 끌어당겨 쓰는 경우도 있었다.
LD포맷을 이용한 교육 타이틀도 국내에서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곧 이어 등장한 DVD에 의해 급격히 사라진 것은 마찬가지. LD 플레이어의 대부분이 CD, Video CD, Kodak Photo CD 등 여러 포맷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어 자체는 LD 미디어가 안 나오게 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쓰였다.(지금도 LDP를 CD듣는 데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크기가 커서 그렇지 보통 CDP보다 성능이 좋았기 때문. 하지만 언제까지나 소형 북셀프와 LDP의 비교이지, 사실 인켈의 구형 CDP 중 일부는 CD가 무려 5장이나 들어가는데다가, 음질 또한 뛰어나다. 크기가 같은 것은 덤.)
이 매체 이용한 아케이드 게임이 1995년 전까지 발매되었다. 대표작으로 드래곤즈 레어이나, 타임 걸, 스페이스 에이스, 디베이스터 등이 있다. 미리 만들어진 영상을 조작에 따라 챕터를 선택하여 보여주는 간단한 방식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좋은 영상을 보여주었다. 게임기 안에 영상을 담은 LD 플레이어 메카가 들어가 있고 컨트롤을 하는 기판이 붙은 형식이었다. AVGN에도 언급이 되는데 동시대의 오락실 게임인 팩맨 등과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 규격으로 발매된 게임도 존재한다. 대부분이 일본에서만 발매되었으며 메가드라이브나 PC엔진 , 심지어 MSX 중에서도 대응하는 게임이 있다.
양면 기록이었고 한면의 용량이 최대 60분 정도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화는 양면, 혹은 2장에 걸쳐 기록되었다. 당시 시중에 돌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카피한 VHS 테이프나 동영상을 보면 도중에 화면이 멈추면서 우상단에 A-B 표기가 뜨는데 그게 바로 디스크를 뒤집어 넣으라는 의미. 카세트 테이프는 오토 리버스가 일반적이었지만 LD는 단가 때문인지 대부분의 기기가 자동 양면 재생을 지원하지 않았고 사용자가 직접 디스크를 꺼내 뒤집어 다시 넣어야 했다.
레이저디스크 말고 그 시절 디스크 형식의 영상저장매체는 더 있었는데 LP처럼 바늘을 사용하는[14] VHD가 대표적이다.# VHS와 마찬가지로 JVC가 개발했고 역시 나쇼날(파나소닉)이 채용했다. VHD 진영에는 파나소닉을 시작으로 도시바 등 쟁쟁한 일본전자기업이 참여했고 레이저디스크는 파이오니어 1개사만으로 출발하여 VHS vs BETAMAX와는 달리 쉽게 VHD의 승리로 끝날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결과는 아는 대로 VHD의 패배.
레이저디스크 승리의 이유에는 기술적 우위가 컸지만 아이러니하게 일반인에게 많이 보급되지 않았다도 있다.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화질차이 같은 기술적 요인보다 접근성이나 편의성 등이 더 중요하겠지만 소위 매니아(오타쿠)나 업소 등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이론대로 미세한 화질 차이까지 신경쓴다. 기술적 우위의 손을 들어준 것. 한 시간마다 디스크를 뒤집어야 한다는 귀찮음도 최대의 화질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문제가 아니다. 이 점이 VHS vs BETAMAX와의 차이.
여담으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보급되지 않은 이유는 대여점의 유무에 있다. 당시로는 복제 방지 기술의 미비로 레이저디스크의 영상을 VCR로 쉽게 복제할수 있었기 때문에 보급 초창기부터 디스크 대여점을 허락하지 않았다. 80년대 말에 가서 이 제한을 풀긴 했지만 그때쯤이면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테이프로도 충분해서 비싼 LD기기를 들여놓지 않았다. 이후 아날로그 복제방지 기술인 매크로비전이 등장하지만 해당 기술은 VHS를 타겟으로 개발되어서 LD는 매크로비전을 넣을 수 없었다. 그래서 DVD는 처음부터 매크로비전, CGMS-A, 데이터 암호화라는 3중 복사 방지를 무장하고 출시된다.
파나소닉은 VHD진영 선도자로써 엄청난 비용을 제품개발과 광고 및 콘텐츠 확보에 사용했으나 결국 VHD가 패배하자 LD로 갈아탔다. 이후 MCA[15] 를 인수했는데 MCA는 바로 LD의 최초 개발사. 이후 파나소닉은 MCA와 공동투자로 LD의 HD화에 적극 투자하게 된다.
[1] 유니버설 픽처스와 유니버설 뮤직의 모기업이었다. 현재는 인수합병 등으로 MCA라는 이름은 유니버설 뮤직의 산하 레코드 레이블로만 남은 상태.[2] 싱글 앨범과 셀락으로 만든 10000Hz대인 옛날 레코드 규격, LP의 약어와 달리 작은 크기.[3] 아날로그 환산시. 디지털의 경우는 정확히 가로 도트수가 정해져 있다. SD영상이므로 720 x 480.[4] 아날로그 영상에서의 화질의 지표 중 하나로, 수직방향으로 검은색/흰색의 선을 번갈아 그어 만든 영상을 표시해서 총 몇개의 선을 구분할 수 있는지 측정하는 형태이다. 아날로그 비디오는 가로 방향으로는 주사선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므로 가로방향 도트의 개수가 정확하게 몇개인가는 말할 수 없어서 이런식의 지표를 사용한다.[5] 와이드TV 용으로 추정된다.[6] 가정에서야 보기 힘들었지 앞서 말했던 A/V카페, 노래방이나 대형 놀이시설, 아주 가끔씩은 큰 학원에서는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노래방에서는 늦어도 이미 레이저디스크에 노래를 저장하던 시대가 훨씬 지난 2천년대 초중반까지도 갖추던 경우가 간혹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유는 뒤에 설명.[7] 그런데 비디오로는 나오지 않은 킹콩 1933년판이 국내에서는 LD로 삼성에서 정발되기도 하여 괴수물 매니아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나중에 DVD로도 나왔지만, 1990년대 초반에는 정발 괴수물로 LD로 나온 경우는 이게 유일했다. 그 외에도 SKC나 나름대로 이름있는 영상매체사는 LD사업을 하기도 했으며 국산영화의 LD도 제법 나와줬었다. 다만 포맷 자체가 심하게 마이너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8] 당연한 이야기지만 LD만 들여놓는다고 VHS보다 훨씬 나은 화질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노이즈만 없을 뿐. TV 또한 그에 걸맞는 낮은 도트피치의 CRT를 사용한 제품이여야 자기 화질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 국내에 보급된 보통의 20인치 이하 TV는 기술력의 부족으로 브라운관의 성능이 낮아 겨우 VHS나 볼만한 수준이다. LD를 제대로 보려면 최소 소니 트리니트론 상위라인급으로, 23인치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일본산 TV는 수입규제품목이라서 충무로 등지에서 현지가격의 2배 이상을 주고 사야만 했다. 제대로 화질을 맛보려면 꽤 많은 돈을 써야 했다.[9] 하지만 일본 내수용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TV시청을 위해서는 UHF전파를 수신하거나 VCR같은 외장형 튜너를 구비해야 되고 부피가 커서 밀수입을 하기가 번거로우므로 대부분 미군PX 유출품을 팔았다.[10] 독점계약된경우 미국이나 말레이시아 같은 제3국 생산품을 수입했다.[11] 1991년에 관악산 송출 KBS 1TV가 UHF ch.25로 전환되었으며 그 전에는 VHF-Low ch.5로 송츨되었다. 전환된 이유는 아시다시피...[12] 오랫동안 VHS와 레이저디스크로만 있다가 2006년에 DVD가 나왔다.[13] 물론 대부분의 당시 일본의 OVA 애니들은 LD, VHS와 동시 출시되는 경우들이 다반사였다.[14] 바늘로 홈을 읽는 LP와는 다르게 디스크 표면에 코팅된 전기신호를 읽어낸다.[15] 전술한 유니버셜영화사의 모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