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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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colbgcolor=white,#2d2f34>1964년 11월 28일 (60세)
미국 뉴저지 주 라웨이
'''속명'''
폴 뮌젠(Paul Muenzen)
'''석현각'''('''釋玄覺''')[1]
'''국적'''

'''거주'''
레겐스부르크
'''학력'''
예일 대학교 철학과, 문학과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비교종교학과
'''종파'''
조계종
'''소속'''
현정사 주지
화계사 국제선원장
레겐스부르크 젠센터
'''출가'''
1996년 통도사
'''수행'''
신원사, 화계사
'''가족관계'''
조지프 뮌젠아버지, 패트리샤 뮌젠어머니
1. 개요
2. 승려가 되기까지
3. 사상
4. 사건/사고
4.1. 한국 불교에 실망과 절연 선언
4.2. 승려 혜민 비판
4.3. 박훈의 저격
5. 근황
6. 일화
7.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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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 독일에서 활동중인 대한민국 국적으로 추정되는 선승(현재 국적이 변경되었다면 수정 바람). 독일계 미국인으로 가톨릭 집안 태생이다. 외가는 아일랜드계라고 한다. 가톨릭계 사립고등학교를 다니며 영적 방황을 겪었고, 결국 예일대에 입학해 철학문학을 전공한다. 이때 쇼펜하우어와 낭만파 시인들에 심취했다. 유대계 미국인[2]으로서 미국에 한국 절을 지은 승려 무량[3], 청안과 더불어 꽤 알려진 한국 불교로 귀의한 외국인 승려다.

2. 승려가 되기까지


어린 시절은 독일계 미국인[4]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미국 동부 중산층 가정으로 부모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고 9남매 중의 하나로 자랐다. 수영장, 테니스 코트가 있는 가족 별장이 따로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였고, 그의 형제 자매는 거의 모두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사립학교[5]를 다녔는데,[6] 청소년기에 친하게 지내던 사촌이 교통사고로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보고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하여 자각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후 부모가 졸업한 예일대로 진학했으며,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고 그중에도 철학을 공부하며 유럽에 교환학생을 다녀오기도 했다. 현각 자신은 훗날 이 당시를 회고하며 쇼펜하우어의 말기 철학에서 불교와의 접점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고 한다.[7]
1989년 하버드 대학원 입학 허가서를 받고 학비를 벌기 위해 월스트리트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는데 대표적인 물질주의 사회인 월스트리트의 삶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런데 브루클린 다리에 투신하려는데 우연히 만난 흑인 거지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서''' 마음을 바꾼다. 어차피 자살할 생각이었으니 가진 돈을 탈탈 털어서 적선했더니 거지는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오늘은 네 생일이야. 나중에 내가 한 말을 떠올리면 이해하게 될 거야." 하며 축가를 불러줬다고 한다. 현각 자신은 어쩌면 그 거지가 관음보살의 현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후 하버드에 입학해 비교철학을 공부하던 중 당시 일본인 지도교수가 숭산의 하버드 강연에 참석할 것을 권하면서 한국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다. 다음 날 케임브리지 젠센터(선원)를 방문해 참선 등 기초적인 내용을 배우기 시작해 결국 하버드를 휴학하고 1990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계룡산 신원사에서 90일 동안거를 마치고 귀국, 학업을 계속했으나 결국 1992년 수계식을 하고 정식으로 출가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수계식을 한 장소가 중국 남화사(南華寺)였다. 이곳은 육조 혜능이 머물던 곳이니 한마디로 한국 선종의 뿌리라 불러도 좋은 곳이었다. 참 묘한 인연이다.[8]
한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KBS 일요스페셜 2부작 만행[9]으로 유명해졌고, 곧이어 출간한 책인 "만행(萬行)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전 2권)"으로 더더욱 유명해졌다.
사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재미있는데 어느 날 출판사에서 "스님이 스펙 쩌는 엄친아인데 출가한 이유가 참 궁금합니다. 수필 써주시면 '''숭산 스님 책도 같이 내드릴게요'''"하는 말에 낚여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6주 만에 탈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 때문에 자신이 너무 유명해지자 수행에 방해된다고 절판시켜 버렸다.
현정사 주지승이었다가 그만두었다. 불교 TV를 보면 법문 방송을 '''영어로''' 볼 수 있다. 물론 자막이 제공되며 자막을 바탕으로 영어 법문을 들어보면 되도록 쉬운 단어를 선택하여 설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문 어휘가 많이 사용되는 설법보다 더 쉽게 법문을 이해할 수 있다. 영문으로 진행된 금강경 강해는 여기서 볼 수 있다.(자막 有) 유튜브 링크

3. 사상


언어와 생각에 갇히지 않는 진리의 본래면목을 강조한다. 진리나 깨달음은 체험되는 것이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크리스 나이바우어의 주장과 통하는 부분이 많다. 모든 만물이 하나인데 이를 마음으로 분별하지 말라는 불이사상도 그가 자주 언급하는 개념이다.

4. 사건/사고



4.1. 한국 불교에 실망과 절연 선언


그렇게 한국 불교에 몸담은 미국인 승려로 유명해졌지만, 수년간의 생활 끝에 기복신앙적인 한국 불교에 회의를 느끼고 2016년 7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한국 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한국 불교를 떠날 것을 선언했다.[10] 조계종이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시켰고, 유교 인습적ㆍ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종파를 운영한 것을 원인으로 보고있다. ''''외국인 승려는 장식품\''''이라고 지적하며 종단의 국적 차별을 비판했다. 페이스북의 글에서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송설정'이라고 언급된 부분의 '송설정'은 화계사의 송원 설정으로 보인다.[11] 현재 페이스북의 해당 문구는 삭제되었지만 기사로 볼 수 있다.(기사링크) 이미 근래 2~3년간 외국인 승려들이 잇따라 떠나며 불교계 내부에서도 문제가 지적되어 왔지만, 현각은 일반에 인지도가 좀 더 높은 인물이기 때문에 파급력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각은 환속하는 것은 아니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현대인들이 참다운 화두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계속 활동할 것이라고 한다. 기사1 기사2 페이스북(현재 글 삭제됨)
다만 이후 BTN과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한국 불교를 떠난다고 한 적 없다. 한국어 미숙으로 인해 뉘앙스가 달라졌으며, 이로 인해 언론 보도가 와전되었다"'''#며 자신의 한국어 실력 미숙을 탓하기도 했다. 중앙일보 기사 현 조계종에 개혁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말의 뉘앙스는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현각은 "조계종(한국 불교)의 교육 방법은 달마의 가르침과 기술에 대한 독특하고 귀중한 그릇"이며 숭산의 말씀을 독일에서 이어나가 한국 불교를 세계에 퍼뜨릴 것이라고 하면서도, "정치와 극단적인 민족주의 때문에 현재 조계종은 그 기술을 세계에 전파하는 귀중한 기회를 놓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한국의 승려와 재가 불자는 이 개혁을 스스로 이뤄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하지만 순응의 문화가 이를 실행하는 걸 막고 있다. 과도한 순응(hyper-conformity)은 한국 승려의 독특한 질병"이라고 말했다.

4.2. 승려 혜민 비판


>원문: 석지 마! 연애인뿐이다. 일체 일체 일체 일체 석가모니의 가르침 전혀 모르는 도둑놈 뿐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 뿐이야...
>
>어문 규범에 맞게 수정: 속지 마! 연예인일 뿐이다. 일체 일체 일체 일체[12]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도둑놈일 뿐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먹으며 지옥으로 가고 있는 기생충일 뿐이야...
2020년 11월 15일, 현각은 승려 혜민을 비판하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특히 이 시기는 혜민이 건물주 논란 및 행실 불량 논란까지 생겼던 때라서 이에 대해서도 '''"그는 단지 사업자이자 배우일 뿐이다. 진정으로 참선했던 경험이 전혀 없다"'''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한 바가 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뒤 혜민이 참회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활동 중단 선언을 한 후 혜민과 대화를 통하여 화해했다고 본인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 단순히 사적인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혜민을 두고 ‘아름다운 사람’, '아우님'이라고 칭하는 등 불과 하루 전에 ‘기생충’ 등 노골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강경하게 비판했던 모습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사건의 추이를 관찰하던 사람들을 당황시켰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성전을 정화한 예수와, 자식을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자식의 잘못에 대해선 꾸짖는 부모의 심정으로 그랬다고.

4.3. 박훈의 저격


변호사 박훈은 최근 부동산 소유 논란에 휩싸였던 혜민을 맹비난했다가 돌연 태도를 바꾼 현각을 겨냥해 “혜민과 다른 점이 뭐냐”고 비난했다. 박훈은 11월 1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현각, 너에게 욕망은 무엇이더냐. 네가 혜민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라고 썼다. 이어 “현각에게 묻자. 너는 자본주의 불교를 비난하면서 너를 끼워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난이었다”며 “넌 하이브리드 영문 불교, 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도 모르는 수덕사 숭산 문중의 하이브리드 외국인 행동대장이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너희 둘은 철학적 깊이가 전혀 없는 모르모트(실험용 쥐)였다”면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이라 생각하나”고 꼬집었다.# 문제는 현각에 대해 박훈이 혜민과 다를바 없다고 자신의 SNS에 현각을 혜민과 비교하여 비난한 것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혜민은 고가의 단독주택에서 혼자 거주하며 온갖 강연과 북콘서트에 출연하여 출연료를 받고 일본 여행 상품을 판매하면서 요금에 후원금을 강제로 책정하며 스타트업으로 사업가 활동을 하는 등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였으나 현각은 출판사에서 "스님이 스펙 쩌는 엄친아인데 출가한 이유가 참 궁금합니다. 수필 써주시면 숭산 스님 책도 같이 내드릴게요"하는 말에 낚여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6주 만에 탈고하였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책 때문에 자신이 너무 유명해지자 수행에 방해된다고 절판시켜 버릴 정도로 세속적 욕망에서 초탈한 모습을 보인 승려다.
2020년 11월 15일, 현각이 혜민을 비판하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맞다. 특히 이 시기는 혜민이 건물주 논란 및 행실 불량 논란까지 생겼던 때라서 이에 대해서도 '''"그는 단지 사업자이자 배우일 뿐이다. 진정으로 참선했던 경험이 전혀 없다"'''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한 바가 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뒤 혜민이 참회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며 활동 중단 선언을 한 후 혜민과 대화를 통하여 화해했다고 본인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단순히 사적인 관계의 회복이 아니라 혜민을 두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칭하는 등 불과 하루 전에 ‘기생충’ 등 노골적인 표현까지 써가며 강경하게 비판했던 모습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여 사건의 추이를 관찰하던 사람들을 당황시킨 것도 맞다. 하지만 현각 본인은 2020년 현재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본인이 2016년에 건립한 사찰 불이선원에 상주하며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식 불교를 포교하고 있으며 유튜브를 통해 한국 불자들과도 함께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혜민의 승려로서의 부적절한 언행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정확히 어떤 삶을 사는 지는 몰라서 그의 참회하겠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기에 현각이 혜민에 대해 하루 뒤에 입장을 바꾼 것은 혜민의 참회하겠다는 말을 믿고 그를 한번 더 믿어보려는 마음에 나온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애초에 현각은 조계종이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시켰고, 유교 인습적ㆍ전근대적인 방법으로 종파를 운영한 것을 원인으로 규정하고 '외국인 승려는 장식품'이라고 지적하며 종단의 국적 차별을 비판할 정도로 종교에서의 인종차별을 반대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박훈은 현각을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힐난하여 민족주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등 막말을 하기로 유명한 자신의 문제점만 부각시킨 꼴이 돼버렸다.
박훈이 자신과 접점이 없는 현각을 비난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몇달 전에 검사 신상을 무단공개하며 실명뿐만 아니라 얼굴 사진, 취미, 가족관계 등 개인정보를 SNS에 올린 심각한 사건을 저질러서 사회적으로 이슈를 끌었으나 결국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며 위기를 맞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현재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혜민에 포커스를 맞춰 현각이 혜민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고 혜민이 참회한다고 하자 하루 뒤에 혜민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칭하며 화해를 한 것을 두고 혜민과 현각을 싸잡아 비난하며 이슈를 끌고 자신이 타인을 훈계하는 태도를 보여 자신은 옳다는 이미지를 대중에 알리기 위한 언론플레이로 보는 시각이 많다. 네티즌들은 물의를 일으킨 혜민만 비난하면 문제 없었을 것을 혜민이 참회하겠다고 하니 한번 용서해서 기회를 주기위해 현각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고 화해를 한 것이 뭐가 문제냐며 박훈 자신이 그동안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물타기 하려고 애꿋은 현각을 공격하지 말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5. 근황


  • 논란 이후 언론 등지에는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으며, 2020년 현재는 독일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본인이 2016년에 건립한 사찰 불이선원에 상주하며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국식 불교를 포교하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한국 불자들과도 함께하고 있다.
  • 한 여행객이 쓴 블로그 글을 보면 불이선원의 모습을 알 수 있다. 현지에 여행을 온 한국인 지인에게 숙식을 제공한 모양이다.

6. 일화


  • 그는 그의 저서와 여러 인터뷰에서 한국에 대한 독특한 인연을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그가 1991년에 계룡산의 신원사라는 절에서 수행을 할 때, 우연히 다른 승려의 방에서 한국 민요나 전통가요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울컥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또 몇 년 뒤에 동국대학교에서 불교 경전 강의를 하다가 우연히 광복 50주년 기념 관련 행사에서 흘러 나오는 똑같은 노래를 듣고 다시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노래는 바로 애국가였던 것. 너무나 신기한 경험에 이 이야기를 스승인 숭산에게 말했더니 "너는 전생에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이었는데 일본인들에게 총을 맞고 죽으면서 부강한 나라에 태어나 한국을 돕길 기원했던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고.[13]
  • 그가 지리산 연곡사 토굴에서 참선수행을 하는데 밤에 독경을 할 때마다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날이 갈수록 그 소리가 뚜렷해졌는데 비명소리, 울음소리 같은 귀곡성이었다고 한다. 현각은 이 당시 오밤중에 화장실도 못 갈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지만 수행 자체는 계속했는데, 신기하게도 스물하루밤이 지나자 그 소리가 딱 그치면서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졌다는 것이다. 훗날 이 이야기를 다른 승려에게 했더니 그 승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에 관한 역사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연곡사는 군경과 빨치산간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피아골 한가운데에 있고, 이후 빨치산의 백골이 수백 구 단위로 발굴되었다.

7. 저서


  • 만행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전 2권)
  • 선의 나침반 (전 2권, 엮은이) - 위의 저서를 쓰게 된 원인이 된 책.
  • 오직 모를 뿐 - 숭산 대선사의 서한 가르침 (엮은이)
  • 부처를 쏴라 (엮은이)
  • 공부하다 죽어라 (여러 저자 중 하나)
'만행'을 제외하면 모두 불교 서적이고 현각 자신을 포함한 국제선원의 도반들이 숭산의 가르침을 편찬한 것들이다. '부처 머리에 담뱃재를 털고(Drop the ashes to Buddha: 한국 정발명은 '부처님께 재를 털면')'는 숭산 본인의 저서로 보아야 하므로 여기에는 미포함.

[1] '현각 스님'이란 뜻.[2] 무량의 할아버지는 아예 랍비였고 아버지는 개신교인으로서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교로, 만행에 의하면 무량이 보낸 불교 귀의를 알리는 편지를 첫 구절만 읽고 두 번 다시 읽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의 귀의를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긴 듯 하다. 다만 무량의 어머니는 그의 귀의를 일절 비난하지 않고 응원했다.[3] 미국 이름은 에릭 버럴.[4] 물론 이민 온지는 몇 세대가 지나 완전히 미국화되었다.[5] 뉴저지주 Metuchen에 있는 St. Joseph High School[6] 동기의 말로는 고등학교 때 대마초를 엄청 많이 피우면서 성적은 잘 받는 학생이었다고.[7]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말년에 불상을 모셔두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8] 한국 선종은 육조혜능으로 시작된 남종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선종의 정통성 문제는 학계의 오랜 연구와 회창법난 이전 돈황 선종문헌의 발굴로 원래 정통은 북종선이었는데 남종선파가 힘이 커지면서 흡수되었다는 게 정설.[9] 후술할 책 제목처럼 "萬行"으로 쓰이지 않고 '卍行'이란 제목으로 쓰였다.[10] 유사하게 한국의 대표적 선승인 송담도 조계종의 돈선거와 법인화, 파벌 싸움 등의 문제로 실망하여 탈종을 선언했었다. 기사링크[11] 송원 설정은 기도로 암을 이겨냈다는 인터뷰를 한 바가 있다.[12] 일절이 아니라 일체가 맞다. 이 문장에서 '일체'는 이어지는 '석가모니의 모든 가르침'을 수식하는 관형어로 기능하기 때문.[13] 당시 널리 불리던 애국가 곡조가 현재 우리가 아는 애국가의 곡조와 다르다는 사실은 안비밀. 단, 지금과 같은 애국가가 1940년 12월 20일 처음 불린 바 있었고 임시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국가로 명문화한 시점은 1942년이니만큼 광복군으로 가정한다면 무리는 아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