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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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75대 천황. 휘는 아키히토(顯仁: あきひと).[1] 생전에 퇴위한 뒤에는 '신인(新院)', '사누키인(讚岐院)'으로 불렸으며, 사후에 추숭되면서[2] '스토쿠인'이란 칭호를 받아 후세에 스토쿠 덴노라 불리게 되었다.
이래저래 '''비운의 덴노'''며, 그 안습함은 조선시대 단종에 맞먹는 수준이다.
2. 일대기
아래 일대기에서 후지와라노 쇼시(藤原璋子)와 후지와라노 쇼시(藤原聖子)의 이름 발음이 겹친다. 혼동을 피하고자 여기서는 처음에만 발음과 한자 표기를 평기하고, 이후로는 이름의 한자를 한국음으로 읽어 각각 '장자'와 '성자'라고 쓴다.
2.1. 네 녀석은 누구의 아들이냐
제74대 천황 도바 덴노의 맏아들로 1119년에 태어났지만, 출생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도바 덴노에게서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은커녕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1210년대에 쓰여진 <고사담(古事談)>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럴 만한 뒷사정이 있었다. 스토쿠의 어머니는 도바 덴노의 첫 번째 중궁인 후지와라노 쇼시(藤原璋子, 이하 '장자')였다. 그런데 장자가 시할아버지 시라카와 법황과 '''밀통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스토쿠 덴노라는 것이다.
시라카와 덴노가 양위한 후 즉위한 호리카와 덴노에게 스토쿠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막내동생이었다. 그는 스토쿠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장남 도바 덴노에게 스토쿠를 양아들로 삼으라고 했다.[3] <고사담>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도바 덴노에게 스토쿠 덴노는 '''양아들이자 또한 숙부'''라는 해괴한 관계가 되어 족보가 꼬인다.
물론 <고사담>의 설명을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바 덴노가 아들 스토쿠 덴노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도바 덴노가 강제로 천황위를 아들 스토쿠에게 양위하고 실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 분노와 원한이 스토쿠 덴노에게 떨어졌을 수도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도바 덴노를 구워삶아서 스토쿠 덴노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고사담>의 서술은 지금까지도 논쟁 중이다.
또다른 야사에 따르면 타이라노 키요모리도 '''시라카와 덴노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스토쿠 덴노는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밑의 '''호겐의 난''' 설명을 참조하라.
아무튼 당시 일본 황실이 얼마나 콩가루 집안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웬만한 아침 드라마는 저리 가라 하는 수준.
2.2. 천황이 되다
1123년, 도바 덴노는 맏아들인 아키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아키히토 친왕이 바로 스토쿠 덴노이다. 이때 그의 나이는 5살에 불과했다.
문제는 도바 덴노가 양위하게 된 과정이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도바 덴노 본인의 의사와 관계 없이, 인세이를 행하면서 실권을 휘두른 시라카와 법황이 도바 덴노에게 양위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도바 덴노가 양위할 때 나이가 '''불과 20살'''이었다. 물론 도바 덴노도 5살에 즉위했으니 15년 동안 재임한 셈이긴 하지만, 어쨌든 한창 나이인 상황에 아들에게 양위해야 했으니 도바 덴노의 기분이 좋았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시라카와 법황이 1129년에 세상을 떠나자 스토쿠 덴노의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세상을 떠난 시라카와 법황의 뒤를 이어 도바 상황이 인세이를 개시하였는데, 일단 도바 상황이 맏아들을 미워하긴 했어도 10여 년간은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무렵 관백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딸 후지와라노 쇼시(藤原聖子, 이하 '성자')를 중궁으로 맞이했는데, 정작 스토쿠 덴노는 성자보다는 후궁인 효에노스케노 츠보네를 더 총애했다. 1140년에 효에노스케노 츠보네가 '''덜컥 아들을 낳아버렸는데''' 이 아들이 스토쿠 덴노의 맏아들 시게히토 친왕이었다. 중궁보다 먼저 후궁이 아들을 낳아버렸으니 당연히 중궁과 중궁의 아버지 타다미치가 좋아할 리가 만무했다. 이는 후에 스토쿠 덴노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2.3. 되풀이된 역사
1141년, 도바 상황은 스토쿠 덴노에게 양위하라고 강요했다. 인세이를 행하면서부터 도바 상황은 후지와라노 도쿠시를 총애했다. 도쿠시가 나리히토 친왕을 낳자, 도바 상황은 나리히토를 천황으로 세우고자 양위를 압박했던 것. <고사담>의 서술이 사실이라면, 도바 상황은 '''할아버지와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한 셈이다. 물론 그 복수의 대상이 아들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결국 아버지의 강요로 스토쿠 덴노는 나리히토 친왕을 자신의 중궁 성자의 양자로 들인 후 양위했는데, 이가 바로 코노에 덴노이다. 형식상 코노에 덴노는 스토쿠 덴노의 아들이기 때문에 도바 상황이 죽은 후에는 상황으로서 인세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도바 상황은 코노에가 스토쿠의 '''아들이 아니라 아우'''라는 점을 명백히 해서, 자신이 죽더라도 스토쿠가 인세이를 할 수 없도록 명분을 막아버렸다. '''인세이는 원칙적으로 천황의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토쿠 상황은 그 후에 와카에 집중했다. 와카를 장려한 덕에 당대의 와카계는 스토쿠 상황 중심으로 흘러갔다. 한편으로는 스토쿠 상황도 미래를 대비했다. 자신의 맏아들 시게히토 친왕을 아버지가 총애하는 아버지의 제2황후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로 들어가게 했다. 이렇게 한 데에는 코노에 덴노가 병약하다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코노에 덴노가 죽게 된다면 후사는 시게히토 친왕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그렇게 되면 스토쿠 상황은 덴노의 아버지가 되기 때문에 인세이를 행할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2.4. 마지막 희망, 그리고 몰락
1155년, 마침내 병약하던 코노에 덴노가 병사하자 후사를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코노에 덴노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황족 중에서 후사를 세워야 했다. 스토쿠 상황의 친아들이자 후지와라노 도쿠시의 양자인 시게히토 친왕이 원칙상 황위계승권 제1순위였다. 만약 시게히토 친왕이 천황이 된다면 스토쿠 상황에게도 빛이 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스토쿠로선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스토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스토쿠 상황이 인세이를 할 경우 입지가 줄어들까 우려하여, 후지와라노 도쿠시는 스토쿠 상황의 중궁 성자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도바 덴노의 넷째 아들 마사히토 친왕의 유부(乳父) 신제이가 가세해서 시게히토 친왕 대신 모리히토 친왕(마사히토의 아들, 이후의 니죠 덴노)를 후사로 밀려고 했다. 스토쿠 덴노는 장인에게, 시게히토는 양모에게 배신을 당한 셈이었다. 거기에 스토쿠 덴노를 지원해주어야 할 후지와라노 요리나가가 아버지와 갈등을 빚으면서 힘을 보태지 못한 것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이들은 코노에 덴노가 죽은 이유를 스토쿠 상황이 저주의 주술을 건 탓이라고 음해하는 소문을 퍼트렸다. 황위 계승에 결정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도바 상황은 이 소문을 듣고 격노했다. 코노에 덴노는 도바 상황이 가장 아끼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도바 상황이 개입해 모리히토를 후사로 결정했지만, 그가 너무 어려서 황위에 오를 만한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도바 상황은 모리히토가 성장할 때까지의 징검다리 차원에서 모리히토의 친아버지이자 도바 상황 자신의 친아들인 마사히토 친왕을 '''덜컥 황위에 앉혀버렸다.''' 그가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다.
이는 대단히 파행적인 조치였다. 마사히토 친왕은 '''태자 책봉도 받은 바 없는''' 말 그대로 황족일 뿐이었다. 그런 사람을 덴노에 덜컥 앉혔으니 스토쿠 상황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만, 달리 해볼 도리도 없었다. 게다가 마사히토 친왕은 동생이지만, 형식상으로는 스토쿠 덴노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 해괴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당연히 마사히토 친왕 또한 스토쿠 덴노를 고깝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토쿠 상황의 마지막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4]
이듬해 1156년, 도바 상황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5] 후지와라노 도쿠시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 등은 눈에 거슬리던 스토쿠 상황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2.5. 호겐의 난
교토에는 '상황(스토쿠 덴노)이 좌부(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작당해서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뒤엎으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연히 이 소문은 도쿠시와 타다미치 등 도바 상황의 측근들이 퍼뜨린 것이었다. 이 소문에 격노하여 고시라카와 덴노는 칙령을 내려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그 부친의 영지에서는 '''모병을 금한다'''고 선포했다. 사실상 스토쿠 상황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칙령이었다.
이는 겉으로는 요리나가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지만,정말로 노리는 타겟은 스토쿠 상황이었다. 스토쿠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아들 시게히토 친왕도 대동하지 않고, 7월 9일 한밤중에 거처인 시라카와 후쿠덴을 빠져나가 교토 동쪽에 사는 여동생 무네코 내친왕의 저택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황급하게 도망쳤던지 <병범기(兵範記)>라는 책은 "위아래가 어수선하여 친소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라고 서술했을 정도다.
일이 이렇게 되자 결국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는 직접 반격을 결심했다. 7월 10일, 시라카와 후쿠덴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상경했으며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타이라노 이에히로, 미나모토노 타메요시, 타이라노 타다마사 등 스토쿠 상황의 측근들이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왔지만 덴노 측과 맞서 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스토쿠 상황은 부족한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마지막 카드로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생각했다. 키요모리는 시게히토 친왕의 후견인이었고, 그의 계모가 시게히토 친왕의 유모인 이케노젠니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같은 아버지의 아들이니 형제이기도 했고.'''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고민에 빠졌으나 결국 일족의 결속을 위한다는 명분으로[6] '''고시라카와 덴노 쪽에 붙어버렸다!'''. 결국 7월 11일, 고시라카와 덴노 측의 군사들이 시라카와 후쿠덴을 공격해 스토쿠 상황 측을 격파하고, 시라카와 후쿠덴을 불태웠다.
7월 13일, 스토쿠 상황은 친동생인 카쿠쇼 법친왕에게 중재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친동생도 형을 버렸다.''' 결국 미나모토노 시게나리에게 붙잡힌 스토쿠 상황은 암자에서 감시를 받다가 수십 명의 호위무사들의 감시 속에 토바로 끌려갔고, 배에 태워져 사누키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때 동행한 사람은 총애하던 효에노스케노 츠보네와 궁녀 몇 명이 전부였다고 하며, 사누키로 유배된 후 8년 뒤 1164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사망의 사유에 대해서는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시라카와 덴노가 사람을 보내 암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2.6. 사후
호겐의 난이 끝난 뒤 사누키인(讚岐院)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천황이 이겼다고 소리 높여 선언한 선명(《헤이안유문》제2848)에도 나타난다. 사누키에서 사망했을 때조차 상복은커녕 조의도 표하지 않고(《햐쿠렌쇼》) 고시라카와는 그의 죽음을 무시했으며, 조정 차원에서 장례를 치르지 않고 현지의 고쿠시(國司)에게 사누키인의 장례를 치르도록 맡겼을 뿐 아니라 교토의 귀족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조문하지 않았다고 한다.(《황대기》)
사누키인을 죄인으로 보았던 조정의 인식은, 사누키인과 함께 유배되었던 후지와라노 노리나가 등의 교토 귀환이 허락되고, 사누키인의 측근이었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아들인 모로나가(師長)가 고시라카와의 측근이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들은 측은히 생각했는지, 그의 능은 시라미네노미사사기(白峯陵)라 불리며 가가와현(香川縣) 사카이데 시(坂出市) 기요미 정(靑海町)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현지의 백성들이 묻은 뒤 시라미네사라 하는 절을 옆에다 세워 그를 위로했다 전해진다. 이는 조선 시대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죽은 단종에 대한 인식과 비슷한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정말로 스토쿠 덴노는 시라카와 덴노의 아들이었나?
해당 풍문은 <고사담>에만 나올 뿐 다른 기록에는 없다.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의 세력을 꺾기 위해 후지와라노 도쿠시가 후지와라노 타이시 황후 저주 사건의 배후가 장자 중궁이라고 음해했듯, 권력욕이 강한 도쿠시가 스토쿠 덴노를 몰아내기 위해 지은 헛소문이라는 추측도 많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키히토는 더더욱 억울해진다(...).
4. 태상황 스토쿠 텐구의 전설
1176년 겐슌몬인(建春門院) · 다카마쓰인(高松院) · 로쿠조인(六條院) · 구조인(九條院) 등 고시라카와 법황[7] 과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사망해 사누키인이나 요리나가의 원령의 소행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안겐(安元) 3년(1177) '''엔랴쿠지의 강소(強訴), 간겐의 대화재,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 등 헤이안 시대가 붕괴되고 본격적인 무신 정권과 봉건적 전국시대에 접어들자 당시의 좌대신(左大臣) 산조 사네후사(三條實房 1147-1225)의 일기 《우매기(愚昧記)》 안겐 3년(1177) 5월 9일 조에 "사누키인 및 우지 좌부의 소행이라고도 한다."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사누키인의 원령에 대한 기사가 귀족들의 일기에 빈번이 등장하게 된다.
사누키인의 원령이 여러 재앙들을 불러왔다는 의식이 형성되는 데는 한때 사누키인에 가담하기도 했던 후지와라노 노리나가(후지와라노 요리나가의 아들)가 깊이 연관된 것 같다.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 1142-1200)의 일기 《길기(吉記)》 주에이壽永 3년(1184) 4월 15일조에, 사누키인과 요리나가의 악령을 신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노리나가 본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벌어지자 고시라카와 법황은 그가 원혼이 되어 벌인 일이라 여겨 사누키인을 죄인으로 규정한 칙령을 철회하고, 8월 3일 사누키인에게 스토쿠인(崇德院)이라는 원호를 올리며 아키히토는 추숭된다. 그래서 후대에 스토쿠 덴노라 불리는 것이다.
그의 편을 들었던 요리나가는 정1위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추증되었다.(《햐쿠렌쇼》) 주에이壽永 3년(1184) 4월 15일에는 호겐의 난의 옛 전장이기도 했던 가스가가와라(春日河原)에 훗날의 아와타노미야(栗田宮)라 불리는 사당을 세워 그의 원혼을 달래려고 했다. 이 사당은 오닌의 난 이후 쇠퇴하여 덴분天文 연간(1532-55)에 히라노 진쟈(平野社)에 통합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스토쿠 텐구가 일본삼대악귀의 일각이자 '''우두머리격'''이라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는데 '''잘못된 소문이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4.1. 의외의 전설
자신을 달래준 이들에겐 은혜를 베푸는 면도 보여주는데 '''조큐의 난'''으로 토사=도사(土佐)에 유배되었던 츠치미카도 덴노(당시에는 상황)(土御門上皇, 고시라카와 덴노의 증손)가 유배지로 가는 길에 스토쿠인의 능 근처를 지나면서,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비파를 연주했다고 한다. 이는 조큐의 난으로 인해 두 상황과 덴노가 유배를 가자 사람들이 오부대승경의 전설을 논하며 그 저주가 이루어졌다 말했는데, 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한 행동으로 보인다.
이에 스토쿠인이 그날 밤 꿈에 나타나 츠치미카도 덴노와 교토에 남겨진 상황 일가의 수호를 약속했고, 그 뒤 상황의 둘째 아들이 가마쿠라 막부의 추천으로 고사가 덴노로서 황위에 올랐다는 말이 있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의 간레이(管領)인 호소카와 요리유키(細川賴之)가 시코쿠의 슈고(守護)가 되었을 때에도 스토쿠인의 명복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 뒤 시코쿠 평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호소카와 집안은 대대로 스토쿠인을 수호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호소카와 가문은 전국시대를 거쳐 수백 년간 명문가로 존재하며 현대까지 내려왔는데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임기는 1993~1994)가 호소카와 가문의 후손이라고 한다.
사누키(시코쿠)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에도 시대의 작가 교쿠테이 바킨이 지은 《진세쓰 · 유미하리즈키》에서 스토쿠인은 주인공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爲朝)[8] 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휘하에 거느린 덴구를 보내 돕는 수호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4.2. 현대까지 그에 대한 두려움이 내려오다
이후로도 스토쿠 덴노는 두려운 신령으로 계속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았다. 1868년 메이지 덴노는 즉위식을 행하면서 칙사를 사누키(시코쿠)에 보내 스토쿠인의 영령을 교토로 모시고 시라미네(白峯) 신궁을 짓게 하였다. 그의 원혼이 에도 막부의 편을 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현재는 시라미네(白峯) 신궁에서 스토쿠의 신령을 모신다. 신궁의 이름이 시라미네(白峯)인 이유는 그의 능이 시라미네능(白峯陵)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대적 특성상 에도 막부는 몰락 확정이었지만, 아무튼 메이지 시대 때 에도 막부가 소멸하고 일본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따라 일제의 길을 걸었다. 이후를 생각한다면 이쪽이 더 재앙이지만.
1963년 쇼와 덴노는 1964 도쿄 올림픽 개최에 임하여 가가와현 사카이데시에 있던 스토쿠인의 능에 칙사를 보내 스토쿠 덴노 식년제(崇徳天皇式年祭)를 거행했다. 올림픽을 하는 동안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일이었다고 하는데, 현대에도 일본 황실에서 스토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쇼와도 이래저래 겪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을뿐더러[9] 사후 800주년을 기념하는 제에서 큰불이 나고 천둥번개가 내리쳤으며 비가 쏟아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스토쿠를 달래려 했다는 소문이 있다.
4.3. 오부대승경?
《호겐모노가타리》에 의하면, 스토쿠인은 사누키에서의 연금 생활 속에서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극락 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10] 의 사경에 전념했는데(피로 썼는지 먹으로 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책마다 차이가 있다), 호겐의 난에서의 전사자 공양 및 반성의 증거로 자신이 직접 사경한 다섯 사본을 교토의 절에서 거두어 공양해주었으면 한다고 조정에 보냈다.
하지만 고시라카와 상황은 저주의 뜻이 담겨있다 의심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격하게 화를 낸 스토쿠인은 마침내 자신의 혀를 물어 뜯어 그 피로
라고 쓴 뒤 스스로를 '일본대마왕(日本大魔王)'이라고 칭하였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뻗어가더니 야차와 같은 모습이 되어 그 상태로 죽은 후 바로 텐구로 전생했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훗날 스토쿠인의 원령으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키게 된 아주 유명한 이야기로 꼽히고 있다.を
日 本 國 の大 魔 緣 となり、皇 [11]取 って民 とし民 を皇 となさん!この
經 を魔 道 に回 向 す!일본의 대마연(大魔緣)[12]
이 되어, 황제를 잡아서 백성으로 하고 백성을 황제로 만들리라!이 경을 마귀의 세계에 회향(回向)[13]
하노라!
하지만, 여기서 말한 스토쿠인이 유배지에서 원한에 사로잡혀 자신의 피로 썼다는 그 오부대승경의 존재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은 요시다 쓰네후사의 일기 《길키(吉記)》이다.
그 내용은, 고시라카와가 스토쿠인이 지었다는 오부대승경의 존재를 듣고 변관에 공양을 위한 원문을 기초할 것을 명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같은 책 주에이 원년(1182) 6월 21일조에 보면, 이미 원령을 진혼하기 위해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의 예를 모방해 스토쿠인을 신으로서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지만 실현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오부대승경을 공양하라는 명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시라카와 법황은 스토쿠인의 사당을 지으라는 명을 내렸다.
오늘날 남아 전해지는 《이마카가미》에 수록된, 스토쿠인이 사누키에서 지었다는 노래들을 보면, "외로운 생활 속에서 슬픔만 남아, 병이 쌓여 해마다 무거워져 가네." 하고 한탄한 노래는 남아있지만, 스토쿠인 자신이 유배당한 처지를 분노하거나 원한을 품었다는 노래는 없다. 《풍아단가집》에 수록된 와카에도 비탄의 감정은 있지만 원한은 없다. 그는 그저 유배지에서 고독함을 느끼며 서글퍼했을 뿐이다.
이는 조큐의 난 때에 오키에 유배되었던 고토바 상황이 분노로 가득 찬 노래를 《원도백수》에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고토바 덴노 쪽이 원혼이 되었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게 느껴질 정도. 사실 스토쿠 덴노는 이들을 용서한 게 아니냐는 말이 있다.
오부대승경이라는 경전의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스토쿠인이 사망하고 이미 19년이나 지난 뒤의 일인 데다, 경전의 실물을 봤다고 하는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처음부터 피로 썼다는 오부대승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두려움에 떠돈 전설을 책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는 상단에 나오다시피 백성들이 가진 그에 대한 동정심과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원령이라는 소문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5. 가족관계
- 후지와라노 쇼시/키요코 중궁(藤原聖子 中宮)
- 효에노스케노 츠보네 여방(兵衛佐局 女房)
호인(法印) 신렌(信緣)의 딸로 미나모토노 유키무네(源行宗)의 양녀다. 시게히토(重仁) 친왕(1140-1162)을 낳았다. 스토쿠 덴노는 츠보네를 총애했다고 하는데, 스토쿠 덴노를 유배지까지 따라왔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 미카와노곤노카미(三河権守)
미나모토노 모로츠네(源師經)의 딸로, 가쿠에(覺恵, 1151년∼1184년)라는 딸을 낳았다.
- 카라스마루노 츠보네(烏丸局)
스토쿠 덴노의 후궁이다.
즉위기간이 짧았고 젊은 나이에 폐위와 유배를 겪었던 탓에 여자나 자식은 그다지 없는 편이다. 외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의 어머니가 중궁이 아닌 여방이었던 것은 훗날 덴노 선정에 악재가 되었다.6. 여담
스토쿠 덴노는 궁궐에 있던 당시 와카를 장려했고, 사누키(시코쿠 섬)에 유배된 시절에도 와카를 남겼던 인물이다. 덴노 시절에는 <사화화가집>(詞花和歌集)의 편찬을 칙으로 명하여 닌페이(仁平) 원년(1151)에 완성했는데, 찬자는 후지와라노 아키스케(藤原顯輔)로 되어 있다. 또 <천재화가집>(千載和歌集)에 스토쿠인이 지은 와카 23수가 수록되었다.
125대 헤이세이 덴노의 본명도 아키히토인데, 이쪽은 명인(明仁)이라고 표기한다.
먼나라 이웃나라 8권에서 상당히 간략하게, 그리고 왜곡되게 묘사했다. 중요 사실관계를 뭉뚱그려 서술하다보니 스토쿠 텐노는 명백히 피해자에 가까운데도 마치 권력욕이 지나쳐 호겐의 난이 일어난 것처럼[14] 서술했다.
7. 백인일수
이 노래를 소재로 한 일본의 고전 만담 상연 목록에 「스토쿠인」이라는 것이 있다. 또한 이 노래와 호겐의 난은 아무 관련이 없다.'''제77번 스토쿠 덴노(崇徳院)'''
瀬 をはやみ岩 にせかるる滝川 の われても末 に あはむとぞ思 ふ빠른 여울이 바위에 부딪치고 갈라진데도 끝내는 다시 만나 하나 되어 흐르리
8. 타이죠코 스토쿠 텐구(太上皇崇徳天狗, 태상황 스토쿠 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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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가나로는 たいじょうこうすとくてんぐ. 우타카와 쿠니요시(歌川国芳 1798.01.01~1861.04.14)가 그린 스토쿠 텐구.
일본 최고의 대텐구로 통칭 상황, 상황천구(죠코 텐구), 일본대마왕. 그 유래는 일본 75대 천황인 스토쿠 덴노가 변하여 텐구가 된 형태이다.[15] 2018년 현재 생존시 900세.
당시 일본은 천황의 아버지가 조코(태상황)로 즉위하여 인세이를 펼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천황은 황태자 정도의 지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스토쿠 덴노의 아버지인 도바 상황은 후지와라노 도쿠시/나리코를 총애하여 그 자식인 코노에 천황을 즉위시키고 스토쿠 덴노를 상황으로 밀어올린다. 하지만 스토쿠 덴노는 명목상의 상황일 뿐, 자신의 자식이 천황이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권은 전혀 없었다.
대신에 스토쿠 덴노는 자신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重仁親王)을 도쿠시의 양자로 들여보내서 차기 황태자, 천황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코노에 덴노가 급사했을 때, 궁중에서는 스토쿠 덴노가 시게히토 친왕을 천황으로 만들고 싶어서 당시 조정의 집권자이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頼長)와 결탁해 코노에 덴노를 저주해서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여기에 분노한 도바 법황은 시게히토 친왕 대신에 자신의 넷째 아들[16] 인 마사히토 친왕(雅仁親王)을 천황으로 책봉한다. 바로 고시라카와 덴노이다.
원래 고시라카와 덴노는 즉위하기 전까지 황태자로 책봉받지도 못했으며, 노래 연습에나 몰두하는 한량이었다. 고시라카와 덴노도 사실은 그다음 천황으로 예정된, 자신의 아들이자 계모 토쿠시의 양자인 니죠 천황이 황위에 오를 때까지의 중계 역할로 즉위한 것이었지만, 아무튼 이것은 스토쿠 덴노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으며 권력에서 더욱 멀어지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스토쿠 덴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가 '''사실은 도바 상황의 아들이 아니라 시라카와 덴노가 늘그막에 본 사생아 출신'''이었다는 소문이었다. 시라카와 덴노는 희대의 난봉꾼이라서 젊어서부터 굉장히 주색을 밝혔는데, 시라카와 덴노의 장남인 호리카와 덴노가 불쌍한 자신의 막내 동생을 늘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장남인 도바 법황에게 스토쿠를 양아들로 삼으라고 명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도바 법황은 스토쿠가 자신의 친아들을 황태자로 내세운 데 반발하여 자신의 넷째 아들인 고시라카와를 차기 천황으로 지지했다. 즉 스토쿠는 고시라카와에게는 형님이지만, 사실은 '''막내 할아버지'''라는 진궁극전설 슈퍼 초울트라 막장 시츄에이션이 연출이 됐던 것이다.
도바 법황이 사망하자 스토쿠 덴노는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결탁하여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스토쿠는 고시라카와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후에 일으킨 쿠데타도 실패하여 정권을 완전히 탈취당해 버린다. 이후 절에 유폐된 후에는 불교에 심취해 마음의 평안을 찾아 보이는 듯했던 그가 마침내 최종 흑화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가 절에서 전념하여 사경한 경전을 조정에 바쳤지만 거절당한 것이다. '반역자'가 올린 경전은 '불쾌하다'는 것이 사유. 이 조치에 분노와 자기비애의 정점을 찍은 스토쿠는 자신의 혀를 씹어 잘라 그 피로 사경했던 경전 위에 저주를 쓰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혀를 물어뜯어 베낀 경전 모두에
라고 쓴 뒤 스스로를 '일본대마왕(日本大魔王)'이라고 칭하였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뻗어가더니 야차와 같은 모습이 되어 그 상태로 죽은 후 바로 귀신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대마왕이 된 상황은 대텐구가 되어 일본 전국의 텐구를 다스리며 여러 시대에 걸쳐 전란과 불안을 일으킨다. 전설에 의하면 텐구들은 보통 수많은 악귀와 요괴들의 장(長)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스토쿠가 일본의 모든 요괴와 귀신을 다스리는 것이 되므로 정말 '일본대마왕'으로서 군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を
日 本 国 の大 魔 縁 となり、皇 [17]取 って民 とし民 を皇 となさん!この
経 を魔 道 に回 向 す!일본의 대마연이 되어, 황제를 잡아서 백성으로 하고 백성을 황제로 만들리라!
이 경을 마귀의 세계에 회향[18]
하노라!
대표적으로 헤이안쿄의 대화재, 요사스러운 별의 출현, 겐지(源氏)와 헤이지(平治)의 대결전,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괴이한 사망, 14세기 아시카가 사건도 그가 배후에서 모든 일을 공작한 것이라고도 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도 조정은 상황의 원령이 막부군에 힘을 실어줄까 두려워 스토쿠 덴노의 신령을 쿄토로 맞이하는 의식을 거행하며 시라미네 신궁(白峯神宮)을 창건했다. 그 후로도 천좌 때의 호우, 1964년의 사후 800주년 기념 제사에서의 대화재, 대화재 직후의 뇌우 등을 보며 사람들은 아직도 스토쿠 대텐구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1963년 쇼와 덴노는 1964 도쿄 올림픽 개최에 임하여 가가와현 사카이데 시에 있던 스토쿠인의 능에 칙사를 보내 스토쿠 덴노 식년제(崇徳天皇式年祭)를 거행했다. 이는 올림픽을 하는 동안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일이었다고 하며, 현대에서도 일본 왕실에서 그에 대한 공포가 내려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20세기 사람인 히로히토가 이런 미신 같은 걸 따른 이유는 히로히토도 이래저래 겪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을뿐더러[19] 위에 말한 것처럼 스토쿠 덴노 사후 800주년을 기념하는 제에서 큰불이 나고 천둥번개가 내리쳤으며 비가 쏟아지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다.
세간에 유포되는 원령담[20] 과 위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면과는 달리, 의외로 스토쿠 덴노는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에게 기원을 한 사람들을 잘 챙겨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시코쿠 전체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하며, 고시라카와 덴노 즉 자기 정적의 증손자인 츠치미카도 상황이 쇼큐의 난(承久の乱)에서 패배한 후 토사로 유배를 갔을 때 스토쿠 천황의 묘에서 혼령을 위로하는 비파연주를 한 날 밤의 꿈에 스토쿠 천황이 나타나 수도에 남은 가족들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상황의 유아는 나중에 가마쿠라 막부의 추천으로 고사가 덴노가 되었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의 관령(管領)인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시코쿠의 슈고(守護)가 되었을 때 스토쿠 덴노에게 기원한 후 시코쿠 평정에 성공한 이래로 호소카와 가의 수호신으로 받들여졌다고 한다. 시라미네 신궁은 축국의 종가 터에 자리잡은 연고로 인해 구기종목 전반의 수호신사로 떠받들어지는데다가, 1950년에 스토쿠의 혼령을 위로하는 제사에서 불꽃 속에서 출현한 용신을 모시는 부속 신사의 우물물은 악연 절단과 질병 치유에 효과가 높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
8.1. 기타 매체에서의 등장
의외로 서브컬처에서의 등장은 별로 없는 편. 실존 인물인 데다 너무나 두려운 존재라서 언급 자체를 불길하게 여기는 것일지도.[21] 실제로 아직도 일본에선 스토쿠 덴노를 신으로 모시며 두려워하고 제사까지 지내고 있다. 심지어 데드 프린세스에서도 '몇백 년 전의 몇 대째 천황'이라거나 '실제 본명은 OOO'라거나 하는 등의 직접적인 표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22] 현대에 와선 친근감마저 느껴지는 주탄동자와 백면금모구미호에 비하면 확실히 대접 자체가 다른 듯. 툭하면 패러디의 대상이 되거나 마왕으로 변해버리는 오다 노부나가와 비교해도 그렇다. 과연 '''일본대마왕'''이라 해야 할까.
- 성전사 에르나 사가의 작가 츠츠미 쇼코의 작품 중 하나인 요호전 의경천본앵(妖狐伝義経千本桜)에서 미나모토 요시츠네(중간에 죽고 주인공인 여우요괴가 대역을 맡음)와 동료들을 추적하는 자들[23] 의 배후 조종자로 등장했다. 이야기 도중 과거 회상에서 일본대마왕으로 각성하는 상황이 나오는데 이때 본명도 제대로 언급되었다. 완결권의 후기에서 자신에게 기원을 한 사람은 잘 챙겨주는 등 신령으로서의 일면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라이트노벨 로그 호라이즌의 위키 뒷설정에서 영웅릉, 마황전, 호노이카즈치 천신궁 등 야마토 각지에 배치된 여러 던전을 무대로 하는 이벤트 '신황의 귀환 축제'의 보스 몬스터. 이름은 직접 나오지 않지만 '야마토 최강의 원혼인 동시에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라는 설정만 봐도 스토쿠 텐구.
- 동방도명수의 4스테이지 보스 스이토쿠인 텐무의 모티브이다.
- 타이라노 키요모리에서도 위와 같은 설정으로 나오다 죽었다.
[1] 125대 천황 아키히토는 한자가 明仁으로 다르다.[2] 폐서인되었다가 사후에 추숭되었다. 이유는 하단에 후술.[3] 스토쿠 덴노가 시라카와 법황의 사생아라는 것은 거의 정설처럼 통하는 야사지만, 호리카와 덴노가 아들 도바에게 스토쿠를 양아들로 삼으라고 명하였다는 설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이다. 1086년(양력으론 87년)에 호리카와 덴노가 즉위했고, 1103년에 도바 덴노가 태어났으며, 1107년에 호리카와가 죽었기 때문이다. 호리카와가 죽은 1107년에 도바는 고작해야 세는 나이로 5살에 불과했다. 1119년에 태어난 스토쿠는 호리카와 덴노와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4] 마사히토 친왕의 생모는 스토쿠의 어머니 성자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스토쿠와는 이부형제이다.[5] 스토쿠 상황은 죽기 전에 도바 상황을 만나려 했으나 도바 상황은 '''저놈에게 내 시체도 보이지 마라'''면서 만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스토쿠 상황이 도바 상황을 만나려 한 이유는 도바 상황의 유언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목적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고시라카와 천황도 도바 상황의 임종을 지키지는 못했다.[6]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스토쿠 상황 쪽에 서도 유리할 게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사실 일족의 결속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숙부 타이라노 타다마사는 이미 스토쿠 편에 선 상황이었다.[7]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 불교의 승려로 귀의한 자를 법황이라 불렀다.[8]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는 호겐의 난 때에 스토쿠인의 편에 서서 고시라카와 덴노에 맞서 싸웠다.[9]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폐위(최악에는 죽음)를 각오해야 했다. 결국 미국이 그를 놔두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해서 이후에도 즉위했지만 대신 일본 황실이 대거 몰락해서 후사부족 문제를 겪는 이유가 되었다.[10] 화엄경, 대집경, 대반야경,법화경, 열반경 [11] すめらぎ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12] 마연은 사람들을 방해하고 재앙을 주는 악귀를 뜻한다. 대마연이라고 한 것은 큰 재앙을 주겠다는 뜻이다.[13] 회향은 불교로 쌓은 공덕을 타인에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는 자신이 쌓은 공덕을 마귀에게 주겠다는 것이다.[14] 먼나라 이웃나라에는 스토쿠 상황이 텐노 때도 다 해 먹더니 상황이 되어서도 인세이로 권력을 휘두려고 하는 모습으로 그렸다.[15] 텐구이기는 하지만 초상화의 모습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얼굴이 붉고 코가 길며 새의 날개가 달린 반인반조 괴물이 아니라 사람에 가까운 모습이다.[16] 둘째, 셋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17] すめらぎ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18] 불공을 드려 죽은 이의 명복을 빌음.[19] 자업자득이기는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고 폐위(최악에는 죽음)를 각오해야 했었다. 결국 미국이 그를 놔두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해서 이후에도 즉위했지만 대신 일본 왕실이 대거 몰락해서 후사부족 문제를 겪게 된다.[20] 이것 자체가 고토바 상황 원령담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21] 천황에 관련된 존재라서 서브컬처의 소재로 쓰기 힘들다는 면도 있다. 솔직히 어느 일본인이 과거 사람이라도 천황을 함부로 다루겠나? [22] 인간이었을 적의 이름은 의미가 없다면서 '''스가미 마엔(崇神 魔縁)'''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고 있다.[23] 추적자들 중에는 타이라 일족의 생존자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