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라노 키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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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 淸盛'''
1118년 ~ 1181년
1. 소개
2. 생애
3. 후계자와 헤이케 멸망
4. 평가
5. 가족 관계
6. 대중문화 속의 타이라노 키요모리


1. 소개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이자 정치가. 통칭 헤이다이쇼고쿠(平大相国)[1] 또는 로쿠하라도노(六波羅殿)[2]

2. 생애


이세(伊勢) 타이라 가문의 두령인, 타이라노 타다모리의 아들로 출생했다.[3]
'''이세 헤이시(伊勢平氏)''' 가문은 간무 덴노의 자손인 '''간무 헤이시(桓武平氏)'''의 분파로 반란을 일으켰었던 타이라노 마사카도도 이 가문 출신이었으며, 키요모리의 아내였던 타이라노 토키코 역시 간무 헤이시 계열의 정5위급 중류귀족 출신이었다. 마사카도의 난 이후 동국에서 서국으로 옮겨온 타이라 일족 중 이세 지방에 자리잡은 일족이 인세이 이후 성장하여 세력을 이루었다.
이후 타이라 일족의 장남으로 자라났는데 시라카와인의 측실 기온노 뇨고가 양모처럼 그를 돌보았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올라 공경의 반열에 들었던 아버지와 함께 승승장구하여 불과 12세 때 종5위하 사효에노스케(従五位下左兵衛佐)직에 올랐다.
1153년, 아버지 타다모리가 사망하면서 명실공히 타이라 가문의 동량이 되었다. 이후 타이라 가문에 대한 인(院)의 신임 덕인지 승승장구하며 '''북면의 무사'''직과 관직을 얻어 나갔다.
이런 출세나, 후에 가격에 따른 관직의 제한이 엄격한 시절에 비 공경 출신임에도 다죠다이진(태정대신)에 오르는 것에서 사실 황가의 사생아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그것이 출세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고 보는 시각도 있다.
1156년 황가와 후지와라 셋칸케의 내분이 폭발하여 카와치 겐지헤이케가 모두 두 패로 갈라져 내전을 벌인 호겐의 난(保元の亂)에서 카와치 겐지(河内源氏)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4]와 연합하여 승리해 고시라카와 덴노의 신뢰를 얻었으며, 이후에는 맹우였던 요시토모와 패권을 두고 싸우게 되었다.
요시토모와 키요모리가 교토에서 격돌한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니죠 덴노 편을 들어 겐지와 싸워 승리하였고, 도망치던 요시토모는 오와리 국의 우츠미에서 부하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이후 무사로서는 최초로 '''다죠다이진(태정대신太政大臣)에 임명되어''' 실권을 잡고 타이라 가문의 전성기를 열었다. 문제는 이때 겐지 일족을 처결하면서 요시토모는 죽였으나 그 아들들은 의모 이케노젠니(池禅尼)의 탄원에 의해 목숨을 뺏지 않고 유배형에 처했는데 이것이 훗날 타이라 가문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일족을 공경으로 들여보내고, 후지와라 셋칸케의 씨장자를 사위로 맞았으며, 이후 셋칸케의 막대한 장원을 대신 관리하는 등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대외 교역에도 열성을 보여 후쿠하라를 중심으로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문을 남겼다. 처제 타이라노 시게코를 고시라카와 법황의 측실로 들여보내 그 사이에서 난 다카쿠라 덴노를 옹립한 후 사위로 삼아 외척 가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황가와 셋칸케의 외척으로서 그 세력은 하늘을 찔러 이 시대에는 '''"헤이시(타이라씨)가 아닌 자는 사람도 아니다(平氏にあらずんば人にあらず)"'''라고 할 정도로, 헤이케의 권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당시 헤이케는 공포정치를 편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카무로(禿)'''라고 불리는, 머리를 일자로 깎은 소년들을 정보원으로 이용한 밀고의 장려 및 숙청을 자행했다고 전한다.[5]
1177년 천황가의 외척이 되어 헤이케의 핏줄을 이어받은 황자를 낳는 등 너무도 강대해진 그의 세력에 대한 고시라카와 법황 측의 견제가 계속되었고[6], 헤이케 제거의 음모가 드러나면서('''시시가타니 사건'''), 이에 격노한 키요모리는 인의 측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고, 아들 타이라노 시게모리의 매형이던 후지와라노 나리치카까지 유배 후 아사시켜버렸다. 이후 불안하게 평온을 찾던 조정은 시게모리 사후 고시라카와인이 시게모리의 영지를 몰수하게 되면서 다시 요동치게 되었다. 공경들조차 탄식하던 이 사건에 분노한 키요모리는 군사를 이끌고 후쿠하라에서 상경하여 고시라카와 법황을 도바 이궁에 유폐해버리기에 이른다. 이후 다카쿠라 덴노를 퇴위시켜 인세이를 행하게 하고, 천황위에는 키요모리의 외손이었던 갓난아이 안토쿠 덴노를 즉위시키게 되니 그는 '''상황의 장인이며 동시에 천황의 외조부'''라는 일본 역사에 전무후무한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고 헤이케 천하는 영원할 듯했다.
그러나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2황자인 모치히토 왕이 겐지이지만 헤이지의 난에서 헤이케 편을 든 미나모토노 요리마사[7]와 모의하여 각지의 겐지 생존자에게 헤이케 토벌 '''센지'''[8]를 하달하며 거병하였다.
이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모치히토 왕의 피살을 계기로 결국 각지의 겐지 잔당과 그에 호응하는 호족들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불교 사원의 발호와, 무리한 후쿠하라로의 천도와 실패[9]로 헤이케의 세력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헤이케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는 후쿠하라 건설이나 잦은 황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 혼을 위로하고자 하던 법회의 비용 등을 무리하게 징수하면서 지방 무사들의 불만이 쌓였던 것이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 어디까지나 무사이던 타이라 가문은 한창 황가와의 결혼을 추진해 귀족 지위에 오르려 애를 쓰고는 있었으나 그 역사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후지와라 셋칸케나 황가와 같은 권위가 없었고, '같은 급'이었던 겐지 일족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되찾고자 앙앙불락하고 있었다.
동국에 유배되었다가 이즈의 호족 호조씨의 사위가 되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도 때를 같이 하여 세력을 규합하게 되는데, 키요모리는 이에 대한 진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열병으로 쓰러졌고, 결국 일어나지 못하며 6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언은 '뒷일은 무네모리에게 맡기며, 다른 의견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는 '장례나 불공을 말라. '''단지 요리토모의 목을 쳐 내 묘전에 가져오라.''' 이를 공양으로 여기라'[10]는 흠좀무한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시대의 무사라면 있을 법한 얘기지만 헤이안 말기에는 보다 문화적이고 인간적인 풍토가 있었고, 헤이케 역시 귀족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에 패배한 겐지의 잔당을 각지에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칠 정도였다.[11] 따라서 이는 작가의 창작으로 여겨지나[12] 당시 조정의 구교였던 쿠조 카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 요와 원년 8월 1일 기사에, 요리토모의 거병 뒤에 조정에서 무네모리에게 요리토모와의 화해를 권유하자 "내 아들, 내 손자로써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 시신은 요리토모 앞에서 보여야 할 것이다!"[13]라는 키요모리의 유언을 들며 거절했다고 실려 있어, 원래 했던 이야기가 후대에 각색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3. 후계자와 헤이케 멸망


장남 시게모리는 "등롱대인"이라 불리는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현명한 인격자였으나 아쉽게도 병사했다.[14] 차남 모토모리 또한 요절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3남인 타이라노 무네모리가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무네모리가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하고,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자 쇠락을 거듭하여, 키요모리 사후 불과 4년 만인 1185년,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망하였다. 당시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안토쿠 덴노 역시 삼종신기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헤이케의 핏줄은 천황가에서 끊기고 말았다.[15] 헤이케는 이로써 멸망했으나, 헤이케의 잔당이나 패잔병이 헤이케의 후손을 남겼다거나 하는 전설 혹은 그들과 관련있는 유물/유적이 각지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외에도 여러 가지 루트로 살아남은 헤이케의 후예들은 이후에도 여러 무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현대에 결성한 종친회도 존재한다.

4. 평가


키요모리는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비정한 성격으로 공포정치를 행하는 폭군처럼 묘사되었기에[16] 현대에도 이 인상이 강하지만, 다른 사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실제로는 온화하고 인정많으며 의리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하찮은 자리에 있는 이라도 그 가족 앞에서는 큰 역할을 맡은 이처럼 대우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족 앞에서 크게 면목이 서서 기뻐했다.'는 기록 등을 보면 실제로 픽션에서 묘사된 폭군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헤이케모노가타리> 자체에서도 의외로 인간적인 묘사가 나오기도 한다. 송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거점으로써 지금의 고베 지역에 신도시 후쿠하라를 건설하면서 그 앞바다에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를 조성하였다. 이 때 매립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오래된 미신에 따라 동자 30명을 바다에 제물로 던져서 공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키요모리는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불경을 적은 돌을 매립부지에 던져 넣어서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최근의 현대적인 해석에서는 키요모리가 아닌 헤이케 일족의 인물들이 과격하게 행동했던 것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런 그의 성격은 일족의 전횡에 대해서도 눈감아주는 경우가 지나치게 잦아서 참지 못한 무사들과 귀족들이 헤이케 일족을 적대시하고 민심 이반이 일어나 결국은 이를 틈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중심으로 반 헤이케 세력이 대두해 타이라 일족의 멸망을 제공한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불교 사원들과 자주 충돌을 빚었는데 이는 열렬한 불교 신자였던 천황가의 지지를 잃어 나중에 고시라카와 법황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을 인정해주는 대가를 맞이한다. 그래도 정치적 재량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재능도 뛰어났던 인물이었다.
최근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년 동안이나 중지된 중국, 한국과의 재교역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점만큼은 고시라카와 덴노와 죽이 맞았던 모양으로, 이에 천마들이 날뛰는 시대냐고 후지와라 씨족이 씹어대는 기록까지 나온다.
결국 취소되기는 했지만,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천도 시도를 한 후쿠하라는 다름아닌 현 고베시다. 현재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번성을 누리고 있는 고베로 천도하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적극적인 해외교역 정책과 더불어 국제 교역에 후쿠하라가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는 뜻이다. 물론 천년고도(千年古都) 교토의 이명을 보면 알다시피 후쿠하라 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건 키요모리가 잘못했다기보다는 교토 기득권층의 거센 저항과 각종 천재지변이 겹친 탓이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처럼 별도의 정치체계를 만들지 않고 천황의 조정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한때는 구시대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실질적으로 무가 정권을 시작한 것은 키요모리라는 평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오히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헤이케 무가 정권을 잘 관찰하고 벤치마킹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이 중론이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위키백과의 본 항목이나 고시라카와 천황 항목을 참조할 것.

5. 가족 관계


정실인 타카시나노 아키코와의 사이에 타이라노 시게모리, 타이라노 모토모리, 계실인 타이라노 토키코[17]와의 사이에 타이라노 무네모리, 타이라노 토모모리, 타이라노 시게히라 등이 있었으며, 타이라노 아츠모리는 그의 조카였다. 다카쿠라 덴노의 황후인 토쿠코는 그의 딸로 그녀의 아들인 안토쿠 덴노는 키요모리의 외손자가 된다. 또 다른 딸인 모리코는 고노에 가문의 당주 후지와라노 모토자네에게 시집보내 고노에 가문과 연을 맺었고, 장남 시게모리의 처는 고시라카와 상황의 측근 후지와라노 나리치카의 여동생을 맞는 등 공경과 실세 집안과도 인연을 맺고 권력을 확대해 나갔다.

6. 대중문화 속의 타이라노 키요모리



6.1. 불새/난세 편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불새/난세 편에서도 원평합전 즉,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활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등장시킨다. 비극의 영웅으로 알려진 요시츠네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물로 묘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타이라노 키요모리 역시 세간의 악명과는 달리 세상살이 속의 거친 파도, 집안사람들에 대한 난폭하고 교만하다는 세간의 평판[18] 사이에서 고뇌하는 '''소심한 늙은 가장'''으로 묘사된다.[19] 일본 측 위키에서도 「식구들에게는 성실하고 다정한 아버지」라는 키요모리의 이미지를 구현한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는 설명을 남기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20] 불새를 쫓고 있었지만 그가 찾은 불새는 단순히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일 뿐이었고, 죽기 전에 환각으로 본 진짜 불새의 피를 마셔서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은 경우의 비참한 운명[21]보단 그냥 지금 죽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죽음을 맞이한다.
죽은 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함께 붉은 원숭이와 흰 개로 환생한다.[22] 원숭이로 환생한 상태에서 꿈을 꾸는데, 여기서 어린 시절 키요모리 자신이 겪었던 수모(귀족들로부터 무사가 천대받던 시대였다)와 그 수모를 품고 악착같이 살았던[23] 인간 시절의 자신을 나레이션과 함께 회상으로 보여준다.

6.2. 머나먼 시공 속에서


머나먼 시공 속에서 3의 등장인물. 성우는 아사카와 유우.
헤이케의 동량. 현 시점에서는 죽은 인물이다.

6.2.1. 스포일러


그가 급사한 것은 오니 일족의 저주로 용맥의 힘을 헤이케의 번영을 위해 쓰다가 무사시보 벤케이가 용맥을 끊으면서 그 저주의 반동으로 죽은 것이다. 하지만 삼종의 신기의 힘으로 다시 부활. 게임 내에서는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헤이케 지상주의자로, 잔혹하고 성격변화도 격렬하다. 원령이 된 뒤 기억도 일부 잃었는지 아리카와 마사오미타이라노 시게모리로 착각하고 있다. 생전에는 마사오미를 아들과 닮았다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등 인격자였던 모양이다. 루트에 따라서는 자신의 착각을 바로 잡고 마사오미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시게모리가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는 등 제정신을 차릴 때도 있다.
여기서는 시라카와 법황의 사생아라는 속설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다. 자신은 헤이케가 아니라는 마사오미의 말에(이때는 여전히 마사오미를 시게모리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헤이케가 아니지만 헤이케를 이끌고 있다며 독려했다.
참고로 운명의 미궁의 팬텀이 바로 그다. 원령이 되기 전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정확히는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다키니텐에게 잡아먹힌 뒤로 기억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이다. 덤으로 운명의 미궁 PSP 애장판 특전으로 동봉된 UMD 금지된 문을 플레이하게 될 시에는 마사오미가 헤이케로 흘러 들어오게 된 시점에 노조미가 같이 흘러가게 되었을 경우의 if 스토리가 그려지며, 여기서는 처음 마사오미와 만났을 무렵의 나이 많은 키요모리가 등장한다. 이쪽은 이노우에 카즈히코가 연기했다.

6.3. 무쌍 오로치


타이라노 키요모리(무쌍 오로치 시리즈) 항목 참조.

6.4. NHK 대하드라마 타이라노 키요모리


일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의 51번째 작품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 바람.

6.5.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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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특전무장으로 등장한다. 대부분 콘솔용으로 등장한지라 창천록를 제외하면, 볼 수가 없다.
창천록 pk판 특별 커스텀마이징 무장으로 등장. 통솔 71 지력 98 정치 96이라는 그야말로 먼치킨 무장이다.
[1] 相国 또는 大相国은 태정대신의 당명(唐名: 중국풍 별칭)이다.[2] 거소인 로쿠하라(六波羅)에서 유래[3] 스토쿠 덴노처럼 시라카와 법황이 진짜 아버지라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밑에 나오는 NHK사극 타이라노 키요모리 1화의 제목이 "두 사람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호겐의 난에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한 스토쿠 덴노는 더 안습해진다.[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요시츠네 형제의 아버지. 겐지의 두령이었다.[5] NHK 사극 드라마의 묘사를 보면 붉은색의 깃털을 모아 붙인 붉은 옷을 입힌 단발머리의 소년들이 노란색 줄무늬가 들어간 검은 봉 혹은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고아를 모아서 만들었다는 대사도 나온다.[6] 측실 시게코 사후 양자 간 사이가 벌어졌다. 이제 양자를 중재하는 것은 타이라노 시게모리뿐이었으나 시게코에 미치지 못했고, 시게모리 사후 양자 간 갈등이 폭발하게 된다.[7] 전설에서는 요괴인 "누에"를 쏘아 죽였다고도 전해지는 궁술의 대가로, 관위가 산미(三位, 3품)였기 때문에 "겐잔미 요리마사"라고도 불린다. 아들 나카츠나가 무네모리에게 모욕당한 것에 격노하여 헤이케를 배반했다고 전해진다.[8] 일종의 교시나 어명 같은 것. 단, 인의 직접적인 어명인 "'인젠"'과 달리 이것은 적장자도 아니어서 '왕'으로 호칭되는 모치히토왕에게서 나온 것이라 격이 조금 떨어지는 명령이다. 그리고 이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운좋게 살아남을 수 있던 원인이기도 했다.[9] 이는 앞서 언급한 불교 세력의 발호와 기근, 도적 떼의 창궐로 황폐한 왕성 교토를 떠나 정치를 일신하려는 시도였다.[10] やがて討手を遣わし、頼朝の首をば刎ねて、我が墓の前に懸くべし、それぞ孝養にてあらんずる[11] 이는 겐지와 연고가 있는 황족이나 귀족들의 탄원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일례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어머니 유라 고젠은 아츠타 신궁(熱田神宮)의 오오구지(大宮司) 후지와라노 스에노리(藤原季範)의 딸로 내친왕의 시녀였기 때문에 나름의 기반과 연고가 있었다. 요리토모 역시 무네코(統子)를 섬긴 일이 있었다.[12] 이는 드라마 요시츠네에서도 유언을 집행한 토키코의 개인적인 원한을 키요모리의 유언으로 가장한 뉘앙스로 연출하였다.[13] 我の子、孫は一人生き残る者といえども、骸を頼朝の前に晒すべし[14] 문제는 시게모리도 상당히 과격한 성격이었다는 점.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키요모리나 무네모리에게 대부분의 악행이 이전되고, 시게모리는 무조건 "헤이케이지만 좋은 사람" 포지션으로만 묘사되었는데, 헤이케가 저지른 과격한 행동으로 평가되는 일들 중 몇 가지는 본래 역사서에서는 시게모리 소행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게 '''덴카노리아이(殿下乘合) 사건'''이라고 불리는 셋칸의 행차에 대한 모욕 사건. 셋칸 마츠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 후지와라노 모토후사)의 시종이 길에서 만난 타이라노 스케모리(平資盛, 시게모리의 아들)의 가마의 무례를 비난하며 굴욕을 준 것을 담아두었다가 천황의 관례 문제로 모토후사가 입궐하던 도중에 시게모리의 무사들이 모토후사의 행차를 습격해 관모를 뺏고 상투를 자르는 등의 난동을 부렸다.[15] 이런 망실/위조 등의 복잡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삼종신기는 '보물을 가진 자가 천황'이라는 것이 아니라, '천황이 가진 게 보물'이라는 식으로 취급되었고 이후에도 일반에 절대 공개하지 않으며 비밀에 부쳐진다.[16] 심지어 <헤이케모노가타리>의 "기원정사의 종소리에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로 시작되는 유명한 머릿말에서는 '''동탁, 왕망, 안녹산''' 등과 비교된다.[17] 남편의 성이 아닌 본성도 타이라 가문으로 이세 헤이시와는 다른 타이라 가문이었다.[18] 같은 시대와 인물을 다룬 차나왕 요시츠네에서는 불새와 달리 강직하면서 위엄있고 권모술수의 대가 정치10단의 절대권력가로 나오며 병사하기 전까지는 요시츠네와 요리토모조차도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었으나 가족과 가문이 사실상 자신을 제외하면 장기집권하기가 어럽다는것을 알고 있었고 그나마 믿었던 시게모리 마저도 세상을 떠나자 지방에서는 지속적인 움직임과 함께 조정과 황실에서도 서서히 호박씨 까려하자 숙청을 하면서도 요시츠네와의 마지막 대면을 하는 장면에서 평상시의 무섭고 강직한 모습이 사라지고 겁이 많으면서 일족을 걱정을 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사망한다.[19] 새해 인사를 온 헤이케 일문 앞에서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한 당사자인 다이라노 토키타다에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왜 하냐?'''"며 지적했다. 새해맞이 연회가 끝나고 술에 취해서 방으로 돌아가다 귀신을 보고 깜짝 놀라서 벌벌 떨기도 하고...[20] 불새나 영원한 생명에 집착하는 이유가 나오기를 자기가 죽고 나면 시게모리 말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그나마도 시게모리는 요절했다)라고 나온다. 자신이 죽고 나면 다이라 일족은 분명히 나태해지고 쇠퇴해서 끝내는 멸망할 것이 분명하기에 자신이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일문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때까지 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어떻게 생각하면 독선에 가까운 강박증적 면모다.[21] 가족의 죽음은 물론, 인류 자체가 멸망하고 지구가 태양에 가까워져서 다 타 녹아버리고 할 때까지 자기 혼자 남게 된다. 이 환상을 본 기요모리는 이런 건 싫다며 절규한다.[22] 겐페이 전쟁에서 겐지가 흰색, 헤이케가 붉은색 기치를 사용했다.[23] 살아생전에도 아버지 타다모리가 사시라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놀림받고 집에 돌아와 수치심 때문에 혼자 울던 모습을 회상하며 "다시는 무사라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애썼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만큼 일족을 키워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