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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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상세
3. 진한 12국
3.1.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
3.2. 삼국사기 기록
3.3. 기타 서적이나 야사 기록
3.4. 구전
4. 관련 역사기록
4.1. 중국
4.1.1. 후한서 동이열전
4.1.2. 삼국지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
4.1.3. 진서 동이열전
4.1.4. 양서 동이열전
4.1.5. 북사 열전
4.2. 한국
4.2.1. 삼국유사
5.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진한의 문화재
7. 바깥고리
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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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辰韓
'''진한'''(辰韓)은 고대 한반도 삼한(三韓) 지역 중에서 경상도 지역에 위치했던 12개의 제국(諸國)이다.

2. 상세


고대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했던 소국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경상도 지역에서 낙동강 동쪽 지역이 대부분 옛 진한에 해당되며, 구성원 중 하나였던 경주의 사로국이 점점 성장해 다른 소국들을 흡수하면서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1세기 ~ 3세기,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 ~ 6세기경에 걸쳐 대부분 사로국이 발전한 신라로 흡수되면서 최종적으로 신라 1개국으로 통일되었다.
진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던 12개국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정사 삼국지 동이전 기록을 존중해 마한목지국 왕으로 보는 설이 있고, <양서> 신라전에서는 진왕 대신 '진한왕'이라고 하고 있으며 <진서> 진한전에서 '진한 왕'이 중국에 조공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진한 왕'에 대한 기록에서 후대 판본으로 넘어가면서 글자가 빠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마한의 진한에 대한 영향력을, 후자는 진한 12국을 아우르는 중심적 정치체의 존재(아마도 사로국?)를 입증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다. 일단 어느 쪽이 됐든 서로간에도 영 따로 놀던 진한지역을 후대의 중앙집권국가마냥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능력이 있었다기는 힘들고, 명목상의 지배자였다고 보는 편이다.
2014년 5세기 후반~6세기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1]가 출토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 지역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소문국(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경북 북부지역인 의성, 군위, 상주, 예천, 안동, 영주, 봉화, 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지역 토기와는 다르다.)와 규두대도(圭頭大刀),삼엽문 환두대도(三葉文 環頭大刀)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일대의 진한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문화는 마한과는 달리 성벽이 있으며 각 마을에는 우두머리 군장을 두었다고 한다. 이들 군장중 최고 우두머리는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고 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건너편의 변한과는 편의상 구분을 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후한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언어, 법속, 의식주 다 똑같고 다만 제사 풍속만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2][3] 애초에 진한과 변한 사람들은 뒤섞여 산다(雜居)고 표현하고 있었으므로 경계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진한과 변한이 구분되는 부분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덤만 해도 진한과 변한이 거의 공통 양식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만큼 비슷하다가 4세기 후엽쯤 가야 가야의 석곽묘, 신라의 적석목곽묘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얼핏 보면 낙동강이 변한과 진한의 경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세하게 따지면 부산지역 같이 낙동강 동쪽이 변한권이라든가 반대로 낙동강 서쪽이 진한권인 경우도 있었다. 대체로 낙동강 상류는 진한에, 중류와 하류는 변한인 편이었다.
변한과 마찬가지로 이 풍부한 나라여서 철을 화폐로 삼았으며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머리를 로 누른다고 한다. 이걸 편두라고 하는데, 이 전통은 후에 가야로까지 이어져 가야 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대부분의 두개골에서 머리가 납작하게 눌린 채로 발견된다. 신라도 편두를 했다고 추정되는 파편적인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편두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 두개골이 실제로 발견된 곳은 김해 예안리 고분군인데 여기가 진한이랑 가까운 편이긴 한데 어쨌든 낙동강 건너 변한권이다. 근데 또 그 옆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편두유골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신생아의 머리를 돌로 누르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위이다. 신생아의 두개골은 숨골이 열려 있기 때문에 어른의 손으로 눌러도 아기에겐 위험한데 무거운 돌로 누르면 아기를 죽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머리를 돌로 누르는 건 어른도 버티기 힘들다. 이 문제 때문인지 청나라의 만주원류고[4]에서는 건륭제가 직접 집필한 <어제삼한정류(御製三韓訂謬)>를 인용해 후한서의 기록을반박하고 있다. 만주족의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에다 아기가 하늘을 바라보는 자세로 반듯이 오랫동안 눕혀두는데 그렇게 하면 머리 형태가 편두처럼 평평해진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정말로 머리를 돌로 눌렀다기보다는 아이를 요람에 반듯하게 눕혀서 재웠기 때문에 머리가 평평해졌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3. 진한 12국



위 지도는 천관우설과 정인보설을 적절히 혼합한 지도로, 현대까지 그나마 가장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1)
<colbgcolor=#ffffff> 이저국(已柢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2)
<colbgcolor=#ffffff> 불사국(不斯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3)
<colbgcolor=#ffffff> 근기국(勤耆國)
<colbgcolor=#4a2d5b><colcolor=#ffd700> (4)
<colbgcolor=#ffffff>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5)
염해국(冉奚國)
(6)
군미국(軍彌國)[5]
(7)
여담국(如湛國)
(8)
호로국(戶路國)
(9)
주선국(州鮮國)
(10)
마연국(馬延國)
(11)
사로국(斯盧國)
(12)
우유국(優由國)
진한은 기록에는 12국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 열두개의 나라는 기록 당시 파악한 나라가 12개라는 것이며 다양한 기록에 따라 나라 이름이 다른 것 등으로 미루어보아 여러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나는 과정을 반복했을 것으로 보인다.

3.1.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개된 진한 12개국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이다. 진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많은 부분이 추측 뿐이며 추정되는 위치 또한 많은 나라들이 그때그때 다르다.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사로국(斯盧國)
경상북도 경주시 인근.
기저국(己柢國)[6]
경상북도 안동시.[7]
불사국(不斯國)
불명[8]
근기국(勤耆國)
불명[9]
난미리미동국(難彌理彌凍國)
불명[10]
염해국(冉奚國)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군미국(軍彌國)
경상남도 사천시 인근.
여담국(如湛國)
경상북도 군위군.
호로국(戶路國)
불명[11]
주선국(州鮮國)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마연국(馬延國)
불명[12]
우유국(優由國)
경상북도 울진군 혹은 영일만인근.

3.2.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병합된 소국들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겹치지 않는 나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감문국(甘文國)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위치
231년에 신라에 병합
골벌국(骨伐國)
혹은 골화국(骨火國)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화산면, 신령면 일대에 위치
236년 신라에 병합
다벌국(多伐國)
불명[13]
108년 신라에 병합
비지국(比只國)(혹은 불사국)
경상남도 창녕군
108년 신라에 병합
소문국(召文國)(혹은 조문국)
경상북도 의성군 추정
185년 신라에 병합
실직곡국(悉直谷國)
실직국(悉直國)
실직(悉直)
강원도 삼척시
104년 신라에 병합
압독국(押督國), 압량국(押梁國)
경상북도 경산시
102년 신라에 병합
우시산국(于尸山國)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79년[14] 신라에 병합
음즙벌국(音汁伐國)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102년 신라에 병합
이서국(伊西國)
이서소국(伊西小國)
이서고국(伊西古國)
경상북도 청도군 추정
297년 신라에 병합
초팔국(草八國)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과 초계면 사이로 추정
108년 신라에 병합

3.3. 기타 서적이나 야사 기록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사량벌국
경상북도 상주시
삼국사기 열전 석우로전에 등장. 첨해왕 때 신라 병합
창녕국
경상북도 안동시
연려실기술에 나옴
구령국
경상북도 안동시
소라국
경상북도 안동시
장산국
경상남도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 일대
동국여지승람에 나옴

3.4. 구전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어모국(禦侮國)
경상북도 김천시
문무국(文武國)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
배산국(盃山國)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아포국(牙浦國)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아포국을 제외한 세국가 모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국가명으로 존재 했다는 근거는 없다. 아포국은 이종휘가 지은 동사(東史)에서 감문국이 아포가 반란하자 토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에서도 이에 관련한 시가 한편 실려있다.

4. 관련 역사기록



4.1. 중국



4.1.1. 후한서 동이열전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有城柵屋室. 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次有儉側 次有樊秖 次有殺奚 次有邑借【皆其官名.】土地肥美, 宜五穀. 知蠶桑, 作縑布. 乘駕牛馬. 嫁娶以禮. 行者讓路. 國出鐵, 濊、倭、馬韓並從巿之.凡諸(貨,貿)易, 皆以鐵爲貨. 俗憙歌舞飲酒鼓瑟. 兒生欲令其頭扁, 皆押之以石.【扁音補典反.】

진한(辰韓)은 늙은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로 진(秦)나라 망명인인데, 힘든 노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을 때 마한이 그 동쪽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한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여 진나라 말과 유사했는데 이 때문에 때로는 진한(秦韓)이라 불리기도 한다. 성책(城柵)과 옥실(屋室)이 있다. 여러 작은 별읍들은 각각 거수(渠帥.우두머리 혹은 군장)를 두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 그 다음은 검측(儉側), 그 다음은 번지(樊秖),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15]

토지가 비옥하고 오곡에 적당하다. 잠상(蠶桑)을 알고 겸포(縑布.비단의 일종)를 짓는다. 우마(牛馬)를 타고 혼인하는 예법이 있다. 보행하는 자들은 길을 양보하는 풍속이 있다. 나라에 철(鐵)이 산출되고 예(濊), 왜(倭), 마한(馬韓)에서 모두 와서 사 간다. 무릇 재화를 교환할 때 모두 철을 화폐로 삼는다. 그 풍속으로 가무(歌舞), 음주(飲酒), 고금(鼓瑟)을 좋아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 모두 돌로 누른다.[16]


4.1.2. 삼국지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어느 노인이 대대로 전해지는 바를 말했는데, 옛날 망명인이 진(통일왕조)(秦)의 사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고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언어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을 방(邦),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행위)를 행상(行觴)이라 부른다.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여 진(통일왕조)(秦)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명칭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스스로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布. 乘駕牛馬嫁娶 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市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飮酒。有瑟,其形似筑,彈之亦有音曲。兒生 , 便以石厭其頭,欲其。今辰韓人皆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변한진한은 모두 24개 국인데 대국은 4천 - 5천 가(家), 소국은 6백 - 7백 가(家)로 총 4만 - 5만 호다.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맡아 세세토록 계승한다. 진왕은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한다.【위략에 이르기를 유이민이 뛰어났으므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농사에 적합하고 누에 치는 법을 알아 겸포(布)(비단의 일종)를 만든다. 결혼할 때 우마(牛馬)를 타고 예속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데 죽은 자가 날아 오르도록 한다는 뜻이다.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질러 묶는데 그 모습이 감옥과 비슷하다 】 철(鐵)이 산출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와서 취한다. 시장에서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낙랑, 대방)에도 공급한다. 그 풍속이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 금(瑟)이 있는데 그 형태가 축(筑)과 비슷하고 또한 연주하는 음곡(音曲)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누르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다. 남녀가 왜(倭)와 가까워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으로,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한다.


4.1.3. 진서 동이열전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진한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진(秦)의 고역(苦役)을 피하여 한(韓)에 들어왔는데, 한(韓)이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성책(城柵)을 세웠으며, 언어는 진(秦)나라 사람들과 비슷한 점이 있어 이로 말미암아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4.1.4. 양서 동이열전


신라(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었다.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데, 양(梁)나라와는 서로 1만리 쯤 떨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진(秦)나라 때 유망인(流亡人)들이 역(役)을 피하여 마한(馬韓)으로 가니, 마한에서는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진(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진한(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고(孤),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한(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 가고, 진한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4.1.5. 북사 열전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국,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궁,弓)을 호(弧), 도둑(적,賊)을 구(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행주,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도(徒)라고 하여 마한(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진왕(辰韓)의 왕(王)은 항상 마한(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진한(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한(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진한은 처음 6국(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일설에 의하면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 고구려· 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불내(不耐)· 한(韓)·예(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왕(王)은 본래 백제(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당초에는 백제에 부용(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군역(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가라국(迦羅國)을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았다.


4.2. 한국



4.2.1. 삼국유사


'''『삼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왕을 거서간(居西干)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진한(辰韓)의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혹은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제2대 남해왕


5.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진한은 기본적으로 신라로 계승된것으로 보나 후에 삼한이 한국사 국가와 민족을 통칭하게 되면서 진한 역시도 한국 자체를 부르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고려시대에는 만월대 내 별궁 중에 하나를 진한궁(辰韓宮)이라 명명 하여 진한을 한국사를 이루는 고대국가 중 하나로 인식하고 계승의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부인(夫人) 작위를 내리는데 공예태후의 어머니 이씨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생성된 진한의 문화재



7. 바깥고리



8. 같이보기


[1]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 서산, 공주, 전북 익산, 전남 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 백제 중앙세력은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검은 비단모자)를 쓰고 금제,은제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었다.[2] 주보돈은 삼국지 기사에서 진한인의 경우 이주민이라는 자의식이 있다고 나오는데 반면 변한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비록 진한과 변한 모두 토착인이 다수긴 하지만 지배집단이 외래계인 진한과 토착인인 변한으로 나눠진다면, 모시는 조상신이 다르다는 것이 삼국지를 쓴 중국인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신이 다른 것으로 비춰진 것이 아닐까 추론하기도 했다.[3] 어차피 제사의 예법이란 건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문화라 현대에도 집안마다, 소지역마다 서로 신기해할 정도로 다른 경우가 많으니 이것만 다르다는 정도는 유의미한 문화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있다.[4] 사실 이 서적은 만주족들이 진한,변한,마한을 모두 만주족 역사(...)라고 왜곡하기 위한 서적이긴 하다. 왜곡을 하기 위해서라지만 나름 연구도 했던 모양.[5] 변군미국(弁軍彌國)[6] 이저국(已柢國)이라고도 한다.[7] 문서에 들어가면 알겠지만 영주군 풍기와 울주군 언양으로 추정되기도 한다.[8] 경상남도 양산시 혹은 경상남도 창녕군으로 추정.[9] 경상북도 포항시 혹은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추정.[10] 경상북도 의성군 혹은 경상남도 창녕군으로 추정.[11]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혹은 경상북도 영천시로 추정.[12] 경상남도 창녕군 경상북도 경산시 혹은 경상남도 밀양시로 추정.[13] 대구광역시로 추정.[14] 삼국사기에는 거칠산국(부산광역시)과 같이 병합되었던 사건만 거도 열전에 있고 시기에 관한 내용은 없으며 79년은 동국통감, 동사강목 기록.[15] 모두 그 나라의 관직 명이다. [16] 편(扁)의 발음은 보전(補典)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