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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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명의 첫 황제. 명나라를 계승한다 치면 명 황실의 제17대 황제라 할 수 있다. 묘호는 안종(安宗),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이다. 휘는 유숭(由崧). 연호가 홍광(弘光)이라 홍광제(弘光帝)라고 부른다. 만력제의 손자이자 복왕 주상순(공종)의 장남이며 숭정제의 사촌이다.
2. 생애
아버지 주상순은 1641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복왕의 영지인 낙양에 쳐들어왔을 때 무방비로 있다가 사로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 때 주유숭은 어머니 추씨와 함께 극적으로 남쪽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남경에 왔을 때 낡고 더러운 각건을 쓰고 부채를 부치는 모습이 마치 시골 부자 정도로만 보였다고 한다.
홍광제는 무능했으나,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고령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남명 정권의 황제로 옹립되었다. 원래 숭정제의 황태자 주자랑이 있었으나, 이자성의 난 때 실종되었다가 전란 중에 살해되었다.[1] 어쨌든 태자 주자랑이 부재한 상태이므로 일단 감국으로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으로 즉위했다.
일부 신하들은 그가 인간적인 결함 7가지가 있다는 이유로 옹립에 반대했는데, 과연 홍광제는 재위기간 1년 내내 정치엔 관심없고 사치와 향락만 즐기며[2] 후궁들을 뽑는데만 열을 올렸다.[3] 이러다보니 신하들은 그를 유비의 아들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며 무시했다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하였으나, 홍광제는 피난 조정에서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 역시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다만 그에 대해서 호의적인 기록들도 남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건 확실하고 다시 살릴 수도 있었던 나라를 망하게 한 책임은 모두 그에게 있다.
마침내 1645년 청나라 정벌군과의 교전 중에 패주하다가 청나라로 투항한 황득공의 부하 장군 전유승(田維乘)과 마득공 등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마침 남경이 함락된 날이 바로 '''그가 즉위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사실 이것도 좋게봐준 기록이고, 청군이 장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에 조정신료들에게 알리지 않고 런(...)했는데 멀리 도망도 못하고 황득공의 진영까지밖에 못갔다는 말도 있다. 황득공은 이후 전사하고 그 부하들이 살기 위해 투항하며 황제를 사로잡아 바쳤다는 것.
홍광제는 모반죄로 감금당했다가 1646년 5월 23일 참수되었다. 정달의 <야사무문>에 의하면 '전유승과 마득공은 그를 통나무에 묶어서 끌고갔는데 그는 울면서 살려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무시당하였다. 화가 난 그는 전웅의 목을 깨물어서 피가 흘렀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한다.
하도 무능하고 어리석어서 남명을 다룬 사서들에는 심지어 그가 진짜 복왕의 아들이 아니라, 복왕의 신분을 사칭한 사기꾼이라는 내용까지 들어있을 정도다. 그래서 명말청초의 유명한 시인인 오매촌(吳梅村)이 지은 문헌인 녹초기문(鹿樵紀聞)에 따르면, 당시 학자인 황종희(黃宗羲), 전병등(錢秉鐙)은 이 복왕이 실제로는 이시독(李侍讀)인데, 복왕의 집안 일을 잘 알았고, 복왕의 금인을 훔쳐내어 복왕의 신분을 사칭한 것이라고 보았다. 황제의 신분조차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는 것은 중국역사상 아마도 유일무이할 것이다.
이렇게 황제의 정통성이 의심스러우니 홍광제 무렵에는 남경으로 와서 자신이 진짜 황제이거나 혹은 황족이라고 우기는 사칭 사건들이 여럿 있었다. 먼저 대비(大悲)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제라고 말했다. 관원들이 붙잡아서 심문을 해보니, 대비는 제왕의 후손으로 이미 서인으로 폐해진 인물이었고, 노왕과 은원이 있어 남경으로 와서 노왕을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왕지명(王之明) 사건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돌연 남경으로 와서, 스스로 숭정제의 태자라고 말했다. 각종 사료를 보면, 그의 이름은 왕지명인데,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이를 피해 남경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런데 홍광제는 왕지명이 가짜 태자라고 폄하하면서 그를 죽이지 않고 그저 감옥에 가두었는데, 나중에 청나라의 실권자 중 한 명인 도도(多鐸)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감옥 안에서 목졸려 죽었다. 헌데 정작 나중에 청나라의 실권자인 도르곤은 그가 진짜 태자였다고 믿었다고 한다.[4]
한편 홍광제는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을때, 청나라의 실권자인 도도(多鐸)도 그를 한심하게 여겼던지 그에게 "너는 숭정황제의 사후에 충효를 다하지 않았으면서 감히 황제의 자리에 스스로 앉았다. 너의 선제에게는 태자가 있었는데, 태자가 왔는데도 왜 황제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진상을 숨기다니[5]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욕을 먹었다. 이에 홍광제는 진땀만 흘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3. 사후 추존
명나라 부흥군은 그에게 성안황제(聖安皇帝)라 시호를 추서하고 묘호를 질종(質宗)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최종 시호는 질종독천계도장민경숙소문강무혜도의효혁황제(質宗續天繼道莊愍敬肅昭文康武惠悼懿孝赧皇帝)라 하였다. 그 뒤 영력제 주유랑은 다시 묘호를 질종에서 안종(安宗)으로 고치고 시호는 처천승도성경영철찬문비무선인광효간황제(處天承道誠敬英哲纘文備武宣仁度孝簡皇帝)로 개시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청나라 연호 대신 그의 연호를 따서 사용하기도 했다.
4. 둘러보기
[1] 이자성이 죽였다는 소리도 있고 남경으로 피난갔다가 정통성 문제를 우려한 홍광제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리도 있고 전란 중에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는 등 말이 많다.[2] 홍광제는 술도 좋아했는데, 한 번은 신하인 유종주(劉宗周)가 그에게 술을 끊으라고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홍광제는 잔뜩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앞으로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유종주는 미안해서 말을 바꾸어 "그저 매번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고, 그러자 홍광제는 금방 말을 바꾸어서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앞으로는 한 잔만 마시겠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홍광제는 태감들을 시켜 엄청나게 큰 금술잔을 만들게 한 다음, 이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서 절반 정도 마시고 내려놓으면, 주위에 있던 사람이 가득 채운 후, 아직 다 마신 것은 아니니 한잔은 안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마시는 술의 양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것이다(...)#[3] 그와 관련해서 이런 이야기도 있다. 한 번은 설날 전 날, 홍광제가 갑자기 신하들을 소집했다. 신하들은 계속된 패전으로 홍광제의 심기가 불편해서 그러는 것으로 생각하여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말들을 끄집어 냈다. 그러나 이 황제는 그 말을 듣더니 "여러 신하들아, 짐은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없다네. 짐이 보니까 노래하고 극하는 아이들중에 제대로 생긴 애가 없다. 그러니 좀 더 미녀들을 많이 뽑아서 후궁을 채워주면 좋겠다. 너희들은 빨리 이 일부터 처리해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신하들은 모두 그가 고민하는게 그런 것이었는지 생각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흩어졌다고 한다(...)#[4] 다만 왕지명 이후에도 자신이 숭정제의 태자라고 자칭한 사건들은 계속 벌어졌는데, 이를 가리켜 이른바 주삼태자 사건이라고 한다. 이 주삼태자 사건은 강희제 때까지 청나라를 줄곧 괴롭혔는데, 왜냐하면 만약 주삼태자가 진짜로 밝혀진다면 이는 청나라의 중국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명나라 부흥을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나라 황실은 누가 주삼태자라는 소문만 들리면 진위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5] 한 마디로 진짜 황제가 되어야 할 인물은 너 홍광제가 아니라 왕지명이라는 것. 즉 도도는 홍광제를 진짜 황제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취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