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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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명의 군주급 인물. 재위 기간은 불확실한데 일단 1645년 ~ 1646년(?)으로 추정된다. 자는 거산(巨川), 호는 항산(恒山)이다.
2. 생애
노숙왕(魯肅王) 주수용(朱壽鏞)[3] 의 5남이자 홍무제의 10남 노황왕(魯荒王) 주단(朱檀)의 9세손이다. 황제 자리에는 직접 즉위하지 않고 스스로 감국(監國)[4] 이라고 칭했으며 보통 노왕이라고 부른다. 다만 간간히 비정통 황제로 보기도 한다.
1644년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했다. 복왕 주유숭이 홍광제로 즉위하고 남명을 세우자 노왕에 봉해졌다. 1645년, 남경에서 홍광제가 청군에 패배한 것에 의해 절강 소흥에서 감국을 칭했다. 이 때 당왕 주율건이 복주에서 융무제로 즉위했는데 주율건의 정통성에 대해 대립했기 때문에 그의 연호였던 융무를 쓰지 않고 감국노(監國魯)[5] 라는 연호를 칭했다.
이렇게 주이해와 융무제가 협력하지 못하고 대립하는 사이에 1646년 절강과 복건이 연달아 함락되고 융무제 정권은 무너졌다. 주이해는 주산(舟山)으로 피신해 1651년 정성공의 비호하에 들어갔다.[6] 이 후 영력제 주유랑의 정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다가, 1662년 11월 금문(金門)에서 사망했다.
[1] 주일귀(朱一貴) 추존.[2] 주일귀(朱一貴) 추존.[3] 1639년 청나라 군대가 연주를 함락시킬 때 전사했다.[4] 즉위 예정인 임금이 즉위 전에 쓰는 임시 칭호라고 이해하면 된다.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었는데, 고려의 대비(大妃)였던 정비 안씨(定妃安氏)가 역성혁명파 관원들의 압박에 굴복하여 공양왕을 폐위한 뒤 조선의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었다. 그리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새로 즉위한 왕은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낼때 자신을 조선 국왕이라 칭하지 않고 권지국사(權知國事)로 칭했으며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후에야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조선 국왕이라고 칭했다. 감록국사, 권지국사는 주이해가 칭한 감국과 비슷한 개념이다.[5] 감국인 노왕이 임시로 다스리고 있는 해라는 뜻에서 감국노라는 특이한 연호를 썼다.[6] 이 때 감국 자리를 그만두고 황제에 즉위했다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