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순

 


[image]
남명의 추존 황제
'''묘호'''
'''공종(恭宗)'''
'''시호'''
모천부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
(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
''''''
주(朱)
''''''
상순(常洵)
'''생몰기간'''
1586년 2월 22일 ~ 1641년 3월 2일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4. 둘러보기


1. 개요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3남으로 작위는 복왕(福王), 시호는 공왕(恭王)이다.

2. 생애


만력제는 주상순의 어머니 후궁 정 귀비를 총애했다. 이에 주상순을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장자계승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반대하여 쟁국본(爭國本)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1] 결국 1603년 장남 주상락을 책봉했지만, 이후로도 태자 암살시도(정격안) 사건이 벌어지는 등 명나라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이궁안에 이르러서는 생모 정 귀비가 이궁안의 배후로 지목된 탓에 정 귀비가 1620년 자결했다.
아무튼 주상순은 복왕(福王)으로 책봉되어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황족답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특히 만력제는 주상순을 아껴서 주상순이 결혼할 때 황금 30만 냥을 혼인비용으로 썼고, 주상순의 왕부도 다른 왕부들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주었으며 낙양과 많은 토지들을 영지로 하사했다. 그러나 주상순은 사치에 탐닉하여 비용을 충당하고자 낙양과 하남 일대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탓에 백성들에게 증오받았다. 주상순의 사치와 탐학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명나라에서 손꼽히게 부유한 하남과 낙양의 백성들이 끼니 걱정을 해야할 만큼 곤궁함에 시달렸다. 조정 대신들도 주상순의 탐학질이 극심함을 알았지만 어찌하지 못하고[2] 다만 백성을 구휼하라고 권고할 뿐이었으나 주상순은 듣지 않았다.
1627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고 1641년 이자성 반군이 낙양을 포위했다. 당시 낙양성은 견고하고 병사의 수와 군량도 충분했기에 이자성 군도 초반에 공성을 시도하다 피해를 입어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상순은 낙양의 병사들을 열악하게 대하고 자기 재산 지키기에만 골몰했다. 병사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위로금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주상순이 준 위로금은 고작 은화 4천 냥이었고, 이 돈조차 주상락의 부장들이 그중 3천 냥을 횡령하여 병사들에게는 1천 냥만 전달되었다. 이 때문에 분노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관들을 죽이거나 체포한 다음, 성루를 태우고 성문을 열어 이자성 군을 맞이하였다. 주상순은 낙양이 함락될 때 성 밖으로 도주했는데, 몸무게가 300근(150 kg)이나 되는 몸이라 지쳐서 영은사(迎恩寺)란 절에 숨어 쉬던 중에 추격해온 이자성 군에게 붙잡혔다.
이자성이 주상순의 재산을 조사해본 결과 쌀 수만 석에 셀 수 없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졌으므로 이를 본 낙양 주민들이 하나같이 분노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주민들한테 끌려온 주상순을 어찌할까 물어보니 모두들 '죽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성은 주상순을 참수한 뒤 복록연(福祿宴)이라는 연회를 열어 사슴고기와 함께 주상순의 고기를 술안주 삼아 먹었다.[3] 주상순은 복왕(福王)이고, 사슴은 한자로 록(鹿)이라 쓰는데 녹봉 록(祿)자와 발음이 같다. 복록(福祿)이라고 하면 '하늘이 내린 복과 나라가 주는 돈(녹)'이란 뜻인데 부귀영화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래서 주상순의 고기(복)와 사슴고기(록)를 함께 먹음으로써 복록을 얻는다는 주술적인 뜻을 부여한 것이다. 주상순의 피와 사슴의 피도 술에 섞어 복록주(福祿酒)라고 부르며 마셨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말 그대로 복록의 끝이 보이지 않던 자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하였다.
위처럼 이자성군에게 잡아먹혔다는 기록이 유명하지만 다른 기록도 있다. 주상순이 이자성에게 붙잡힌 뒤 연회 자리에 끌려간 것까지는 맞지만 연회 자리에서 잡아 먹힌 게 아니라 이자성에게 사슴 요리를 대접 받았으며, 이후 주살 당했다는 기록이다. 시신도 요리된 게 아니라 주상순을 따르던 환관들의 간청을 들은 이자성이 장례는 치르도록 허락해 주었고 결국 간소한 장례와 함께 묻혔다는 기록이다. 바이두 백과에서는 잡아 먹혔다는 설은 야사고 이 설이 정설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반해 중국어 위키피디아나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잡아 먹혔다는 설이 정설로 소개되고 있다.
확실한 팩트는 주상순은 이자성에 의해 죽었고, 착취에 시달리던 낙양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점이다.
장남 주유숭남명홍광제로 즉위하자 공종(恭宗)으로 추존되었다. 결국 아버지 만력제가 원하는 대로 사후에나마 황제가 되긴 했으나, 홍광제의 정권이 불과 1년 만에 무너져 의미가 없어졌다.

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 언급되는데, 황제로 즉위했다고 한다. 그래서 명나라는 실제 역사보다 더 빨리 멸망했다고.

4. 둘러보기




[1] 쟁국본은 어이없게도 조선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까지 연결된다. 광해군과 주상순 모두 임금의 장남이 아니었기에, 장남 주상락을 지지하던 명나라 조정은 선뜻 광해군을 지지할 수 없었던 것. 결국 명은 끝내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만 인정하지 않았을 뿐, 조선에 보낸 친서에 '조선의 세자 광해'라고 하는 등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인정했다.[2] 주상순은 숭정제를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숭정제와 관계가 좋았고 조정과 황실에서 위치가 높았다.[3] 반란군이 주상순을 잡은 뒤 능지처참해서 가마솥에 넣고 고깃국을 끓였는데, 그 몸에 어찌나 기름과 살이 많은지 그곳에 있던 군중들 모두가 기름이 뜬 국물 한사발에 고기 한 점을 씹을수 있었다고 한다.